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1화 (21/407)

〈 21화 〉 #13. 하수도의 재앙

지리산을 떠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꽤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일단 연도를 알고 싶다. 지금이 몇 년도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시각이 생긴 이후론 얼추 하루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지만, 래서 슬라임으로 지내던 시절에 얼마나 시간을 소모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계획을 수렴하려면 현재 상황부터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당면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 그리고 소설 속 세계를 올바른 결말로 이끌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나는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 비록 개 같은 완결 때문에 5700자 댓글을 쓰고 말았지만, 그만큼 애정이 있었던 작품이라는 거다. 전개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소설 속 내용을 알고 있는 나라면, 원래는 저지하지 못했던 놈들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로 죽어간 소설 속 등장인물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어드벤티지는 크니까. 끝으로 치닫는 폭주 기관차 같은 이 망해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어드벤티지를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살릴 사람은 살리고, 죽여야 할 사람은 미리 죽인다.'

그리고 그 살생부는 미리부터 정해둔 지 오래였다. ――부산으로.

***

"…질병은 멈추지 않았다라."

손톱을 기른 손가락이 리드미컬하게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톡.

"그래. 그분께서 더 하신 말씀은?"

"말씀드린 것 외에는 없습니다."

"네가 손도 못 쓰고 제압당했다라… 여전하신가 보군."

"……."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스퀘어 마스터. 심지어 그분이 상대였으니."

"…죄송합니다."

"됐다. 그것보다 알파는?"

"2팀에 맡기려고 합니다."

"종을 뛰어넘었다는 건 들었다. 힘들 것 같나?"

팀장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군. 무슨 뜻인지 알겠다."

과연 그럴 기회가 올까? 알파는 그동안 영리하게 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은신은 물론이고 밝혀진 포식 외에도 다른 스킬들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놈을 경시하지 말고, 얼굴에 먹칠한다 하더라도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물론 뒤늦은 후회요, 당시에는 괜한 인력을 낭비하지 않는단 의미에서 옳은 판단이었으나.

"지리산 밖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은 생각해봤나?"

"경시할 수 없습니다."

"대책은?"

"막을 수 없습니다. 알파의 발은 빠르고 지리산은 방대합니다. 잠복해도 성공할 확률은 낮습니다."

톡. 톡톡. 톡.

탁자를 두드리는 손이 빨라졌다. 팀장은 그것이 클랜장의 습관임을 알고 있었다.

"3팀 부팀장에게 연락해라. 최대한 빨리 복귀하라고."

"지금 부팀장은 부산에서…"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 알파가 지리산을 빠져나간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너는 상상이나 할 수 있나?"

"……."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그놈들을 찾는 것보다 알파를 찾는 게 더 급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알파가 지리산을 빠져나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현재 알파의 추정치는 최소 B클래스 헌터 이상이었다.

이것도 최소로 잡은 것이고, 팀장 자신이 직접 들었던 그 울음소리에는 어쩌면 A클래스에 달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는 힘이 담겨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겨우 워그가 진화했다고 A클래스에 근접할 리가 없지만… 알파는 이미 몇 번이나 상상을 뛰어넘었으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클랜장님."

"……?"

은색 안경알이 그를 올려다보자 팀장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렌즈 너머로도 느껴지는 여전한 안광(眼光). 그것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3팀도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왜지?"

"현재 할당된 임무가 없으니까요. 정예로만 소집해 2팀에 합류하겠습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알겠다. 허가하지."

"감사합니다."

클랜장의 방을 빠져나온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요 근래 좋아 보이던 클랜장의 심기가 유난히 언짢아 보였으니.

'그럴만도 하지. 고원에 잡을 건수가 사라졌으니.'

되려 건수가 잡히게 생겼다. 고원이 떠넘긴 일을 처리하지 못했으니 "야. 그렇게 할 거면 받질 말던가."라는 식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거였다. 물론 익명으로 떠넘긴 것이니 그렇게 나오지야 않겠지만… 알파를 잡지 않는 이상, 클랜장의 심기는 계속 불편할 터.

아무래도 한동안은 산만 타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 알파가, 이미 지리산에 없다는 사실은 팀장을 포함해 누구도 알지 못했다.

***

어떻게 돼먹은 세계인지 몬스터들이 도시 안에 떡하니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지리산에서 보았던 용벌레들이 제법 많이 모여있었다. 심지어 꽤 큰 개체도 있었다.

헌터들은 어디서 뭘 하는지. 물론 건들지만 않으면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라지만 일단 퇴치하는 게 맞지 않나? 저것도 몬스터니까.

……하기야 그네들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용벌레보다도 내가 더 주의해야 할 테니. 그나마 들키지는 않지만. 커다란 개를 보고 무서울 순 있어도 몬스터라고 생각하진 않는 모양. 물론 감정 스킬이나 관찰 같은 스킬에 노출된다면 들키겠지만, 그런 스킬을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다고?

그래. 내가 들킬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근데…

"대체 저런 큰 개를 누가 버렸담?"

"엄마. 이거 이거. 멍멍이!"

"떽! 얘가 큰일나려고!"

…가는 길마다 유기견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은신을 사용한다고 해도 도심 속에서 커다란 검은 개가 있는 건 눈에 띄니 완전히 숨을 순 없으니까.

사람을 피한다고 해도 좁디좁은 대한민국 땅의 인구밀도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기견… 그래. 늑대도 갯과에 속하기는 하지. 유전적으로 개와 늑대는 99.8%가 동일하다고 하던가? 이해한다. 충분히 착각할 수 있겠지만…

"멍멍아. 멍멍해봐! 멍멍"

아무리 그래도 꼬리 잡아당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백번 양보해서 그냥 개라고 생각해도 그렇지 겁도 없나?

난 어릴 때 쪼그만 개만 봐도 무섭던데… 그래도 "으르르."하고 소리내니 꼬리를 당기던 꼬마는 겁을 집어먹고 울며 도망쳤다.

이게 무슨 꼴인지. 처량한 내 신세…

지리산을 정복한 몬스터가 도심 한복판에서는 유기견 취급이라니… 산의 폭군이라는 칭호가 울고 있었다. 차라리 변화로 덩치를 좀 줄여볼까. 아니면 은신을 D랭크로 만들어버릴까.

아니, 아니다. 그래. 개 취급 좀 당하면 어떻다고? 괜히 스킬 포인트 낭비하는 게 더 아깝지.

처음에는 방향을 잘못 들어서 이곳저곳을 헤매기는 했지만 슬슬 도착한 모양.

한국은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은 대신 그만큼 치안률이 높았다. 몬스터가 발생해도 금방 신고가 들어오고 헌터들이 빠르게 대처하니까. 또한, 관리가 잘 되는 만큼 표지판을 비롯한 안내문이 남아있었다. 그 때문에 길을 잘못 들더라도 다시 길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2071년― 소설 속 세상은 미래였다. 다만 몬스터의 출현으로 아수라장이 됐고 그로 인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거의 멈춰버린 세계. 사실상 내가 사는 현대와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퇴보했으면 퇴보했지.

문제는 2071년이 아닌 2069년이라는 점. 나는 분명 소설의 전개를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에 한해서다.

본래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은 주인공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2071년. 내가 알고 있던 시기보다 2년이나 앞당겨진 셈이다. 시간이 흐르다보면 2071년이 되어 소설 속 전개가 시작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어떻게보면 지금 2년이라는 시간을 번 셈이지만, 동시에 이정표를 잃어 막막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단 확실한 것들부터 하자. 지금부터 미리 막을 수 있는 재앙을 막기 위해 이 곳 부산으로 온 거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재앙. 지금 막지 않으면 나중에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게 될 테니. 이 아래 주민들의 번식력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하수구의 뚜껑을 열었다. 역겨운 냄새가 확 올라오자 후각을 비활성화하고, 단숨에 뛰어들었다.

***

사람인 시절이었다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을 테지만, 약한 시력으로 그나마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잘 보이는 건 아닌지라 더듬더듬 앞을 걸어가고 있다가 미끄덩 발에 밟히는 게 있었다.

물컹거리는 감촉과 긴 꼬리. 쥐의 사체가 뜯겨 먹다 말고 가죽만 남아 덩그러니 버려져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힘든 어둠 속에 숨어있다. 하지만 감지를 사용해보니, 바글하게 널려있는 기척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수구 너머에서 붉은 눈이 번쩍이자 곧장 염탐을 사용했다.

[탐욕스런 쥐(Greed Rat)]

[체장 26cm] [체고 4cm] [체중 250g]

[힘 11] [민첩 21] [체력 14]

[저주하는 쥐(Curse Rat)]

[체장 27cm] [체고 3.8cm] [체중 246g]

[힘 6] [민첩 15] [체력 9] [마력 6]

그리드 랫과 커스 랫.

한 마리 한 마리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일반인이라도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지만, 문제는 그 숫자였다.

"찌지직! 찌찍!"

"찌지직? 찌지지직!"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 그것들이 우루루 달려들자 마치 검은 파도처럼 보였다. 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도 이렇게 쌓여있었다고?

이 두 마리 쥐. 바로 이 두 녀석이 재앙의 주된 원인이자 골칫거리였다. 나중에 숫자가 쌓이게 되면 이 녀석들은 하수도를 빠져나와 부산 전체에서 난동을 부리게 된다. 특히 그리드 랫은 자기네들끼리도 잡아 먹을 만큼 성격이 포악했고, 커스 랫은 마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헌터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드러내고 위협을 가하자 녀석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쥐들이 터준 길을 순순히 지나갈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이게 다 경험치니까.

몬스터. 그러니까, 평범한 소동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쥐라면 경험치를 얻을 수 없겠지만 이 녀석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겁에 질린 녀석들에게 달려들어 단숨에 꿀꺽 삼켰다.

[그리드 랫을 섭취했습니다. 포만감과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커스 랫을 섭취했습니다. 포만감과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체장 체고 체중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인 체격의 차. 죽이는 게 아니라 삼키기만해도 얼마가지않아 식포에서 소화되거나 탐식으로 녹아버렸다. 발악해봤자 경화와 약한 재생을 뚫고 나올 순 없을 테니까.

호전적이고 탐욕스러운 그리드 랫은 상대하기 편했다. 하지만 귀찮은 건 커스 랫. 녀석은 곱게 죽지 않는다. 삼켜져 소화되어 경험치로 변하는 건 같았지만, 놈들 각각의 개체가 가진 5~6 정도의 마력이 죽으면서 독으로 변한다.

단순한 신경독이라면 부정형인 내게 통하지 않겠지만, 녀석의 독은 마력이 독으로 변화한 것. 그건 나라도 피해를 입는다.

물론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건 아니다. 귀찮은 거였지.

[미약한 독 내성(F)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독 내성(F) Lv.1 → 미약한 독 내성(F) Lv.2]

놈들을 포식하는 도중, 전에 얻었다가 한 번도 효용을 못 봤던 스킬의 레벨이 상승했다. 안 그래도 미약하던 녀석들의 독이 통하지 않게 됐다. 아니, 오히려 통하는 녀석이 있기를 바랐지만 결국 쥐를 다 몰살시킬 때까지 독 내성은 오르지 않았다.

[EXP 10245 / 19124]

수백 마리를 삼켰는데도 레벨업은커녕 경험치의 절반 정도밖에 차오르지 않았다. 개체가 워낙 약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티끌 모아 태산.

물론 녀석들을 아무리 먹어치워봤자 그 원흉을 제거하기 전까지 하수도의 재앙은 끝나지 않을 터.

하지만 그 원흉과 싸울 때는 좀 편해지리라.

이 쥐들은 이 놈의 사역마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만큼 쥐들의 숫자를 미리 줄여놓으면 나중에 놈과 싸울 때 그만큼 편할 테니까.

"으르르르…"

낮게 울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부산에 있는 하수도가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지만, 감지가 있는 이상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그렇게 길을 걷다가 굳이 쥐를 먹지 않아도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온갖 오물이 떠 있는 하수도. 물 속에 몸을 담그기만 해도 불쾌했다. 당장에라도 몸을 빼고 싶었지만, 아마 담그고만 있어도 독 내성이 올라갈 터. 중금속 중독이라던가… 그것도 독이라면 독일 테니까.

그나저나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숫자다. 머릿수가 깡패라지만 놈들이 내게 위협이 되기엔 역부족. 결국 경험치 셔틀밖에 되지 않는다. 전부 먹었다.

[탐식(E)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탐식(E) Lv.9 → 탐식(E) Lv.10]

[탐식(E)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탐식(E) Lv.10 → 악식(D) Lv.1]

'악식?'

괴물 늑대를 먹으면서 10레벨이 머지 않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쥐를 먹고 오를 줄은 몰랐다. 탐식의 다음 스킬은 악식. 포식. 탐식. 악식. 어쩐지 죄다 좋은 느낌으로는 안 들리네.

[악식 :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된다]

어쩐지 설명은 편식하지 말자고 들리는 것 같은데…

슬라임이 된 이후로 편식의 편자도 나랑 연관이 없다. 사실 D등급으로 오르면서 스킬 이름이 폭식으로 바뀌진 않을까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리셰니까.

폭식(爆喰). 일곱 대죄 중 하나이자 판타지에서 악역 혹은 주인공의 능력으로 자주 등장하는 능력. 보통 먹어치운 대상을 자신의 힘으로 흡수하는 사기중의 사기인 능력이었으니.

그래서 기대했지만 결과는 악식이었다. 그 능력은 고작 가리지 않고 먹는다…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아쉽지만 탐식이 사라진 건 아니니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탐식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사기라 부를만 햬까. 정 아쉬우면 C등급을 기대하면 될 터. 아쉬움을 달래며 이 경험치 덩어리들을 포식해나갔다.

쥐들의 왕이자 재앙의 원흉인 랫 맨을 찾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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