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13. 하수도의 재앙 (2)
[미약한 독 내성(F)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독 내성(F) Lv.2 → 미약한 독 내성(F) Lv.3]
되면 좋고 안되면 마는 거였는데 정말로 레벨이 오르고 말았다… 중금속 덕분에 스킬 레벨도 오르는데 이곳 쥐들도 썩 괜찮은 경험치 셔틀이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4 → Lv.15]
[공복(E) Lv.6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공복(E) Lv.6 → 공복(E) Lv.7]
그렇게 결국 15레벨에 도달했으니까.
일단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안전하다는 거였다. 요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달고 살긴 했지만, 로우리스크… 아니. 노 리스크 하이 리턴만큼 바람직한 것은 없으니까.
워그정도 된다면 모를까 이런 쥐들이 아무리 덤벼봤자 상성상의 이유로 무력하다. 제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급소가 없는 슬라임인데다가, 경화 하나면 놈들은 놈들의 공격은 무용지물이니까. 게다가 몬스터라서 일단 경험치는 획득한다. 마리당 10에서 20정도? 많이 주지는 않지만 쥐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악식으로 포만감이 경험치로 치환되는 것 까지 생각한다면?
지리산에서처럼 일일이 찾을 필요도 없다. 끝이 없는 쥐 떼 그리고 독 내성이 쭉쭉 오르는 오수와 함께 기분 좋게 사냥을 이어갔다. 하수도의 길을 걷다 보니 어둠에도 눈이 적응해간다.
그렇게 사냥이 되풀이되자 놈들도 학습이란 걸 한 모양인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라임 시절부터 감지로 사냥하는 데 익숙했는지라, 도망쳐봤자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외길이라 도망쳐봤자였고.
슬슬, 발 아래 감지되는 기척이 머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약한 시각(E) Lv.4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시각(E) Lv.4 → 약한 시각(E) Lv.5]
[암시(F)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암시. 이제와서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공짜로 얻은 스킬이니 감지덕지다. F등급이긴 했지만 스킬은 스킬인지 어두웠던 눈이 익숙해졌고 사냥은 더 수월해졌다.
[미약한 독 내성(F)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독 내성(F) Lv.3 → 미약한 독 내성(F) Lv.4]
***
[뭐? 돌아오라고?]
"거기보다 여기가 급해."
[아니 잠깐만. 그니까 이 씹새들보다 꼴랑 늑대 한 마리 잡는게 더 급하다 이거야?]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는 상대방에게 팀장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어."
[야! 몇 달간 뺑이를 쳤는데 갑자기 이래? 미쳤어?]
"클랜장님 명령이야. 꼬우면 따져."
[시발. 너 진짜 나날이 협박만 늘어간다?]
"넌 욕 좀 그만할때 안 됐냐? 내가 네 상관인 건 알고 있지?"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박박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간다고! 가! 치사한 새끼]
"언제 올건데?"
[언제까지 가야되는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늦어도 내일?"
[야! 그럼 왜 물어봐?]
"예의상?"
전화 너머로 한참이나 욕지거리. 팀장은 욕을 들으면서도 하하 웃었다.
[존나 무능한 새끼들. 겨우 늑대 한 마리 때문에 사람을 오라가라 지랄이야]
"미안해. 근데 네가 없으면 좀 힘들 것 같다."
[……그 정도라고?]
수화기 너머의 인물이 떨떠름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있기는 해?]
"분명히. 그리고 진화했다고 추정중이고."
[진화? 지랄도 가지가지하네… 야! 일단 끊어. 나중에 다시 걸 테니까!]
급하게 끊어진 핸드폰을 보고 잠깐 멍하니 있던 팀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자식은 뭐가 급하다고…"
곧 팀장은 어느 서류를 턱을 괴고 읽어 나갔다.
[부서 변경 신청서]
***
감지에 확인된 기척. 그것은 쥐가 아니라 더 거대한 무언가였다. 함께 감지된 기척들에 나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발 아래서 감지되는 기척들.
"그르르르―"
워그의 형상을 포기하고 몸을 넓게 펼쳐 하수도를 거름망처럼 둘러쌌다. 한 치의 틈도 남기지 않고 하수도를 꽉 채운 그대로 나아갔다. 당연 쥐들은 물러서기 바빴고 그렇게 곧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됐다. 철창으로 가로막힌 격벽이었는데 작은 몸을 가진 쥐들은 그 틈새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나였기에 좁은 틈새를 빠져나가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쯤에 있을 텐데…….
격벽의 틈새를 빠져나와 천장을 향해 촉수 다발을 사용해 벽을 들어올렸다. 처음엔 쓰다듬거나 간지럽히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들어올릴 수도 있다니. 그 성장에 감개가 무량하다.
아무튼, 그렇게 들어올리자 구멍이 있었다. 아니, 구멍이 아니라 통로.
이러니 들킬 리가 없지. 바로 이 천장이야말로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었으니까. 지하로 향하는 길이 천장에 있다는 게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하수도는 물이 흐르는 곳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그렇게 천장을 오르자 어른이 허리를 숙이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나왔다. 물론 거기에도 바글바글하게 쥐가 쌓여 있었다.
[이빨 쥐(Teeth Rat)]
[체장 44.5cm] [체고 7.8cm] [체중 960g]
[힘 21] [민첩 26] [체력 19]
뉴트리아를 닮은 이빨 쥐. 이런 녀석이 하수도에 숨어있다는 게 놀라웠다.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실화 기반이라면서 B급 공포영화를 찍어내지 않을까?
그래봤자 경험치지만. 남김없이 포식하며 천장을 한참 걷던 와중에 내려가는 길을 발견했다. 내려가는 길이라기보단 구멍이었는데, 마치 미끄럼틀처럼 뚫려 있었다. 슝하고 내려가 4초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지하에 입성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쥐들이 널려있었고 슬슬 그 숫자에 질릴 지경이었다. 하수도의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찌지직! 찌지직?!
내 모습을 본 쥐들은 당황하며 도망치려했만 그러거나 말거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미약한 청각(F)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청각(F) Lv.9 → 미약한 청각(F) Lv.10]
[미약한 청각(F)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청각(F) Lv.10 → 약한 청각(E) Lv.1]
드디어 미약한 청각의 등급이 E등급으로 상승했다. 덕분에 듣기 싫은 시끄러운 소리까지 듣게 됐다. 특히 지하라 그런지 소리가 잘 울려 고역이었다. 결국 청각을 잠깐 비활성화해두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길이 끊겼는데 하수도의 물이 길을 범람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누수되어 뚝뚝 떨어진 물이 오랜 시간 고여 깊은 고랑을 만든 셈이다. 거의 10m 정도나 되는 거대한 고랑이었지만 뱀사골에서 갈고 닦은 수영과 잠수가 있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설 속에선 이 고랑 때문에 제법 애를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오물로 가득한 물이었기 때문인데다가.
[오염된 피라냐]
[체장 15.3cm] [체고 5.6cm] [무게 340g]
[힘 24] [민첩 21] [체력 25]
이런 피라냐가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적 과장을 뺀 피라냐는 그렇게 위협적인 어종은 아니지만, 이 녀석은 영화속에서 튀어나온 듯 그대로였다. 날카로운 이빨과 몬스터다운 포악성을 가지고 침입자인 나를 먹어 치우려 했다.
물론 그래봤자였지만. 경화를 사용하면 거의 강철만큼 단단해질 수 있었는데, 제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봤자 힘 24로 경화를 뚫는 건 무리였다. 굳이 경화까지 사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피해 감소와 약한 재생만으로도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죽어준다면 모를까.
쥐나 피라냐들이나 비슷비슷한 경험치일뿐. 수영과 잠수의 레벨이 사이좋게 4에서 5로 상승했다. 16레벨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정말 오랜만에 편하게 사냥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피라냐들도 손쉽게 먹어치우고 고랑 너머로 올랐다. 이제 정말 코앞이었다. 기나긴 하수도의 끝이 보인다. 랫 맨과의 거리가 100m도 남지 않게 됐다.
놈도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연신 불안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낡은 백열전구 두 세개가 천장에 붙어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 모양의 형상이 있었다
놈이 바로 랫 맨. 드디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존재와 처음으로 마주한다는 설렘도 잠시. 그 흉측한 외형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냥 쉽게 말해 쥐가 사람처럼 두 발로 서 있는 모습?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소설 속에서 간단히 묘사한 것과는 달리 좀… 역겹다.
[하수도의 주인(랫 맨)]
[체장 1.61m] [체고 45.7cm] [체중 28.9kg]
[힘 67] [민첩 104] [체력 97] [마력 115]
곧바로 염탐해본 결과였지만 나랑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상당히 약했다. 일단 직립보행인데 체고가 아니라 체장이 1.6m인 것도 신기했다. 놈은 잠깐 찍찍거리더니, 자신의 목에 걸린 오컬트적인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찌직. 찌지직!? 뭐냐, 찍?!"
놈이 말을 했다. 아니, 말을 할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로 말을 하니 새삼 신기했다. 비록 쇳소리같은 불쾌한 음성이었지만 말이다. 녀석은 나를 노려보더니 책상 위의 플라스크를 집어 냅다 던졌다. 날아오는 플라스크를 염탐으로 확인하고 그대로 맞았다.
"찌지지직! 찌지직!"
비웃는 것도 잠시. 놈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이를 드러내 위협하자 꼴깍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친다.
[신경독 플라스크 : 아세틸콜린을 비롯한 여러 화학물질이 마력으로 섞여 있는 독극물]
신경독은 나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다. 오히려 독 내성이 5레벨로 상승했으니 고마웠다. 자신의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불안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게 영락없이 도망칠 방법이 없나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독 내성 올리기 좋네.'
"히, 히찌익!
[위협(F) Lv.5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위협(F) Lv.5 → 위협(F) Lv.6]
지하에서 울려퍼진 끓는 소리는 내가 들어도 섬뜩하다. 녀석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오물이 묻은 단검을 치켜들었다.
의외로 겁먹은 주제에 도망치는 것보다 맞서기를 선택한 모양. 닿기만 해도 파상풍이나 알러지를 일으킬 것 같은 비쥬얼의 단검을 겨누고 눈을 부라려왔다.
…나야 상관없지만.
지금부터 미리 막을 수 있는 재앙은 몇 개 더 있었지만, 내가 굳이 하수도부터 찾아온 것은 상성 때문이었다. 이곳의 몬스터들과 녀석은 제아무리 발악해봤자 날 이길 수 없다. 정확히는 날 죽일 수단이 없다고 해야하는 게 옳으리라. 독은 아무리 써봤자 무용지물이고.
곧 녀석이 달려들었다. 그래봤자 나보다 낮은 민첩. 거기에 더해 간파와 직감이 있는 이상 녀석에게 당하는 게 더 어려웠다. 옆으로 물러나 피하고 뒤에서 덮쳤다. 단번에 바닥에 눕게 된 녀석은 "찌지직!" 하며 두려워했다. 품에 있는 플라스크를 하나 더 던지는 놈. 이번엔 물러나 피했다.
부글부글…
돌바닥이 끓어올랐다. 신경독은 무시해도 산성은 통한다. 그래도 맞지 않으면 결국 같다.
"재빠른 찌직!"
내가 물러난 걸 보고 알아챘을까? 놈은 허리띠에 매고 있는 신경독 플라스크는 죄다 버리더니 산이 든 플라스크만 던져댔다. 하지만 그걸 피하는 건 누워서 떡먹기보다 쉽다. 급기야 놈은 마력까지 사용했지만, 그래도 한참이나 느리다. 괴물 늑대가 훨씬 빨랐으니까.
허리에 찬 병이 떨어지자 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닥을 짚었다.
'아…'
저게 체고가 아니라 체장이 1.6m인 이유였다. 애초에 이족보행이 아니라 사족보행을 하는 짐승이었다. 사람을 흉내내고 있었을 뿐, 사람은 아니라는 소리.
과연 세자리 수에 걸맞은 민첩을 뽐내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아까까지와는 다른 움직임. 놈은 그 재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벽 곳곳을 박찼다. 바닥뿐만 아니라 벽까지 이용하는 날렵함에 일순 당황했다. 놈의 손톱 끝이 요요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건 놈이 가진 마력. 비록 115라는 수치에는 턱없이 모자라보이지만, 분명 마력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력에 맞으면 위험하다. 놈은 처음엔 분한 듯 이래저래 공격을 퍼부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다. 중간부터는 쥐들도 불러내서 함께 싸웠는데 그냥 무시하고 랫 맨만 집요하게 노리자 아까의 기세를 잃고 도망치고 있었다.
"찌직!"
눈을 교란시키는 움직임이기는 했으나 느리다. 사실 진작에 끝낼 수도 있었지만, 시간을 끈 이유는 그냥 확인하고 싶었다. 어쨌든 소설 속에서 등장한 인물과 조우한 건 처음이었으니 랫 맨을 기준으로 지금의 내가 어느정도아지 확인해본 것뿐이다.
랫 맨은 좋은 지표가 됐다. 다음 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고가 되리라.
이만큼 확인했으면 됐다. 준족과 돌진을 비롯한 스킬들을 사용해 놈에게 접근해서,
"찌이익?!"
―단숨에 제압했다.
놈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대부분은 사역마들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비록 사역마들은 내가 먹어 치웠지만 그렇다고 마력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마력이 없는 놈은 한낱 짐승일 뿐. 내가 고전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발톱으로 녀석의 등허리를 찍어눌렀다.
"찌지지지직! 찌지이이익! 찌이이익!"
비명을 지르는 랫 맨. 턱을 벌리자 오들오들 떨었다.
"찌직! 사, 살려줘라! 찍!"
녀석의 꼬리가 안면을 강타한다. 놈의 힘으로 아무리 쳐봤자 간지러울 뿐이었다.
"귀, 귀공은 포식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찍! 그만한 힘! 말은 못하더라도 지성이 있을 찍! 나, 나랑 거래를 하자!"
"……."
"찌직! 찌지직! 살려준다면 이 하수도를 찌직! 귀공의 식사장소로 바치겠는 찍!"
'그건 좀 솔깃하네.'
이게 내 양식장이 된다고? 쥐들의 번식력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유효한 제안이었다. 주기적으로 들르기만해도 레벨업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터. 내가 솔깃해하는 태도를 보이자 놈은 대화가 통한다고 확신했는지 비굴한 미소를 띄웠다.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기는 하다.
"어, 어떤 찍? 귀공이 방금 먹어치운 숫자라면 한달이면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찍! 날 살려준다면…!"
거래를 할 줄 아는구나. 분명 랫 맨이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쥐 몬스터들은 유효한 경험치 양식이 될 테고, 분명 성장의 밑거름이 되리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보다 귀한 경험치를 만드는 양식장 주인이라는 뜻.
"찌직! 귀공도 이해한 모양…?"
비릿한 미소와 말. 그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언행이었다.
[랫 맨을 섭취하였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증가합니다]
[포만감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경험치가 포만감으로 치환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5 → Lv.16]
'타협은 없다.'
양식장 이야기는 솔직히 솔깃했다. 하지만 이후, 놈이 저지를 일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반드시 죽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놈이 약속을 지킬거라는 보장도 없다.
놈의 비열함. 그리고 놈이 자행한 끔찍한 실험들을 생각하면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랫 맨은 내가 자신을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게 놈은 거래의 성립 대상이 아니었다. 하수도의 왕은 그렇게 허망하게 쓰러졌다. 그러나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나는 녀석의 허리춤에 메달려있던 열쇠를 집어들었다.
뒤처리는 확실한 게 좋으니까.
놈을 죽임으로써 부산에 일어날 재앙은 막았다. 이 넓은 하수도의 쥐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고는 자신 못하겠지만, 어차피 조종할 주인이 없다면 녀석들끼리 부산에 재앙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남은 놈들도 어차피 청소할거니까.
돌아가는 길에 싸그리. 감지에 쥐 새끼 한 마리 포착되지 않을 만큼 철저히. 나는 랫 맨의 흔적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울 생각이었다.
끼리릭― 끼릭.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넣고 돌렸다. 그리고 그 너머의 처참한 광경. 생각해보라. 놈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몬스터를 사역하고 있었을지를.
나는 양옆으로 펼쳐진 고깃덩이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키메라 실험. 키메라라는 건 의외로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원래는 흰 쥐와 검은 쥐의 색깔을 섞은 정도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여기는 소설 속 세계이며 현대 지구는 아니라는 점.
놈은 몬스터인 동시에 뛰어난 연금술사이기도 했다. 그 실력을 바탕으로 암수 한 쌍의 키메라로부터 번식시킨 것이 커스 랫과 그리드 랫을 비롯한 하수도의 몬스터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앞에 그 실험의 결정체가 있었다.
어두운 철창 너머에 웅크린 무언가. 천장에 메달려 있던 백열 전구로 놈을 밝혔다.
'…역시 지금도 있구나.'
혹시나하는 기대는 있었다. 여기는 소설이 시작되는 2년 전 시점이니까. 하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하수도의 괴물(키메라 비스트)]
[체장 2.47M] [체고 56cm] [체중 169kg]
[힘 265] [민첩 82] [체력 244]
놈의 몸 곳곳에 박힌 수많은 눈알들이 빙그르르 돌아가며 나를 주시했다.
"……."
그래. 잘 알고 있다. 그토록 선명한 흰자위를 가진 동물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