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5화 (25/407)

〈 25화 〉 #15. 극기(克己)

"그르릉―"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기분 좋게 잠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이제는 사람이 없어진 바다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진 속에서나 보던 광안대교의 모습과 그 아래 펼쳐진 조용한 밤바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해수욕장이 으레 그렇듯, 수심이 깊지 않았다. 좀 더 바다 깊숙이 나가기 위해 늑대에서 유선형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감지를 활성화해도 놈을 찾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이유는 너무 많아서. 바닷속 생물들의 숫자가 숫자이다 보니 D등급의 감지로도 한계가 있다. 물론 E등급 시절처럼 열과 기척도 여전히느낄 수 있다고는 하지만 바닷속에서 열 감지는 힘드니까.

어류의 대부분이 외부 환경에 따라 체온을 조절하는 외온성 동물이기 때문이었다. 수온과 비슷한 체온을 가진 수생 동물을 열 감지로 찾는 건 할 수는 있지만 효율이 별로다.

송사리처럼 작은 기척은 걸러내고, 커다란 기척만을 포착한다. 그렇게 포착한 기척을 다시 한번 후각으로 선별한다.

수생 생물은 아가미와 코가 따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수중에서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포유류는 코가 호흡과 후각의 역할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수중에서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러나, 약한 후각은 스킬에 의해 발현된 것. 물 속이라 한들 내가 후각을 못 쓸 이유는 되지 않는다. 애초에 포유류도 아니었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급진 이름. 딱 한 번 먹어봤던 랍스터를 어떻게든 떠올리려 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조리되지 않은 녀석의 냄새를 몰랐다. 그래서 갑각류 특유의 꾸릿꾸릿한 냄새를 찾으며 시행착오를 반복한 결과.

[천년용하(千年龍蝦)]

[체장 3.09m] [체고 54.5cm] [체중 175kg]

[힘 246] [민첩 196] [체력 311] [마력 149]

'이러니까 못 찾지.'

모래 더미 아래에 붉은 등껍질이 아주 살짝 튀어나와 있다. 평소에 저렇게 숨어 지내는데 나처럼 놈이 있다고 확신하고 찾는 게 아닌 이상에야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녀석은 가재(龍蝦)였지만, 일반 가재랑은 생태가 다르다.

천 년 동안 쌓아온 노하우. 하긴. 저 덩치로 바위 아래 숨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천년 묵은 랍스터.

군침이 돈다. 따지고 보면 녀석은 재앙이 아니므로 꼭 처리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요가 아니라 기호로 따진다면 반드시 먹고 싶은 녀석이었다. 천년용하. 놈은 영약― 그 중에서도 영물이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먹게 되는 녀석. 소설 속 어떤 등장인물이 취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머지않아 배신한다. 그러니 자신이 취하는 게 나으리라.

코앞까지 다가갔는데도 녀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절대로 들킬 리가 없다고 자신하는 것처럼. 놈은 영물. 천년을 살아왔으니 대범해진 걸까?

일단 스테이터스부터가 범상치 않다. 이런 얕은 바다에서 위협당할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 헌터들을 제외하면 내가 본 적들 중에서 가장 강한 축에 속했다. 마력이 149인 걸 보면 어쩌면 괴물 늑대와도 좋은 승부가 될지도 모른다.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52로 상승한 마력은 이제 커피포트를 넘어 주전자에 가득 찬 물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마력을 한데 모아 응집했다.

곧 생성된 마력탄은 가재의 껍질과 부딪혔고 제아무리 껍질이 단단하다 해도 마력탄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마력탄은 녀석의 외골격을 철저히 부쉈다. 아쉬운 건 머리가 아니라 집게발이었다. 그 사이에 반사적으로 들어 올려 막은 모양이었다.

단단하다. 집게발을 관통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마력탄은 힘을 다해 소멸했다. 예상 이상으로 단단한 껍질. 천년용하는 그 육중한 몸을 모래 속에서 일으켰다.

그러자 바닥에 또 한 마리가 보인다. 두 마리……? 아니, 아니다. 두 마리인 게 아니라… 나는 씩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천년용하(탈피 중) : 천년을 살아남은 바닷가재가 영물이 된 개체]

탈피중이었다. 아직 껍질을 완전히 벗지 못해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 특히 탈피 중인 때는 새로운 외골격에 칼슘이 없어 가장 약한 시기이기도 했으니.

가장 먹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뜻이다.

***

[천년용하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천년용하를 섭취했습니다. 마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7 → Lv.18]

[악식(D) Lv.2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악식(D) Lv.2 → 악식(D) Lv.3]

[공복(E) Lv.8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공복(E) Lv.8 → 공복(E) Lv.9]

레벨이 18레벨이 된 것만 해도 만족스러운데 어느새 공복이 D등급을 바라보게 되었다. 희희낙락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다가 천년용하를 섭취한 효과인지 17레벨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마력이 91까지 상승해있다. 거의 40. 정확히 39. 50년 묵은 인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승세였다.

미각이 없다는 게 이렇게 후회스러울 때가 없었다. 진지하게 '미각을 획득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지만, 스킬 포인트가 아까워 그만뒀다. 다만 녀석의 식감은 느낄 수 있었는데, 쫄깃쫄깃하면서도 야들야들한 살은 그 식감만으로도 웬만한 음식들은 넘어섰다 하겠다.

[미약한 육감(F) Lv.6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육감(F) Lv.6 → 미약한 육감(F) Lv.7]

갑자기 레벨이 오른 미약한 육감. 그리고 육감의 레벨이 상승할 때는 항상 얼토당토않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학습된 위기감에 곧잘 은신을 사용하고 바닷속으로 숨어들었다.

"씨발?"

밤바다의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깨는 욕설. 웬 붉은 머리 꼬맹이가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게 신기하다. 복장은 오픈 숄더 원피스. 어린애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지만 애초에 어린애가 왜 이 시간에 바다에? 아니, 그것보다 숨죽이고 은신하는 데 집중하자.

"씨발, 벌써 튀었나?"

소녀는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기척 감지가 뒤늦게 반응했다. 하수도에 있던 그 괴인, 아니 헌터임이 분명했다.

'그 헌터가 저 꼬맹이라고? 아니, 저 꼬맹이가 헌터라고?'

믿기 어려운 일에 나도 모르게 염탐을 사용하고 말았다.

[홍유리(인간)]

[신장 143.6cm] [체중 32.9kg]

[힘 219] [민첩 245] [체력 278] [마력 640]

'……?'

마력이 640? 잘못 본 거라 믿고 몇 번이나 다시 읽어봐도 그대로였다. 64가 아니라 640. 내 안에 각인된 전투력 랭킹이 사이좋게 한 칸씩 내려갔다. 심지어 홍유리라는 저 소녀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새벽의 여명이라는 2위 클랜 소속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어보면 몇몇 독자들이 '불속성 로리' , '매운맛 합법로리'라면서 유난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2위 클랜의 헌터… 하수도에서 안 들킨 게 기적이었다. 하지만 위화감은 느꼈던 모양이고.

'뒤늦게 위화감을 쫓아서 여기까지 왔다?'

얼추 이야기의 아귀가 맞는다. 그 순간, 홍유리의 눈이 좁혀졌다.

"―찾았다."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순간,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하. 물고기였을 줄이야."

비릿한 미소를 띤 홍유리가 조소하고 있다.

그녀의 두 눈이 위험하게 빛난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날카로운 마력 수십 발이 수면을 강타, 물보라가 크게 치솟는다. 7레벨에 이른 수영으로도 균형을 잃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

정신 차리기도 전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이어졌다. 세상이 붉게 물든다. 아니, 그게 아니다. 그녀의 거대한 마력이 밤바다를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

헤엄쳐서 도망칠 순 없다. 마치 달이 떨어지는 것 같은 위기였다.

[미약한 육감(F) Lv.7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육감(F) Lv.7 → 미약한 육감(F) Lv.8]

곧바로 촉수로 모래를 박찼다. 준족이 활성화되고 높게 뛰어올랐다.

쿠과광-!

거대한 마력이 해안을 덮친다. 파도가 멈추고 물보라가 치솟았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과 함께 용오름과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구름까지 솟구친다.

빨려 들어가기 직전 최후의 순간, 나는 공중에 떠오른 물고기에게 탄력을 사용해 돌진의 보정까지 받고, 남은 마력을 전부 폭발시켰다.

***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상외로 너무 빨랐다. 간발의 차이긴 했지만, 설마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

바닷속으로 도망친 이상 좇아도 소용없겠지만, 다음번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으리라. 아니, 어차피 저딴 잡몹은 알아서 뒤져나갈 테지만.

"아 씨발, 구진하가 또 잔소리하겠네…"

부팀장, 홍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그래서 놓쳤다고?"

[아 씨발 존나 빨랐다고.]

"너. 이거 뒷감당은 할 수 있어? 나중에 광명회가 뭐라고 하겠어?"

[그럼 뚝배기 다 깨버리지. 자기들 할 일을 대신 해준 건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럴 거면 보고는 왜 하는데."

[뒷정리 하라고 했지. 왜?]

팀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보낸 사진에는 엉망이 된 광안리의 사진이 있었다. 모래사장은 완전히 엎어졌고 그 위에서 생선들이 펄떡이고 있다. 당연 사람들은 다 놀라서 깨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하는 말이 뒷수습이나 해달라는 거였다.

[너 지금 딴생각해?]

"아니. 아무것도? 아무튼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냥 바로 올라와."

[오냐]

멋대로 끊어진 휴대폰. 팀장은 광명회의 번호를 찾다가 잠깐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내일이면 알파의 꼬리가 잡히겠지."

성격과는 별개로 홍유리의 눈은 수색팀이란 이름을 대표하는 것이었으니.

***

죽을 뻔했다…….

가진 모든 걸 사용했는데도 잡힐 뻔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체면적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급한 마력의 사용, 도망치기 위해 발밑에 마력을 터뜨린 탓이었다. 그나마도 바다가 아니라 육지였다면 100% 사망이었으리라.

바위를 집고 물에서 뭍으로 겨우겨우 올라왔다.

광안리에서 동백섬까지.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약한 재생으로 체면적을 복구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약한 재생(E) Lv.8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재생(E) Lv.8 → 약한 재생(E) Lv.9]

'후우우―'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오히려 가라앉히려 하면 할수록 속이 끓었다.

'홍유리는 자기 할 일을 한 거야.'

몬스터가 있으면 처치하는 게 헌터의 일이니까. 안다.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아는데… 욕지거리가 치밀어 오른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건 전혀 별개였으니까. 속으로 온갖 욕설을 다 퍼부어도 나아지기는커녕 답답하기만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때려치울까 하는.

사실 여태껏 죽을 뻔한 위기는 셀 수도 없었고 싫은 경험도 빈번하게 겪었다. 나라고 벌레를 먹는 게 좋았겠나. 싸우는 게 좋았겠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먹기 싫은 것도 먹어야 했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만 했다. 보기 싫은 것도 계속 봐야만 했다. 이 개같은 세상은 항상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이젠 숨 좀 돌리겠다 싶었더니 홍유리에게 죽을 뻔했다.

지긋지긋하다. 대체 언제쯤이면 죽을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이 미친 세상에서?

짜증난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짜증은 그렇게 울분으로 변했다. 이 세상에서 겪으면서 느끼는 거라고는 내가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뿐이다.

몬스터에게 위협당하고 헌터들에게 노려지고.

불합리하다. 인류와 대적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하다.

그래. 사람이 죽을 위기를 겪으면 변한다고 하던가?

그럼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변해야 했을까? 몇 번이나 포기해야 했을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다. 문자열로만 접했던, 책 속의 글자로만 읽었던 상황. 내게 희극이었던 것들이 비극으로 변했고, 그 비극의 매 순간이 지옥 같았다.

고개를 꺾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하늘. 무심하도록 검은 하늘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물에 흠뻑 젖은 털. 털어내려면 얼마든지 털어낼 수 있었지만,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비참해서.

[여기서 멈추시겠습니까?]

별안간 들려오는 목소리. 시스템은 여기서 그만두겠냐고. 멈춰서겠냐고 물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진짜 너도 참.'

똑같은 상황. 똑같은 물음.

늘 그랬듯 시스템은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너무 명백해서. 이젠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참. 너무 서툴러서 격려 같지도 않은 격려.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였다.

묻어있는 물기를 털어냈다.

0.02%― 포기한 것도 있지만, 지켜낸 것도 있다.

워그들에게 죽을 뻔한 이은하를 살렸다.

랫 맨과 키메라를 처치해 하수도의 재앙을 막았다.

그로 인해 원래라면 '마녀의 재앙'이 됐을 백소율을 구했다.

비록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분명히 이 세상을 올바른 결말로 이끌고 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이제 와서 한 번 죽을 뻔했단 게 뭐가 어떻다고?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삶이 투쟁의 연속이었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마침내 끓던 속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해는 이해. 울분은 울분이었다. ―복수는 언젠가 반드시 해 주겠다.

'홍유리.'

나는 엑스트라였던 그녀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극기(克己) 스테이터스가 생성됩니다]

[멸망 확률 99.98% -> 99.9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