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17. 던전의 주인 아라네아
[리빙 하운드를 섭취했습니다.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안 되네.'
아무리 먹어 치워도 레벨 업은 불가능했다. 던전에서 시간을 보낸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구상섭이 죽었음에도 입구에 있던 헌터들만 잠깐 들어왔을 뿐,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진 않았다.
'아무리 목숨 걸고 하는 직업이라지만.'
괜히 씁쓸해진다. 아니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소설을 읽었을 뿐이지 이 세계의 주민인 건 아니었으니까.
'던전을 나가야겠지?'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더 이상 이 던전에서 얻을 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20레벨 달성 조건이 문제였다.
'0.1%의 업.'
[산의 폭군(워그{부정형}) Lv.19] [EXP 36777 / 36777]
[업(業) 0.07%]
[체장 1.79m] [체고 81.4cm] [체중 58.5kg]
[힘 123] [민첩 140] [체력 210] [마력 94] [극기 1]
20레벨이 되면서 상승한 스테이터스들. 경험치를 모두 채웠지만, 20레벨 달성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여전히 문턱에 걸려있다.
'답답한데.'
혹시나 해서 진화 목록을 열었지만, 여전히 조건은 불충족이었다.
레벨업을 하기 위한 달성 조건은 0.1%의 업. 현재 내가 가진 업은 0.07%.
'즉, 0.03%의 업을 추가로 획득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걸 어디서 얻나.
부산을 혼란에 빠뜨릴 하수도의 재앙을 막아서 0.02%
광명회를 무너뜨리는 계획의 주춧돌이 되는 구상섭을 처치하고 0.04%였다.
'하지만 홍유리를 만나고 나서.'
죽을 위기를 겪고 이후 극기를 얻으며 0.01%를 추가로 획득했다. 무슨 조건이었을까? 죽을 위기를 겪는 것? 아니면 위기를 넘긴 것? 그것도 아니면 다른 조건이 있는 건가?
[극기 : 스스로를 극복하는 의지]
'의지?'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재앙을 막고 멸망으로부터 세상을 구할 것이다… 10초 정도는 진지하게 했지만 이내 쪽팔려서 그만뒀다.
'아오오오. 도저히 못 하겠다.'
혹시나 해서 확인한 극기는 여전히 1이었다. 애초에 이런 작위적인 것으로 업을 획득한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지. 어찌 됐건, 내가 여기에 더 있을 필요는 없다는 소리였다. 다른 재앙을 막거나 살생부에 포함된 인물을 죽이는 게 낫다.
'대구에 한 명 있기는 한데 이 시점에도 있는지 잘 모르겠네.'
또 지금 시점이라면 아직 아카데미 학생일 터인 주인공의 얼굴도 보고 싶었고.
'일행에 끼면 업을 획득하기 쉬울 텐데.'
비록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멸망을 막는 데 실패했다지만, 많은 재앙을 막았다. 내가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면 업을 획득하는 게 훨씬 수월해지리라.
'물론 2년 후에 말이지.'
그 이전의 사건들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애초에 먼치킨보다는 성장형 주인공에 가까웠으니 아카데미 시절부터 문제를 척척 해결한 것도 아닌 듯하고.
'하지만 전개를 알고 있는 내가 있다면?'
주인공의 성장을 끌어당길 수 있으리라.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말 소설 속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의 전개를 알고 있다는 건 한발 먼저 행동할 수 있다는 소리. 잘 나가다가 갑자기 '종말을 맞이했다(完)' 이 지랄 하던 소설의 제대로 된 완결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가능할지도…?'
진짜 희망이 생겨났다. 희희낙락 웃으며 던전 입구까지 가던 와중 스킬이 경종을 울린다. 강한 이들― '기척 감지'는 그들을 인간이라 판단했다.
'사람? 헌터가 들어왔다고? 이틀간 조용했으면서 갑자기?'
함부로 입구로 향하는 건 위험했다. 구상섭이 확인시켜준 것이지만, 경계하는 헌터는 내 은신을 꿰뚫어 볼 수 있었으니까. 아까까지 헌터가 오지 않는다며 씁쓸해하던 놈이 태도를 바꾸다니. 스스로 우습다고 자조했다.
'레벨이 오르긴 했는데.'
이틀간 던전에서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스킬의 레벨이 전체적으로 상승. 5레벨의 은신. 하지만 그 정도로 저 많은 헌터를 모두 속일 수 있을까?
'…6명? 아니, 10명.'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그들은 단숨에 미궁을 돌파해나간다. 길을 아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알고 있다. 그들 중에 구상섭의 일행이었던 전사와 궁수도 있었으니.
'도망칠 수 있을까?'
그들은 그 짧은 시간에 자신들이 도망쳤던 곳까지 도달했다. 그 이후에는 아무래도 길잡이가 없었으니 돌파 속도가 더뎌졌지만.
'내 탓도 있어.'
요 이틀간, 몬스터들을 제법 먹어 치워왔으니 몬스터 자체가 없기도 했다. 덕분에 이곳 던전의 지형은 다 외웠지만.
'그리고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대충 알지.'
헌터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철저한 준비를 하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다. 그런 이들이 고작 던전 하나의 수준을 짐작하지 못하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뉴스에선 대표 클랜이 다른 클랜에 맡긴다고 했었지?'
저들 또한 경산 지역 근처에 자리 잡은 클랜이라는 뜻이었다.
[남은 스킬 포인트 8]
마지막으로 남은 스킬 레벨을 확인했다. D등급 스킬 2개를 획득할 수 있는 양이었다.
'은신을 C등급으로 올려보는 건.'
아직 5레벨인 은신이었으니 스킬 포인트를 모두 사용하면 아마 C등급으로 상승시킬 수 있을 터. 그렇게 되면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아깝다.'
아깝다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았다. 0.03%의 업을 추가로 획득하기 전까지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는 건 최후의 보루여야 했다.
'―0.03%?'
그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어떠한 생각.
'멸망― 아니, 애초에 이 세상은 몬스터 때문에 멸망하고 있는 거잖아?'
자연재해나 환경오염 같은 현대 지구의 문제 요소가 아니라 몬스터 때문에 멸망해가는 세상. 그리고 그 멸망의 주된 원인인 몬스터는 지리산의 워그나 슬라임처럼 자연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던전도 그 일부였다.
'그럼 던전을 클리어하기만 해도 업을 획득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여태까지 이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 생각하는 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던전, 하지만 그게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어디까지나 독자의 시점으로 보았기 때문.
'던전은 사냥터가 아니야.'
인류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장소. 주인공이 그렇게 구르는걸 알면서도 여태 읽은 소설들의 흔하디흔한 위기가 생각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목적과 수단을 반대로 생각했었어.'
멸망을 막기 위해 '던전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헌터로서 성장한다'는 수단을 선택한 인류. 그와 반대로 나는 해피 엔딩을 위해 '성장해서 강해진다'를 목적으로 '던전은 사냥터로' 이용할 수단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 세상에 완전히 익숙해진 건 아니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던전을 클리어한다면.'
얼마나 업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0.03%이상 멸망 확률이 내려가는 건 확실하리라.
'왜냐고?'
시스템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시스템이 했던 말과 행동들을 떠올려보면 답은 분명 근처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이 던전을 클리어하라는 게 가장 신빙성이 높아.'
어쩌면. 아니 아마도 원래 소설 속에서는 던전 공략에 실패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헌터들이 죽어 나갔을 테고. 따라서 시스템은 내게 이 던전을 클리어하라고 은연중에 알리고 있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나 혼자서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저 헌터들이 던전을 클리어하도록 돕는다면?
'가능해.'
어차피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로서 행동할 생각이었다. 직접 구르긴 싫었으니까. 이번 기회를 그 초석으로 삼아보자.
***
"야. 내 말은 어디 귓등으로 쳐들었냐? 여기 없다니까?"
"진짜 없는 모양이군."
법계사뿐만이 아니라 지리산 전역을 뒤져보아도 늑대 발자국으로 보이는 건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홍유리는 말했을 터.
"분명 내가 없다고 했지? 이 개자식아."
"욕은 하지 말고.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
"너 때문에 오늘 괜히 뺑뺑이 돌았잖아. 망할."
팀장의 말에 홍유리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구진하 이 씹새끼. 하여간 존나 꼼꼼해요."라는 소리를 팀장은 애써 무시했다.
"네 마안은?"
"흔적이 생각보다 빨리 흩어졌어. 원래라면 흔적이 남을만한 크기인데…"
분명 법계사에 알파가 있기는 있었다. 커다란 워그의 흔적이 분명 느껴졌으니. 하지만 그 이후로 알파의 움직임을 읽을 수 없다. 갑자기 가벼워졌거나 사라진 것도 아닐텐데. 흔적이 이렇게 금방 사라진다고? 그게 못내 이상했다.
'진화해서 날개라도 달렸나? 아님 다이어트라도 했나?'
"근데… 아냐. 아무튼 지리산에는 없어."
"……?"
"아무것도 아니라고. 암튼 올 필요 없잖아? 여기 산에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팀장은 수긍했다. 수색 3팀. 그 중에서도 추적에 가장 능한 홍유리조차 쫓지 못한다면 고원의 광휘라도 오지 않는 이상, 알파를 찾는 건 무리였다. 말끝을 흐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자꾸…'
마치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것처럼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워낙 희미해서 애매했지만. 신경쓰이긴 하지만, 기억 나지 않는다면 딱 그 정도겠지. 홍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무튼. 산에는 없다고. 내려가서 다른 방향으로 찾아봐야지. 안 되는 거 붙잡고 있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2팀에도 알려두지."
어째서 알파는 법계사에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리고 다른 한 마리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지. 정말로 산을 내려갔다면 왜 아직 아무 일도 없는 건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지만, 알파를 쫓아야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
"이거 이렇게 쉬워도 되나? 왜 이렇게 몬스터가 없지?"
"왜 조용하고 좋은데?"
"클리셰잖아요. 조용하다가 갑자기 왁! 하고 터진다던가."
"어이구~ 그래쪄요? 영화 좀 많이 봤나봐? 하라는 훈련은 안 하고."
"흠흠."
"전에 왔을 때는 많았는데요…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 걱정 붙들어 매시죠. 저희 누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 C클래스 헌터라는 건 알겠는데요."
위험도가 높은 던전은 아니라지만, 고작 10명 남짓한 인원으로 던전을 클리어하자는 건 무리가 아닐까. 상섭의 일행이었던 궁수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사람이 더 필요한 게 아니었나 싶은데요."
"왜요. 순조롭잖아요? 뭐 있는 것도 없고."
말마따나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태까지 만난 몬스터라고 해봐야 오크 둘 정도? 궁수 또한 여헌터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지만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래도 상섭이 사라진 던전이었으니.
"역시 합류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알아서 오겠죠."
"아무리 그래도 던전인데."
남자 헌터와 궁수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걸 보던 여헌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 참~ 말 많으시네? 그럼 가시던가요. 어차피 길 안내도 끝났잖아요? 사실 그쪽이 징징거릴 처지는 아니죠."
"누님!"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코웃음 치며 비꼬는 여성 헌터의 말에 궁수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자신의 말을 이어간다.
"아니~ 쪽팔리지도 않아요? 돈지랄해서 선점해놓고 나중에 하는 말이 저희 친구가 없어졌어요~ 찾아주세요~ 그 말 들은 우리 기분은 상상이 가요? 세상에. 상도덕도 없나? 박탈감 느끼는 걸 떠나서 어이가 없던데요."
"……."
"씨발. 개 좆같았다고요. 알아들어요? 원래 우리 클랜이 이 던전 먹는 거였는데. 몰래 침 발라놓고 이젠 클랜원 찾는답시고 우리랑 같이 들어온 거잖아요. 내 말 틀려요?"
"……."
"아. 누님. 왜 그러십니까?"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남자 헌터가 여성 헌터를 급히 말렸지만, 궁수의 눈에는 말리는 시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놔 봐. 할 말은 해야지. 왜요? 꼴에 열은 받나 보네? 근데 쪽팔린 줄은 알랑가모르겠네?"
"그건 저희가."
"입 다물어요. 선점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세 명이 들어갔다가 두 명으로 나온 등신 새끼가 어딜 입을 열어요? 돈 쳐먹은 대표 클랜은 물론이거니와 난 사실 이걸 허락한 우리 클랜장님한테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에요. 근데 그걸 부탁한 그쪽 클랜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말 다 했습니까?"
"아뇨. 아직 덜 했는데요? 다시 말해줘요? 꼬우면 꺼지라니까? 사실 난 그쪽이 길 안내하겠다는 것도 싫었다고요."
궁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한참 숨을 골랐지만, 결국 고개를 숙여야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징징거리지 마요. 내 말 알아듣죠?"
"…조심하겠습니다."
이미 일행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6명의 헌터에서 1명을 깔아보는 5명으로.
'시발. 그 때 그 자식 말대로 찾으러 갔어야했어.'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역지사지로 자신이 저들이었다 해도 저리 말했으리라. 반박할 거리가 없어진 궁수는 이를 악물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깊은 곳에서 오크 두 마리를 만났지만, 무리 없이 처치했고.
"고작 이 정도 던전에서… 쯧."
구시렁 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마침내 던전의 심층부에 다다랐을 때. 커다란 문, 영락없는 보스 방이었다.
"자. 여기서 후발조랑 합류할 거예요. 그쪽 클랜 헌터분을 찾았을지는 모르겠는데. 못 찾았다고 해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언짢은 표정으로 여성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
"상섭이 형이 사실 먼저 나간 건 아니겠죠?"
클랜원의 말에 다른 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 그럼 클랜에서 연락 왔겠지."
"진짜 희한하네. 원래 죽었어도 시체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텐데…"
"어허. 그거 말도 참. 말이 씨가 된다잖아."
"아. 죄송합니다. 근데 이제 합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시간 많이 됐다. 어차피 찾아볼 만큼은 찾아본 것 같은데… 어쩌겠어. 인제 그만 합류하자고."
전사의 표정은 심란했지만, 시계는 합류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상섭이도 상섭이지만, 던전도 클리어 해야지. 우리도 심정이야 같지만, 헌터로서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냐."
"…휴. 알겠습니다."
달래는 선배 헌터의 말에 간신히 납득한 전사는 발길을 돌렸다.
"그때, 들어가는 게 나았을까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네가 안 것도 아니고. 들어갔으면 너네까지 어떻게 됐을지 몰라."
과연 이게 정답이었을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이 심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쩝."
복잡한 길이었지만, 먼저 움직인 선발조가 남긴 표식을 따라 합류할 수 있었다.
"조금 늦었네요?"
선두에 선 여헌터의 말에 선배 헌터가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보스는 확인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어깨를 으쓱이는 여성 헌터. 굳게 닫힌 보스 방. 미궁형 던전에선 드문 것도 아니었기에 선배 헌터는 알겠다고 답하고 귀를 가져다 댔다.
"어머. 청각 스킬이라도 가지고 계시나 봐요?"
"E등급이오."
"아~ 네. 그래서 들리세요?"
"글쎄…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일단 열어봅시다. 돌아갈 거 아니면 클리어는 해야 할 거 아뇨? 뾰족한 방법 있소?"
"없죠."
둘은 잠시 일행을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다. 궁수는 여성 헌터의 클랜에서 자신의 클랜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섭이는?"
"아니, 못 찾았어."
"…왠지 그럴 것 같더라."
"자. 엽시다."
거대한 미궁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온통 하얀 실로 가득한 방이었다.
"이거…"
여성 헌터를 누님이라 불렀던 이가 거미줄에 손을 가져다댄 순간, 활짝 열려있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쾅! 하고 닫혔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한 그 짧은 순간,
"으아아악!"
거미줄을 만졌던 헌터가 끌려가고 있었다.
"아라네아?!"
"지태야! 김지태!"
"거미 몬스터잖아? 문은요? 문은 안 열립니까?"
"등신아! 보스 방에서 어떻게 나가! 빨리 전투 준비나 해!"
다급한 여헌터의 말에 모두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시작부터 한 명이 당했다. 1 vs 9. 던전의 주인, 아라네아를 상대하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결국 그들은 보스 방까지 가는 동안 구상섭의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평온한 던전행. 지난 이틀간 대부분 몬스터들은 내가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있던 몬스터들도 저들 몰래 처리했고.
'…이런 몬스터들이 헌터들을 어떻게 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사실 오크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기는 했지만, 어차피 경험치도 오르지 않는 데 싸울 필요도 없고 무리하진 않았지만. 남은 오크들까지 모두 쓰러뜨리고, 결국 합류한 헌터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겠지.
'아마도 보스가…'
문 너머의 기척을 아무리 감지하려 해봐도 느껴지지 않는다. 헌터들이 힘차게 문을 여는 순간,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그들은 볼 수 없었겠지만, 나는 보았다.
'천장 위에…!'
커다란 거미가 있다. 방 전체를 뒤덮은 거미줄 사이로 붉은 여덟 개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난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에게 염탐을 사용했다.
[미궁의 거미(아라네아)]
[체장 6.32m] [체고 2.61m] [체중 940kg]
[힘 325] [민첩 438] [체력 346] [마력 244]
'최악이다.'
덩치에 비해 체중은 얼마 나가지 않았지만, 그만큼 가볍다는 소리였다. 그 증거가 400을 초과하는 민첩. 거기에 더해 244나 되는 마력은… 여태까지 만난 그 어떤 몬스터보다 강하다. 지리산의 그 괴물 늑대보다 아라네아 쪽이 훨씬 강했다.
'…헌터들이 저걸 이길 수 있을까?'
전우택이나 홍유리라면 모를까 이들이 아라네아를 이길 수 있을까?
[유아현(인간)]
[신장 172.1cm] [체중 53.9kg]
[힘 228] [민첩 256] [체력 252] [마력 196]
[박무택(인간)]
[신장 174.9cm] [체중 70.1kg]
[힘 222] [민첩 234] [체력 261] [마력 189]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여성 헌터와 중년 헌터의 스테이터스조차 모든 방면에서 아라네아에게 한참 뒤처진다. 보스와 헌터의 스테이터스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쾅! 하고 문이 닫혀가는 순간, 아라네아와 눈이 마주쳤다.
'시발…'
놈은 내 은신을 꿰뚫어보고 있다. 이걸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문이 닫혀간다. 그냥 이대로 던전을 나가면 살 수 있다. 업은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다. 문이 닫히는 속도는 빨랐고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에라. 모르겠다!'
스킬을 동원해 닫히는 문 틈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들어왔고. 그 사이, 거미줄을 건드린 얼빠진 헌터가 끌려 올라갔다.
"으아아악!"
비명을 시작으로 다들 무기를 쥐었다. 긴박한 와중이라 은신 중인 나를 헌터들이 알아보는 일은 없었지만.
'제기랄.'
시작부터 한 명이 죽었다. 최악의 시작이었고,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라네아는 여덟 개나 되는 붉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중 몇 개의 눈이 나를 주시했다.
'아. 들어오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따라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