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17. 던전의 주인 아라네아 (2)
하얀 방.
아니, 하얀 실이 가득한 방. 1t에 가까운 아라네아는 얇은 줄에 잘도 매달려있었다.
'그만큼 거미줄이 튼튼하다는 소리겠지.'
까득- 까드득- 콰득!
끌려간 헌터의 머리가 분리됐고, 아라네아의 이빨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거미줄을 붉게 물들였다. 부정할 수 없는 죽음. 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죽은 헌터의 동료로 보이는 창을 쥔 남자였다.
"이, 이런 씹!"
그는 거미줄 사이를 재주 좋게 뛰어올랐다. 그러나― 거미줄은 모두 놈의 영역. 다시 말해 이 '하얀 방' 안의 모든 공간이 아라네아의 손이 닿는 곳이었다.
"안 돼!"
여성 헌터― 유아현이 활에 시위를 걸었다. 재빠른 움직임이었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아라네아의 앞발이 당겨짐과 동시에 거미줄을 타고 오르던 헌터가 미끄러진다. 발판이었던 거미줄은 순식간에 창을 쥔 헌터를 휘감았다.
"끄윽?!"
창을 뻗어 저항하는 헌터. 아주 조그마한 틈을 남기고 완전히 감싸이기 전에 여성 헌터의 화살이 거미줄이 한데 모인 연결점 적중했다. 하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겨지면서 거미줄이 조여들었다.
"끄아아악!"
크게 비명을 지르는 헌터. 뒤늦게 궁수들이 화살을 쏘려 했지만, 중년 헌터가 크게 소리쳤다.
"안 돼! 못 끊을 거면 아예 쏘지를 마시오! 놈은 아라네아입니다. 적정 난이도 B- 의 괴물이라고!"
적정 난이도 B-. 즉, 단독으로 토벌하려면 B클래스의 헌터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는 무어라 더 소리쳤지만, 듣지 못했다.
'―어차피 여기서 죽으면 끝이야.'
망설이지 않는다. 구해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 나와 헌터들의 공동전선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리고 동맹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뻗어야 했다.
'나까지 적이라고 인지하면 곤란한데.'
당장 토벌해야 할 몬스터가 아니라, 일단 공동 전선을 펼치는 적의 적인 동료라고 생각하게끔. 창을 쥔 헌터가 완전히 감싸인 거미줄까지 도달하는 데 2초― 아라네아는 처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움직이자마자 견제했지만.
'쉬울 줄 알고!'
놈이 나를 주시하는 것처럼, 나 또한 놈을 주시했다.
간파와 직감이 거미줄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려주었다. 리듬을 타듯, 파도를 타듯 흔들리는 실을 타고 단숨에 도착한 나는 이빨을 변화시켰다.
'잘라내야 해!'
자르고 끊어야 한다. 그에 걸맞은 형태로 변한다. 얇고 촘촘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마치 톱날 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곧바로 거미줄을 물어뜯었다.
'질겨!'
힘 123에 경화까지 더했는데 도무지 잘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마력까지 불어넣은 다음에야 거미줄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르자―
"씨발. 보스 방에 몬스터가 둘?"
―제아무리 D등급 은신이라 해도 헌터들의 인지를 피할 순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헌터들의 시선을 받으며 재빨리 거미줄을 끊어내고 갇힌 헌터를 꺼냈다.
"허흑! 어흑! 푸흐헉!"
거미줄에 숨이 막혔던 건지 목을 감싸 쥐며 기침했지만, 기다려 줄 시간이 없다. 창과 함께 단숨에 저 아래로 집어 던졌다.
"떠, 떨어진다! 지훈이 잡아! 잡으라고!"
10m 높이에서 던진 거지만, 알아서 받을 거라 믿는다. 무엇보다 그걸 보고 있을 여유는 없다. 아라네아는 마치 거미줄 그 자체가 마리오네트인 것처럼, 인형사처럼 유려하게 실을 조종했고― 사선에서 그리고 사방에서 거미줄이 옥죄어왔다.
'……!'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방안을 가득 메운 거미줄을 조종할 수 있는 걸까? 마력의 힘일까? 아니면 아라네아라는 종족 자체의 힘일까?
'빈 곳은?'
없다. 생각하는 와중에 팔방이 실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일순, 아주 작은 틈이 생겼다.
'함정?'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가야한다! 내 본질은 슬라임. 아주 조그마한 그 틈새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약 1초 후, 거미줄은 한데 뭉쳐 서로를 밀쳤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질긴 아라네라의 거미줄에 잡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됐을까?
'즉사…'
"지금 뭘 한 거요! 왜 저 늑대를!"
중년 헌터가 유아현에게 따져 묻는 소리가 내 착지음에 묻혔다. 한 손에 활을 쥔 모습. 아마 그녀가 거미줄의 연결점을 쏜 게 아닐까.
"……."
"……."
"으으음!"
나와 그들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뒤이어 따라오는 아라네아의 위협에 우리는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어찌 되었건 서로에게 더 위협적인 상대가 있었으니. 인간은 공동의 적 앞에서 손을 잡는 법이었다.
'나야 몬스터기는 하지만.'
"저 워그는 나중에. 그것보다 지금은 아라네아가 급하다고요. 저거, 제대로 아는 사람 있어요?"
"존나 빠르고 거미줄 잘 쓰는…"
"그건 다 알고! 좀 다른 거 없어요?!"
"불을 써 보는 건 어때요?"
전사의 말에 유아현은 혀를 찼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지 손톱으로 화살촉을 긁었다. 화살촉이 가연물인 것도 아니고 화약이 묻은 것도 아닌데 끝부분이 타올랐다.
'마력?'
마술에서나 볼 법한 속임수를 구현하기 위해 마력을 쓰다니… 아이러니하네.
"설마 그걸 그대로 쏠 셈이오?"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입꼬리를 비튼 유아현은 화살대를 쥐었다. 아라네아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유유히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물결치는 거미줄이 소리 없이 공간을 잠식해왔다.
'빨라!'
이전보다 빨라진 속도. 아라네아도 조금은 진심이라는 소리였다. 그 어떤 헌터도 감히 실의 파도를 막아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몰려진다.
'몰이를?'
당하고 있다. 뛰어난 양치기견처럼 우리는 방의 한구석으로 내몰렸다. 그 사이, 유아현이 쥔 화살대가 거미줄에 닿은 순간, 거미줄 한 부분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나, 연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가 염려했던 건 저 연기겠지. 소매로 입을 가리지만 상상 이상으로 독한 모양이었다. 불을 붙인다면 거미줄을 다 태우기도 전에 질식할 게 뻔했다.
"불은… 못 써먹겠네. 망할."
방금 구했던 창을 쥔 헌터가 다가오는 거미줄을 잘랐다. 보아하니 마력을 담은 모양이었다.
'일일이 마력을 쓰지 않으면 거미줄도 어쩌지 못한다니…'
새삼 격의 차이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놈의 가장 큰 장기인 민첩은 사용하지도 않은 상태. 놈은 제자리에서 우리를 농락하고 있었다.
"으어억!"
또 한 명이 끌려 올라간다. 미리 보고 있었던 내가 실을 끊자 아라네아의 눈알들이 기분 나쁘게 회전했다.
'이걸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특별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놈이 나를 주시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스트레스였다. 무엇보다 이 방을 가득 매운 거미줄을 일일이 끊어내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뾰족한 수가 필요했다.
'저것만 끊을 수 있다면…'
아까 유아현이 쏘았던 연결점.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거미줄이 한데 뭉치는 공간. 실이라는 것은 이어져야 의미를 갖는 것이니, 제아무리 놈이라 한들 끊어진 실을 사용할 순 없을 터. 연결점을 목표로 뛰어올랐다.
"몰렸어!"
"틀어막아! 어떻게든 막으라고!"
물러난 끝에 결국 궁지에 몰린 헌터들. 중년 헌터를 필두로 방패가 이어졌다.
"씨발… 왜 이딴 던전에 아라네아가 있는 거냐고!"
"말할 시간에 막으라고! 이 등신아!"
파도는 흙에 스며들어 사라지지만, 놈의 실은 그렇지 않다. 겹치고 겹쳐 중량이 가중되자 그들의 발이 바닥을 끌었다. 마력으로 거미줄을 잘라내봤자 밀려드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전사들의 발이 바닥에 끌리자 궁수들이 그들의 등을 있는 힘껏 밀었다.
"버텨!"
"씹…!"
유아현은 선두에 선 전사의 머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거미줄 사이로 착지한 그녀의 발이 실 사이를 파고든다. 당연 빠져서 갇힐 거라 생각했지만, 암벽을 등반하듯 거미줄을 쥐더니 손발에 마력을 둘러 출렁이는 와중에도 용케 중심을 잡았다.
'대단한데.'
구상섭도 그랬지만 헌터들은 하나같이 집념이 있다. 그녀의 움직임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거미줄이 쇄도한다. 직감과 간파로 읽어 아슬아슬하게 피한 순간, 우연히 아라네아의 소름 돋는 눈과 마주쳤다.
'―녀석이 움직이기 전에.'
놈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스킬들을 겹쳐본들 소용없다. 그 전에 어떻게 거미줄만이라도 처리해야 한다. 놈이 우리를 얕보는 사이에.
"옆으로 거미줄! 틀어막으아아아아!"
진형이 붕괴한다. 압박을 견디지 못해 방패 사이가 좁아지고 안그래도 좁은 틈새가 아침의 지하철처럼 조여든다. 저 아래의 헌터들이 자력구제를 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키야아아악!"
아라네아의 여덟 눈, 그 모두가 나를 주시하자 잠깐 움직임이 경직된 듯한 착각― 아니, 정말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처음 겪는 현상이었지만, 알고 있다. 마안(魔眼). 그 여덟 개의 눈 하나하나가 마안의 조각이었다. 발동 조건은 아마 여덟 눈 모두가 주시하는 것.
'마비? 석화? 경직?'
어떤 종류의 마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가진 244라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나를 멈췄다.
[모든 피해 감소(D)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피해 감소(D) Lv.3 -> 모든 피해 감소(D) Lv.4]
모든 피해 감소는 E등급 시절 마법 피해 감소와 물리 피해 감소가 통합되어 상승한 것. 마안의 위력이 감소한다. 거기에 더해 94의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리자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제기랄!'
덕분에 마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마력 재생(D)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남은 스킬 포인트 4]
우물에서 지하수가 솟듯 마력이 조금씩 차오른다. 정신 고갈의 영향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거미줄을 타고 한참을 오른 결과, 마침내 연결점까지 도착했다. 아라네아는 마안이 통하지 않자 거미줄을 조종해 나를 방해했다. 하지만 같은 수에 두 번 당해줄 만큼 멍청하진 않다.
"지금이다! 밀어내애애애애애!"
시선과 실이 내게 집중되자 자연스레 아래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전사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실의 포위망을 뚫는다. 곧바로 궁수들의 화살 세례가 이어져 미궁의 거미를 노렸다.
"아현 누님을 도와! 아라네아를 견제하라고!"
일제히 쏘아진 화살들. 아라네아는 실로 장막을 쳐 막았지만, 이번엔 막히지 않았다. 마력이 담긴 화살은 더 이상 화살이라고 불릴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대물저격총― 아니, 그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화살을 아라네아는 가볍게 피했다.
"다시 장전! 전사들은 밀집해!"
중년 헌터의 지시에 따라 헌터들이 하나가 되어 몰려드는 거미줄을 막는다. 강한 압력에 방패가 찌그러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이 기댈 거라고는 그 외엔 없었으니.
"끄드드득…!"
연결점의 실들이 상상 이상으로 질겼다. 잠깐 회복된 마력을 다시 사용해야 했고 덕분에 현기증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연결점이 끊어지자 방을 뒤덮었던 하얀 실들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방패로 막아! 아냐, 피해! 피해야 돼! 피하라고!"
쿠광!
한 박자 늦게 실뭉치가 추락해 바닥을 크게 울리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만약 막았다면? 저기에 깔렸다면? 중년 헌터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한 번의 잘못된 지시가 모두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다.
아직 모든 실이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아라네아의 다리에 직접 연결되지 않은 실들은 대부분 떨어졌다봐도 무방했다. 이제 한 숨 돌리겠다 생각한 중년 헌터가 다시 상황을 살폈다.
'저 미친!'
유아현이 아라네아에게 활을 겨눴다. 연결점으로 향하던 게 아니었다. 여헌터는 처음부터 아라네아를 노리고 있었다!
"……!"
"안 돼! 돌아와! 돌아오라고!"
중년 헌터의 말대로였다. 미친 짓이다. 자살행위다. 이성을 잃은 건가? 아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
'아라네아는 지금까지 장난친 것뿐이라고!'
여태까지 놈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인형 놀이를 했을 뿐. 놈의 진짜 무서움은 실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438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민첩에 있었다.
"죽여주겠어!"
유아현이 시위를 당긴다. 마치 교과서나 올림픽에서나 볼 법한 교본적인 자세. 화살에 포함된 200에 가까운 그녀의 마력이 모든 것을 꿰뚫을 기세로 나아갔지만, 실과 부딪힌 순간 허망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녀가 몰랐던 것.
그건 바로 아라네아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살이 막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200에 가까운 마력? 아라네아의 마력은 그녀의 마력을 훨씬 상회한다. 화살은 마력을 담아야지만 거미줄을 관통할 수 있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아라네아가 실에 마력을 담은 순간, 뚫을 방법은 없다는 소리였다.
'병신같이!'
궁수들의 화살이 실을 뚫었을 때, 아라네아는 마력이 없다고 지레짐작한 게 아닐까.
스스스― 소름 돋는 거미의 여덟 눈이 보복하듯 여성 헌터를 직시한 순간, 그녀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뒤늦게 헌터들이 그녀를 구하려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진작 달리고 있던 나를 제외하면.
"컥?!"
놈이 움직이기 전에 유아현을 물어 던졌다. 중년 헌터가 그녀를 받아들자마자 경화를 사용했다.
'피할 수 없어!'
직감과 간파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가지고도 어떻게도 할 수 없다. 이미 지척에 있다. 이 공격만은 피할 수 없다!
"……!"
커다란 충격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아라네아와 부딪힌 것이다. 비록 고통은 없다지만 정신 고갈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건지 도무지 균형을 잡을 수 없다. 탄력도 소용없다! 부딪힌다―!
'끄으으윽!'
이 속도로 벽에 부딪힌다면 그 충격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도대체 체면적의 몇 퍼센트를 잃는 거지? 설마 즉사하는 건 아니겠지?
"이이익!"
그렇게 충돌하기 직전, 누군가가 나를 받았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안간힘을 쓰며 바닥을 몇 번이나 긁고 벽과 부딪히기 직전에 멈추어 섰다.
"…후우우우!"
돌아보니 아까 구했던 창을 쥔 헌터였다.
"씨발. 살다 살다 몬스터도 구해보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은 헌터가 힘겹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미 다리가 풀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후우우!"
"막아! 틈 벌리지 말고! 화살 장전해!"
나를 들이받은 걸 시작으로 아라네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첩 438. 직감과 간파로 미리 보아도 반응하기 어려운 속도였다. 헌터들은 하나하나 파죽지세로 당해갔다.
"컥!"
어떤 헌터는 방패와 함께 아라네아의 앞발에 꿰뚫렸고.
"이이익!"
이름 모를 헌터의 머리는 거미의 이빨에 우두둑 뜯겨나갔다.
'1 대 7…'
남은 헌터는 일곱. 아니, 창을 쥔 헌터가 여기 있으니 1 대 6이었다. 그 사이 유아현의 화살이 적중. 두터운 아라네아의 털을 뚫고 몸통을 꿰뚫었지만 오히려 거미 보스의 화만 돋구고 말았다.
"후퇴 밀집! 후퇴! 후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뒤로 물러나 벽을 등진다. 중년 헌터와 전사들이 방패를 들고 사수했고, 궁수들이 그들을 엄호한다. 보통이라면 통했을 것이다― 상대가 보통이 아니었을 뿐.
"뚫리지 마!"
중년 헌터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외침을 토했다. 그러나 그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사가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중년 헌터가 지원했지만, 순식간에 대형이 뚫리고 말았다. 거미의 목표는 유아현이었다. 활을 쥔 그녀가 허망하게 올려다보았다.
"씨, 씨발! 망할 거미 새끼야아아아!"
"안 돼! 돌아와! 돌아오라고!"
그 순간, 전사가 달려들었다. 어깨의 견장으로 숄더 차지를 시도하지만, 힘과 중량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은 아라네아에게 순식간에 붙들리고 만다. 그는 재빨리 허리춤의 파우치에서 단거리 이동 주문서를 꺼내 찢었지만.
"으어, 끅…"
그것보다 빠르게 거미가 전사를 찢어발겼다. 처참한 시체만이 뒤늦게 빛에 휩싸여 이동했고, 바닥을 피로 물들였다.
'아.'
동물들의 것과는 다른 혈향이 미궁의 방을 가득 채운다. 그 사이에 셋이 죽었다. 1 vs 5. 승산? 애초부터 그런 게 있었나? 처음부터 승산 같은 게 있기는 있었나? 아라네아는 강했다. 처음부터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이들을 말렸더라면.
아라네아가 강하다는 걸. 유일하게 아라네아를 보았던 나는 알고 있었는데. 나만은 알고 있었는데.
―어쩌면, 내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게 아닐까.
"뭐 해! 기껏 구해놨더니… 후우욱!"
상념이 깨졌다. 헌터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고함 질렀다.
"가! 가서 싸우라고! 뭘. 멀뚱히. 쳐다보고, 있어?! 이 괴물 새끼야!"
분명 부러졌을 갈비뼈를 쥐고 창백한 안색으로 등을 떠밀었다. 미는 손에 힘은 남아있지 않고 터덜터덜 걷는 발걸음은 창에 의지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만큼 위태로웠다.
"비켜! 나는. 후우욱! 싸울, 거니까."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유아현을 밀치고 중년 헌터가 아라네아의 일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헌터가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허망하게 막힌다. 거미의 대낫 같은 앞발이 휘둘러지려는 순간, 창을 내팽개친 그는 미친 듯 달렸다.
―촤악!
방금까지 내게 소리치던 헌터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갈라져 고꾸라졌다. 그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싸운다고 소리쳤던, 싸우라고 소리치던 헌터는 고작 유아현의 죽음을 몇 초 뒤로 미뤘을 뿐이다. 과연 그 죽음에 의미는 있었는가?
그렇게 죽을 운명이라면 그가 살아온 인생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지훈아! 서지훈! 서지훈!"
"정신 차리시오! 그는 이미 죽었단 말이오!"
"장전! 재장전!"
아라네아의 붉은 눈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중 몇 개의 눈이 나를 향하다가, 이젠 그럴 가치도 없다는 듯 헌터들을 주시했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이제 너 따위는 관심도 없다고.
'……!'
그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마치 무언가가 강하게 등을 떠미는 듯.
두근― 두근―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있지도 않은 맥박이, 있지도 않은 심장이 고동쳤다. 바닥난 마력이 단숨에 차올라 우물을 가득 채웠다. 정신 고갈로 어지러웠던 몸이 균형을 찾았다.
[극기 스테이터스가…]
그의 죽음에 의미가 있었을까. 죽어간 이들은 죽어야만했을까.
[멸망 확률…]
모르겠다.
하지만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건.
죽을 위기를 계속해서 맞이하는 건.
또 누군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건.
[0.03%의 업을…]
―이젠 사양이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9 -> Lv.20]
[진화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미약한 육감(F)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육감(F) Lv.9 -> 미약한 육감(F) Lv.10]
[미약한 육감(F)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육감(F) Lv.10 -> 약한 육감(E) Lv.1]
[마랑의 길(魔狼)을 선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