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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1화 (31/407)

〈 31화 〉 #18 세 번째 진화

유아현은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직감했다. 내가 뭐라고. 사실 지방에서야 C클래스라고 띄워주지만, 상위 클랜에선 널린 게 C클래스였다. 이름 모를 전사가, 그리고 같은 클랜이었던 지훈이가 대신 죽어갈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시렸다.

내게 그럴 가치가 있었는가― 하고 말이다.

'큭.'

비참한 상황을 한탄하듯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조였을까. 실소였을까. 마력도 진작에 바닥났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시발.'

어쩐지 재수가 없더라니.

새옹지마? 개소리였다. 불행은 불행일 뿐 결코 행운이 되지 않는다. 겨울 온 뒤에는 얼어붙은 땅만 남을 뿐― 그리고 이제 내 차례. 아라네아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박물관에서나 봤던 전화기의 다이얼처럼 빙그르르 돌았다. 중년의 아저씨가 힘겹게 막아줬지만, 방패가 깨졌다. 저 아저씨는 싸울 무기를 잃은 것이다. 아라네아는 나와 아저씨를 번갈아보았다.

분명 누굴 죽일지 고르고 있다.

'……시발.'

마지막까지 개같네.

죽일 수 없다는 게 한이었다. 그럼 먼저 죽기라도 하자. 으드득 이를 갈며 유아현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살려줘서, 고작 몇 초 더 살겠다고 물러났다가 다른 누군가가 먼저 죽어가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최후의 최후, 여헌터는 눈을 감았다. 예리한 낫이 곧 자신을 양단하리라― 그러나 아라네아는 끝내 그녀의 생명을 거두지 못했다.

'……?'

왜, 왜 죽이지 않지? 또 누가 나를 살린 건가? 그 아저씨가? 또 구해졌다고? 비참해진 유아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눈꺼풀을 열었다. 보지도 않은 광경이 상상됐고 충혈된 그녀의 눈동자 위로 눈물이 코팅된다. 그러나 눈에 비친 광경은 그녀의 상상과는 다른 현실을 비추었다.

"아."

거기에 있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단지― 보다 이질적인 괴물일 뿐이었다.

***

진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원래 있었던 두 갈래 길. 가로막는 울타리를 넘어서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진화할 때마다 보았던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언가, 그 편린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업(業).'

다만 그것뿐만은 아닐 터.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의 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가까스로 엿보았을 뿐,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금의 내가 알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이해를 넘어서있다.

[마랑의 길 : 워그의 상위종으로 진화한다]

시스템은 마랑의 길을 택하면 워그의 상위종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은연중에, 혹시라도 마랑의 길을 선택하면 괴물 늑대― 즉, 하이 워그(High Warg)로 진화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달리 내가 아는 워그의 상위종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내 예상 밖이었다는 소리다.

[산의 폭군(스컬 울프) Lv.1]

그 이름 그대로, 흑색의 털빛을 가진 하얀 두개골이 드러난 늑대. 대지를 박찼다. 이전과 달리 부정형이 아닌 진짜 육체를 가지고 피가 흐르는 몸이 되었다. 촉각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실제 생생한 다리의 감각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강해진 건가?'

부정형으로서의 특성을 모두 버렸다. 새로운 종으로 도약했지만 의문이었다.

나는 강해진 게 맞는가. 과연 아라네아와 맞설 수 있을까.

'가! 가서 싸우라고!'

죽어간 헌터의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그래. 싸워야지― 생각할 여유는 없으니까.

전신의 근섬유 하나하나가 긴장했다. 여전히 놈은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기만인가? 그게 아니면 교만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물어뜯는다. 오직 그것 하나만을 생각했다.

중년 헌터의 방패가 산산이 부서졌고 그와 동시에 힘을 견디지 못해 나가떨어진다. 뒤이어 아라네아는 여헌터의 목을 취할 셈으로 대번에 사선을 갈랐다.

까드드드드득!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이 풀려난 순간 세포 하나하나가 탄력을 발했다. 질주하는 발이 대지를 박찼고, 놈에게 닿았다. 찰나의 순간, 앞발의 대낫이 유아현의 숨통을 끊기 직전, 녀석의 앞다리 마디 사이를 물어뜯었다. 가장 약한 부분을 물어뜯긴 놈은 크게 당황했다. 마력까지 더해 물어뜯었는데 질기다― 하지만 충분하다.

[악식(D) Lv.4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악식(D) Lv.4 -> 악식(D) Lv.5]

지난 이틀간, 몬스터들을 먹어 치우며 숙련도가 올랐던 악식의 레벨이 또 한 번 상승한다. 5레벨이 된 악식은 더 흉악하게 그 위용을 드러냈다.

"스스슷!"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치는 아라네아. 낫처럼 예리했던 앞발은 체액을 줄줄 흘리며 다리와 떨어졌다.

'재생 스킬은?'

가지고 있지 않다. 놈의 다리가 재생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크르르?!"

낮은 울음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진화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느낌. 성대가 울린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전까지는 미각이 없어 몰랐는데, 부정형이 아닌 육체가 생긴 뒤에는 미각이 발현됐다. ―두개골뿐인 머리이기는 했지만.

'망할.'

입에 물고 있던 다리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토할 것 같은 맛에 퉤하고 뱉었다. 나뒹굴어진 자신의 다리를 보던 아라네아는 여덟 개의 눈으로 나를 탐색한다.

"스, 스컬 울프? 저게 왜 여기…"

"C- 클래스 몬스터 아니에요?"

"워그가 아니라 스컬 울프였다고?"

웅성거리는 헌터들의 말소리. 중년 헌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 오랜 기간 헌터로 활동하며 길러온 안목은 눈앞의 늑대를 분명 스컬 울프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상하다.

'스컬 울프라고?'

이 자리에서 진화한 건지. 아니면 힘을 숨기고 있었던지. 백번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스컬 울프? 눈앞의 저 몬스터는 정녕 스컬 울프란 말인가?

"……."

덩치는 작다. 처음에는 덜 자란 아성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까지 저 몬스터의 활약을 떠올려보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성숙한 스컬 울프가 아라네아의 앞발을 물어뜯을 수 있다고?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이상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장내를 지배하는 이 위압감은 대체 무엇인가? 힘의 총량은 아라네아가 위겠지만,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스컬 울프에게는 힘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호재다!'

적어도 지금은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다. 몬스터를 어디까지 신용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 적의 적이 강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겠다고 알게 모르게 중년 헌터가 기뻐하는 사이 여헌터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남은 화살은 고작 네 발. 하지만 세 번이나 구함 받은 목숨이다. 방금처럼 포기하고 내다 버릴 순 없지 않을까. 이젠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유아현은 입안을 감도는 비릿한 핏물을 집어삼켰다. 정말 작은 가능성이지만, 여헌터는 거기에 매달려야 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활을 쥐었다. 두 사람을 시작으로, 헌터들에게 반격의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들을 등 뒤에 두고 아라네아에게 이를 드러냈다.

***

거미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눈이 놓칠뻔한 존재감이 흐릿했던 늑대. 그런 존재는 처음이라 흥미로웠고 자신의 실을 망가뜨린 귀찮은 존재였지만, 딱 거기까지. 거미가 늑대에게 내린 평가는 '아둔하고 나약한' 그리고 '기회를 엿보는' 짐승에 불과했다. 그리고 본디 짐승이라면 더 강한 생물에게는 덤비지 않는 법. 거미는 나가떨어진 늑대가 죽지 않았더라도 덤비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래서 시선을 거뒀고, 관심을 껐다.

―그게 실수였다.

지레짐작한 대가는 크게 치러야했다.

"크르르륵!"

나약했던 늑대는 새로운 탈을 쓰고 자신의 자랑이었던 앞발을 물어뜯었다. 거미는 늑대의 사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덤비는 거지? 왜 물러나지 않는 거지? 왜 멈추지 않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왜 늑대를 죽일 수 없는가?

귀찮은 화살이 날아오자 남아있던 거미줄로 방어했다. 그 사이 늑대가 파고들었고, 떼어내려 하면 인간들이 지원했다.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늑대는 몇 번이나 막아섰고, 놈을 무시하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래. 고작 그것뿐인데.

"키에에에엑!"

건방진 암컷 인간이 바닥을 굴렀다. 그 위로 자신의 거미줄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아라네아의 방적돌기에 화살이 적중했다. 쥐꼬리만하게 담긴 마력. 그에 아픔을 느낀 거미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죄다 죽여버리겠어.

거미는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 다소 무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

내 속도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아라네아의 절반이었다.

실제 스테이터스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겠지. 하지만 스킬의 보정과 헌터들의 지원이 가까스로 아라네아와 맞서는 걸 가능케했다.

"산개! 장전!"

전사들은 궁수들의 떨어진 화살을 모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살은 진작 바닥났을 터. 바닥을 뒹구는 포션 병들이 깨져서 유리 조각이 반짝거렸다.

"키에에엑!"

사각으로 숨어드는 거미줄을 감지하고 자세를 낮췄다. 민첩 438은 놈의 속도일 뿐, 거미줄의 속도가 아니다. 아라네아는 분노한 듯 앞다리를 들어올렸다. 하나 남은 대낫에 빛이 반사됐다. 유난히 예리해 보이는 낫.

'…하나 뿐이라면!'

제아무리 438의 민첩이라 한들, 고작 하나라면 직감과 간파로 미리 읽어 피할 수 있다. 과감하게 파고들어 놈의 동체 아래로 들어갔다. 배 아래로 들어온 나를 떨쳐내고자 아라네아가 몸부림쳤고 물어뜯었다.

콰드득!

살점을 한가득 물어뜯었다. 놈이 뒷발로 몸을 지탱해 들어 올렸다.

"샤아아악!"

놈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송곳 같은 두 번째 쌍의 다리로 나를 찍으려 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건 헌터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소리다.

"지금이다! 쏴!"

궁수들의 화살 끝에 불이 붙었다. 사방이 거미줄 천지였기에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었지만, 바닥으로 거미줄이 내려앉은 지금, 저렇게 명확한 목표가 드러나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438의 민첩을 가지고 있더라도 거미의 신체구조상 뒷발을 들어 올린 채 피할 수는 없다. 드러난 놈의 배에 불화살이 작렬했다.

"끼에에에엑!"

거미는 여태껏 가장 높은 톤의 비명을 질렀다. 찢어진 상처를, 물어뜯은 가죽 아래를 넘실거리며 불태웠다. 체액과 피가 흘러내리기도 전에 타올랐고, 살점이 익어 군내가 났다.

"장전!"

멈추지 않는다. 거미는 계속되는 집중포화를 막기 위해 거미줄을 둘렀다. ―네 번째 다리. 실을 조종하는 그 다리를 물어뜯었다. 자연 장막처럼 둘러졌던 거미줄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이제 물러나면 됐는데 어느샌가 네 번째 다리에 얽힌 거미줄이 내 다리를 휘감았다.

처음부터 함정. 집중포화를 받더라도 놈은 나를 죽일 생각이었던 거다. 438의 민첩과 300이 넘는 힘에 간단히 들어올려진다. 여덟 눈과 마주쳤지만, 바로 마력을 끌어올려 마안을 깨부쉈다. 아주 짧은 경직이었고, 그 사이에도 헌터들의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놈은 그 모두를 감수했다.

그렇게 해도 고작 휘감은 몸이 조금 느슨해졌을 뿐. 이 순간에도 악식을 발휘했지만 놈은 멈추지 않는다. 비수에 찔린 것처럼, 날붙이보다 날카로운 이빨이 가죽을 꿰뚫었다.

"키에엑!"

충분히 느슨해진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미약한 독 내성(F)…]

미약한 독 내성의 숙련도가 미친 듯 차올랐다. 레벨업을 했다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보았을까? 랫 맨의 약품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극독이었다. 이제까지 독이 닿기도 전에 모조리 죽여버렸을 뿐, 놈의 진가는 어쩌면 거미줄이나 민첩이 아닌 독일 지도 모른다.

독니가 박힌 다리가 부풀어 오른다.

'제기랄.'

어쩔 수 없는 선택. 다리를 물어뜯었다.

질겅질겅― 그득, 끄드득! 촤악!

[통각 무효(D)를 획득했습니다]

[해당 스킬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남은 스킬 포인트 1]

고통은 없었지만, 스스로 다리를 자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가 줄줄 흘러 바닥을 물들였다. 약한 재생이 스멀스멀 다리를 복구했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약한 재생(E)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재생(E) Lv.9 -> 약한 재생(E) Lv.10]

[약한 재생(E) Lv.10이 레벨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재생(E) Lv.10 -> 재생(D) Lv.1]

꾸멀꾸멀 피어난 살점이 씨앗이 되어 다리를 재생시킨다. D등급이 된 재생은 찬연하게 그 능력을 발휘했다. 그 사이, 나는 스킬을 점검했다.

[준족(E) Lv.5이 질풍(D) Lv.1에 통합되었습니다]

[질풍(D)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질풍(D) Lv.1 -> 질풍(D) Lv.3]

진화 특전으로 얻은 스킬이 둘―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짧은 사이에 다리가 형태를 이뤘다. 내가 물러난 사이 전황은 좋지 않게 흐른다. 앞다리가 그리고 네 번째 다리가 잘린 데다가 배를 지져진 아라네아는 민첩 438을 완전히 살린 움직임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헌터들은 빛에 휩싸여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었다.

"그르르르―"

나아가자. 멈추지 말고, 절망이었던 거미를 먹어치우자.

바람을 두른 발은 그 이름처럼 질풍이 되었고, 순식간에 대지를 박차고 아라네아를 덮쳤다―!

***

"아."

외마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두가 멍하니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C-. 책정된 등급이 무색한 움직임. 기묘하고 빠르게 아라네아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다. 공격을 읽고 밀어붙이는 수 읽기. 정교함과 광기를 감추지 못하는 괴물의 본능이 결합된― 지금 이 순간, 그들 모두는 아라네아가 아니라 스컬 울프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뭐해요! 등신처럼 서 있기만 할 거예요!?"

번쩍 정신이 든 것처럼 헌터들이 뒤늦게 움직였다. 여헌터는 마지막 한 발 남은 자신의 화살을 쥐고 신중히 거미를 겨냥했다. 굳은살이 터졌고 정신 고갈의 영향으로 현기증이 왔다. 거기에 더해 이 어두운 곳에서 저 재빠른 거미를 맞출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아니, 반드시 맞춰야한다. 이게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한쪽 눈을 감아 조준선을 정렬하고 화살촉의 끝을―

'씨발… 안 보이잖아!'

좀 더, 좀 더 빛이 필요하다.

유아현은 허리춤을 뒤졌지만 단거리 이동 주문서는 진작 사용한 뒤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파우치를 뒤져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신경질적으로 뜯어 집어던졌다. 화살촉 끝에 불을 지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빛이 필요한 건 여기가 아니라 저 멀리. 거미에게 불을 붙여야 한다. 하지만 남은 화살은 딱 한 발. 게다가 남은 마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아니, 진작 드러난 바닥을 포션을 마셔서 억지로 견디고 있을 뿐.

'제기랄.'

그 순간, 화살이 공기를 갈랐다.

거미는 일순 보이는 빛에 눈길을 주었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엉뚱한 곳을 맞추고 주변에 있던 거미줄만 조금 불태웠을 뿐. 결국 화살은 적중하지 않았다.

"뒷일은 부탁…"

눈을 까뒤집고, 궁수가 기절했다. 여헌터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등신 얼간이 주제에…!"

충분하다. 그가 밝힌 불꽃이 이정표가 되었다. 시야는 흐릿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맞출 자신이 있었다.

팽팽히 당겨진 시위. 떨리는 근육. 그러나 뚫을 수 있을까?

"드시오."

"대체 몇 병이나 가져온 거예요?"

"나도 배불러 죽겠소."

중년 헌터의 마지막 남은 포션. 그가 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아주 조금이지만 마력의 잔향이 다시 피어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여헌터는 마지막 한 발의 시위를 놓았다.

***

질풍을 둘러도 다리를 두 짝이나 잃은 녀석의 속도에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438.'

다시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수치. 여기까지 와서 겨우 호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싸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깨고 서로에게 결정타가 될 한방을 준비한다. 놈과 나는 그 순간을 재고 있었다.

'마안만 없었다면.'

계속해서 마력이 소모된다. 그나마 스킬에 의해 마안의 효과가 절감되었지만, 그럼에도 일순의 경직이 죽음을 부른다. 사선을 타고 줄 위에서 뛰노는 두 괴물. 그리고 마침내 그 균형이 깨졌다.

"키에에엑!"

필중의 화살. 저 멀리 활을 놓지 않고 쓰러지는 여헌터의 모습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균형이 깨졌다면, 남은 것은 유린뿐이었다. 다리에 걸린 바람이 마치 동화되듯 변해간다. 나부끼는 바람을 조금씩 잡아먹으며 불씨는 거대한 화염으로 변해갔다.

[잿불(D)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잿불. 진화가 선사한 또 하나의 스킬.

빛이 들지 않는 듯 검은 화염이 질풍을 타고 거세게 타올랐다. 타오르는 질풍을 두르고 대지를 불태우며, 거미줄을 태우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뛰어올랐다.

"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아라네아를 타고 오르며 불태운다. 순식간에 등허리 위로 올라타 크게 턱을 벌렸다.

"크르르르―"

가죽 하나 없는 두개골은 날 것 그대로 녀석을 물었다. 크게 벌려진 턱이 닫히고, 거미의 살점을 와작와작 씹었다. 체액과 피가 엉망으로 섞여 흘러내렸다. 멈추지 않고 머리를 더 들이밀었다. 매 순간, 화염은 발버둥치는 아라네아를 태웠고 악식은 타오른 녀석을 탐욕스레 집어삼켰다. 최후의 저항으로 실을 짜낸 녀석이 천장에 달라 붙으려했다― 어떻게든 떼어내려는 놈에게 절망을 선사하듯, 변화를 사용한다.

"키에에엑! 키에에에에엑!"

나를 데리고 천장에 달라붙은 아라네아가 발악했다. 그러나― 경험한 바 있다.

'그 패턴은 이미 질렸어.'

놈이 아니라 지리산에서. 등허리에 올라탄 적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기억 속― 뱀장어와 검은 늑대를 떠올리며 유유히 착지했다. 내가 떨어지자 놈은 매달린 채 벽과 부딪쳤다. 넘실거리는 화염이 방적돌기까지 집어삼키고 거기서 이어진 실을 불태웠다. 매캐한 연기가 가라앉는다. 그 사이에서, 실 끊어진 거미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탄력(E)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탄력(E) Lv.9 -> 탄력(E) Lv.10]

[탄력(E)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탄력(E) Lv.10 -> 뛰어난 탄력(D) Lv.1]

자세를 낮추고 용수철처럼 팽팽해진 다리는 또 한번 대지를 박찬다.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높게. 더 높게.

떨어지는 놈과 뛰어오른 나는 그 중간 지점에서, 시야를 가린 연기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교차했다. 놈의 여덟 눈에서는 오로지 공포와 두려움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협(F) Lv.6의 숙련도가…]

"크륵."

긴박한 상황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늑대는 추락하는 거미의 숨통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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