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20 전쟁의 신전 잠입!
'아무리 그래도 이걸 열면 들키겠지?'
으리으리하게 거대한 문을 뒤로하고, 신전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비상구가 있는 걸 발견했다.
'화재는 어쩔 수 없지.'
커다란 건물에 비상구가 있는 건 법으로 지정된 것. 다행히 소설 속에서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고민할 것 없이 열쇠 구멍에 발가락을 갖다 댔다.
'변형.'
열쇠 구멍에 맞춰 발톱 모양을 바꾸고 끼릭끼릭 돌리자 문이 열렸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됐나? 안은 벌써 소등한 채 어두컴컴했다. 암시 스킬을 가지고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지만.
'눈치챈 사람은 없고.'
신전 건물 자체가 어지간한 교회보다 컸으니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날이 새고 말거다.
'…명단이 어디 있으려나?'
사무실을 찾아보자. 쪽문에서부터 구석구석을 찾고 주방을 지나서.
'음?'
누군가 다가온다. 기척을 피해 주방 구석에 숨어들자, 곧 그 인물은 냉장고를 뒤적였다. 혹시 들킬까 봐 염탐을 쓰진 않았는데 발소리가 나지 않는 게 그가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곧 그가 사라졌는데 놀랍게도 냉장고가 거의 텅텅 비어있었다. 들고 간 음식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걸 다 먹는다고?'
포식 스킬이라도 갖고 있나? 아무튼, 그가 밖으로 나가고 나도 곧바로 행동을 재개했다.
'사무실이 어디에 있을까?'
여기가 일단 신전이니까, 교회랑 비교해보자면…
'높은 층에 있지는 않을 거야. 신자들도 들러야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후보는 1층 아니면 2층이 유력하다. 은신으로 숨어들어 1층을 찬찬히 살폈다. 하지만 끝까지 다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2층인 모양. 엘리베이터가 보이긴 했지만, 사용하면 들키고 말리라.
'…계단으로 가자.'
넓은 중앙 계단에는 장식품들이 많았는데, 붉은 카펫으로 깔린 계단을 오르면 다시 양옆으로 2층 복도로 이어지는 모양의 계단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진짜 미친 광신도들.'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높이 들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참 기괴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처럼 보이는 칼이었다. 게다가 예수님은 붉은 피눈물을 흘리고 무언가를 부르짖고 있다.
'정신 나갔네.'
내가 종교인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관점으로 볼 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그나마 전쟁의 신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을 알고 있으니 망정이었지. 무엇보다 기괴한 건 높게 든 십자가를 뺏으려는 듯 달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아. 사람이 아니라 좀비인가?
'하여간 빨리 구마준만 찾아서 나가자.'
2층으로 올라왔을 때,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많이 늦은 시간인데 아직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아. 형제님. 지금 오신다고요? 한데 시간이 좀… 많이 늦었습니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 상대방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 거로 보아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음…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신부님께 기별하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려는데 마침 통화가 끝났다. 남자는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중앙 계단을 내려갔다.
'머리도 없는데 왜 긁는담?'
그래도 간지럽나? 아무튼 남자는 날 발견하지 못했다.
'…어두운 곳에서 은신하면 눈치채기 힘든 모양이네.'
[은신(D) Lv.6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은신(D) Lv.7]
악식보다 은신이 먼저 C등급에 도달하게 생겼다. 그야 종일 사용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넓었다.
'규모가 크다 보니까 사무실도 큰가? 찾기 힘들겠는데.'
하지만 분명히 있을 거다. 개인 책상보다 먼저 사무실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찾아보면 분명 나오긴 하겠지만.'
비밀번호가 걸려있겠지. 게다가 소음 때문에 들킬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명 명단을 책으로 만든 것도 있을 거다. 제아무리 전산 기술이 좋다고 해도 책으로 엮은 건 언제나 쓰일 데가 있었으니. 예를 들어 근무 시간을 적어놓는 근퇴부
'…2067. 2068. 2069. 이거다.'
[2069년 출근계]
부서별로 나뉘어 있는 출근계를 찬찬히 넘겼다. 그러나―
'없잖아?'
세 번이나 다시 찾아봐도 구마준의 이름은 없었다.
'아직 잠입하지 않은 건가? 시기가 아닌가?'
다시 명단을 집어넣는 와중. 어떤 책이 눈에 띄었다.
[2069년 1급 신자 등록명부]
'설마?'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명부를 뒤졌다. 명부라기보다는 이력서 같았는데, 이 1급 신자라는 건 전쟁의 신전에 가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일단 전쟁의 신전도 클랜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등록된 신자들이 하나같이 헌터들 뿐이었다.
'이현식… 김적배… 당우진…'
그리고 구마준. 이름과 성별 나이 경력을 비롯해 자세한 것들이 세세하게 적혀있다.
'집 주소까지 있을 줄이야.'
3분 정도 구마준의 명부를 달달 외우고, 다시 책장 틈으로 집어넣었다. 사무실 문도 조심스레 닫고 중앙 계단을 다시 내려가려는 때.
"그래서 신자님이 오고 계시다고요?"
"아. 그래. 뭐가 그리 바쁜 건지 모르겠는데 지금 꼭 신부님을 만나야겠다네?"
"뭐 어쩌겠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종교단체였다. 비록 이런 시간이지만, 입장상 방문객을 거절하기는 뭐 했다. 정말 급한 일이다― 라고 우긴다면 말이다.
"그냥 오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신부님은 괜찮다고 하긴 했거든?"
"그럼 됐죠. 뭐."
구시렁거리던 두 남자가 지나가고, 나는 다시 행동을 재개했다. 아까 들어왔던 비상구 통로 쪽으로 나와 다시 문을 잠갔다.
'다행히 안 들킨 것 같은데.'
―그러다가 나는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띠웠다.
***
이제 곧 신전이었다.
'매번 오는 것도 귀찮군.'
빨리 신전에 잠입하면 편할 텐데. 그렇게 되면 일일이 신전을 찾아올 필요도 없다. 매번 신부를 협박해서 일을 시킬 것도 없이, 자신이 직접 하면 됐으니까. 추천서를 작성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다. 구마준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세상도 말세지. 도박에 빠진 신부라니.'
덕분에 이용할 수 있어 좋기는 했지만.
'……근데.'
왠지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착각일까? 불길한 느낌에 얼른 신전 안으로 들어간 구마준은 곧 신부의 방까지 안내받았다.
"예. 신부님은 안에 계십니다.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안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급한 일이시니까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요."
한 차례 덕담을 나누고, 그가 멀어지자 구마준은 입가에 띈 미소를 지웠다. 신부의 방문 손잡이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신부가 그에게 말을 건다.
"오셨습니까?"
"예. 더 말할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어, 어디까지라고 하심은?"
"몰라서 물으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멋대로 의자를 끌어서 앉은 구마준이 신부의 방을 눈으로 훑었다.
"얼마나 카피했습니까?"
"절반에 조금 못 미칩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쓸모없는 놈.'
기한은 오늘까지였다. 역시 빨리 신전에 들어가야 이 꼴을 안 볼 텐데. 그래도 그때까지 신부는 이용해야 한다. 구마준은 티내지 않고 미소를 보였다.
"뭐. 좋습니다. 손목이 아프셨겠지요. 중요한 건 끝까지 하시는 거니까요. 참. 추천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주, 주교님도 좋게 보고 계십니다. 아마 신전에 들어오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구마준은 잠깐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4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았다.
"그럼 다음 달까지 끝내실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카피한 것들은 받아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내부 인원 명부는 다 기록했습니까?"
"예. 같이 가져가시겠습니까?"
"후. 나쁘지 않네요. 이렇게만 해주신다면야."
"그… 돈은 언제쯤 받을 수 있을지?"
"일이 끝나면 어련히 알아서 드릴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구마준은 비릿한 미소를 띠고 신부의 방을 나섰다. 정문 입구까지 걷는 와중에 안내해줬던 몽크를 다시 만났다.
"이제 돌아가십니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신부님께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덕분에 이 야밤에 평온을 얻었지 뭡니까?"
"하하하! 이거 조만간 신전에서 뵐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후후. 함께 던전을 쳐부술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밖으로 빠져나온 구마준은 품 속에 챙겨둔 서류들을 다시 한번 매만졌다.
'빠진 건 없군.'
돌아가서 조직에 연락만 하면 되겠다. 한참을 걷던 와중에, 구마준은 신전에 오기 전에 느꼈던 불길한 시선을 다시 느꼈다.
'…착각인가?'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하긴 새벽 4시에 이런 골목에 누가 있을까?
"으르릉!"
'개?'
눈살을 찌푸리고 구마준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깊은 골목에 조그마한 강아지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겨우 강아지 따위한테…
자존심이 상한 구마준은 손목을 튕겼다. 겨우 그런 동작이었지만, 헌터의 힘은 돌풍을 일으켜 강아지를 덮쳤다. 그에 구마준은 코웃음쳤다.
'요즘 예민해졌나?'
생각해보면 요 며칠 잠을 못 자긴 했지. 돌아가면 정말 숙면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그르릉…"
다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구마준의 발을 멈춰 세웠다.
'…많이 피곤한가?'
왜 살아있지? 분명 죽였을 텐데. 어떻게 버틴 모양인데 거슬렸다. 확실히 죽이는 게 속이 시원하리라. 그렇게 몸을 돌린 순간―
"크르르르―!"
―구마준은 살의에 가득한 괴물의 눈을 보았다.
***
[구마준(인간)]
[신장 181.6cm] [체중 77.4kg]
[힘 217] [민첩 241] [체력 209] [마력 256]
크게 벌린 턱을 재빨리 닫았지만, 놈은 재주 좋게 빠져나갔다. '어떻게?'라는 생각은 곧 '아. 그랬지.'로 바뀌었다. 아마 D등급 가속을 가지고 있던 걸로 기억한다.
'잠깐 까먹었네.'
내 잘못이 아니라, 그리 비중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진다면 작가의 잘못이겠지.
"스컬 울프가 왜 여기에!"
놈은 가속을 통해 벗어나려 했지만, 당연하다는 듯 한 걸음 더 들어온 내게 기겁했다.
"……?!"
꼴에 헌터라고 챙기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지만, 베기는커녕 동강 나 부러지고 말았다. 새삼 경화로 얼마나 단단해질 수 있는지 실감했다.
"미친!"
구마준이 물러나려는 순간, 이미 뻗은 촉수 다발이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큭! 씨발!"
거기에 경화를 써 휘감긴 발을 부러뜨렸다.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간 발목. 더는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끝났다― 라고 생각한 순간.
'……?!'
어디선가 모인 빛에 차츰 휩싸여간다. 급히 발톱으로 놈의 왼쪽 흉부를 꿰뚫었지만.
'놓쳤다.'
죽이지 못했다.
놈이 사라진 자리 아래에 찢어진 종잇조각이 흩어져있다. 대체 언제? 그럴 틈이 있었나? 자세히보니 종잇조각뿐만이 아니었다.
'미친.'
아마 처음부터 단검을 꺼내며 파우치와 함께 스크롤을 찢어버린 모양.
'망할.'
놈은 기습당했다는 걸 알고 곧바로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같잖게 생각했었는데 놈이 더 노련했다. 하지만 그게 도망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찾았다.'
후각과 감지가 곧바로 놈을 포착했다.
고작 500m. 전력으로 달리면 30초 안에 도착할 수 있다. 단숨에 뛰어올라 건물 지붕 사이를 달렸다.
***
부러진 발목이 시큰거렸다.
"망할… 씨발! 왜 도시에 저딴 괴물이!"
혹시나 해서 미리 스크롤을 찢은 게 정답이었다. 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지는 차치하고 지금은 도망치는 게 더 급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집과는 반대 방향. 설령 집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놈이 쫓아오지 못할 것 같지는 않다.
'…신전으로?'
신전으로 가는 게 정답이겠지. 집과 멀어졌다는 소리는 반대로 신전에는 가까워졌다는 소리다. 신전까지만 가면 스컬 울프에게서 안전하다. 그리고 신전까지는 고작 500m.
'저 늑대는 절대 정상이 아니다!'
스컬 울프가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처음은 기습이었다 치더라도, 그 이후에도 매번 자신을 웃돌고 있다.
'특수종? 대체 얼마나 괴물인 거냐.'
가속 상태인 자신보다 빠른 몬스터. 심지어 스킬도 가지고 있는 거로 보인다. 다시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괴물이었다.
'…부러진 발로 500m를 도망가라고?'
불가능.
구마준은 입술을 씹었다. 제아무리 잘 숨어봤자 스컬 울프라면 능히 찾아내겠지. 소리쳐서 사람을 부를까? 그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가진 서류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자기 목 하나 날아가는 거로는 끝나지 않으니까.
'제기랄.'
구마준은 품속의 약병을 꺼내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마개를 열어 단번에 들이켰다.
"욱!"
구역질을 참고 억지로 넘기자, 가슴의 상처 부분에서 점액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점액은 이내 꿈틀거리며 살점을 만들어냈다.
"우읍!"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치솟은 두 번째 구역질까지 참았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던지 비틀렸던 다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대체 이런걸 어디서 만들어내는지.'
언뜻 듣기로 '어떤 쥐새끼'의 도움이 컸다고 흘린 말을 들은 적 있는 것 같지만…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도망친다!'
저 괴물과 싸워 이길 확률은 극히 낮다. ―이때까지의 구마준은 냉정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달린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리고, 스킬까지 아끼지 않고 사용했다.
그런데도.
'망할!'
절반도 도망치지 못했다. 기껏 스크롤로 거리를 벌렸는데! 메워진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구마준은 목청껏 소리쳤다.
"우아아아아악!"
***
'이번엔 도망 못 칠 거다.'
바람을 다리에 두르고 내달렸다. 놈이 끝내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공원이었다.
'기습은 당하지 않겠다는 건가?'
나무가 심어지긴 했으나, 놈이 있는 곳은 사방이 탁 트인 장소였다. 놀라운 것은 그사이에 가슴의 상처와 부러진 발을 고쳤다는 점일까?
'…구마준이 재생이나 회복계 스킬을 가지고 있던가?'
아니, 아닐 텐데. 구마준이 가진 거라고는 가속밖에 없다. 그 외에 자잘한 몇 개 스킬들이 더 있긴 했지만 전투에 쓸만한 건 그게 끝이었다. 제아무리 포션을 마셨다 해봤자 이렇게 빨리 상처가 회복될 리가 없는데?
[구마준(변이 중)]
[신장 181.6cm] [체중 80.9kg]
[힘 217] [민첩 241] [체력 267] [마력 206]
다시 한번 놈을 염탐하자 스테이터스 일부가 달라진 걸 볼 수 있었다.
'변이라고?'
머릿속에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그걸?'
[이단의 탕아들]― 놈들은 어떤 물건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실험을 벌였고, 그 실험 중에 탄생한 부수적인 성과가 있었다. 아마 구마준이 마신 건 그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
'그걸 왜 놈이 가지고 있지?'
어쩌면 탕아들은 원래 구마준을 실험체로 사용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증거 하나 없는 억측이지만, 어째선지 그렇게 느껴졌다. 더 생각할 시간이 없다. 시간이 지연될수록 불리해진다.
"크와아악!"
거리를 좁혔다. 놈은 어떻게든 견디려 했지만 구마준의 살갗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다. 보통이라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망할.'
단숨에 재생된다. 놈을 죽이려면 자잘한 공격으론 힘들었다.
'―이런데서 잿불을 쓸 순 없어.'
그랬다가는 공원 전체가 불타고 말리라. 시간이 많다면 천천히 상대해주겠지만 시간이 없다.
"크흐흑. 크흐흐흑!"
놈은 목을 하늘로 꺾고 흐는끼는 듯 웃어젖혔다.
"이거, 이건 대단한데! 도무지 죽을 것 같지가 않아!"
마치 소설 속 삼류 악당처럼 웃으며 구마준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더 놀라운 건 파열된 안구가 순식간에 재생됐다는 점이다.
"하아아아. 왜 진작 안 마셨는지 의문일 정도야."
황홀한 표정으로 피와 수정체를 눈물처럼 쏟아내며 구마준이 달려들었다.
'등신.'
단순하고 일직선적이다. 그 재생력에 취해서 자신의 움직임을 제어할 생각이 전혀 없다. 헌터가 아닌 일개 짐승으로 자락(自落)했다. 그리고 그러한 짐승들은.
"……!"
수도 없이 사냥해봤다.
등허리를 누르고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놈은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영혼이 빠질 듯한 절규를 들으며 데구르르 구르는 머리를 짓밟았다. 크게 뜬 눈이 두려움에 떠는 걸 보며 힘을 주었다.
'단단하다.'
찌그러뜨릴 생각이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어느새 놈의 체력이 300을 돌파했고, 반대급부로 마력은 150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이 강해지고 있다고 착각하겠지만, 모든 힘에는 대가가 있다.
'마력을 다 쓰면.'
재생하지 못한다. 악식의 효과가 발휘되고 놈의 마력이 실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발아래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발악하던 놈의 머리가 기괴하게 웃는다.
"크흐학!"
동시에 목 없는 몸이 달려든다. 순식간에 난도질당한 몸이 그 대가로 머리를 되찾았다. 거꾸로 끼워진 목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제자리를 찾았다.
'제기랄.'
놈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기껏해야 두 번. 앞으로 놈이 재생할 수 있는 숫자였다. 하지만 끼어든 방해꾼이 문제였다.
"구마준 신자님! 괜찮으십니까!"
걱정하며 달려온 남자. 볼 것도 없이 헌터… 아니, 전쟁의 신전 소속이었다.
[박요한(인간)]
[신장 175.6cm] [체중 59.9kg]
[힘 311] [민첩 318] [체력 307] [마력 290]
빡빡머리 몽크. 아까 신전 사무실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골치 아픈데.'
아무리 그래도 아라네아 정도는 아니었지만,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떤 스킬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게 까다롭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박요한을 상대하다가 구마준이 도주하는 것.
'지금 내 정체가 까발려지면 곤란해.'
가능하면 탕아들에게 들키지 않고 행동하고 싶다. 그걸 위해서 구마준을 살려둘 수는 없지만―
'전쟁의 신전이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물러날 리가 없을 테고.'
좋지 않은 상황에 이가 갈렸다. 박요한 뿐만이 아니라 [감지]에 포착된 기척이 최소 둘은 더 이쪽으로 오고 있다.
'승산이 없어.'
―어쩔 수 없다. 구마준과 박요한 둘을 상대로 속전속결로 끝내는 건 불가능하다. 곧바로 질풍을 둘러 달아나려는 순간, 박요한의 마력이 발목을 붙잡았다.
'언제?'
모르겠다. 그런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걸까? 290이나 되는 마력이 끈질기게 발목을 붙잡았다. 악식으로 억지로 끊었지만, 그때는 이미 둘러싸인 뒤였다.
'망할.'
억지로 뚫고 지나갈 수 있을까? 아니, 무리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굉음이 발밑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도대체 누가?'
아니, 아니다. 누군가가 아니라―!
"지, 지진!"
"아니 지진이 아닙니다! 이건… 던전입니다!"
―공원이 통째로 던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