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22 악의 태동
'여기까지 왔으면…'
제법 멀리까지 왔다. 나무 위로 올라가 그 싸움을 구경했다. 괴수 대전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 말이 딱 맞았다.
'존나 쎄네.'
마력 능력치 640과 체력 능력치 600을 넘긴 괴물. 다른 스테이터스만 보면 살더미가 압살하고 있지만, 홍유리에겐 기술과 지혜가 있었다.
'그리고 마법까지.'
솔직히, 살점 괴물에게 허무하게 당하는 홍유리를 상상하는 게 더 어려웠다.
'…제발 뒤졌음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홍유리가 질 것 같지가 않다. 그나마 괴물이 가진 메리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진다는 점?
'저건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으니까.'
다른 능력치는 거의 성장을 멈췄다. 힘은 506. 민첩은 419. 그러나 체력만큼은 600을 돌파하고도 끝없이 상승하는 중이다. 사람은 크고 강한 것에 열광한다. 나도 어느샌가 그 싸움에 시선을 뺏겨 멍하니 보다가 퍼뜩 정신 차렸다.
'아니, 봐서 뭐 할 건데?'
중요한 건 괴수들이 치고 박는 게 아니라 내 상황이지.
'일단 구마준은 OK.'
도망치기에는 살덩이 괴물에게 시선이 끌린 지금이 적기겠지만, 밖에 나가봤자 어차피 신전이나 대표 클랜이 진을 치고 있을 터. 좀 더 시간이 흘러 던전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질 때를 노려야했다.
당면의 목표는 은신 C등급이었다.
***
"―――!"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토해내며 괴물은 울부짖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적발의 소녀, 홍유리는 살의를 숨기지 않았다.
"―죽여준다고 했지?"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Distruge, Flacără―!"
처음으로 나타난 마법의 행사. 지금까지의 모든 게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 표횰했던 마력이 말에 담긴 의지에 따라 형상을 이루고 현상을 만들어냈다. 파멸을 부르는 불꽃이 괴물들 덮쳤고, 괴물은 끓어오르는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워."
적발 적안의 소녀가 "Tăcere." 라는 말을 뱉은 후부터 괴물은 소리를 낼 수 없게 됐다. 괴물의 안에 아직 남아있던 지성의 잔재가 의문을 가졌다.
어이하여 매번 밀리는가? 어째서 닿을 수조차 없는 것인가? 그 늑대에게도, 이 소녀에게도 어째서 닿을 수 없는 것인가?
분노를 표출하는 것처럼 괴물은 수천 개나 되는 촉수의 끝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송곳이 된 촉수는 일소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버러지 주제에."
주제를 알라고. 오만한 선언이 떨어지자, 괴물은 소리 없는 외침을 질렀다.
'――!'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외침.
어느새 그녀의 붉은 마력이 맑게, 노랗게, 백색을 띠고, 결국 새하얗게 물들었다. 색을 잃어버린 불꽃을 보며 괴물이 한 생각은 '저것은, 그야말로 빛이 아닌가―?' 였다.
"Alb pur Stelele sunt sa explodeze―"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본 괴물은 찰나, 분노를 잊고 넋을 잃었다.
"Iată moartea ta―!"
마침내 순백의 빛이 괴물을 덮었다. 최후의 순간, 괴물은 '따뜻하다.'고 느꼈다. 그 생각이 끊어진 건 찰나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흥."
홍유리는 시시하다는 듯 손을 털었다.
이내 그녀가 몸을 돌린 사이, 검게 타들어 익어버린 살덩이― 아니, 괴물에 깃들어 있던 것이 꿈틀거렸다. 괴물의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은 요동치고, 박동하기 시작했다.
태동(胎動). 무언가가― 의지를 갖추고 껍데기를 벗으려 하고 있었다.
'―――!'
구마준이었던 것의 잔재, 지성은 소리 없는 단말마를 지르며 아우성쳤다.
죽음의 강을 건너는 와중에, 무수한 악의가 손짓했다. 존재하는 모든 종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종의 악의(惡意)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속삭였다.
'――.'
본래 병에 담긴 악의는 존재를 키메라로 변질시키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쥐새끼'의 도움으로 탄생한 이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은 기존의 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효과뿐만이 아니라 거기 담긴 악의 또한. 연구 결과에 따라 더욱더 끔찍하게. 더욱더 비참하게 죽어간 존재들의 사념이 담겨 있었다.
자연 그에 비례해 악의는 커졌고, 더욱 끔찍한 악을 품게 되었으니.
'――.'
악의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두려웠으나―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그 찬란한 빛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지성의 잔재를 이끌었고.
"뭐야?"
묘한 낌새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죽였다. 죽였는데…?
"…살아있어?"
어떻게? 홍유리의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악의에 이끌린 지성의 잔재를 집어삼킨 순간, 끔찍한 악은 괴물을 완전히 잠식했다.
"―――! ―――!"
꿀렁! 꿀렁! 꿀렁!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무엇도 죽음에서 돌아올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일.
―순수하고 끔찍한 악이 만들어낸 최악의 기적이었다.
"대체 뭘 만들어 낸 거야. 이 씹새끼들은!"
붉은 살덩이가 검게 물들어갔다― 그렇게 괴물은 악의의 화신이 되었다.
***
"꾸어어어엉!"
멧돼지의 거대한 엄니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어우. 위험해라.'
말이 멧돼지였지 사실 코끼리와 비견할만한 덩치였다.
'근데 그래봤자 멧돼지기는 해.'
난폭한 멧돼지의 돌진을 투우사처럼 피했다. 비록 멧돼지의 민첩이 200을 넘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라는 생각만 들었다.
'정작 내 민첩은 200이 안 되는데.'
레벨 업으로 딱 180. 여태 상대해왔던 녀석들이 하나같이 괴물인지라 눈만 높아졌다.
돌풍을 활성화하자 아까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들었던 멧돼지가 멈칫거렸다. 섬뜩한 바람이 공기를 가르며 멧돼지를 위협했다. 놈은 도망칠 수 없단 걸 깨달았는지 최후의 발버둥으로 커다란 엄니를 앞세웠지만, 그 엄니가 산산이 조각나자 "꾸에에엑!" 비명을 질렀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척 봐도 단단해 보이는 엄니가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조각났다.
'이게 C등급?'
나중에 악식과 잿불이 C등급으로 오를 때가 기대된다. 멧돼지는 있는 힘껏 발악했지만 결국.
[큰 엄니 멧돼지를 섭취하였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EXP 38074 / 62743]
레벨 업이 멀지 않았다. 새로운 먹잇감을 물색하다가 저 멀리, 새하얀 불꽃이 폭발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언젠가 영상으로만 보았던 초신성의 폭발처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나 용케 살아남았구나.'
홍유리에게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저 괴물 같은 년. 곧 신나서 쫓아올 걸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박요한 개 씹새끼.'
박요한을 껌처럼 씹으며 욕했다. 그 빡빡머리 몽크를 구하느라 애꿎은 스킬 포인트를 써버려서 이 고생이었다.
'그래도 레벨 업만 하면.'
남은 스킬 포인트는 4가 된다. D등급 은신을 익힐 수 있게 될 테고, 잘만 하면 C등급으로 올릴 수 있을지도? 그러다가― 본능적인 섬뜩함에 시선을 돌렸다.
'와. 시발. 아직 살아있다고?'
징그러운 생명력이었다. 그래도 그만큼 시간을 벌어준다는 소리였다. 최대한 빨리 성장해야 한다.
'…홍유리가 이길 것 같았는데.'
이젠 모르겠다. 궁금증에 나도 모르게 염탐을 사용했다가.
[염탐(E)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염탐(E) Lv.9 -> 염탐(E) Lv.10]
[염탐(E)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염탐(E) Lv.10 -> 통찰(D) Lv.1]
'아주 그냥 숙련도를 퍼주는구나.'
그만큼 난해한 존재라는 거겠지. 통찰이 된 스킬로 녀석의 스테이터스를 살폈다.
[태동하는 악]
[체장 …] [체고 …] [체중 …]
[힘 …] [민첩 …] [체력 …] [마력 …]
[보유 스킬 목록]
[고속 재생(B)]
"……!"
이제 보유 스킬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단 사실에 놀랐지만, 그것보다도.
'몬스터가, 아니. 구마준이 저런 스킬을 가지고 있었나?'
원래 구마준이 가지고 있던 가속은 온데간데없고, 어디서 갑자기 B등급 스킬아 나타난 거지? 전혀 다른 존재라도 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했다.
'고속 재생?'
내가 가진 D등급 재생만 해도 사지가 잘려도 자라날 정도다. 한데 그보다 두 단계 높은 B등급인 재생이라면?
'홍유리한테 견딜 만했구나.'
게다가 녀석의 체력과 맞물려 무시무시한 시너지를 발휘할 터. 그 상승효과를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한데. 놈의 마력이…
'0이 아니야?'
100. 200… 처음 체력이 그랬던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마력이 급증했다. 도대체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그것보다 태동하는 악이라는 건 도대체 뭘 뜻하는 거지?
'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을 마셨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어찌 됐든 저기에 있는 존재가 정말 괴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어우우우.'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저기서 싸우고 있는 게 홍유리가 아니라 나였다면?
'10초도 못 견뎠겠는데.'
다른 사냥감을 찾으면서도 나는 도저히 그 싸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작고 여린 존재는 항상 늑대를 지켜봐 왔기에, 그리고 그것과 대척점에 서 있기에 괴물 속에 자리한 악의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뀨르르…"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고 소름 돋는 악(惡) 그 자체였다. 어린 존재는 괴물을 집어삼킨 거대한 악의에 떨어야만 했다. 감히 항거할 수는 없다. 그러기엔 어린 존재가 가진 힘은 아직 나약하고 보잘것없었으니.
하지만 구할 수는 있다.
비록 악의를 이길 순 없겠지만, 늑대를 데리고 도망칠 수는 있다.
"뀨르륵! 뀨르르륵!"
어린 존재는 자신을 구했던 늑대를 살리기 위해 움직일 필요를 느꼈다.
그곳은 환계(幻界).
모든 요정과 환수의 고향 되는 곳이었다.
***
"홍유리!"
붉은 마력에 떠 있는 홍유리에게 팀장이 소리쳤다. 홍유리의 진홍색 눈동자가 아래를 바라보자, 팀장은 의문을 품었다.
'벌써 진홍이라고?'
마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실제로 그녀의 마법인 백색 불꽃도 보았다. 그런데도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건가? 새벽의 여명 제일가는 마법사가?
"뭐?"
짜증을 감출 생각도 없는 목소리가 화답해온다. 팀장은 그 진홍색 눈을 바라보다 말했다.
"…가세해도 되겠지?"
잠깐 그녀의 표정에 고민이 머물렀다. 눈에 보일 듯 뻔한 고민이었다.
'자존심이냐. 아니면…'
잠깐의 시간, 고민하던 홍유리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그녀가 가진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리라.
'큭.'
너무나도 알기 쉬워 작게 웃었는데, 그걸 또 알아채고 노려본다. 황급히 고개를 떨군 팀장이 웃음을 지우고 코트 자락에서 검을 뽑았다.
지이잉―. 맑은소리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급소는?'
없다. 어딜 공격하든 똑같다. 하지만 팀장이 할 일은 놈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
'보조한다.'
수십, 수백 개의 촉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홍유리를 꿰뚫으려 했다. 그것은 아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 ―어째서?
'마력을?'
마력이 없는 게 아니라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건가? 촉수 하나하나가 마력을 가지고 홍유리의 마력에 저항한다. 비록 그 차이가 극심해 불타오르긴 했지만, 처음으로 홍유리가 몸을 피한 순간이었다.
"칫! Glonț arzător!"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8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여덟 총알은 다가오는 모든 촉수를 꿰뚫고 파고들었으나.
'망할.'
고작 그것뿐이었다. 바늘로 찌른다고 코끼리가 죽을 리 없듯, 총알로는 괴물을 죽일 수 없다. 더욱 성장해가는 괴물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거대한 촉수를 만들었다. 기존 촉수의 10배에 달하는 크기. 커진 만큼 홍유리의 마력에 저항했다.
"Flacără―!"
가까스로 마법의 불꽃이 촉수를 제지했다. 그러나 그런 촉수가 수십 개 있다면?
"……!"
피하기에는 늦었다. 마법을 행사할 시간은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마력을 집중 시켜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는 것뿐. 하지만 수십 개나 되는 촉수는 단 하나도 홍유리에게 닿지 못했다.
쿵! 바닥에 떨어진 촉수들이 뭍에 떨어진 물고기처럼 꿈틀거렸다.
"아슬아슬했군."
세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팀장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전혀 아니거든? 이 등신아!"
"그래. 그런 거로 치자고. 그것보다 마력은?"
"한참 남았으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
"그러고 싶은데 상성이 안 좋아서."
담담하게 말한 팀장의 말은 담백한 사실이었다. 그의 애검이 검 끝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무식한 싸움에 쓰라고 있는 검은 아니거든."
"구진하 이 쓸모없는 새끼!"
세검사(細劍士)라는 이름답게, 그는 유려한 기술과 정교히 계산된 전투를 선호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얇은 세검은 저런 괴물과의 싸움에선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자랑하는 영역은 대인전. 사람간의 싸움이었지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게 아니었다.
"반박할 수 없다는 게 뼈 아픈데."
적어도 이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씁쓸하게 웃은 팀장은 뻗어 나온 촉수를 잘라 홍유리를 보조했다. 그리고 그때쯤.
"팀장님!"
우택이 사람들을 이끌고 가세했다.
'애매한걸.'
팀장은 흘깃 눈길을 주며 그들을 가늠했다.
'4명. C클래스와 B클래스 사이.'
6명이라고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2명이 없다. 우택과 합류한 걸로 보아 생존자라도 찾았던 걸까?
'숫자가 부족해.'
머릿수가 부족했다. 일정 수준 이하의 헌터는 발목만 잡을 터. 가뜩이나 힘든 전황인데 차라리 우택이만 남기고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럴 권한이 없었다. 던전 자체가 신전이 위임받은 거니까.
'일단 쓰자.'
윽박질러 보낼 수는 있겠지만, 팀장은 그러지 않았다.
'2팀장이 올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적어도 고기 방패 역할은 수행할 수 있으리라. 그것만으로도 홍유리의 부담은 충분히 줄어들 테니. 냉정히 계산을 마친 팀장이 저 아래의 우택에게 소리쳤다.
"우택아! 네가 그분들이랑 움직여. 난 프리로 뛸 테니!"
"알겠습니다!"
씩씩한 대답에 반응하듯 촉수가 방향을 바꾼다. 지면을 향해 나아간 촉수가 일행을 노렸지만.
"흡!"
강건한 철권에 막혀 으깨졌다. 그럼에도 우택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반동이 강해.'
단 일격의 교환일 뿐인데 괴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걸 상대하고 계셨던 건가?'
하나 더 날아온다. 우택이 준비하는 사이, 그의 앞에 선 성기사는 배트를 쥔 타자처럼 해머를 휘둘렀다. 정확도도 뭣도 없이 힘에만 치중한 일격이었으나 어차피 저만한 크기라면 대충 휘둘러도 맞는다.
"큭!"
간신히 막기는 했다만 촉수는 멀쩡했다. 반대로 성기사는 손목이 시큰거려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설마 이게 던전 보스요?"
"설마요. 이 녀석보다는 훨씬!"
몽크와 우택이 양옆에서 촉수를 찌그러뜨렸다.
"…약하겠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소. 잡아도 던전 보스가 남았으니 불행인가?"
"형제님들! 하나 더 옵니다!"
저 위에서 비산하는 촉수들에 비하면 정말 빙산의 일각이었지만, 그걸 막는 것만 해도 쉽지 않다. 게다가 점점 그 숫자가 많아지고 있다. 막고 또 막고. 우택의 주먹 끝, 벗겨진 피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후! 일단 살고 봐야겠죠!"
"거, 참 옳은 말이오!"
망치와 주먹이 쉴 새 없이 허공을 비산했다.
***
"큿...!"
홍유리는 치미는 두통에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비볐다. 그렇게 마력을 써댔으니 당연한 결과. 정신 고갈의 전조가 찾아오고 있었다.
'남은 마력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홍유리의 마력과 달리 놈은 끊임없이 거대해졌다.
'…짜증 나.'
역겨운 살덩어리 괴물에게나 이딴 버러지 하나 처치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나.
아니, 분명 죽였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죽음에서 되돌아왔다. 그렇게 부활한 놈은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신의 괴물이었다. 덮쳐오는 촉수를 쳐내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대부분 구진하가 커버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 얇은 세검 하나로 모든 걸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더럽게 안 죽네.'
태우고 짓누르고 부수고. 온갖 방법으로 죽여봤자 1초도 되지 않아 재생했다. 결국, 빌딩만큼 거대해진 놈을 일격에 소멸시켜야 한다는 뜻인데. 한참 고민하던 홍유리는 결국.
"구진하!"
살점 사이사이를 누비며 촉수를 베던 팀장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짧게 눈을 마주친 순간, 홍유리는 입술을 씹었다.
"…키핑해."
"알았어."
담담한 대답에도 홍유리는 부르르 떨었다. 고작, 고작 저딴 거 하나 못 죽여서!
'죽여버릴 거야!'
갈가리 찢어서, 아니 전부 태워버려서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으리라.
그녀가 가진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진홍색 눈이 짙은 살의를 띄었지만, 그와 달리 그녀의 의식은 차갑게, 깊디깊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았다.
"후우우…."
숨을 뱉어내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곧 그녀의 진홍색 눈동자가 빛을 흩뿌렸다. 붉은 마력이 일렁이자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Se înroșesc."
힘이 깃든 말(呪言)에 따라, 그녀의 마력이 짙어졌다. 눈동자의 색에 따라 선홍(鮮紅)에서 심홍(深紅). 결국 진홍(眞紅)으로 물든 마력은.
"Puterea cuvintelor mele Acoperă lumea."
노래를 읊음(詠唱)에 따라 모든 걸 뒤덮기 시작했다.
"아…"
싸우는 와중에 성기사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로부터 비롯된 진홍의 마력이 퍼져나가 초목을, 생명을 이윽고 대기까지 잠식해 모든 것을 지배하에 두었고.
"Prin urmare, Ceea ce vreau este devenit realitate―"
그녀의 바람에 따라, 마력은 형상(形象)을 넘어 현상(現象)으로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
멍하니 있던 괴물이 움직인 건 그때였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촉수만을 뿜어내는 게 아니라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대지를 기었다. 수목이 쓰러지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동식물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우택아!"
팀장의 부름에 우택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잠깐이면 된다! 멈출 수 있겠어?!"
고개를 끝까지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괴물. 팀장은 우택에게 그런 괴물을 멈춰 세우라고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부탁임에도 그는 주먹을 쥐었다.
"예! 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곁에 있던 성기사와 몽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리요! 저 괴물을 어떻게 막겠다는 거요!"
이제까지 싸움은 공격을 받은 게 전부였다. 놈에게 뻗어 나온 촉수를 막았을 뿐. 그것만으로도 우택의 주먹은 피투성이였다. 헌데 저 괴물을 멈춰 세우라고?
"비켜주시죠."
"비록 소속은 다르다 하나 우리는 함께 싸운 전우! 그대를 사지로 보내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들을 밀쳐낸 우택은 자세를 잡았다.
"멈추시오! 그랬다간 그대로 깔려 죽고 말 거요!"
이제는 코앞까지 다가온 살더미의 늪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손을 뻗은 그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흡!"
우택의 팔이 어깨 뒤로 젖혀졌다. 유연한 허리로부터 시작된 움직임은 탄탄한 어깨를 타고 팔꿈치를 지나 손목에서 회전을 받아 주먹까지 전해졌다. ―거기에 더해, 진한 마력의 향이 우택의 주먹을 감쌌다.
"설마!"
성기사, 성대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확실히 우택의 주먹은 촉수를 막는 것만으로도 붉게 물들었다. 제아무리 단련되었다 한들 압도적인 중량과 거대한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을 순 없었다. ―맨몸으로는 말이다.
거대한 마력이 내부에서 소용돌이친다. 근육의 움직임을 따라 전신을 휘저은 마력은 고스란히 우택의 주먹에 담겼다.
"…설마 여태까지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건가!"
그들이 착각하고 있었던 것.
우택은 단 한 번도 마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순수한 맨몸으로, 오직 그가 가진 철권으로 촉수를 격파하고 있었을 뿐. 그걸 멋대로 마력을 사용했다고 착각했을 뿐.
"이건 B클래스 정도가 아니라!"
B클래스. 그것만으로도 아득한 경지다.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헌터는 재능 있는 한 줌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택이 B클래스에 도달한 건 무려 5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여명의 제일가는 마법사, 홍유리의 가르침을 받았던 철의 권사(拳士)는.
"괴물 같은!"
진작에 A클래스에 발 디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흡!"
숨을 내쉼과 동시에 철권을 뻗는다.
"크으윽!"
몽크와 성기사들은 밀려나지 않게 서로를 잡고 지탱하는 게 고작이었다.
과거, 슬라임이었던 늑대가 보았던 우택의 힘은 517. 일개 인간이 가졌다기엔 너무나 비상식적인 힘이 그보다 더한 578이라는 꾸준한 노력의 산물로부터 도움닫기 해― 폭풍을 일으킨 것이다.
강타한 주먹에 거대한 살덩어리가 출렁였고, 바람이 잦아지자 보인 것은 수십 톤의 화약이 단번에 폭발한 듯한 거대한 구멍이었다. 그 너머의 광경. 수목이 살점과 검은 피로 물든 터무니없는 참상에 그들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또한, 그들의 놀람은 끝나지 않았다.
―드디어, 홍유리의 마법이 완성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