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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40화 (40/407)

〈 40화 〉 #22 악의 태동 (3)

"……."

거기서 검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검을 포기했더라도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마법은 완성되더라도 적중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끝났다고 멋대로 판단했을까. 왜 멋대로 끝난 싸움이라고 단정 지었을까.

'…….'

정말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옅어져 가는 홍유리의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이쯤이면.'

제법 거리를 벌린 것 같다. 팀장은 급하게 코트 안주머니에서 가지고 있던 포션을 꺼냈다. 쓰러진 홍유리의 기도를 확보, 포션을 마시게 했다. 그러는 중에 팀장은 자신의 옷을 길게 찢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피와 오물은 대부분 코트에 묻었으니 괜찮을 거다. 길게 찢은 옷을 붕대 대신으로 홍유리의 옆구리에 감아 출혈을 막았다.

'…임시방편일 뿐이야.'

지금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포션을 마셨다 해도 이런 위중한 상처가 나을 리는 없다.

'던전 밖으로 나가면.'

2팀에 회복 스킬을 가진 팀원이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밖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

'이쪽이었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팀장은 남은 마력을 모조리 다리에 실었다. 그런데도 괴물과의 거리는 차츰 좁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상처. 뒷발목, 아킬레스건 때문이었다.

"윽…"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찢어진 상처가 시큰거렸다.

자만했나? 아니면 오만했나? 만약 조금만 더 주의했다면.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데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팀장은 홍유리를 업고 묵묵히 숲길을 달렸다.

***

'이 정도면 적당한데.'

은신을 유지한 채로 녀석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얼추 3km. 당장은 안전하지만, 태동하는 악의 덩치를 생각한다면 금세 좁혀질 거리였다.

'아마 날 쫓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괴물이 난해한 존재라고 하나 C등급으로 상승한 은신을 쉽게 꿰뚫어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날 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의식 과잉이었다.

'…흠흠.'

조금 쪽팔리네. 무엇보다 놈이 움직이는 방향에서 벗어나도 놈은 우직하게 가고 있다는 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쫓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마 홍유리.'

그것 말곤 없겠지. 십중팔구 괴물이 노리는 건 홍유리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 저건 지성이 없는 키메라다. 물론 지금은 키메라도 아니게 된 것 같지만, 그래도 지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위협 같은 스킬들을 사용해서 관심을 끄는 건 무리겠지. 무엇보다, 그런 지성 없는 존재가 저렇게까지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어쩔 수 없지.'

[Lv.10 달성 조건 : 태동하는 악을 유인할 것]

뭐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

살갗이 완전히 벗겨지고 뼈가 뒤틀렸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 무수히 많은 정권을 질렀으나, 괴물의 발걸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최초의 일격도 다소 무리를 한 공격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해.

우택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로 가득 찼다. 꾸물대는 살덩어리 괴물의 발을 어떻게든 멈춰야 한다. 팀장님과 부팀장님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시간을 벌어야 한다.

'차라리.'

우택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보았다. 이미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만큼 괴물은 단단하고 강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성기사는 몸을 돌려 달아나는 우택을 보고 의아해했다.

'도망?'

아니, 아니다. 그는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도망갔으리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지만, 깔리지 않게끔 거리를 조절하며 계속 망치를 휘두르던 와중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

왜 갑자기 흙이? 그리고 성기사가 본 것은 커다란 구멍이었다.

커다란 구멍… 아니, 싱크홀?

'던전에서?'

싱크홀처럼 구멍은 맞았으나, 자연적으로 발생한 건 아니었다. 저 멀리서 권사가 망가진 손으로 땅을 내리치고 있다. 거기에 호응해 신전의 형제들이 그를 도와 더 큰 구멍을 만든다.

'아. 그렇군.'

뒤늦게 그가 하는 것을 이해했다. 괴물은 무한히 재생하는… 말하자면 불합리한 괴물이었다. 어차피 놈을 공격해서 발을 묶을 수 없다면…

'땅을 파는 게 낫다는 건가.'

괴물을 공격해서 멈추는 것보다 괴물의 이동 경로를 막는 게 효과적이다. 그게 그의 생각이었으리라. 작전은 훌륭히 적중했다. 마치 홀린 듯 무언가를 쫓는 괴물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방해하건 말건, 밑에 구멍이 있건 말건 피하지 않았다.

덩치가 덩치인지라 놈을 완전히 빠뜨릴 구멍은 만들지 못했지만, 충분히 동선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아예 주변을 보지 않는군.'

쩌엉! 풀스윙으로 휘두른 해머가 살덩이 괴물을 강타했다. 뻔히 공격당하고 있는데도 괴물의 공격은 이제까지완 달리 소극적이었다. 마법사에게 했던 것처럼 끔찍하고 절망적인 공격은 없다. 이따금 촉수를 뻗어내기는 했지만, 그동안 받아냈던 촉수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건가?'

여명의 마법사의 마법은 성공했지만, 적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덩어리 괴물을 잿더미로 만들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상처라도 불사신처럼 재생하던 괴물이 단순히 상처를 입은 것에 재생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그 마법은 무언가… 무언가 달랐던 건가?'

의문투성이였다.

괴물은 어째서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마법사를 쫓는 건지. 공격이 소극적인 건 아직 회복이 덜 됐기 때문은 맞는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의 마법만이 그렇게 강한 충격을 입혔는지. …전혀 모르겠다. 성기사로서는 그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쩌어엉!

다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전력으로 망치를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

넋을 잃고 몽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맑은 하늘 중천에 해가 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형제님.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혀, 형제여. 정말, 정말 밖으로 나온 겁니까?"

"예. 저희가 박요한 형제님을 모셨습니다. 이제 안전합니다."

신전 동료의 말을 듣고서야 그는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건네받은 수건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았다. 정신을 잃었던 것도 아닌데 그간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하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던전 밖으로, 아니 언제 던전 밖으로 나온 거지? 그러다가, 박요한은 멍하니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만신창이셨습니다. 다행히 회복 스킬을 가진 여명 분이 계셔서 치료는 했지만."

온전하게 회복하진 못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회복 스킬의 등급이 그리 높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며칠 요양하면 금세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듣고 박요한은 안심할 수 있었다. …뒤늦게 던전 밖으로 나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온화한 목소리가 몽크의 귓가에 머물렀다. 잠깐 멍하니 듣던 몽크가 화들짝 놀랐다.

"주, 주교님?"

"어머.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군요.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보다 이야기라 하심은…?"

온화하고 상냥한 미소. 그리고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약간의 텀을 둠으로써 주교는 박요한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카운슬링. 간단한 대화의 기술. 그녀는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다. 또 신을 믿는 자로서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안심시키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의 일이 궁금할 뿐이랍니다. 다짜고짜 몰아붙여 미안해요. 진정하면 그 때 이야기해도 괜찮답니다."

시간을 주는 주교의 말. 그러나 박요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수는 없다. 지금도 던전 안에서 상황은 급변하고 있을 터.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다른 형제들이 걱정이었다.

"많이 긴장하고 계시는군요. 심호흡해 보시겠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박요한은 늑대의 이빨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손목을 잠깐 쳐다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

"망할."

팀장은 담배가 하나도 없다는 것에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있었어도 피울 시간은 없었겠지만.

"후우. 그렇게 찾아도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하필 최악의 타이밍에 조우했다. 아니, 놈의 지능을 생각하면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타당하겠지. 상황을 지켜보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터.

"알파."

팀장이 늑대의 이름을 불렀다.

알파(Alpha).

지리산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악연이 닿은 늑대 몬스터. 놈을 쫓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최악의 타이밍에 마주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스컬 울프가 맞긴 하군.'

근 한 달간 놈을 쫓았음에도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은하를 제외하고 여명의 누구도 놈을 목격한 적이 없었으니. 놈이 정말 지리산의 알파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산의 헌터에게 들은 것처럼 보통의 스컬 울프보다 작은 체구인 것만은 확실했다.

'특수 종이라는 거겠지.'

지리산의 워그처럼. 모든 정황이 놈을 알파라고 말하고 있다.

"크르르―!"

우두머리 늑대(Alpha male)는 이빨과 발톱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위협했다.

'과연.'

스산한 살기(殺氣)와 확실한 살의(殺意)에 팀장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스컬 울프의 책정 등급은 고작 C-. 그런데 놈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는 일순 자신을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였다. 지리산에서 느꼈던 놈의 포효는 착각이 아니었다. 놈은 정말로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최악인데.'

가능하면 지금만큼은 싸우고 싶지 않다. 물론 저쪽은 그럴 생각이 없겠지만. 거센 돌풍이 꽃과 잔디를 마구 찢어발겼다. 놈의 시선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오직 광기뿐이었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

팀장은 다시 한번 상황을 점검했다.

'뒤에는 괴물이 쫓아오고.'

살덩어리 괴물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온다. 이번에야말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나마도 남은 사람들이 막아주지 않았으면 진작 잡혔으리라. 이런 상황인데 무기도 잃었다.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애검을 보며 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싸우는 건 무리겠지.'

손잡이만 남은 애검을 코트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맨손으로 싸우는 건 특기가 아닌데.'

그렇다 해도 평범한 스컬 울프와 싸우는 건 문제 되지 않을 테지만….

'놈의 전력이 미지수다.'

들었던 대로라면 최소 아라네아에 버금가는 강함을 가지고 있다. 아니, 지금은 더 성장했다고 봐야겠지.

무엇보다.

'자신 있으니까 나온 거겠지.'

거기에 더해 아킬레스건의 상처.

제대로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살덩이 괴물과 싸운 뒤라 마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 확실히 싸운다면 지금 이상의 타이밍은 없겠지. 팀장은 홍유리를 나무에 기대어 눕히고 자세를 취했다.

'시간제한. 다리의 상처. 무기는 없음. 놈의 전력은 미지수. 정신 고갈도 멀지 않았고… 거기에 홍유리도 지켜야 한다.'

최악. 모든 상황을 정리한 팀장이 볼살을 씹었다.

"…덤벼라. 알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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