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22 악의 태동 (4)
"후우. 그렇게 찾아도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코트를 입은 남자의 말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터는 하나같이 괴물. 하물며 홍유리를 업고 달리는 이 남자는…
[구진하(인간)]
[신장 182.1cm] [체중 74.8kg]
[힘 519] [민첩 577] [체력 535] [마력 585]
'미쳤나.'
정신 나간 능력치. 새벽의 여명 3팀장 세검사 구진하. 소설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하나같이 괴물인 건 잘 알겠다. 일단 모든 능력치가 500을 넘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떻게 싸워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알파."
알파? 아마도 날 부르는 이름이리라.
구진하의 담담한 목소리만 들어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당장에라도 찌그러질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그에 맞서 나도 소리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르르―!"
[위협(F) Lv.8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위협(F) Lv.8 -> 위협(F) Lv.9]
살짝 목소리가 떨린 것 같은데, 쫄았단 게 들킨 건 아니겠지? 그래도 레벨이 올랐다는 건 통했다는 뜻일 테니까… 칭호와 위협이 어떻게든 해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다음 순간, 구진하의 눈빛이 바뀌었다.
'통하긴 개뿔!'
오히려 경계심만 돋웠다. 차갑게 시린 눈동자로 그가 나를 살핀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는 순간, 구진하는 내 목숨 줄을 틀어쥐리라.
'다리에 부상. 맞나?'
발자국이 유난히 깊은 거로 보아 다리를 다친 것 같기는 했다. 신발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피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무기는…'
손잡이밖에 없는 검은 쓸 게 못 됐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구진하는 검을 코트 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구진하에게 검이 있었다면 무조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을 테니.
'바바리맨 같은 자식.'
슬쩍 바라보니 홍유리의 옆구리에 붕대… 아니, 천이 감겨 있었다. 아마 찢어서 붕대 대용으로 사용한 거겠지만.
'후우우.'
홍유리를 바닥에 내리고 구진하는 맨손으로 자세를 잡았다. 로우 핸드 가드(Low Hand Gurad). 안쪽 손을 턱에 붙이고, 앞선 손을 하단으로 내리는 자세.
'싸우겠다는 거구나.'
구진하의 판단. 방해꾼은 미리 제거하겠다는 생각이 아닐까.
'정확하네.'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잔뜩 어드밴티지를 받고도 그와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잠시 갈등하고 있는 사이,
'이럴 시간도 아깝다는 거냐!'
돌풍이 구진하의 손목을 절단할 기세로 휘감았지만, 놈의 손목에는 미약한 생채기만 났을 뿐이다. 큰 엄니 멧돼지의 엄니도 쉽게 잘랐는데… 어떻게 되어 먹은 세계관인지.
"흡!"
보고 피하기는커녕 놈이 움직인 순간 물러나야 했다.
'망할.'
직감과 간파가 통하지 않는다.
몬스터들과 달리 구진하의 동작은 매 순간 변했다. 매번 궤도가 바뀌고, 직감으로 미리 읽더라도 그에 맞춰 변한다. 순간에 수십 수백 가지의 판단, 매 순간 바뀌는 궤도. 눈을 어지럽히는 기예. 세검사의 기량이 그의 손발에서 펼쳐지고 있다.
무엇보다, 주시하고 있어도 구진하의 움직임을 좇는 게 어려웠다.
'이게 기술?'
면면부절(綿綿不絶).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연격, 보고도 당해야 하는 불합리함. 이해할 수 없는 묘리를 담은 움직임. [모든 피해 감소]와 [경화]를 가지고 있는데도. 탄력으로 충격을 줄여도 골절당했다. 수많은 페널티를 가지고도 나와 놈 사이의 승부는 성립하지 않는다.
'격이 달라.'
새벽의 여명 3팀 팀장. A클래스 헌터. 세검사라는 별칭을 가진 랭커.
놈에게 붙은 화려한 수식어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자식은 정말 괴물이라고.
***
'충격을 줄였다.'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알파를 타격한 주먹. 피할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적중했지만, 감각이 옅다. 알파는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오연하게 이를 드러냈다. 만약 검이 있었다면― 숨통을 끊을 찬스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 그게 못내 아쉬웠다.
'멀리 갈 수도 없고.'
발이 묶여 있다. 홍유리의 곁에서 멀리 떨어질 수는 없다. 알파는 영악하게도 그 점을 이용하고 있다.
'거기다 마력도 사용하면 안 되고.'
치밀어오르는 두통이 정신 고갈을 경고했다. 괴물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마력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잠깐 공방을 나눠본 결과, 알파는 이미 스컬 울프의 수준은 진작 뛰어넘은 거로 보인다.
'달려들질 않는군.'
일부로 틈을 보여줘도 물지 않는다. 저만한 살의와 광기를 보이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을 살피고 저울질할 지성이 고등한 사고를 한다는 증거였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
시간을 끈다면 유리해지는 게 자신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영리하다 못해 영악했다. 구진하는 언젠가 읽었던 [시튼 동물기]의 늑대 이야기를 떠올렸다. 늑대 왕 로보― 거의 200년 전, 이름을 떨쳤던 가장 유명한 늑대의 이름이었다. 온갖 함정을 간파하고 사람들을 비웃었던 악랄한, 옛날이야기 속 늑대가 눈앞의 알파와 겹쳐 보였다.
'인간을 웃도는 지능을 가진 몬스터라.'
정말 자색의 흑호처럼 손쓸 도리 없는 괴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알파의 성장 가능성을 떠올리면 어쩌면 맹렬히 쫓아오는 살점 괴물보다 놈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상황은 좋지 않지만 어쩔 도리 없이 내몰려졌다.
"흐으윽."
쓰러진 채로 신음하는 홍유리. 팀장의 눈에는 알파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괴물이 오더라도 자신은 도망칠 자신이 있을 테니 추적자는 여기서 끊어내겠다는 건가?
'제기랄.'
영악? 영악함을 넘어 악랄하기까지했다.
***
D등급 재생의 효과는 탁월했다. 부러진 뼈가 우둑우둑 제자리를 찾았다. ―30초. 구진하가 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위험한 타이밍이었다.
"크르르!"
구진하를 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태동하는 악도 다가오고 있는데.'
이제 제법 가까이까지 왔다. 게다가 잿더미가 됐던 상처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그게 분명 내게만 암담한 상황은 아닐 텐데.
'이 자식은 감정이란 게 없나?'
담담한 눈빛. 그리고 포커페이스. 여유로운 태도였다. 분명 태동하는 악이 다가오면 놈도 좋지 않을 텐데 내색도 하지 않는다. 설마 무슨 수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 수를 박살 내면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구진하를 이길 수 없다. 홍유리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우리 사이엔 그만한 격차가 있었다.
그러니까―
"구오오오오오오오오!"
―보험이 나설 차례였다.
"…늪의 용!"
처음으로 구진하의 가면 같은 표정에 금이 갔다. 그걸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사태만큼은 놈도 예상치 못했단 거니까.
[늪의 용]
[체장 8.6m] [체고 2.7m] [체중 4.4t]
[힘 426] [민첩 415] [체력 476] [마력 318]
[보유 스킬]
[용린(C)] [악식(D)]
틀림없는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다.
***
'늪의 용!'
알파의 지능을 얕봤다. 놈은 인간을 상대로 함정을 파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 잠재적인 위협이 아니라 현재의 놈 자체가 크나큰 위협이었다. ―이렇게까지 수세에 몰린 적이 도대체 얼마 만이지? 구진하의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애드를 내는 몬스터라니. 그리고 정말 이게 끝일까?
알파가 파 놓은 함정이 여기서 끝일 거라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놈은 몇 번이나 상상을 뛰어넘었으니까.
'야단났군.'
늪의 용의 추정 클래스는 B ~ B+.
'좀 더 준비했었다면.'
안일했다. 던전에서의 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검이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스크롤을 가져왔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수도 없이 많은 후회가 구진하의 머릿속을 휘감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변하지는 않았다.
'할 수밖에 없다.'
울부짖는 늪의 용을 앞에 두고, 구진하는 주먹을 쥐었다.
"구오오오오오오!"
홍유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쓰러뜨려야 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으니까.
***
늪의 용(Swamp Dragon).
깊은 숲이나 늪지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아룡종. 비록 날개도 지성도 없지만, 용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아라네아 이상으로 강한 몬스터인데.
'괴물 같은 자식.'
그런 몬스터를 상대로 마력도 없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물러설 수 없는 거다.
"크와아악!"
늪의 용이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든다. 구진하는 그런 놈을 멈춰세우고.
'어쩌려고?'
구진하의 팔에 힘줄이 돋았다. 그리고 안간힘을 쓰던 그는.
"끄으으으…!"
늪의 용을 들어 밀어내고 있었다!
"쿠아아아악!"
4.4t의 체중. 426의 힘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데도…!
'아니. 지금이 기회야!'
가만히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다. 돌풍에 포함된 돌진을 이용해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이미 구진하가 막고 있다 ―분명 늪의 용과 실랑이하는 걸 보고 움직였는데.
'민첩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 내가 행동을 시작하면 놈은 이미 두 번째 세 번째 움직임을 취한다. 하단을 막던 주먹이 올라와 자세를 취한다.
'…피할 수 없다!'
태동하는 악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다. 더 시간을 끌 순 없다. 그러니까.
'뚫어야 해!'
마력을 전부 일으켰다. 광폭한 마력의 운용에 몸이 삐걱였다 ―148. 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괜찮다.
"크와아아악!"
반대쪽에서 늪의 용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구진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역시.'
드디어 마력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검의 손잡이가 틀어박히자 늪의 용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날뛴다. 마력을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던전의 보스조차 구진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내가 홍유리를 향해 달리는 그 짧은 사이에 두 번이나 늪의 용을 물리친 셈이다.
그 손에 검이 있었다면 용은 두 번 죽었으리라.
'……!'
마력을 사용하는 구진하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제까지의 움직임이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속도. 그러나, 나도 준비하고 있었다.
'예상했어.'
놈이라면 어떻게든 할 거라 믿었다. 달려드는 구진하의 주먹이 두개골을 부숴버리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쇄도했다. 어떤 기술도 없는 직선적인 움직임. 그렇기 때문에 최속. 구진하의 주먹이라면 분명 내 머리는 단번에 박살 날 터.
구진하의 눈이 확신으로 가득 찼다. ―그걸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통했으니까.'
팔의 궤도가 틀어진다. 구진하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문이 두 눈에 가득 담겨 있다.
'확신은 없었어.'
나는 당했지만, 구진하가 당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도박이었고, 성공했다. 구진하의 주먹을 쳐낸 마력이 되돌아온다. ―몽크에게 배운 기술. 은신을 사용해 마력을 숨기는 방법. 마력으로 구진하의 팔을 쳐냈는데도 궤도를 조금 비트는 데 그쳤다. 그의 손날과 내 두개골이 마찰을 일으켰다.
끄드드드득―!
스쳤을 뿐인데 두개골이 반파됐다.
그러나― 웃은 건 나였다.
"알파!"
소리치는 그를 무시하고, 쓰러진 홍유리를 업었다. 무섭게 쫓아오는 구진하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쫓아올 수 없었다.
"큭!"
방금 공방의 사이에서 돌풍은 놈의 발목을 완전히 찢어놨으니까. 그 자리에 주저앉은 구진하는.
"알파――!"
그의 비통한 외침이 숲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하여, 모든 준비가 끝났다.
태동하는 악을 유인하기 위한 준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