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22 악의 태동 (5)
'태동하는 악.'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모든 건 이 순간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전과는 달리 맹렬한 속도는 태동하는 악이 홍유리에게 입었던 상처를 대부분 회복했음을 뜻했다.
'터무니없네.'
[태동하는 악]
[체장 …] [체고 …] [체중 …]
[힘 510] [민첩 413] [체력 699] [마력 567]
'미쳤구나.'
힘은 506. 민첩은 409였는데 그사이에 좀 더 강해졌다. 원래 0이었던 마력조차 567, 터무니없는 수치였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본 가장 높은 수치는 홍유리의 마력 640이었다. 하지만 놈의 체력은 699. 홍유리의 마력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스테이터스다.
'대체.'
고작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으로 이렇게 됐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무언가,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작용했다.
"……."
구진하와의 싸움에서 너무 시간을 끌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놈과 나의 거리가 가까웠다.
[Lv.10 달성 조건 : 태동하는 악을 유인할 것]
시스템은 내게 유인하라고 했다.
유인― 즉, 어딘가로 끌고 가라는 소리였다. 태동하는 악이 쫓는 건 홍유리였고, 놈을 유인하기 위해 구진하와 싸웠다. 태동하는 악은 내 등에 업혀 있는 홍유리를 보았고.
'――!'
소름 돋는 시선에 털이 쭈뼛 곤두섰다. 남은 마력은 전체의 절반 이하. 699. 바다에서 아무리 물을 퍼 쓰더라도 바닥날 일이 없는 것처럼, 놈에게 체력이란 무한한 자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인즉,
'스태미나가 무한이나 다름없는 민첩 413의 괴물한테 도망친다?'
무한정으로 뻗어 나오는 촉수. 태동하는 악이라는 다시 없을 악의의 화신― 남은 거리는 고작 200m. 이전과는 다르다.
'덩치가 너무 커졌어.'
산이 움직이는 듯하다. 놈에게 짓밟힌 몬스터들의 수가 기백을 넘었고,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큿!"
촉수 다발로 등 위에 묶어 놓은 홍유리를 노리고, 놈은 자신의 몸을 분리해 던졌다!
"……!"
검은 살덩이가 질퍽이며 땅에 떨어지자, 주변을 검게 물들였다. 피? 체액? 놈의 피에 독이 섞여 있는 건가? 하나둘 떨어지는 살덩이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몇 개가 오는 거야!'
운석처럼 떨어지는 것이 숲을 검게 오염 시켜 물들인다. 놈을 피해 달리던 몬스터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미친!'
부딪힌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흑사병에 걸린 것처럼 빌빌대더니 숨을 거뒀다. 만약에라도 맞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묶어놓은 홍유리를 촉수 다발로 완전히 덮었다.
'유인.'
생각해야 한다. 시스템은 나한테 놈을 쓰러뜨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유인하라고만 했지.
'어디로?'
설마하니 던전 밖으로 나가라는 소리는 아닐 터. 늪의 용? 지금쯤 구진하한테 떡이 되어 있지 않을까? 늪의 용이 아니라 진짜 용이 오더라도 지금의 놈한테는 힘들 것 같다.
'그럼 누구한테?'
구진하도 당해내지 못했고, 홍유리도 쓰러졌다.
그러나 시스템은 언제나 명확한 길을 제시해왔다. 좀 더, 좀 더 생각해보면...!
'안 돼!'
지척까지 따라온 놈을 피해 마력을 끌어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화된 신체는 다시 거리를 벌렸지만, 그럴 수 있는 찬스도 앞으로 한 번. 그 뒤는 없다. 구진하를 따돌리는데 생각보다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달성 조건은 유인이야.'
만약 시간을 끌라고 했다면 유인이 아니라 생존 혹은 버티기였겠지. 따라서, 누군가를 찾아가라는 뜻이었다.
'망할. 항상 애매하게 친절하다니까.'
반대인가? 달성 조건이 이게 아니었음,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가능한 수목이 우거진 곳으로 달려 놈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그러는 와중에 감지를 사용하는 걸 잊지 않았다.
'생각해라. 생각해!'
신전의 주교? 아니 주교라도 태동하는 악을 이길 순 없다. 애초에 던전 밖에 있을 테고. 그럼 이 던전에서 태동하는 악을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는 누구지?
밀려드는 살점의 폭격. 수는 많았지만, 그나마 떨어질 위치를 미리 알고 있어서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큭!'
돌풍이 오염된 초목을 흩날렸다. 어디로 떨어지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이미 떨어진 살점들이 길을 막고 있는 건 영 껄끄러웠다.
'…망할.'
몰리고 몰린 끝에, 숲의 끝이 코앞이었다. 숲의 끝. 던전의 경계를 넘으면 공원으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
"후우욱. 후우우!"
쓰러진 용의 배를 깔고 앉은 남자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발목이 찢어져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손등을 잘근잘근 씹으며 억지로 견뎠다.
'홍유리…'
이해 가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알파가 홍유리를 납치한 이유였다. 도대체 왜? 처음에는 인질로 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지. 알파는 미련 없이 떠났으니.'
그렇다면 굳이 홍유리를 납치한 이유가 뭘까? 그다음으로 구진하는 알파가 홍유리의 '추적의 마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태까지 봐왔던 알파라면 예상을 뛰어넘어 혹시 알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럼 굳이 데려갈 이유가 없다. 홍유리를 업고 도망치는 것보다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고 도망치는 게 더 나았으리라.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알파가 홍유리를 데려간 이유는?'
모르겠다.
몬스터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몬스터지 어디 사람이겠는가? 다만, 알파가 지금 당장 홍유리를 죽이진 않을 것 같다. 분명 쓸 데가 있어서 데려간 거겠지. 자책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게 먼저였다.
'일단 합류하는 게 먼저다.'
구진하는 절뚝이는 다리로 손등을 씹어가며 걷고 또 걸었다.
***
"크후욱!"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슬라임이던 시절에는 못 느꼈는데 육체를 얻고 난 뒤 처음으로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발을 멈출 순 없다. 그 순간이 곧 죽음이었으니까.
쿠구구구구…!
거리가 좁혀지자, 놈이 촉수를 뻗어왔다.
'마력을 써야 하나?'
딱 한 번 여분이 있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면 나중이 감당되지 않는다. 만약 신전과 마주하면? 다른 헌터한테 발각당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길한 상상이 발목을 붙잡았다.
30cm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송곳. 머리 위를 흉흉하게 스친 채찍. 그 와중에도 살의 폭격은 멈추지 않는다.
'……!'
가까스로 피했다. 채찍이 바닥을 완전히 헤집어놓은 사이 촉수 하나에 꿰뚫리고 말았다. 문제는 뒷발과 지면이 함께 관통되어 바닥과 붙었다는 점.
[선택하십시오]
흘러나오는 피. 촉수는 질겨서 끊어지지 않는다. 악식까지 사용해가며 가까스로 물어뜯었을 무렵에는.
"......!"
숲의 끝에서, 거대한 살덩이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울타리가 쳐진 듯 사방이 살점으로 가득했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선택의 때를 알려오는 목소리가.
[나아갈지 혹은 멈춰설지를]
이번에도 선택을 강요해왔다.
***
"팀장님!"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우택이 만신창이가 된 씁쓸한 웃음을 짓는 팀장을 부축했다.
"미안하다. 유리를 뺏겨버렸어."
"…부팀장님이."
믿기 힘든 사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농담할 리 없다. 정말 알파가 홍유리를 데려가고 만 것이리라.
"몸은 괜찮으십니까?"
"죽겠다. 그래도 나보다 걔가 급해. 쫓을 수 있겠어?"
"하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말. 그 자신도 한계에 다다랐을 텐데. 뒤늦게 우택의 뒤를 쫓아 신전이 도착했다.
"크헉! 뭐, 뭘 그리 빨리 가는 거요? 쫓는 게 버겁잖소."
"…죄송하지만 저희 팀장님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전 괴물을 쫓겠습니다."
"…먼저 가시지요. 우리도 곧 증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밖으로 가면 희망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명 2팀과 3팀의 정예들. 그들까지 온다면 어쩌면 저 괴물을 막을 수 있을지도?
"후우우. 우리가 해줄 수 있는게 그런 것 밖에 없어 보이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전 먼저."
"형제들. 부탁하오."
"성대운 형제님… 부디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주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음! 주님께서 굽어 살피시기를."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몽크가 구진하를 부축했다.
"경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시죠."
쓴웃음을 지은 구진하는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건지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가, 한참을 가다가.
"무언가 옵니다! 전투 준비!"
놀란 몽크의 말. 그러나 정작 나타난 건 몬스터가 아닌 사람.
"3팀장님! 괜찮으십니까?!"
던전에 같이 들어왔던 2팀의 일원, 성훈이었다.
"괜찮습니다. 것보다, 알파가 유리를 데려갔어요. 쫓을 수 있겠습니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잊으셨습니까?"
성훈의 말에 멍하니 있던 팀장이 흠칫했다.
"제가 누굴 찾고 있었는지요. 이미 그 분이 가고 계십니다."
"하. 망할. 진작에 좀 왔으면 어디 덧나나?"
"제 말이요. 한가하게 낮잠이나 자고 있더라니까요? 눈곱까지 끼어 있었습니다."
투덜거리는 두 사람의 말과는 달리 그들의 안색에 불안이 사라져 있었다. 그게 못내 의아했던 몽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그러는 겁니까?"
저 끔찍한 괴물을 상대로 이들의 불안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이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
경계의 끝에서 완전히 둘러쌓이고 말았다. 놈은 거대한 몸뚱이로 사방을 덮어 길을 봉쇄했다.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폭격과 송곳과 채찍을 피하는게 버거웠다.
―선택. 선택하라고 했었지.
'당연히 나아간다.'
경계를 넘으면 당연 놈은 나를, 아니 내가 업고 있는 홍유리를 쫓을테고, 그럼 도심 속에 놈을 풀어놓는 꼴이 된다. 만약 홍유리를 놈에게 제물로 바친다고 해도 놈의 살육은 멈추지 않겠지. 어쩌면 가장 귀찮게 했던 나를 쫓아 도심 밖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간다―!'
놈을 경계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한다.
살점의 폭격, 날카로운 송곳, 날아오는 채찍을 모두 피할 각오를 다졌다.
'변화는 사용하기 어려워.'
홍유리를 감싼채로 변화를 쓸 순 없다. 거기다 남은 마력은 딱 한번. 사용하면 아마도 정신 고갈이 찾아온다. 사방팔방을 둘러싼 태동하는 악. 이미 물러날 곳이라곤 없다. 그리고― 물러날 맘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용하지 않기로 맘 먹었던 스킬. 화르르 타오른 잿불이 수풀을 태웠다. 곧 거대한 화마로 변한 잿불은 돌풍을 집어삼켰다.
놈의 촉수가 뻗어왔고, 그걸 타고 올랐다. 돌풍을 집어 삼킨 화마는 맹렬한 기세로 살점을 따라 놈을 불태웠다. 검은 살점이 타올라 매캐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
형언할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는 태동하는 악.
끝없이 재생해봤자 불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잿불은 끝없이 놈을 태웠고, 놈은 그 이상으로 몸을 재생해야만 했다.
'너무 높잖아.'
올라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놈의 전신에 불길이 번지는 만큼 연기가 피어올랐다. 돌풍은 연기를 밀어냈고, 오르는 사이 채찍과 송곳을 피했다. 발 아래 살점이 꿈틀대며 함정처럼 구멍을 만들었고, 가시처럼 돋아난 살점이 진로를 방해했다.
그 모든 걸 피했음에도, 놈이 만들어낸 수십 개의 채찍만큼은.
'이건!'
[간파(E) Lv.5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간파(E) Lv.5 -> 간파(E) Lv.6]
간파의 레벨이 올라도 소용없다. 내가 움직일 사방 팔방을 모두 점하고 있다.
마력을 일으켜도 늦는다…!
'이건 피할 수 없어!'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 아라네아 때처럼 몸을 변형시켜 탈출할 작은 틈도 없다―!
'……!'
경화에 모든 피해 감소를 더한다고 해도 분명 즉사― 라고 생각했던 순간.
'어떻게?'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그래야한다는 것처럼 공간을 뛰어넘었다― 어떻게?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고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맞는 건 기정사실이었는데?
'…설마 홍유리가?'
단거리 이동 마법? 모르겠다. 확실한 건 생각할 시간에 움직여야 한다는 것. 망설이지 않고 한 줌 남은 마력을 일으켰다.
'지금!'
한 박자 늦게 수십 개의 채찍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서로 부딪혔다. 그 충격에 태동하는 악이 요동치자 반동과 함께 탄력을 이용했다.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며 놈의 살점에 발톱을 박아 가까스로 떨어지지 않았다.
"크르르―!"
체액에 발톱이 오염됐다. 몬스터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약한 독 내성(F) Lv.8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독 내성(F) Lv.8 -> 미약한 독 내성(F) Lv.9]
겨우 균형을 잡았나 싶었더니 이번엔 현기증이 따라온다.
'망할.'
정신 고갈이 가까워졌다. 바닥을 드러낸 우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마력 재생(D) Lv.2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마력 재생(D) Lv.2 -> 마력 재생(D) Lv.3]
작게나마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르륵!"
잠깐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사이 앞발이 송곳에 꿰뚫렸다. 살점이 살점을 뚫어 내 움직임을 묶었다.
'질겨. 끊기 힘들어.'
돌풍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 악식으로는 시간을 맞출 수 없다. 변형으로 발 모양을 바꿔 빠져나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놈을 지나 반대편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들려오는 말소리.
"저 늑대는?"
지리산에서 보았던 헌터였다. 하지만 그가 왔음에도 안심할 수 없다. 그보다 강한 구진하와 홍유리도 결국 태동하는 악을 쓰러뜨리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정작 전우택의 상태도 좋지 못했다.
"후, 후우욱! 따라가는 것도 버겁군."
전에 갑토랑을 놓쳤던 그 성기사도 뒤따라왔지만, 기대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명이 클랜 차원에서 날 쫓고 있다는 건 확실해보인다.
"큭!"
채찍을 피하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여명이 날 쫓는거라면. 시스템이 말한 '유인'이 새벽의 여명을 염두에 두고 말한 거라면.
내가 알기로 여명에서 홍유리와 구진하보다 강한 건 두 명이었다. 먼저 클랜 로드이자 1팀의 팀장인 강태준. 하지만 고작 나 하나 쫓겠다고 여명의 수장이 왔을 리는 없겠지.
'그러니까…'
그리 생각해보면 남는 건 딱 한명 뿐이다.
'강태호.'
강태준의 동생이자 선발 2팀의 팀장. 또한 검을 대변한다(劍公)는 별칭을 가진 괴물.
'강태호는 어딨지?'
"크흐압!"
저 아래에서 전우택이 자세를 잡았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걸 보니 태동하는 악을 멈출 모양이었다.
"무리요! 그 손으로 어떻게 하겠다는거요!"
"…걱정 마시죠."
망가진 손. 성기사가 보기에 이미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번 더 부딪친다면 어쩌면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사는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빗나갔다?!'
아니, 빗나간 게 아니다. 이 거리에서 맞추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가 노린 건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아!'
그의 주먹으로부터 풍압이 촉수를 헝클었다. 그 틈에 늑대는 화마를 일으키며 달렸다.
"처음부터 길을 만들어 줄 생각으로?"
"부팀장님은 지금 알파가 데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즉, 늑대가 괴물에게 잡힌다는 건 홍유리 또한 죽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늑대를 살려야했다.
"어디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겠소?"
"일단 시선이라도 끌어야겠죠. 가능하시겠습니까?"
"맡겨주시오!"
영차, 망치를 들어올린 그가 믿음직하게 웃었다. 최후의 최후,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망치를 쥐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은 주교가 담담히 끄덕였다.
"구마준 신자님이 괴물이 되었고 그 이유는 모르신다는 거군요?"
"죄송합니다."
박요한이 면목없다는 듯 시선을 떨구자 주교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교님. 외람되지만, 그건 정말 괴물 같았습니다. 만약 던전 밖으로 나온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그 괴물이 던전을 나와 이 도심에서 활개친다면? 생각만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괜찮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던지요."
주교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창문을 연 주교는 던전으로 변한 이현공원을 바라보았다.
"후후… 그분께서 계시니까요."
***
이제까지 없던 힘으로 성기사는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깔끔하고 군더더기없는 교본적인 일격이었다.
"크으윽!"
그러나 결정적으로 힘이 부족하다.
태동한 악은 생물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 어설픈 초인의 일격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성기사는 몇 번이나 해머를 휘둘렀다. 쩌엉! 쩌엉! 쩌엉! 쩌렁쩌렁 울리는 망치질에도 불구하고 태동한 악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큭!"
쩌어엉!
마지막 힘까지 모아 망치를 휘둘렀으나, 망치가 날아갔다. 덜덜 떨리는 팔, 그리고 손아귀가 찢어져 무언가를 쥘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B클래스도 되지 못한 그의 힘으로는 이 살더미 괴물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그래. 자신으로써는 저 괴물의 시선을 끄는 것조차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힘이, 압도적으로 힘이 부족하다.
절망스러울 정도의 격차였다.
"포기할 줄 알고?"
그래도 성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오기로 악으로 깡으로 날아간 해머를 찾았다. 그러나 끝내 해머를 쥐진 못했다. 힘에 부쳐서도 아니었고, 손아귀가 찢어져서도 아니라.
"거 썩 괜찮은 사내로군!"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사내가 해머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성기사의 눈이 휘둥그레 떠지자, 그는 씩 웃어보였다.
"어디, 잘 보시오."
아까까지 성기사가 들었던 망치를 쥐고, 거한이 소매를 걷었다.
"망치질은 이렇게 하는 거니까!"
거한의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으로부터 돋아난 힘줄이 세차게 박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