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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43화 (43/407)

〈 43화 〉 #22 악의 태동 (6)

성기사, 아니 성대운은 사람이 그렇게 거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

사람이라기보다는 맹우(猛牛)에 가까운 근육. 울긋불긋 솟아나는 힘줄은 쇠심줄을 연상케했다. 처음 머리 하나 크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어느새 자신의 배는 커다래져있었다. 극한까지 압축되었던 근육의 팽창.

'들어 올릴 뿐인데?'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풍압으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이윽고 바람이 잦았을 때, 그의 무식한 근육이 뻣뻣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극한의 긴장 상태.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힘을 모으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아니,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고 있다.

'……!'

그리고 마침내 대기의 흐름이 멈췄을 때, 성기사는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Lv.10 달성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9 -> Lv.10]

'레벨이 올랐어?'

9레벨은 도달했지만, 경험치를 최대치까지 쌓아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

그러고 보니 태동하는 악이기 이전에도 같은 메시지를 보았다. 지금은 태동하는 악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지만, 키메라라는 형질 자체는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그리고 동시에 체력이 회복됐다. 가까스로 살점의 벽을 넘어 지면에 착지했다. 주먹을 뻗고 있는 헌터, 전우택. 그가 날린 권풍이 촉수를 뒤흔들어 길을 터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는 홍유리 때문일 터. 전우택은 우묵한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홍유리를 데리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태도였다.

'내놓으라는 거군.'

사실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좋건 싫건, 몬스터나 동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위협받는 건… 정말 싫은 기분이었다.

하물며 크게 보자면 그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는데도.

'그 처음이.'

홍유리였다. 이은하와 괴물 늑대한테 맞서 싸운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단지 상황이 그러했을 뿐이었는데.

그래서였을 것이다. 멋대로 배신감을 느꼈던 건. 내가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느꼈던 억울함은 제멋대로인 억지일 뿐이었는데. 홍유리는 자기 일을 했을 뿐인데.

'이해는 하고 있어.'

그래도 느끼는 건 다른 법이다.

누군가는 밴댕이 소갈딱지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도 고민하고 있었다.

'홍유리를 먹어치운다면.'

20레벨까지 단번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러리라.

'그리고.'

만신창이인 전우택까지 쓰러뜨릴 수 있다면 다음 진화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

누군가의 불안한 듯한 시선을 받으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가능할 리가 없지.'

그런 짓을 해봤자 멸망을 부추길 뿐이다. 촉수로 덮었던 홍유리의 모습이 드러나자 전우택의 시선이 고정됐다.

"……."

언뜻 보기에 그 시선은 담담했지만, 그 눈동자 속 한줄기 불안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피를 흘리고 있는 홍유리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구진하가 천으로 감아두기는 했지만, 이리저리 많이 흔들렸으니 상태가 좋진 않겠지.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고.'

홍유리를 내려놓자 전우택이 재빠르게 안아들었다.

'잘 하면 죽을지도.'

전우택이 묘한 시선을 보냈다. 나를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모양. 지금 몸 상태로 날 죽일 수는 있는지. 또 그럴 시간은 있는지 계산하고 있을 터. 그러더니 결국 몸을 돌렸다.

'…홍유리부터 살리겠다는 거네.'

옳은 판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태호.'

커다란 배틀 해머가 그에게는 공구용 망치처럼 작아 보였다. 한계까지 압축됐던 근육이 해방하려는 순간, 전우택은 흠칫하며 달아났다.

강태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태동하는 악의 시선은 거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위협―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이들부터 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빈사상태의 홍유리보단 당장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강태호가 더 위협적이라 판단한 모양이었고.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

송곳, 촉수, 채찍, 폭격. 그리고 존재 자체가 폭력인 거대함. 태동하는 악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거한을 막으려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닿기 직전에 모두 의미를 잃었다.

"크르르르, 크르륵!"

발톱을 땅바닥에 깊게 박아 넣고서도 몇십 센티는 밀린 것 같다. 그가 극한까지 힘을 끌어올려 휘두른 망치가― 태풍을 만들었다.

'진짜…'

어쩌면 힘 하나로만 따지면 모든 헌터 중에서 최강일지도 모르는 인물. 강태호의 망치질이 태동하는 악에게 닿은 순간, 태동하는 악이 나가떨어졌다.

'나가떨어져?'

헛웃음이 나왔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작은 산만한 덩치인데 방금 일격으로 태동하는 악이 움직였다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괴력. 그런데도 거한, 강태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거, 미안하오. 망치가 부서져서… 응? 왜 거기 있소?"

풍압에 날아간 성기사에게 망치를 건네자 얼빠진 얼굴로 봉이 된 망치를 받아들었다.

해머란 게 원래 부서지는 물건이었던가?

"아, 아니. 그건 괜찮소만."

무기 없이 괜찮겠느냐 묻던 성기사의 입이 다물어졌다. 거한이 허공을 움켜쥐더니 어디선가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대검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대검이라기보다도 공성무기에 가까운 크기였다. 2미터를 족히 넘는 거한보다 배는 커다란 철덩어리.

'패태검(覇太劍).'

검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지만, 저 검으로 하여금 모든 검사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검을 대변한다(劍公)는 별칭을 얻었으니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물러나 계시오. 휘말리면 위험하니까."

강태호의 경고에 성기사가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식한 검을 휘두르자 태동하는 악이 ―갈라졌다?

'난 촉수 하나 끊는 것도 버거웠는데…?'

두 동강 난 태동하는 악이 재생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패태검을 휘두른다. 매번 지형이 바뀌고 대지가 갈라졌다.

'이게 인간이냐?'

도망치는 것도 힘들었는데 강태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놈을 몰아붙이고 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도 할 일을 해야지.'

C등급 은신을 활성화하자 성기사가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사라진 날 찾지 못하고 있다.

'아. 됐다.'

더 강한 헌터라면 모르겠지만, 성기사한테는 통하는 모양.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내 모습이 사라졌으니 의아해할 만도 하지.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숲을 되돌아 달렸다. 홍유리를 업고 도망친 길을 다시 달리는 동안 제법 많이 오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윽고 내가 돌아간 길 끝은 구진하를 따돌렸던 곳이었고.

'역시 아직 남아 있네.'

[늪의 용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식탐(D)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식탐(D) Lv.3 -> 식탐(D) Lv.4]

[경험치가 최대치에…]

'어우.'

얼른 메시지를 치웠다.

늪의 용은 아라네아보다 강한 몬스터였다. 지금 내가 쓰러뜨리는 건 무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6만이 넘는 경험치가 4번이나 채워져 10레벨에서 14레벨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거의 30만에 달하는 경험치를 한 번에 획득했다.

'…흠흠.'

재주는 구진하가 부리고 이득은 내가 챙겼다.

그리고 아직 먹을 게 남아 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끔찍하게 오염되어 죽어 간 형상들. 태동하는 악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몬스터들이었다. 완전히 오염되어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나만은 달랐다.

'악식이 있으니까.'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미약한 독 내성(F)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독 내성(F) Lv.9 -> 미약한 독 내성(F) Lv.10]

[미약한 독 내성(F)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독 내성(F) Lv.10 -> 약한 독 내성(E) Lv.1]

슬라임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독 내성이 마침내 E등급으로 상승했다.

'흠흠.'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입꼬리가 자꾸 씰룩였다.

***

"…도망?"

성기사가 얼빠지게 중얼거렸다. 살점 괴물이… 도망치고 있다?

"아, 귀찮게."

패태검을 어깨에 짊어진 거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꾸물거리는 살점 괴물이 무언가를 뱉어내고 있었다. 뱉는다… 도대체 무엇을?

'뱉는 게 아니었군.'

분열, 분열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분리이리라.

"쯧. 쓸데없는 짓을."

다시 한번 패태검을 휘두르자, 분리된 살덩이 대부분이 쓸려나갔다. 그러나 전부를 처리하진 못했다. 상당히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건물만큼 커다란 살덩이가 그를 막아섰다.

"흠."

그래봤자 이놈을 끝장내는 건 앞으로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속으로 계산을 마친 거한이 성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정도면 괜찮겠지. 쫓을 수 있겠소?"

가지고 있던 포션을 던지자 얼떨결에 받아 마신 성기사가 끄덕였다.

"…맡겨주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보겠소."

"적당히 하시오. 적당히."

거한이 보기에 분리된 조그마한 것들은 대부분의 능력을 상실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성훈이 이 자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패태검을 휘두르며, 거한은 자신을 깨우러 왔던 헌터를 떠올렸다.

―분명 특수종 늑대를 보는 게 신기하다며 데려가달라 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뭐, 제놈 알아서 하겠지만."

정 신경 쓰이면 최대한 빨리 죽이고 가면 될 테니까.

***

[던전의 공포(스컬 울프) Lv.17] [EXP 62584 / 96238]

[업 0.06%]

[체장 2.21m] [체고 94.9cm] [체중 141kg]

[힘 183] [민첩 204] [체력 262] [마력 180] [극기 4]

'좋아. 상상 이상이야.'

순수 스테이터스만 보더라도 C클래스 헌터와 맞먹을 수 있게 됐다. 스킬로 인한 시너지까지 생각해 보면 이제 아라네라와 1:1로 싸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태동하는 악 때문에 골치는 썩었지만, 놈이 남긴 먹잇감들은 그 이상으로 날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저것만 먹으면…?'

남은 먹잇감들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것들을 먹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언가― 라고 해야 할까? 조그마한 검은 살덩이였다. 그것들이 기괴하게도 죽여놓은 오염된 시체를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있었다.

'설마?'

역시나. 통찰로 확인해 본 결과, 태동하는 악이었다.

[멸망 확률 99.84% -> 99.8%]

[0.04%만큼의 업을 획득합니다]

'0.04%?'

갑자기 멸망 확률이 줄어들 일이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강태호가 태동하는 악을 죽였다는 소리였다. 그런 것 치고는 획득한 업이 너무 작아 눈살을 찌푸렸다가.

'아.'

내가 쫓지 않았다면 구마준은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을 마실 일이 없었겠지. 즉, 원래는 벌어지지 않았을 일. 시스템은 '구마준이 죽었다'라는 사실만큼만 인과율을 계산했다는 소리였다.

'…그럼 저 잔재들은 어차피 태동하는 악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건가?'

좋은 먹잇감. 썩어도 태동하는 악의 잔재였다.

"그르르―!"

이를 드러내자 그것들이 달려들었다. 저런 모습인데도 시력과 청력이 있는 모양. 과연 얼마나 많은 경험치를 줄지 기대됐다.

'겁도 없네.'

강태호한테는 도망쳤으면서 사람 차별하나? 살덩이 하나하나는 기껏 해봐야 너구리만 한 크기였고, 스테이터스는 코볼트 수준이었다. 덩치에 비하면 놀라운 스테이터스였지만.

[―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내가 당하는 게 무리였다.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돌풍을 사용하기만 해도 가차 없이 썰려나갔다. 믹서기처럼 갈려버린 태동하는 악의 잔재들은 꾸룩꾸룩 거릴 뿐 행동을 취하진 못했다.

'짭짤하네.'

마리당 1000… 감지로 느껴본 기척이 대충 30마리 정도 있으니 다 먹으면 18레벨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식탐이라는 것도 이젠 좀 알겠어.'

처음엔 전혀 감을 못 잡았지만, 생물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배고픈 상태를 유지한다는 건.'

끊임없이 먹어치울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공복으로 인한 굶주림을 겪는 건 아니었으니 대단한 스킬이라고 할 만했다. 부정형이던 시절에야 있으나마나한 스킬이었지만.

'부정형을 버린 건 여전히 아쉽기는 해.'

악식으로 섭취할 때마다 독 내성의 숙련도도 함께 오르는 모양이었다. 약한 독 내성으로도 완벽히 막지는 못했지만, 곧 회복될 거라 문제는 없다― 그러니까 회복되기 전까지는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현기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무언가에 꿰뚫렸다.

'…어떻게 된 거지?'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이 담긴 화살. 돌풍을 꿰뚫은 화살이 내장까지 헤집어놓았다. 모든 피해 감소가 없었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격으로 죽었을지도 모를 상황.

'신전에 화살을 쓰는 사람이 있나?'

아니, 없다. 내가 알기로 신전 소속이 화살을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말인즉,

'여명.'

여명 소속이라는 뜻. 던전에 입장한 클랜이 그 외에 없다고 단정 짓진 못하겠지만, 아마 신전이 위임받은 상태에서 많은 클랜을 들여놓을 리 없으니까.

'여명에 활잡이가 누가 있었지?'

일일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많다. 하나 확실한 건 싸워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싸움을 걸었을 터.

'…물러나자.'

최소 B클래스. 어쩌면 A클래스일지도 모른다. 곧바로 은신을 사용했지만 그럼에도 화살은 날아왔다.

'망할.'

가까스로 피했지만 요행이었다. 눈앞에서 검은 살덩이가 먼저 맞아서 터지지 않았더라면 보고도 당했을 터.

은신이 마냥 만능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몸을 숨긴다는(隱身) 것이 상대의 인지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눈치채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공격까지 한 상태에서야 모를 리 없다.

'…그렇다 해도 C등급 은신을 꿰뚫어 볼 실력이 있다는 소리야.'

궁수 다운 눈이라고 해야 할까.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는 부러진 수목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 너머에서 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대략 2km. 저 거리에서 저격했다고?'

제대로 달려도 30초는 걸릴 거리다. 그동안 저격을 당할 걸 생각하면 승산은 희박했다. 게다가 궁수라고 한들 접근했다고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게 물러나려고 했을 때, 흰 투구의 성기사가 가로막았다.

'망할.'

"으음…."

잠깐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성기사는 이내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나름 태동하는 악에 맞선 동료가 아니었나… 하긴 신전이 그런 걸 따지는 게 더 이상 하겠지. 그래. 기대도 안 했다.

'혼자라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던전에서 처음 만났던 당시라면 성기사와 싸우는 게 어쩌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길어야 1분이면 그를 죽이거나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저격. 궁수야.'

궁수는 성기사만으론 내 발을 묶는 게 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능한 빠르게 성기사를 제치고 도망친다. ―궁수가 저렇게까지 다가온다는 건 정말 모습을 드러내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곧바로 돌풍과 함께 달렸지만, 그 길을 당연하다는 듯 성기사가 막았고, 휘두르는 메이스를 피했다.

원래라면 성기사가 날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 하지만 처음 저격의 피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재생이 있다고 해도 내장이 헤집어진 상처를 회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돌풍에 휘말리는 와중에 성기사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갑옷 사이로 물어 뜯기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좋아.'

체력이 떨어진 건 아무래도 나뿐만이 아닌 모양. 그대로 성기사를 밀어 넘어뜨리자 태동하는 악의 잔재들이 그를 먹어치우려 달려들었다. 성기사가 발버둥 치는 사이, 화살이 날아와 그를 구했다.

'됐어. 예상대로야.'

날 쫓는 것보다 성기사를 구하는 게 먼저 일거라 예상했다. 예상은 적중했고 이제 도망칠 수 있다― 고 생각 한 순간 더한 절망이 가로막았다.

"성훈이를 제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3팀이 놓친 가락이 있기는 했군."

'……!'

시스템이 멸망 확률의 변동을 알려줬을 때, 그걸 경고로 받아들여야 했다.

왜 좀 더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 바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때늦은 후회였다.

'시발… 바로 튀어야 했는데.'

패태검을 짊어진 거한이― 절망 그 자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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