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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44화 (44/407)

〈 44화 〉 #23 환계(幻界)

강태호에게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0에 수렴했다.

그 수많은 어드밴티지를 가지고도 보스 몬스터를 애드까지 내서야 구진하에게 홍유리를 뺏는 걸 성공했을 정도인데 강태호는 그보다 강하다. 하물며 심지어 뒤에는 이름 모를 저격수까지 있다.

'끝이다.'

도망치는 건 만에 하나라도 불가능하다. 발버둥으로 C등급 은신을 사용해봐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허, 참. 은신 계열 스킬까지 가지고 있다니."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있다. 똑똑히 보인다는 뜻에 숨을 죽이고 침을 삼켜야만 했다.

'역시…'

설령 남은 스킬 포인트를 다 써서 은신의 레벨을 올리더라도 숨는 건 불가능하다. 하물며 속도와 관련된 스킬을 획득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

"어. 팀장님. 빨리 오셨네요?"

시위를 내리지 않은 채, 궁수가 등 뒤에 섰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저격당할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강태호가 어깨에 짊어진 패태검을 내리는 순간,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

"어. 유리랑 진하가 당할 만큼은 하더라."

"…근데 벌써 왔다고요?

"어차피 베면 다 죽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게 안 되니까 당한 것 아닌가. 물론 그에게는 그게 사실이겠지만.

"죽일 겁니까? 아깝지 않습니까? 일단 갯과니까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놈 여태까지 한 짓을 보고도 길들인다고? 너 자신 있냐?"

궁수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몬스터를 길들인 사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한 달 동안이나 수색 3팀을 엿 먹인 놈이다. 도대체 어떻게 지리산을 벗어났는지는 아직도 의문이거니와 경산의 던전에서 목격되지 않았더라면 쫓지도 못했을 터. 결국 궁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제기랄.'

성큼 다가오는 발걸음. 죽이는 건 기정사실인 모양이었다. 도망칠 수 없고 숨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

'변화.'

[변화]를 사용해서 성대를 만들었다. 구조 따위는 모르지만, 일전에 구상섭을 죽였을 때 한번 사용해보았으니 어렵지 않았다.

"멈. 춰."

입 밖으로 언어가 나온 순간, 무슨 일에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거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궁수는 넋이 나가 시위를 놓쳤다. 조준하고 쏜 것이 아님에도 매서운 화살을 가까스로 피하자 궁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활대에 시위를 걸었다.

"티, 팀장님.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닙니까? 설마 팀장님도 들었습니까?"

"…사살하는 건 취소다. 생포. 무조건 생포한다."

'망할. 어쩌지?'

그나마 다행인 건 거한이 패태검을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아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패태검이 사라지자, 거한이 뿌득뿌득 손을 풀었다.

"역시 때리는 건 손맛이지…?"

미친놈. 구진하의 빗나간 주먹에도 두개골이 반파됐다. 강태호한테 어딜 맞더라도 즉사를 면치 못한다. 이대로 잡혔다가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우리에 갇혀서 실험용 동물로 끝나는 것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야 했다.

"탕아들. 위협. 꼬리."

"…뭐라는 겁니까?"

"모르겠는데."

'망할.'

이 시점에 탕아들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알고 있어도 [탕아들]이라는 명칭까지는 모르는 것일지도. 뭔가 다른… 주의를 끌 만한 다른 말을 떠올려야 했다.

'뭐가 있지? 무슨 말을 해야 강태호를 멈출 수 있지?'

소설 속에서 강태호는 어떤 일을 했더라? 무슨 일을 벌였지?

"강훈. 생존."

급한 상태에서 떠오른 말. 그 말에 강태호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강태호의 표정이 스산한 살기를 발했다.

"…성훈아. 저놈 무조건 잡는다."

"어차피 그럴 생각 아니었습니까?"

'망할.'

시위를 떠난 화살, 동시에 강태호가 다가왔다. 솥뚜껑처럼 커다란 주먹이 시야 전체를 가리고―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뀨"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

"…사라졌다?"

거한은 멍하니 허공을 헤집었다. 단순히 모습을 숨긴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자신이 놓칠 리 없었다. 아무리 마력을 퍼뜨려봐도 이미 여기에 알파는 없다. 마치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알파가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거한은 으스러지라 주먹을 쥐었다. 수십 km 밖을 꿰뚫어 보는 그의 시력이 늑대를 쫓았으나,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팀장님… 이게 대체?"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미 여기에 없다는 거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주문서의 존재였다. 단거리 이동 주문서(Blink Scroll) 같은 도구들. 혹시 놈이 그걸 가지고 있다가 사용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기엔.'

전조가 되는 현상이 없다. 마력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찢어진 스크롤도 없다. 거기에 더해 빛무리도 일어나지 않았고.

"허. 이거였나? 유리가 쫓지 못했던 이유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잡히지 않았던 걸까? 어떤 능력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투명화? 공간도약? 혹시 스킬이 아니라 마법인 건 아닐까? 말을 할 지능이 있다면 혹시라도 마법을 배웠을 가능성은…

'미치지 않고서야.'

거한은 고개를 흔들어 그 가능성을 지웠다. 마법을 배웠다는 건 어떻게든 스퀘어와 연관이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스퀘어가 굳이? 굳이 자신들을 적으로 돌릴만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거한은 회의적이었다.

"팀장님. 이건 도대체 뭡니까?"

"……?"

궁수가 들어 올린 것은 마치 뱀의 것처럼 보이는 에메랄드색 비늘.

"이건 설마…"

그 비늘을 본 거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또 그 현상이다.'

태동하는 악을 지나치려 달렸을 때 느꼈던 현상. 나는 그걸 홍유리가 사용한 마법이라고 생각했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빈사상태에서 마법을 사용한 거라고. 하지만 지금 홍유리는 없다. 즉, 홍유리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존재가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여기는 대체…?

'마치 다른 세상 같아.'

아니, 실제로 다른 세상이겠지. 자세히 보면 방금 강태호와 궁수에게 둘러싸였던 장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푸른 물감을 쏟은 듯한 색감과 머리 위, 하늘이 있어야 할 곳에 에메랄드빛 녹색 바다가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점을 뺀다면.

'아.'

그러다가 푸른 색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마력. 농도 짙은 마력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친.'

숨 막힐 듯한 마력의 농도. 숨만 쉬어도 마력이 올라갈 것 같다. 여긴 어디고 대체 누가 날 여기로 데려왔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녀석은 대체 뭐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마치 뱀 같은 생명체…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뱀처럼 기다란 몸에 아름다운 날개가 붙어 있었다. 새보다는… 나비의 날개? 잘 보니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였다.

"뀨루룩~ 뀨루룩!"

요상한 그것은 칭찬해달라는 듯, 빛가루를 뿌리며 아름답게 날았다. 홀린 듯 구경하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 [통찰]을 사용했다.

[페어리 드래곤]

[체장 16.2cm] [체고 2.6cm] [체중 126g]

[힘 16] [민첩 14] [체력 23] [마력 76]

[보유 스킬]

[점멸(D)] [마력 재생(D)]

'……?'

마력을 제외하면 정말 특출날 것 없는 생명체. 하지만…

'드래곤?'

드래곤(Dragon). 동서양 문화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용종(龍種)이라는 소리였다.

그래. 뱀의 몸에 날개가 달렸으니 용처럼 보이기는 했다. 용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용치고는 너무 약하잖아.'

날개도 없는 늪의 용도 나보다 강했는데 이 녀석이 용종?

'…페어리 드래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수도의 재앙을 끝내고 구했던 우화 중이던 용벌레의 알. 분명 용벌레라는 건 페어리 드래곤의 유충이 아니었던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아니, 그 설마가 맞는 것 같다. 이유도 없이 페어리 드래곤이 날 구해줬을 리가 없으니까. 아마 그때 구해줬던 용벌레가 아닐까.

'은혜 갚은 까치도 아니고.'

헛웃음이 나왔다. 페어리 드래곤은 공중을 비행하며 빛가루를 뿌렸다. 그러면서 종종 돌아보는 것이 얼른 따라오라는 듯한 태도였다.

'어차피 여기 있어도 소용없으니까.'

겹쳐진 듯한 다른 세계에 입을 다물고 페어리 드래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뀨루루룩~ 뀨루룩~!"

유난히 즐거워하는 페어리 드래곤의 태도. 적어도 위협당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녀석은 나를 한참을 데려가더니.

"뀨루룩. 뀨루루룩?"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어디더라? 까먹은 듯한 태도에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목숨은 건졌어.'

강태호와 궁수가 따라오질 않는 걸 보면 별개의… 마치 거울에 비친 것 같은 세계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현공원의 던전 그 자체였다.

'어쩌면 현실이랑 완전히 연결된 건 아닐까?'

마침내 경계에 도달하자 페어리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녀석이 먼저 숲의 경계를 넘어서자 나도 뒤따라 던전 바깥으로 나왔고. 예상했던 대로 이곳은 던전 바깥의 세상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도심 사이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수많은… 생명을 볼 수 있었다.

'아.'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사람들이 아니라 이해를 벗어난 생물들이 거꾸로, 모두 거꾸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흐르는 바다를 기준으로 떠 있고, 나만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

아무리 떠올려봐도 소설 속에서 이런 세상이 나온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말인즉, 주인공도 와본 적 없는 세계라는 뜻이었다. 존재조차 모를 세계… 그리고 그곳에서.

"અહીં રાક્ષસો કેમ છે?"

"વરુ, વરુ! મોન્સ્ટર વરુ~!"

까르르 기분 좋게 웃는 소리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마치 팅커벨과 흡사한 요정과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용벌레들이 서로 어울리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세 번째 겨울의 아이(요정)]

[신장 26.2cm] [체중 240g]

[힘 11] [민첩 25] [체력 16] [마력 57]

'…진짜 요정이라고?'

***

"진심입니까?"

"그럼 내가 농담하리? 알파가 말했다니깐?"

붕대를 칭칭 감은 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농담하지 말라고 하는 듯한 태도에 거한은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자신이라도 저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구라칠 거면 좀 더 그럴싸한 구라를 치지 않겠냐?"

"종종 그랬잖습니까. 언제부터 구라를 그리 잘 치셨다고."

"성훈이도 봤다고. 안 그러냐?"

정작 그 장본인은 넋이 나가서 '몬스터가 말했다… 몬스터가 말했다…'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까는 잘만 떠들더니 막상 뒤돌아 생각해보니 놀란 모양이었다.

"…일단 진짜인 것 같군요."

설마하니 둘이 같이 꿈이라도 꿨을 리는 없을 테고. 구진하가 느끼기에 알파는 물론 강했지만 그게 거한에게 통용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정말 백번 양보해서 정신 공격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거한에겐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것보다 넌 꼴이 그게 뭐냐?"

"누군가가 농땡이를 부린 탓이죠."

찔렀다가 괜히 되갚음당한 거한이 찔끔거렸다. 겨우 그런 놈한테 당했냐고 쏘아붙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해 본 살덩이 괴물은 정말 강했으니 뭐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알파가 말했다라… 혹시 말하는 몬스터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 하지만 거의 사람 말을 듣고 따라 하는 정도였어. 앵무새처럼."

"…저도 그 정도밖에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혹시나 모르지. 말할 수 있는 몬스터를 잡고 그런 놈들을 숨기고 있는 놈들이 있었을지도."

"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네요."

이 세상에 몬스터가 나타난 지가 50년이 다 되어 간다. 50년… 반백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하는 몬스터에 대한 것을 숨길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회의적이었다.

"댁도 놓쳤을 정도라면 알파를 쫓는 건 정말 요원할 겁니다. 유리도 저 꼴이니… 포기해야 할지도요."

"아. 그거 말인데."

거한이 들어 올린 건 한 장의 비늘이었다. 그 비늘을 이리저리 살피던 팀장의 표정이 곧 심각해졌다.

"…이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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