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23 환계(幻界) (2)
요정들이 빙글빙글 돌며 흥미를 보였다.
"વરુ વરુ મોટા રાક્ષસ વરુ!"
신기하다는 듯 쓰다듬거나 등줄기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오는 요정들. 그만 가라는 뜻으로 입을 벌렸더니 안으로 쏙 들어와 빈 눈구멍으로 쏙 빠져나갔다.
"આહહાહા~ હહાહાહહાહા!"
깜짝 놀라서 턱을 닫을 뻔했다. 죽을 뻔했다는 것도 모르는지 천진난만한 요정들은 그저 즐거워했다.
'…좋니?'
한참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싶으니 페어리 드래곤이 귀를 물고 질질 잡아당겼다. 그런다고 잡아당겨 지겠냐마는…
'갈 곳이라도 있나?'
"뀨룩~!!"
페어리 드래곤에 이끈 곳은 도심의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따라온 요정들과 페어리 드래곤이 서로 날아다니며 장난을 치더니 저편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나비?'
처음에 나비라고 생각했던 게 가까워지자 내가 아는 나비가 아니었다. 일단 보라색 불꽃을 두르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불꽃 나비(煥蝶)]
[체장 4.5m] [체중 10g]
불꽃 나비는 타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더니 등을 보였다. 하지만… 고작 10g밖에 안 나가는 녀석을 탈 수 있을까? 10g이면 내 발톱보다도 가볍다는 뜻인데.
'에라 모르겠다.'
불꽃 나비를 타고 오르자, 곁에서 페어리 드래곤과 요정들도 함께 날아올랐다. 빛가루를 뿌리며 비행하는 그 모습은 마치 동화책의 한 장면 같았다.
'…기분은 좋네.'
하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바다의 수면을 뚫었다. 숨이 막히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색색들이 아름다운 빛을 보이는 바다 깊은 곳까지. 나비는 날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수압이 느껴지는 건 아닌데.'
그러는 와중에도 요정들과 페어리 드래곤은 털을 잡아당기며 장난쳤다. 괜히 한마디 하려다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그만뒀다.
'귀엽기도 하고.'
한참을 올라간 끝에 거꾸로 자라난 나무가 있었다.
나비는 여기까지가 자기 할 일이라는 듯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요정과 페어리 드래곤의 이끌림에 따라 옹이로 들어갔더니, 그 내부는 사진으로만 보던 커다란 궁전 같은 장소였다.
'…이쯤 되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제 그냥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아는 세상도 아닌 모양이고, 내가 알던 상식이 통하지도 않으니까. 요정의 인도에 따라 카펫이 이어진 끝으로 향했다.
'옥좌?'
커다란 옥좌. 거기에 앉은 한 마리 요정.
'여왕이겠지?'
왕관을 쓰고 있으니 아마도.
이제껏 봐왔던 요정들과는 달리 근엄한 표정과 초연한 눈빛으로 손을 저었다. 이리로 오라는 듯한 제스쳐에 망설였지만, 이왕 온 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요정 여왕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મૂર્ખ. વરુ મૂર્ખ છે. હું રાણી નથી."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머리에 인 왕관을 내게 씌웠다.
'……?'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드는 요정에게― "무슨 짓이냐?" 묻고 싶었지만, 어느새 궁전과 요정을 포함한 모든 게 사라졌다.
'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정도가 있지. 눈앞에서 장소가 휙 하고 바뀌는데 안 놀랄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여긴 또 뭐야?'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펴보니… 마치 우주 같았다. 별이 하나도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아득한 흑색 공간에서 어느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시스템?'
언뜻 듣기에 시스템과 흡사했지만, 분명 모르는 언어. 요정들의 말이었음에도 의념만큼은 확실히 전해져왔다.
'…….'
말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칠흑으로 빚은 듯한 머리칼과 우주와 은하로 이루어진 것 같은 여인의 모습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신의 모습에 가까웠으니까. 이 공간에 없는 별이 그녀로서 빚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너를 불렀단다. 아가】
'아가?'
갑작스레 아가라고 불리는데도 기분 나쁘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반사적으로 통찰을 사용하려 했지만.
'태동하는 악이랑은 달라.'
[약한 육감(E)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육감(E) Lv.1 -> 약한 육감(E) Lv.2]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왕관을 씌워준 요정은 그저 전령에 불과했다고. 바로 이 존재야말로 여왕이자 신적인 존재― 감히 통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감각.
"크르르―"
그러나 육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통찰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녀의 본질을 이해하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확실히… 용의 비늘이 맞는 것 같군."
파충류, 뱀의 비늘은 조각처럼 보이나 사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떨어지는 건 일부로 그렇게 만들지 않는 이상 힘들었다. 무엇보다 비늘을 둘러싼 순도 높은 마력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잘도 찾았군.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아니라 성훈이가 찾은 거지. 그보다 어때?"
거한의 재촉에 클랜장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스퀘어의 걸작. 사용자의 마력을 대가로 D등급 감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일품이었다.
"요정용. 나도 그렇게 보이는군."
"요정용이 알파를 도울 이유가 있겠습니까?"
요정용. 다른 말로는 페어리 드래곤. 이야기속 요정처럼 장난을 치는 경우는 있었지만,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을 도왔으면 도왔지.
"요정용이 몬스터를 도운 사례는?"
"없습니다. 그랬다면 요정용도 보이는 족족 사살했겠죠."
"골치 아프군. 첫 사례라 이건가? 아니면 알파가 특수한 건가?"
클랜장이 눈을 감고 탁자를 두드렸다.
"보통 내기가 아닙니다. 알파는 다른 몬스터들과는 다릅니다. 놈은 인간의 사회구조에 대해 이해하고 있고 사람 이상의 지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의 지능을 가진 괴물을 과연 괴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일단 요정용이 협력할 정도이니…"
알파에 대한 것은 모든 게 의문이었다.
뒤늦게 떠오른 것이지만, 어쩌면 알파가 홍유리를 데려간 이유가 살점 괴물을 유인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째서? 몬스터에게 이득이 되는 일도 아닌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지. 그 반대일지도."
"반대? 무슨 소리야?"
"살점 괴물이 죽어주는 게 알파에게는 이득이었다고 말하는 거다."
"왜?"
"던전의 먹잇감을 독식하기 위해… 서는 아니겠군."
궁수, 성훈이 말하기를 오염된 먹이를 잘만 먹고 있었다고 한다. 알파에게 독 내성… 혹은 그에 준하는 스킬이 있다고 봐야했다. 살점 괴물은 몬스터를 포식하진 않았으니…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지만 애초에 살점 괴물은 알파를 노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한 지성이 있는 존재가 스스로 위험을 자처할 리가요."
그러나 신전의 박요한이라는 몽크는 알파가 자신을 구했다고 말했다. 믿기 어려웠지만 그의 손목에 난 흉터 자국은 분명 늑대의 이빨이었다.
"왜. 경산에선 헌터들이랑 아라네아 잡았다더만. 사실 존나 착한 새끼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기엔 은하를 덮친 전력이 있고 처음 던전이 나타나기 전에도 구마준이라는 자를 습격하고 있었다고 하던걸요."
"점점 미궁에 빠지는군."
행동이 일관적이지 않다. 백보 양보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스컬 울프… 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알파는 누군가를 구하는 면을 보이는가하면 반대로 누군가를 죽이기도 했다.
"일단 밝혀진 알파의 스킬은 몇개지? 포식. 변형. 바람과 불. 은신…"
"촉수 그리고 재생까지. 거기에 마력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알아보니 마력을 은신으로 숨긴 공격… 신전 몽크의 기술이더군요."
기술… 그때만큼은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여태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의 전유물이었으니. 아니, 오크를 포함한 몇몇 몬스터가 사용한 전례는 있으나 그들은 아인(亞人)이었다. 짐승, 스컬 울프인 알파가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는 맥락이 달랐다.
"종합하자면 마력과 기술 거기에 스킬을 사용하는 특수종 몬스터라는 말인데."
"그게 끝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 늑대 자식이 말을 했다니까?"
거한의 말에 생각하기만 해도 클랜장의 안광이 번뜩였다.
"넌 그걸 믿으라고 말하는 건가?"
"아 거참. 성훈이도 들었다니까?"
당당한 태도. 믿긴 어렵지만 정말 그렇다는 거겠지.
"뭐라고 했더라? 멈춰. 탕아들. 위협. 꼬리 그리고… 강훈. 생존."
"강훈?"
클랜장의 손이 우뚝 멈췄다. 강훈… 그 이름에서 떠오르는 건.
"그래. 아부지 이름이지."
"그분의 이름을 왜 알파가 알고 있지?"
"모르겠다고. 그 양반은 진작에 가셨잖아."
강훈. 그 이름보다는 칠영웅의 일원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 그들의 아버지인 동시에 전대의 검성(劍星)이었다. 다만, 이미 십수년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일단 보류한다. 알파에겐 무언가 모를 비밀이 있다. 반드시 생포해야 해. 그리고 3팀장."
"예. 클랜장님."
"알파를 쫓을 수 있을 것 같나?"
"무리입니다. 유리가 없는 이상에는."
탁자를 두드리던 손이 뚝 하고 멎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고원의 뒤를 캐라."
"드높은 고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잊은 건가? 알파. 지리산의 워그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넘긴 게 누구였지?"
"설마…?"
"에이~ 형님. 그건 아니지. 설마 고원이 지금 딴 주머니 차고 있다는 소리야?"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아무 연관이 없고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한 눈빛에 거한이 움찔했다.
"가장 수상한 건 고원이다. 가능한 그들의 정보를 캐라.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좋아. 먼저 나가보도록."
팀장이 꾸벅 고개숙이며 나가자 거한이 팔짱을 꼈다.
"진심으로 고원이랑 척을 지려고?"
"상황에 따라서는. 나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고원이 변질한 게 맞다면."
클랜장은 일어나서 땅거미가 내려 앉은 황혼녘을 바라보았다.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겠지."
***
―차가운 이물적인 감각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포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어났구나】
"그르릉?"
턱을 간질이는 손길에 눈을 떠보니 누군가의 무릎을 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여왕. 벌떡 일어나자 어쩐지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왜 짐승의 소리를 내는 것이니? 네가 물들지 않았음을 알고 있단다】
'말하라는 뜻인가?'
가만히 기다리는 여왕. 잠깐 고민하다가 변화로 성대를 만들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이 세계의 주인】
이 세계… 요정과 용벌레를 비롯한 여러 생명들이 뛰놀았던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일컫음이리라.
역시 여왕은 내가 말했음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럼 신입니까?"
【그런 존재는 없단다. 오직 진리만이 있을 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튼 신이 없다… 그런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일견 내게 호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 존재를 믿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나를 죽이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랬다면 기절한 사이에 죽였을 테니까.'
되려 머리가 맑고 상쾌한 것이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경계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절 데려온 게 맞습니까?"
쓰러지기 전 여왕은 나를 불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날 데려온 것은 페어리 드래곤이었다.
【그렇단다. 널 환계에 들인 것은 어린 용이었으나, 그 또한 내 뜻이었지】
여전히 의미를 모르겠다. 페어리 드래곤을 조종했다는 뜻일까?
"그럼 왜 제가 쓰러진 거죠?"
【과욕을 부렸잖니? 네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갑자기 쏟아진 팩트에 가슴이 아렸다. 육감은 경고했지만 통찰을 사용한 건 나였으니.
【아가. 알고 있니? 나와 만난 이들은 반드시 한 가지를 묻고, 내 물음에 답해야 한단다】
'무슨 개소리야?'
생각해보니 이미 몇 번이나 질문한 것 같은데… 아. 그러니까 이제 자기 말에 답하라 이건가? 내 얼빠진 얼굴을 보고 짐작했다는 듯 여왕이 웃었다. 눈 코 입도 없는 실루엣 같은 형상이었지만, 나는 분명 여왕이 웃었다고 느꼈다.
【아가는 모르고 있었으니 다시 해도 괜찮단다. 하지만 내 물음에는 진지하게 고민해주겠니?】
'답하는 게 아니라 고민해달라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왕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물으렴. 네가 알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물어도 되는 걸까?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이건 기회였다. ―그러나 동시에 의심이 들었다.
'정말 물어봐도 되는 걸까?'
질문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물건이 얼마냐는 물음에는 '내가 그 물건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듯이. 만약… 정말로 만약에 그녀가 안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내 의도를 추측하려고 하는…
'모르겠어.'
다만, 그녀가 내게 보인 호의를 생각했을 때 질문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미 몇 번이나 질문해놓고 뭘 새삼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뭘 물어봐야 할까?'
묻고 싶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나는 왜 슬라임으로 전생했는지.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떠오르는 수도 없는 물음 중에서 할 수 있는 질문과 할 수 없는 질문을 추려냈다.
'…그리고.'
가능한 정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질문을 떠올렸다.
【정했니?】
내가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꿰뚫어 본 것처럼 여왕이 미소지었다.
"멸망. 당신은 멸망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멸망… 그 단어를 꺼내자 날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어떤 멸망을 말하는 거니?】
"세계가 끝나는 것."
【그들이 알려준 모양이구나】
그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알고 있단다. 머지않아 이곳에도 멸망, 아니 종말이 찾아올 것임을】
"……."
그녀 역시 변한 시간축을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본래 이 세계는 한번 멸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되돌려졌고 본래 소설 속 이야기가 시작되는 2년 전 시점인 69년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계가 멸망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과연 그녀를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럼 내가 물을 차례구나】
"예. 말씀하시죠."
서로 묻고 묻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날먹할 생각은 없었으니 심호흡과 함께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했다.
【네가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진리의 일부가 아니란다】
"…네?"
【시스템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겠니?】
***
"질문이라면서…"
결국 화두만 툭 던지고 사라진 여왕. 물음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나, 답변을 바라지 않으니 질문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라했었지.'
시스템. 물론 고민한 적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본래 세계관에서 있던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본래 소설 속 시스템에게 자아는 없었으니까. 단지 일을 처리하는 기계…같은 느낌이 강했다면 내 시스템은 도우미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를 성장시키려 한다.
선택을 종용하고, 멸망 확률을 표시하며 의도적으로 이 세계의 멸망을 막게끔 유도한다. 알게 모르게 메시지로 정보를 준 적도 많다. 갈림길에서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선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게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레벨 달성 조건을 포함해 짜증나는 미션을 주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나를 이 세계로 데려온 게 시스템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물론 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만약 시스템조차 없었다면 슬라임인 상태에서 진작 미쳐버렸겠지. 아니, 영원히 진화할 수도 없었을 테고.
'물론 작가가 맞다면…'
병주고 약주고 있다는 소리였으니 이야기가 다르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관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요정 여왕은 뭐라고 한 걸까?'
네가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진리의 일부가 아니다…? 모르겠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조금 더 많은 단서가 필요하다.
'어쩐다.'
고민하고 있는 내게 빙긋빙긋 웃고 있는 요정이 왕관을 가져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잘 다녀왔어?"
"……?"
"늑대늑대~ 이히히히! 괴물 늑대! 여왕님이랑은 이야기 잘 하고 왔어?"
여전히 요정어. 그러나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스테이터스를 살펴보니 [보유 스킬 목록]에 요정어(F)라는 스킬이 떡하니 적혀있었다.
'이게 뭐시다냐.'
여왕의 선물이겠지. 그 외에 요정어를 갑자기 통달할 리 없었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는데 고마울 따름이다.
'일단.'
이 미지의 세계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왕이 괜히 이런 능력을 준 건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