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23 환계(幻界) (4)
나타나는 몬스터의 수준은 차츰 올라갔지만, 여태 늑대를 애먹게 만든 녀석은 없었다.
'한번 보고 싶었건만.'
백록이 아쉽게 입맛을 다시던 때, 동굴 끝에서 "구오오오오!" 하는 포효소리가 들렸다.
'오크.'
던전의 형태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범용성이 높은 제법 강한 몬스터. 백록은 이번에야말로 늑대의 실력의 편린을 엿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우린 뒤에 있으면 돼?"
늑대가 끄덕이자 요정과 페어리 드래곤이 백록의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오크는 커다란 몽둥이로 늑대를 후려 치려고 했다.
"구오오오!"
피할 걸 예상한 것인지 오크는 한 발 더 성큼 들어왔다. 이번엔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요정이 질끈 눈을 감았다.
"늑대야!"
"호. 흥미롭군."
상반되는 반응. 다시 눈을 뜬 요정이 본 것은 벙찐 오크의 표정이었다.
"어, 어?"
"저길 보아라."
"응? 어? 어어어? 우와~!"
백록이 고갯짓한 곳엔 몽둥이였던 것이 산산조각나 널브러져 있었다.
"대단해! 대단해!"
손뼉을 치며 감탄하는 요정에게 어째선지 페어리 드래곤이 으스댔다.
"흠."
늑대의 강함은 백록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오크는 분기를 참지 못한 듯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늑대는 그 모든 공격을 유유히 흘렸다.
'제법이군.'
지근거리에서 피한다는 건 절대 쉽지 않다. 늑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맞아선 안 된다.'라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 때문인지 다소 과하기는 하다만.'
과한 동작으로 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뛰어난 집중력은 부족함을 커버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다음 수를 읽는 눈이 탁월했다.
'상대가 안 되는군.'
늑대의 앞발이 오크의 등을 난도질했다. 늑대를 잡기 위해 오크가 몸을 돌렸으나 이미 거기엔 아무도 없다.
'빠르구나.'
몸을 빙글 돌리는 것과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오크는 늑대의 꼬리조차 보지 못했다.
"흠…."
백록에겐 마치 늑대가 스스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상대로 머지않아 늑대가 오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르르―"
뚝, 오크의 숨통이 끊어지자 늑대는 오크의 몸통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역시 탐식이었군. 환수들도 잘 없는 스킬인데.'
아니, 괴물이라서 가지고 있는 스킬이겠지. 백록은 담담히 끄덕였다.
"수고했네."
"별로."
살벌했던 방금과는 달리 감흥 없다는 듯 보이는 모습. 그리고 요정을 힐끔거리는 것이 '안 가려도 되나?'라고 묻는 것 같았다.
"요정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네. 그들은 그저 순수할 뿐이지."
"……."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얼추 알아들은 모양. 백록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재촉했다.
"동굴 끝까지 멀지 않은 모양이군. 얼른 가세나."
***
"그래서 이 등신아. 결국 못 잡았다고?"
"…그보다 깨어나서 다행이야."
"말 돌리지 말지? 어차피 뒤질 정도도 아니었거든? 닥치고 썰이나 풀어."
'뒤질 정도 맞았는데.'
팀장은 잠깐 알파가 널 놓아줬다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아마 그 말을 들으면 어지간히 분해할 터. 일단 넣어두기로 하고 적당히 각색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괴물은 2팀장 님이 처치했고."
"……."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손이 침대 시트를 구겼다. 잠깐 뒤에 '그 미친 근육 덩어리는 어디서 뭘하고 있었냐?'며 씩씩거렸다.
'낮잠 자고 있었다는 소리 들으면 아주 미쳐 날뛰겠군.'
"후. 그래서 퇴원은 언제쯤 할 수 있는데?"
"내가 의사냐? 아마 좀 더 걸리겠지."
벌써 일어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회복하려면 좀 더 안정을 취해야했다.
"시발 옆구리 쑤셔…"
"급하게 수술을 했다던데. 아마 헌터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다."
죽었을 거란 말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잠깐의 정적 끝에 입술을 달싹이던 팀장은 툭 고개를 떨궜다.
"…미안하다."
"뭐가?"
"네가 이렇게 된 건 키핑을 제대로 못 한 탓이니까."
"맞는 말이네. 구진하 이 등신 같은 새끼.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할 거면 그냥 나가 뒈지지 그래?"
"……."
"…뭐 이렇게 말해줬음 하냐?"
흘기는 듯한 눈초리에 팀장은 쓰게 웃었다.
"그건 좀 심한데."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는데?"
피식 웃는 홍유리. 팀장은 마른세수를 했다.
"…고맙다."
"됐고. 넌?"
"너한테 비하면 다친 것도 아니야."
비교적 회복하기 쉬운 아킬레스건이었다. 포션과 회복으로 당일부터 걸을만한 수준은 되었다.
'머리는 아직 좀 지끈거리지만.'
정신 고갈만큼은 어쩔 수 없다. 마력 재생 같은 스킬이라도 얻지 않는 이상에야 헌터들의 천륜과도 같았으니.
"참.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해. 오면 엄청 갈려 나갈 테니까."
"병가가 마지막 휴식? 염병. 망할 늑대 새끼 하나 때문에… 아 그러게 잡았어야지. 이 등신아!"
"거 미안하게 됐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푹 쉬고. 먼저 간다."
"하. 꼴에 바쁜 척 하기는."
바쁜 척이 아니라 진짜 바쁜 건데. 팀장은 병실 문을 열며 홍유리에게 하지 않은 말들을 떠올렸다.
'알파가 말을 했다거나. 요정용이 알파를 돕는다거나.'
지금이라도 알려줄까? 슬쩍 돌아보니 홍유리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겉으론 멀쩡한 척해도 얼굴에 드러난 피곤함을 감추진 못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 오랜 악우를 위해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자.
'…꼬리털이라.'
대전. 대전이라고 했지? 그는 호주머니 속 차 키를 꽉 쥐었다.
***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7 -> Lv.18]
[암시(F) Lv.6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암시(F) Lv.6 -> 암시(F) Lv.7]
18레벨에 도달함과 동시에 암시가 7레벨에 도달했다.
'슬슬 끝이 멀지 않은 것 같은데.'
감지로 느낀 제법 많은 기척들이 한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여기가 미궁은 아니니까.'
코발트 던전은 미궁과의 복합형이었기에 길이 복잡하고 보스 방이 따로 있었지만, 아마 이 던전은 동굴 단일형인 모양.
'보스가 다른 몬스터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소리야.'
서로 일장일단이 있다.
보스 방이 닫히면 보스를 처치하기 전까지 나갈 수 없는 미궁. 보스와 함께 다른 몬스터들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동굴.
'지금은 동굴이 낫겠지.'
최악의 상황에도 도망칠 순 있을 테니까.
"긴장되나?"
백록이 묻자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별로."
"그런가? 이 던전. 생각했던 것보다 수준이 높다네."
"그래서."
"자네가 와서 다행이라는 거네. 다른 환수들이 왔었다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모르겠어."
아직 그렇게 위험한 녀석들은 없지 않았나? 하지만 백록이라면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C등급 마력 감지가 있었지 아마?'
어떤 몬스터들인지 알아챘을지도. 머지않아 도착한 곳은 조금 넓은 광장이었다.
'…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보스로 추정되는 녀석이었다.
[동굴 포식자(Cave Predator)]
[체장 3.11m] [체고 1.67m] [체중 230kg]
[힘 249] [민첩 420] [체력 243] [마력 216]
[보유 스킬]
[가속(D)] [미약한 재생(F)]
'아. 소설 속에서 봤던 녀석이네.'
커다란 박쥐 같은 외형이었지만 다소 기괴한 형상이었다. 뇌가 겉으로 드러나 있고, 유사시 뇌를 덮을 수 있도록 뿔 공룡과 비슷한 프릴이 달려있었다.
'비행하는 보스 몬스터라?'
민첩 420. 특출난 스테이터스는 그것밖에 없다.
'문제는 다른 몬스터도 있다는 건데.'
마력에 노출된 박쥐는 물론 다른 박쥐들도 있었다.
'박쥐가 많은 이유가 보스 때문인가 본데.'
우두머리가 박쥐이니만큼 보호받을 수 있다고 여긴 거겠지.
잠깐 뒤를 돌아봤더니 백록이 요정과 페어리 드래곤을 데리고 지켜보고 있다. 가세한다면 쉽게 끝나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
'적어도 뒤는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요정과 페어리 드래곤만큼은 보호해주리라. 동굴 속에서 눈은 퇴화한 모양이지만 박쥐 특유의 청각으로 발소리라도 감지한 건지 "캬아악―" 끓는 소리를 냈다.
"키이익!"
'일단 작은 녀석들부터.'
녀석들이 날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거슬렸다.
박쥐들이 날아오자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동굴 포식자가 크게 입을 벌렸다.
'초음파?'
목젖이 떨리는 것 같은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가청범위를 벗어난 음역이라는 뜻이다.
'……!'
곧 박쥐들이 선회하며 방향을 틀었다. 돌풍의 영향권에 들어온 녀석들은 처참히 갈려 나갔지만, 몇 마리 되지 않았다.
'지휘를 한다고?'
놈의 지휘에 따라 이번엔 페어리 드래곤과 요정을 노렸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등신.'
요정이 소스라치듯 놀랐지만, 박쥐들은 다가오지도 못하고 툭툭 쓰러졌다.
'걱정할 것 없겠어.'
말할 것도 없이 백록이 한 일. 뒤가 안전하단 걸 확인하고 동굴 포식자에게 달려들었다.
"키이이익?"
눈이 퇴화하여 청각에 의존하는 박쥐. 그리고 소리는 돌풍의 살벌한 바람 소리에 묻히고 있었다.
'상성이 좋아.'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겠지만 근접한 상태에서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놈은 곧바로 날아올랐지만, 돌풍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피막에 구멍이 뚫렸다.
'생각보다 더 쉬운데?'
놈이 동굴 천장에 거꾸로 붙었다. 내려올 기미가 없는 게 미약한 재생으로 회복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밑에 있는 녀석들부터.'
박쥐들을 하나하나 사냥해갔다. 입구는 백록이 막고 있어 나가지 못했고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돌풍 속으로 뛰어드는 기척.
'왔구나.'
동굴 포식자가 달려듦과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쩍 벌려진 턱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민첩 400대는 장식이 아닌지 아슬아슬히 착지했다.
'한 걸음만 더 들어왔으면 됐는데.'
그래도 돌풍이 녀석의 피막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미약한 재생으로는 한동안 날 수 없으리라.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양날개에 붙은 손가락이 지면을 박찼다. 민첩이 높다고 해봤자 신체구조상 빠를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맞다. 가속 있었지?'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놈.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찼지만,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다.
"끼이이익!"
놈이 어깨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아마 목덜미를 노린 거겠지만 돌풍에 소리가 묻혀 착각한 모양. 동시에 나도 턱을 벌려 물어뜯었다. 놈의 이빨은 제대로 박히지 않았지만 나는 놈의 날개 하나를 끊어냈다.
[경화(D) Lv.5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경화(D) Lv.5 -> 경화(D) Lv.6]
'약한데?'
귀찮긴 해도 백록이 염려했던 것 만큼 강하진 않다. 끊어낸 날개를 툭 뱉어내고 녀석과의 간격을 가늠했다.
'그사이 도망쳤군.'
이젠 날짐승이 아니게 된 들짐승. 반항해 봤자였다.
'싱겁네.'
얼마 가지 않아 놈의 숨통을 틀어쥐었다. 공포에 질린 눈이 떨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종유석이 쿵! 하고 떨어졌다.
"키에에에엑!"
시야에 보이지 않아 피하지 못 할 뻔했다. 조금만 방심했다면 종유석에 꿰뚫리고 말았을 터.
'누가?'
날개가 끊어진 동굴 포식자를 감싸며 천장으로부터 활강하며 내려오는 커다란 박쥐.
[무리 우두머리(동굴 포식자)]
[체장 4.26m] [체고 2.04m] [체중 374kg]
[힘 305] [민첩 469] [체력 317] [마력 269]
[보유 스킬 목록]
[은신(D)] [약한 재생(E)]
'처음부터 보스가 아니었다고?'
모든 면에서 더욱 우월한 동굴 포식자. 내가 방금까지 상대했던 놈은 페이크― 놈이야말로 진짜 우두머리였다. 여태까지 상대한 건 아마도 암컷이 아닐까?
'백록이 염려했던 게 이거였나.'
두 마리. 지금까지 날 가늠하고 있었다. 은신으로 숨어 지켜보는 건 내가 여태 하던 짓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역으로 당했다라.'
같은 등급의 감지로는 은신을 꿰뚫어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종유석에 꿰뚫려 어이없이 삶을 마감할 뻔했다. 우두머리는 암컷을 한 번 감싸 안았고 둘은 높게 울부짖었다.
'같이 싸울 모양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암컷이 날 수 없는 상태라는 점. 우두머리라면 모르겠지만 F등급 미약한 재생이 날개를 재생할 수 있다곤 생각지 않는다. 등 뒤에서 요정이 호들갑을 떠는소리가 들렸다.
"느, 늑대 괜찮을까?"
"글쎄. 지켜봐야 하겠지."
시큰둥한 백록의 대답에 요정이 울먹였다.
"늑대 도와주자! 응? 늑대 도와줘어!"
요정에게 시달리던 백록과 눈이 마주쳤다. '도움이 필요한가?' 물어보는 눈빛에 휘휘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는군."
"늑대야아아아~!"
칭얼대는 요정을 뒤로했다.
두 마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렇게 암담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넌 실수했어.'
암컷이 당하기 전부터 나섰어야 했다. 놈은 나를 가늠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도 전력이 아니었다.
"그르르르―!"
돌풍에 잿불이 휘날렸다. 검은 불씨가 휘날리자 동물의 본능처럼 놈들이 움찔거렸다.
"저런 스킬도 가지고 있었나?"
백록의 탄성에 요정이 울음을 그치고, 페어리 드래곤은 거보라는 듯 의기양양해했다.
"크르르륵!"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혼비백산한 우두머리가 놀라서 날아오르고 암컷이 우두머리의 발목을 잡았다.
'흠?'
예상했던 환장의 궁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날개를 펄럭인 수컷은 300이 넘는 힘으로 발목에 매달린 암컷을 달고도 높게 날아올랐다.
"키기기깃!"
"키에엑!"
확실히 동굴의 높이는 10m가 넘었고 천장에 매달리면 잡기 어렵다.
'그래서.'
그래서 작은 박쥐들부터 처리했었다. 하지만 어렵다는 게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즉, 놈들이 공중을 비행한다고 손가락 빨고 있을 이유는 없다는 것.
"크르르르!"
탄력을 받아 높게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놈들의 고도까지 도달하자 깜짝 놀라 기함했다. 매달린 암컷의 발목을 물고 고개를 비틀었다.
"키, 키기깃?!"
그러는 와중에도 돌풍과 잿불이 암컷과 수컷을 찢어발기고 불태웠다. 수컷은 발버둥 쳤고.
'버릴 생각이군.'
다리에 매달려있던 암컷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황망하게 올려다보던 암컷은 자신을 버린 수컷에게 울부짖었다.
"키야아아악!"
결국 바닥에 떨어진 암컷. 이미 발목이 끊어졌고 하나 남은 날개도 도무지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움직이기도 힘들 거다.'
최후의 발악으로 가속을 사용해 달려드는 암컷. 이번엔 마력도 아끼지 않았는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였다.
'진작 그랬어야지.'
입을 벌리고 될 대로 되라는 듯 물어뜯는다. 이번엔 경화를 뚫고 이빨이 박혔기에 보란듯이 비틀었지만, 촉수로 놈을 꿰뚫었다.
'태동하는 악에게 배웠지.'
대신 내 촉수는 놈의 촉수처럼 질기고 단단하지 않았다. 그 부족함을 경화와 마력이 보충했다.
"키이잇…"
악식의 접촉 섭취― 그 한계치는 내 털로 이루어진 촉수에도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암컷을 집어삼킨 나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수컷을 올려다봤다.
"키, 키기깃…!"
겁먹은 표정으로 벌벌 떠는 수컷. 찢어진 피막은 재생한 모양이지만, 달려들 의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 암컷을 구하지 않은 순간부터 녀석에게 승산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라네아 정도는 아니라지만.'
생각보다 더 쉬운 싸움.
다시 탄력을 받아 뛰어올랐다. 수컷은 몇 번인가 발악하며 뛰어오르는 나를 쳐냈지만,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끝에 거꾸로 매달린 놈의 날개를 촉수로 휘감을 수 있었다.
"키에에엑!?"
의외로 힘으로 버틴다. 내 체중은 200kg도 되지 않았고 암컷을 들어 올렸던 걸 생각하면 견딜 만도 했다.
'…이건 생각 못했네.'
이대로 악식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놈의 날갯죽지만 끊고 다시 떨어지고 말 터.
"키에에엑!"
놈의 이빨이 촉수를 잘근잘근 씹었다. 경화된 촉수가 버티고 있었지만 끊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돌풍이나 잿불은 거리가 닿지 않아.'
몇 미터나 늘어진 촉수로 매달려있는 실정이었다. 잿불을 사용해봤자 불이 닿기도 전에 촉수가 끊어질 게 뻔했다.
'그렇다면.'
변화를 이용해 촉수에 탄성(彈性)을 부여했다.
마력이 소모되는 걸 느낀 나는 아래로 촉수를 사용해 자신을 끌어당겼다. 바닥으로 당기는 촉수에 의해 팽팽해졌고, 놈의 이빨에 끊어지기 직전 바닥을 잡고 있던 촉수를 풀었고.
"――!"
놀라운 탄성에 의해 튀어 오른 순간, 놈이 날갯짓했다. 비행하는 놈을 향해 탄력을 사용했다.
'큿…!'
선회하던 수컷이 기함했다. 공중에서 갑작스레 힘의 방향이 꺾이자 몸 안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차피 통증도 없고 재생으로 알아서 회복될 터. 돌풍에 포함된 돌진의 효과로 단숨에 놈에게 달려들었고.
"끼이이익!"
서로의 몸이 부딪힌 순간, 경화를 발동했다. 150kg에 가까운 강철보다 단단한 덩어리에 부딪힌 놈이 순식간에 벽에 부딪혔다.
"……!"
2차 충돌한 녀석은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크르르―"
그 밑에는 이미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킷, 키에에엑!"
수컷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날개를 펄럭였으나, 충격으로 꺾이고 부러진 뼈. 날아오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
내게만 간신히 들렸을 정도로 높은 음역의 소리. 그게 놈의 단말마였으리라.
[동굴 포식자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8 -> Lv.19]
레벨 업을 알리는 메시지― 더 이상, 나를 제외하고 이 던전에 남은 괴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