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24 꼬리를 쫓아서
"뭔가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
주교의 물음에 신부는 벌벌 떠는것 밖에 할 수 없었다.
"휴. 없다는 건가요?"
"주, 주교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데요."
주교가 서류를 흔들었다. 1급 신자였던 구마준의 집을 수색하면서 찾은 서류. 원래 신전이 거기까지 조사할 의무는 없지만, 구마준이 어떻게 살점 괴물이 됐는지 최소한의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수사에 동참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서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적힌 필체는 두말할 것 없는 신부의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신부의 방에서 발견된 증거까지. 빼도 박도 못 할 상황이었다.
"신전의 자료를 빼돌린다라… 재밌는 일을 해주셨군요."
노파의 온화한 미소― 그러나 신부에게는 마치 사신의 것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저, 저는 단지 돈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제발, 제발 주교님!"
"어린 양을 이끌어야 할 목자가 도박에 빠졌다?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요?"
제정신이냐는 듯한 일갈. 좌중의 싸늘한 눈초리 아래 신부는 꼴깍 침을 삼켰다.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안일하게 신부실에 자료를 숨긴 게 실수였다. 이제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상상만 해도 눈앞이 컴컴하다. 신부 자신이 소속된 곳이긴 하지만, 이 '전쟁의 신전'이라는 곳은…
"하지만 주께서는 늘 용서하라 말씀하셨지요."
갑작스러운 주교의 변화에 신부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노파를 올려다봤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오, 오! 주교님! 주교님!"
이 순간, 신부에겐 주교가 광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신부를 보며 주교는 달래듯 말했다.
"그러니 말씀해보시겠습니까? 구마준 신자님에 대한 것을. 그리고 당신이 아는 것을요."
"무, 물론입니다."
좌중이 듣고 있는 가운데, 신부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도박에 빠져 돈이 부족한 자신에게 구마준이 접촉했었단 것. 그가 요구한 것은 신전의 자료였으며, 또한 자신을 신전의 일원으로 받아주길 원했다는 것…
"그럼 그가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는 모르신단 말씀이군요?"
"저, 저는 그저 시킨 대로 할 뿐이었습니다! 물, 물론 물어는 봤지만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납득했다는 듯 주교가 끄덕이자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숨 막히는 정적이 기도실을 가득 채웠다.
"……."
한참 생각하는 듯하던 주교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요,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상냥한 손길로 주교가 신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주의 동상 아래, 기도실에서 신부는 어린 양이 되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오!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새사람이 되겠다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신께 맹세한다고 울부짖는 신부의 기도. 그에 감동한 것처럼― 모든 신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 죄를 뉘우치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처럼 신부가 의아해했다.
"…형제님들?"
철그렁. 철그렁.
기도하던 신부는 묵직한 소음이 들린 기도실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느 빡빡머리 몽크가, 기도실 문손잡이를 쇠사슬로 묶고 있었다.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주교의 온화한 목소리가 기도실을 울리는 가운데. 신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 온화한 주교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싸늘하게 들려왔다.
"다만."
뚝, 말을 끊은 주교가 더없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용서일지는 모르겠지만."
***
[멸망 확률 99.8% -> 99.78%]
[0.02%만큼의 업을 획득합니다]
'환계 던전을 클리어해도 멸망 확률이 변한다고?'
0.02%가 추가되어 0.12%의 업을 보유하게 됐다. 던전 클리어라고는 하지만 멸망과는 별개 아닌가? 환계는 현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텐데?
"뀨루룩!"
잠깐 상념에 빠져있던 찰나, 페어리 드래곤이 잡아당기는 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상한 구멍을 발견했다.
'뭐야?'
알 수 없는 구멍… 동굴이 아니라 공간 자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보고 있자니, 삼투압처럼 던전의 짙은 마력 일부가 구멍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설마…"
"그렇다네. 현계지."
"환계와 현계가 연결된다고?"
"자네는 던전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백록의 물음에 잠깐 떠올렸다. 소설 속에서 던전이 나타나는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간단히 말해 던전이란…
"침식."
"호. 알고 있었는가?"
침식(浸蝕). 던전이 생긴다는 것 자체만으로 세상이 갉아 먹히는 것이다.
이현공원을 떠올려보자. 공원은 본래보다 훨씬 큰 지름 30km가 넘는 원형의 던전으로 변했다. 즉, 공간이 왜곡된 셈. 마력이 다해 던전이 붕괴하기 전까지 본래 있어야 했던 공간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네. 허면 환계는?"
"거울?"
"잘 아는군. 환상이자 허상인 세계. 본래 환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계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환계의 일이 현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어째서 멸망 확률이 내려간 걸까? ―본능적으로 그 답을 알아채고 구멍을 보았다.
요정이 눈을 끔뻑이며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며 물었지만, 나와 백록은 무시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허상이긴 하나 연결된 세계. 던전이라는 침식이 환계에 나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현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네."
연결된 두 세계. 만약 환계에 던전이 생기면 현계로 이어지는 구멍이 생긴다. 만약 환계에 던전이 늘어난다면? 그래서 구멍이 많아진다면?
"경계가 없어진다고?"
"정답이네. 정말 괴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군."
그래서 멸망 확률이 줄어든 거였구나.
백록의 시선에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두개골뿐인 얼굴에 장점이 있다면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연히 이어지는 생각에 백록을 노려보았다.
"정말 대단하군."
"…대답해."
백록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던전을 방치하는 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닐세."
"……."
"던전의 짙은 마력은 환수라면 몰라도 영물에겐 부담이 될 테니."
어느새 구멍― 침식은 사라져 있었다.
던전이 붕괴된다면 당연 던전의 마력은 환계에 잔류하게 된다. 나조차 짓눌렸을 정도로 강한 마력― 만약 용벌레처럼 약한 몬스터, 아니 영물들이 노출된다면?
"…그걸 조절한 거라고?"
"그렇네."
환계의 마력을 조절하기 위해 일부러 던전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해는 풀렸는가?"
"그래."
헛다리 짚었다.
세계가 붕괴할 거란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줄 알았더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 늑대야! 같이 가!"
요정을 태우고 던전 밖으로 나갔을 무렵, 천천히 던전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던전이…"
경계 밖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마력이 흘러 나오고 있다. 왜곡된 공간이 천천히 제모습을 찾아갔다.
"던전이 붕괴하는 건 처음 보는가?"
"…그래."
던전을 클리어한 적은 있어도 붕괴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곧 백록의 말대로 던전의 짙은 마력이 환계로 흘러나왔다.
'마력이…'
백록이 알려준 대로 저항하지 않고 마력을 받아들였다.
[마력이 2 상승했습니다]
그 메시지를 보자 조금 욕심이 났다.
'조금 더 있을까?'
여왕이 보여주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던전의 침식? 아니면 다른 것?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소설 시점이 시작되기까진 시간이 남았으니까.'
경고도 했다. 여명이 내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지만, 최소한 찾아보려는 시도는 하겠지.
'그럼 됐어.'
적어도 탕아들을 견제할 순 있으리라― 그럼 당분간 환계에서 힘을 기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마치 생각을 읽힌 것처럼 메시지가 떠올랐다.
[Lv.20 달성 조건 : 환계를 벗어날 것]
'…….'
작게 숨을 흘렸다. 20레벨 달성 조건치고는 너무 간단한 조건이었지만, 시스템의 의도가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진리의 일부가 아니란다】
여왕이 말한 진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스템은 내가 환계에 남는 걸 원하지 않았다.
'여왕과의 대화는 듣지 못한 건가?'
만약 들었다면 괜한 경계심만 돋구는 경솔한 조건은 걸지 않았을 텐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여왕인가 혹은 시스템인가. 최악의 경우 양쪽 모두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직 단서가 더 필요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다. 설령 시스템이 악한 존재라 할지라도 아직 내게 시스템은 필요했으니까.
'…현계로 돌아가야겠어.'
숨을 들이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록. 현계로 돌아가는 방법은?"
"흠. 가려는가?"
"…그래."
"돌아가고 싶다고 강하게 염원하게."
즉,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갈 수 있다는 소리인 것 같다. 생각보다 더 간단한 방법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어? 벌써 가려고?"
백록의 말에 요정이 울먹였다.
"그러지 마! 우리랑 같이 여기서 있으면 안 돼?"
"……."
"응? 늑대야~! 우리랑 여기서…"
칭얼대는 요정을 밀어내자 녀석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상처받은 듯한 표정에 내가 괜히 아렸지만, 밀어낼 때는 밀어내야 한다.
'어쩔 수 없으니까.'
요정을 데려갈 순 없다.
요정과 괴물이라는 차이점 때문이 아니었다. 지킬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지. 백록 또한 그게 맞는다는 듯 끄덕였다.
"언제 돌아갈 텐가?"
"조금 있다가."
그래도 가는 길만큼은… 대전까지 갈 생각이었으니 당장 현계로 가는 것보다 환계를 통해 가는 게 편할 터. 울먹이는 요정을 달랠 겸,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돌아올 방법은?"
"자네는 환계로 올 수 없다네."
예상은 했지만 단호한 대답이었다.
환계란 그 이름처럼 요정과 환수의 세계였지 괴물이 있어도 되는 곳이 아니었으니. 설령 가능하다 해도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시스템이 그거 하나만큼은 맞췄지.'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넘쳐난다.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순 없다.
"하지만… 흠. 아무것도 아닐세."
의미심장한 백록의 눈초리.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인데 끝까지 말하진 않았다.
"왜 가려는 거야~! 왜에에에! 환계가 불만인 거야? 우리가 싫어진 거야?! 나도 같이 데려가!"
'무리지.'
내 심정을 이해한 듯, 백록이 떼쓰는 요정을 불렀다.
"세 번째 겨울의 아이야."
듣기 싫다는 듯 요정은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라."
고작 하루 만에 제법 정이 들었다. 호들갑을 떨긴 해도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요정이 싫지 않았다.
'조금 시끄럽긴 해도.'
순수한 호의라는 건… 나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번만 해도 그래.'
만약 백록이 없었다면 요정과 페어리 드래곤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쯧.'
백록의 말마따나 요정은 순수했다. 짧은 사이에 정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일 터. 백록과 함께 한참을 달랜 끝에.
"그럼 몇 밤 지나면 돌아올 거야?"
'애 맞네.'
그런 눈초리로 노려보니 백록이 멋쩍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무튼 이해해준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백록이 태워주면 금방이었겠지만, 우리는 대전까지 천천히 걸었다.
"여기면 됐어."
"그런가? 살펴 가게."
"그래."
머리 위 페어리 드래곤을 떨쳐냈다. 설마 얘도 떼를 쓸까 싶었지만.
"뀨룩?"
잠깐 갸웃거리더니, 백록의 머리 위로 옮겨탔다.
'시원섭섭하네.'
배웅하듯 요정과 페어리 드래곤이 날아올랐고, 빛가루가 떨어지는 광경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믿어보라고 했던가.'
"뀨룩~"
"늑대야! 꼭 돌아와야 해!"
백록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으로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잊지 말라는 건지 잘 알고 있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현계로 돌아가자.'
짧은 시간이었지만, 환계에서 무엇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아니, 받았다.
'그리고.'
확신을 얻었다.
이제 더 이상 숲에서 벌벌 떨기만 하던 슬라임이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나는 강했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행동할 때였다.
탕아들의 꼬리를 쫓아― 나는 마음속으로 '현계로 돌아가겠다.'고 강하게 염원했다.
***
"흐응. 조금 늦으셨네요~?"
묘한 미소와 함께 비음을 흘리는 여성. 로브를 뒤집어쓰고 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점쟁이 같은 모습. 팀장은 사진과 함께 슬쩍 그녀를 훑었다.
"당신이 '꼬리털'입니까?"
"그래요~ 보잘것없는 정보상이죠. 하면 세검사께서는 무슨 일로 납셨을까요?"
역시. 알고 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팀장 자신의 얼굴은 여기저기 알려져 있으니.
'…묘하군.'
분명 마력은 느껴지는데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정보상이니 도리는 알 거라 믿습니다."
"어머. 난 죽기 싫답니다?"
비밀을 엄수하라는 압박에도 꼬리털은 싱긋 웃었다.
"사실 짐작은 가네요. 고원인가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처음 자신이 왔을 때만 하더라도 '늦었다'고 말했다. 올 것이란 걸 예상했다는 뜻이다.
'그 정보상이 알린 건가?'
그 외엔 생각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녀는 팀장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말아요. 커넥션은 없으니까. 단지 여명의 3팀장께서 꺼리실 만한 일이 고원에 대한 일이 아니고서야 또 있을까요?"
'까다롭군.'
주교와는 다른 의미로 속을 읽을 수 없다.
완수율 100%라는 명성은 허명이 아닌 모양. 게다가 그녀가 어디까지 정보를 쥐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맞습니다. 고원. 어디까지 캘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 원하시죠?"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진하게 묻는 말에 팀장은 목소리를 낮췄다.
"가능한 한 전부."
"세게 나오시네요? 좋아요. 해드리죠."
"?"
부탁한 그가 일순 당황했을 정도로 너무나 흔쾌한 대답에 팀장은 되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보신담~? 부끄럽답니다?"
"장난치지 마시죠."
"장난?"
"전 드높은 고원을 말하는 겁니다."
"어머~ 우연이네요? 저도 그런데."
팀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광휘의 눈을 피할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왜 없다고 생각하세요? 광휘도 사람인데~"
"…진심입니까?"
"그럼요. 광휘는 고원. 당신은 여명."
꼬리털은 배시시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전 어디일까요?"
***
'돌아왔다.'
마력의 농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여기가 현계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잘 은신을 사용했다.
'…20레벨은 좀 아쉽네.'
환계에서 던전을 하나 더 돌고 올 걸 그랬나. 어차피 경험치는 채웠어야 했는데.
[EXP 90216 / 112455]
'얼마 남지 않았어.'
수컷 동굴 포식자가 생각 이상으로 경험치를 많이 줬기 때문이었다.
'은신 C등급이면.'
이제 어지간해서 들킬 일은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강아지처럼 조그맣게 변했다.
'대전의 대표 클랜.'
구마준에게 지시를 내렸던 꼬리는 바로 그곳에 잠입해 있었다.
'은자의 숲.'
대전의 대표 클랜이자 순위는 19위. 당연히 어떤 클랜인지도 알고 있다. 클랜 로드에 집중된 체제― 따라서 그녀 하나만 조심한다면 꼬리, 이백섬을 쫓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해보자.'
사실 구상섭은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는 놈이었고, 구마준은 꼬리라고 부르기도 힘든 말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백섬은 제대로 된 탕아의 일원이니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놈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슬슬 밤이네.'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머지않아 적막한 밤이 찾아올 터.
―그래. 숨어있는 꼬리를 쫓을 시간이었다.
***
"가려느냐?"
"……."
"그럴 거라 생각했다."
"……."
"걱정하지 않아도 세 번째 겨울의 아이는 남을 것이다."
"……."
"글쎄."
백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대신 보이는 건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뛰노는 요정들과 환수들이었다.
아름답고 더할 나위 없는 광경.
백록은 환계에서 올려다보는 바다를 좋아했다.
―그는 언제까지나 이 풍경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용에게는 아니겠지.
어린 용의 소망은 환계에선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심정을 이해하고, 백록은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