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25 대전의 밤
"이걸로 만족합니까?"
팀장의 물음에 꼬리털이 갸웃거렸다.
"뭐가요?"
"대금. 이걸로 치렀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와~ 날먹하려 하시네? 겨우 이걸로 고원 뒤를 캐라고요? 그게 계산이 맞아요?"
불쾌한 표정으로 팀장은 손을 털었다.
"당신이 스퀘어 출신이 아니었다면 절대 들어주지 않았을 부탁입니다."
"어머? 어차피 솎아내야 할 것들인데요?"
"……."
"저울은 아직 기울어져 있거든요? 밤은 기니까 좀 더 어울려주신다면… 글쎄요?"
"후우."
팀장은 아까 전, 꼬리털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
자신을 가리키며 어디 출신일 것 같냐는 물음에 답이 돌아오지 않자 꼬리털은 난처한 미소를 띄었다.
"나름 신비 컨셉이었는데 별로였나요?"
"……."
"아 정말~ 저 마법사에요. 마.법.사! 엄청 비싼 몸이라니까요?"
"마법사라…?"
"마법사! 그것도 진짜배기! 자, 이것 봐요."
로브 소매에 확실히 보라색 커프스가 붙어 있기는 했다.
"…퍼플 스퀘어? 당신이 스퀘어 출신이라는 말입니까?"
"어머. 못 믿으시네? 이럼 좀 믿음이 가시려나?"
그녀의 손끝에 육망성이 나타났다. 마법도 뭣도 아닌 마력의 구현이었지만, 이 정도로 정밀한 형상을 만들어냈다는 게 마법사라는 반증이었다.
팀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꼬리털을 바라보았다.
"스퀘어의 마법사가 이런 데서 뭘 하는 겁니까?"
"그거참.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줘서 고맙네요?"
고작 정보상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의문에 꼬리털은 생긋 웃었다.
"저희도 쫓고 있거든요? 여명처럼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게 뭡니까?"
"사각지대(Blind Spot). 저희가 쫓고 있는 조직 아니, 배신자들의 이름이에요. 순조롭게 쫓고 있었는데, 일이 꼬이고 말았어요. 사각지대가 어떤 조직과 손을 잡았거든요."
"……."
"얼마 전 부산에서 있었던 일은 들었겠죠? 하수도의 일이요."
물론 알고 있다. 하수도의 실험장을 발견했던 게 홍유리였으니까. 듣기로는 키메라를 만들고 있었다던가? 정작 연금술사도 키메라도 발견되지 않았다지만.
"저흰 사각지대와 협력한 조직이 하수도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즉, 당신은 사각지대 혹은 그 협력 조직을 쫓고 있다…?"
"어머~ 영특하셔라. 바로 그거랍니다. 정확히는 그 협력 조직의 '꼬리'라고 불리는 사람이죠."
"……."
"아~ '설마 당신이 꼬리털인 이유가 그거 때문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네요?"
여인이 자신을 흉내 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자 팀장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정답~ 근데 저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거든요? 제가 여기서 몇 년을 썩었을 것 같나요? 아하하~ 자그마치 3년을 이러고 있었답니다?"
웃고는 있지만, 그녀의 아미에 도드라진 혈관을 보면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아. 등신 같다는 거 저도 알아요! 근데 답답해서 그러죠! 꼭꼭 숨어서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
"이대로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어차피 우리가 눈치챘다는 건 걔네도 알고 있고."
변명하듯 말하던 꼬리털은 이젠 그냥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애초에 스퀘어가 나쁜 거라니까요? 마스터도 너무하시지! 날 이딴 곳에 처박아두고!"
"당신 사정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궁금하지도 않고요."
팀장이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것보다 이런 얘기를 해주는 이유는 거래입니까?"
"어머, 제가 쓸데없는 말을… 네. 그렇답니다. 저는 고원의 정보를 캐주고 당신은 제 일을 조금 도와주고. 서로 윈윈이 아닐까요?"
"…당신의 뒷배가 스퀘어라는 건 믿겠습니다. 고원의 뒤를 캐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죠."
여태 완수율 100%라는 말도 안 되는 정보상의 뒷면에는 스퀘어라는 거대한 조직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그 조직에 대해 3년간 감도 못 잡았던 거 아니었습니까?"
팀장의 물음에 꼬리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엔 달라요. 부산의 하수도. 거기까지 갔다가 조금 단서를 찾았거든요."
"……."
"정말 어이가 없더라고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 바보들이나 속는 줄 알았더니…"
'부산의 하수도라.'
그녀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키메라 실험에 이용된 사람들을 공급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놈들이 숨어있는 곳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 혼자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자신 없다라. 솔직히 믿기 어렵군요."
"사실인걸요? 그래서 당신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꼬리털은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 로미오.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답니다. 부디 이 가엾은 쥴리엣을 도와주시겠어요?"
"……."
"아~ 쪽팔려라."
팀장의 싸늘한 눈초리에도 꼬리털은 킥킥 웃었다. 마치 가면을 갈아 끼우듯 휙휙 변하는 표정과 성격. 솔직히 정신병자 같았다.
'차라리 홍유리가 낫군.'
마법사란 족속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는데, 이 여인은 그중에서도 중증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니라면 고원의 뒤를 캐기 어려운 것도 사실.
"정보상으로서 도리는 지킬 거라 믿겠습니다."
"걱정 말아요. 죽기 싫다고 했잖아요?"
팀장이 작게 끄덕였고, 둘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데 혹시 개명할 생각은 없어요? 로미오로."
"……."
"장난인데 뭘 그렇게까지 반응하신담?"
"후. 일이나 하죠."
"에이~ 미안해요. 미안하다니까요?"
***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앉고― 적막한 어둠에 달 한 조각이 떠올랐다.
신전에 잠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은자의 숲에도 잠입할 생각이었다.
'…여긴 열쇠가 아니네?'
패스워드와 지문인식. 어느 쪽이든 하나라도 풀면 되는 모양인데… 잠깐 고민하다가 문 아래 틈새를 보았다. 1cm도 되지 않는 좁은 틈.
'되려나?'
얼마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커진 상태에서 저 조그마한 틈새로 들어가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시도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발소리가 들려 얼른 숨었다.
'……!'
다가온 남자가 문 앞에 섰고, 곧 띡띡-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411202 그리고 4.'
암시와 약한 시각으로 비밀번호를 읽을 데 성공했다.
'운이 좀 따라주네.'
지문 인식으로 문을 열었다면 틈새로 들어가야 했을 텐데.
'조심해서.'
기척이 멀어졌음을 확인하고 촉수로 문과 틈새를 덮었다. 가능한 소리가 들리지 않게끔 차단한 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띡띡- 뚜루루루.
'됐다.'
다시 문을 닫고 안을 바라보았다. 절제된 내부가 클랜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은자의 숲.'
이전처럼 사무실을 찾을 필요는 없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구마준과는 달리 이백섬에 대해선 확실히 알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안다.
'3층.'
느껴지는 기척은 셋. 총 4층인 건물. 4층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당연히 클랜 로드일 테고, 방금 문을 열었던 사람은 이백섬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3층이야.'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백섬의 거주지가 클랜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찾아내기 힘들었던 거야.'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구마준에게 대전의 대표 클랜에 꼬리가 있을 거라고 듣는다. 하지만 구마준도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 거기서부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좀 고생을 했었지.'
숙식. 설마 클랜에서 먹고 자는 이백섬이 범인이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백섬만 죽이고 조용히 나온다면?'
일단 이백섬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거의 100%라고 생각하지만 이백섬 본인을 확인한 건 아니니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3층까지 수월하게 도착해 기척이 있는 방 끝까지 다가가 감지를 사용했다.
'자나?'
제자리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작은 소음이 들린다.
'자고 있진 않은 모양인데.'
잠깐 고민하다가 한 번 더 감지를 사용했다.
'4층에도 움직이는 기척은 없어. 마찬가지로 방금 들어왔던 사람도.'
다만, 헌터이니만큼 조금만 움직여도 깨어날 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옥내 소화전이 보였다.
'아?'
뇌리에 번뜩 떠오른 생각에 힘차게 경보기를 울렸다.
고요한 새벽, 야음의 정적을 깨고― 따르르릉!
'이건 못참지.'
울려 퍼진 경보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난 기척이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이백섬(인간)]
'맞구나.'
두꺼비를 닮은 듯 심술보가 가득해 보이는 인상.
깜짝 놀란 이백섬이 경보기를 확인하는 와중, 놈의 방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어우. 시끄러워라. 뭡니까?"
"글쎄요. 저도 갑자기 경보기가 울려서…"
저편에서 다른 클랜원이 다가오자 이백섬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잘못 누르셨나봐요?"
"아뇨. 방에 있었는데 갑자기 울리더라고요."
"희한하네. 오작동이라도 했나? 일단 끄고… 어. 네네. 그 경종 두 개랑 옆에 부저까지."
곧 경종이 멎자 두 사람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휴… 잠 다 깼네요."
"저도요."
"클랜장님도 깨셨을 것 같은데요…"
"제가 오작동이라고 말씀 드릴 테니 먼저 들어가시죠."
클랜원이 끄덕이자, 이백섬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운이 좋다. 만약 헌터의 방이 경보기에 더 가까웠더라면, 눈치를 보고 올라가는 건 이백섬이 아니라 그였을 테니.
'지금이야.'
잠깐 둘러봤지만 이백섬의 방은 상당히 삭막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상을 제외하면 옷도 거의 없는 수준. 애검이 벽 한 쪽에 걸려있긴 했지만, 헌터치고 방에 무기 하나 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이상하다는 낌새가 없어야 한다. 이백섬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수롭지 않게. 그러면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게끔 유도해야 했다.
'…소음은 이거였나.'
핸드폰이 침대 위에 던져져 있다. 잠금이 걸려있어 풀 순 없겠지만, 꺼지지 않고 대기화면인 걸로 보아 방금까지 사용 중이었던 모양.
'00:44. 배터리 28%.'
감지로 이백섬이 클랜장의 방까지 도착했음을 포착했다. 아마 소란의 원인을 보고하는 모양.
'이거라면.'
충전기를 들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은신을 유지한 채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백섬이 돌아왔다.
'나오면 따라가고. 나오지 않으면…'
자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들어가서 죽인다. 이백섬은 내 은신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조심히 들어가면 아마 가능할 터.
그렇게 30분이 더 지났을까? 문 안의 기척이 슬그머니 움직였다.
'…….'
숨을 죽이고 기다리니, 이백섬이 밖으로 나왔다.
'좋아.'
녀석이 계단을 내려갔다. 3층 아래로는 아무도 없었기에 높은 확률로 이백섬이 클랜 밖에 용무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편의점.'
충전기를 사러 가는 모양이었다.
빌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새벽 1시가 넘었으니 민폐라 생각한 모양.
'조금만 더 멀어지면.'
마침내 클랜 건물 밖으로 나온 이백섬을 조심스레 미행했다. 놈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 쓰벌."
배터리가 다 한 모양인지 곧 걸쭉한 욕과 함께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돌아보니 클랜과 제법 떨어졌다. 걸어서 5분은 걸릴 거리. 당연히 마력을 사용한다면 눈치채겠지만, 얼른 처리하고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가능한 들키지 않게.'
스멀스멀 뻗은 촉수를 경화와 마력으로 가능한 위협적으로 만들어 이백섬을 꿰뚫었다.
'좀 아쉽네.'
단번에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꼬리라는 건지 마지막에 놈이 반응했다. 심장을 뚫을 생각이었는데, 살짝 몸을 틀어버려 어깨를 꿰뚫고 말았다.
"……!"
이백섬의 시선이 돌아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된 거지?'
놈의 눈에 가득차 있는 것은 분명 당혹이었으나,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마치 예상했던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는 정도의…
"설마 했는데…"
'은신을 눈치챘었던 건가?'
아니면 올 줄 알고 있었나?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작위적이기는 했다.
'경보기만이라면 몰라도 충전기도 사라졌으니까.'
위화감 정도는 느꼈을 터.
혹시나했던 거겠지. 이백섬은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냈고 그 순간 내 촉수가 잘려 나갔다. 일순 물러나자, 가로등 아래 내 모습이 비쳤다.
"뭐야? 몬스터?"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 이백섬.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대단한데.'
나 같아도 어이가 없을 텐데 순식간에 당황을 감춘다.
방에 있었던 애검은 가져오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단검이라도 가져온 모양이다. 싸우기 전에 소화전 앞에서 확인했던 놈의 스테이터스를 떠올렸다.
[이백섬(인간)]
[신장 169.4cm] [체중 66.1kg]
[힘 341] [민첩 386] [체력 374] [마력 319]
[보유 스킬]
[괴력(D)] [가속(D)] [약한 시각(E)]
'그래. 괴력이 있었지.'
촉수는 끊어졌지만, 이미 왼쪽 어깨는 완전히 헤집어 놓았기에 사용할 수 없을 터. 내가 달려들자 놈은 피할 자세를 취했다.
'물러난다?'
갑작스레 움직임이 빨라졌다. 처음 기습에 그나마 몸이라도 틀 수 있었던 건 가속 덕분이리라.
'빨리 끝내야 해.'
놈은 내가 올 걸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밖으로 나왔다면 이건 함정이라는 뜻이었다.
"큭…"
이백섬은 초조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 유인하려던 게 맞는 모양. 다소 과할 정도로 신중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여태 탕아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리라.
'철두철미해.'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지 않고 그에 대비한다― 이것조차 함정. 새삼 그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은 품속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던졌고, 그 순간 연기가 피어올랐다.
'닌자냐?'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그래서 그게 소용 있느냐 묻는다면…
'되겠어?'
매캐한 연기로 눈과 코는 가렸지만, 감지는 이백섬의 위치를 포착하고 있다.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다.
'근데 유인했던 거 아니었나?'
함정이 있는 곳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인가? 의아했지만, 일단 놈을 쫓았다. 놈의 민첩이 400에 가까웠고, 가속 스킬까지 가지고 있어 작정하고 도망치는 놈을 잡는 게 쉽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빠르네.'
거의 20초 정도. 쫓고 쫓아 결국 건물 안까지 들어간 놈은 일그러진 미소를 띄었다.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자신만만한 이백섬의 모습. 마치 이곳에서라면 당할 리 없다는 듯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여기가 아지트인가?'
"멍청한 괴물 새끼…?"
그러다가, 곧 놈의 눈이 커졌다. 솔직히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뭘 믿고 나댄 거지?'
놈이 준비한 게 있을 거라 여겼다 아무리 봐도 내가 있단 걸 아는 듯한 태도였으니까.
'솔직히 나도 자신 있어서 온 거기는 해.'
꼬리인 이백섬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말단 몇 명이 더 있다고 거리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놈이 유인한 곳까지 도착해보니 감지에 느껴지는 기척도 없었고 딱히 뭔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 새끼. 여긴 왜 온 거야?'
내가 갸웃거리는 사이, 이백섬은 당황한 듯 핸드폰을 꺼냈다.
"시, 시발. 이럴 리가 없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핸드폰을 조작하려 했지만, 그게 될 리가 없다.
'야. 너 배터리 없잖아.'
그제야 아차 싶은 모양. 촉수를 가까스로 피한 놈이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모습엔 한숨을 금치 못했다.
'휴. 이딴 게 꼬리라니…'
치밀? 치밀은 개뿔이. 차라리 구마준이 더 나은 것 같아 긴장했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크르르―!"
이백섬은 들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유일한 무기를 투척한다는 건 정말 최후의 순간에나 할 법한 판단이었다. 녀석이 던진 단검을 악식으로 먹어 치웠다. 그 사이, 놈은 마력까지 사용해가며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
계단으로 쫓아도 되겠지만 덩치가 덩치인지라 조금 좁다. 놈의 위치를 계속 감지하며 닫힌 엘리베이터의 문을 억지로 열었다. 아니, 뜯어버렸다. 곧 천장까지 우드득 뜯어버리고―
"그르르!"
탄력으로 십수 미터를 뛰어올라, 촉수로 벽에 붙어 마찬가지로 6층의 닫힌 문을 뜯어냈다. 마침 놈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미, 미친!"
10초 남짓한 시간 만에 여기까지 뛰어왔으니 대단하긴 했다. 날 보자마자 황급히 몸을 돌리던 이백섬이 날카로운 촉수에 쓰러졌다.
"끄으윽!"
신음을 참으며 놈이 촉수를 잡아 비틀었다. 충혈된 눈이 유난히 붉었다. D등급 스킬인 괴력이 폼은 아니었는지 이백섬의 팔에 힘줄이 돋았고, 경화한 촉수를 힘으로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대단한데.'
힘 341과 괴력이 겹친 결과. 놈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괴력과 가속이 겹친 커다란 주먹― 그러나 420의 민첩으로 가속을 사용하던 동굴 포식자도 사냥한 나였다.
[간파(E) Lv.7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간파(E) Lv.7 -> 간파(E) Lv.8]
고개를 틀어 놈의 주먹을 피하고 되려 앞발로 내리찍었다.
"……!"
쿠궁! 뒤통수가 바닥과 강하게 충돌한 놈은 계단과 계단 사이 층계참의 바닥을 부수고 다음 층까지 나가떨어졌다.
그때까지도 숨이 붙어있다는 게 용했지만, 곧 죽을 목숨이었다.
"크헉, 씨팔… 병신 같은. 새끼들. 대체 어딜 간 거야?"
뭘 준비하긴 했던 모양인데 일이 꼬인 모양이다. 슬쩍 밖을 보니 주변 건물에 불이 켜져 있었다.
'너무 소란스러웠어.'
계단 하나를 부쉈고 오밤중에 추격전을 했으니까. 빨리 도망갈 필요가 있다.
'먹을 수도 없고.'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밀폐시킨 방에서 잿불로 놈의 시체를 소각했다.
'이걸로 됐어.'
꼬리는 잘랐다. 아무리 조심했다지만, 이쯤 되면 탕아들도 누군가 방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터.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충분히 방해했어.'
멸망까지 앞으로 몇 년인가 시간이 남아 있다. 소설 속 시점이 시작되는 순간까지 충분히 성장 해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더. 아무리 못해도 강태호만큼은 강해질 필요가 있다.
'…….'
낮과 밤을 구분하게 된 뒤부터는 제법 빨리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2달도 걸리지 않았을 터.
'2년 조금 덜 되는 시간.'
그 이후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리라.
'아카데미로 가자.'
내가 물어다 주는 기연을 먹고 무럭무럭 성장해 멸망을 막아줄 주인공을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흐뭇했다.
'나만 구를 게 아니니까.'
어떻게 잘만해서 조력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온갖 고된 일을 다 떠넘겨주리라.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1층까지 도착했다.
'…일단 튀고 보자.'
아직 감지되는 기척은 없었지만, 분명 은자의 숲 클랜장이 눈치챘을 터. 어쩌면 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건물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문득 보인 것에 잠깐 발길을 멈췄다.
'어?'
놈이 떨어뜨린 핸드폰… 이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