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25 대전의 밤 (6)
'결국 왔군.'
고작 스컬 울프 따위의 방해로 끝내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아직 4절― 다시 마법이 완전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창선의 제자는 떨궜나.'
결국 세검사는 자신의 마력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냈다.
"아가일!"
어리석은 누이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다. 결연한 눈으로 항복을 권유해왔다.
"이제 정말 끝이야."
"아넬라."
"마지막 권고야. 여기서 그만해."
"그건 5년 전에 말했어야지. 너만은 알고 있었을 텐데."
남매는 엇갈린 지 오래. 수평선을 달리듯 이견은 좁혀지지 않는다. 구진하는 아가일을 향해 검을 겨눴다.
"아가일 모레스트. 영창을 멈추고 항복하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하."
아가일이 코웃음 쳤다.
"경고?"
차갑게 냉소한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너 따위가 뭘 어쩌겠다는 거지?"
엮이고 엮인 자색 실타래. 아가일이 손가락을 튕기자, 마력이 구진하를 덮쳤다. 일순 환상을 보았으나 이미 한 번 당한 공격. 알고 있다면 막을 수 있다.
"흡!"
극도로 집중한 그의 세검이 마력의 정중앙을 찔렀다. 실타래의 중앙. 결을 정확히 노린 침착한 대응이었다.
"그걸 대답으로 듣겠다!"
아가일을 완연한 적으로 간주하고 마력을 일으킨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섬세한 검술과 정교함으로 그를 압박해갔다. 경계 위에서 줄타기하듯 목숨을 도외시한 견제― 일견 그렇게 보였으나 그 모든 것이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철저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세검사, 구진하가 장기로 삼는 것은 일대일의 대인전. 눈을 어지럽히는 기교에 아가일은 하염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큭!"
로브 자락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그사이, 손가락이 얽히며 수인(手印)을 맺었다.
'하필이면.'
아가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한 손으로 수인을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속 쫓아요!"
마치 들개처럼 구진하는 아가일을 쫓고 또 쫓았다.
끈질긴 추적에 남은 주문을 외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긴 아가일이 불완전하게나마 마법을 해방했다.
"Adormiți în oglindă!"
그렇다 해도 5절의 영창. 구진하를 덮친 마법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가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다. 발현하는 아가일이나 그를 막으러 온 두 사람이나. 구진하가 뒤를 돌아본 순간, 아넬라가 끄덕였다.
"Ruperea fanteziei!"
미리 준비하고 있던 3절의 영창. 환상 파기― 오직 환영의 마법을 깨부수기 위해 만들어온 그녀만의 비기.
'됐다?'
아니다.
구진하는 재빨리 몸을 굴렀다. 처음에는 맞받아칠 생각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는지 깨달았다. 아가일의 마법은 아넬라의 환상 파기를 처참히 부쉈다. 섬뜩한 대마법이 구진하의 머리 위를 스쳤다. 닿지도 않았는데 온갖 환상이 난무했다.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속이 메스꺼웠다. 세계가 빙빙 도는데, 자신은 반대로 도는 듯한 느낌.
억지로 나사를 끼워 넣은 듯―
"정신 차려요!"
아넬라가 외치며 손가락을 튕기자, 혼미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알고 있었는데.'
구진하는 이를 악물었다. 맞지도 않았고, 대비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산이었다.
오산이었던 건 아가일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걸 준비하고 있었다니.'
환영을 부수는 것만을 위한 마법. 덕분에 기껏 준비한 마법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포션의 효과로 상처는 아물었으나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가일. 너 손이?!"
이제야 깨달은 듯 놀라는 누이를 보며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라는 소리다."
빈 손목에 마력이 휘감겼다.
충분한 마력은 거의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 비록 손목을 재생시킬 수는 없다지만.
'만들 수는 있다.'
휘감은 마력이 형태를 이뤄갔다. 아가일은 만들어진 손을 쥐었다 폈다.
'불편하군.'
감각도 조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양손으로 수인을 맺을 수만 있다면.
"큭!"
세검이 바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자색 가시가 솟아오르고 썩어 문드러진 사슬이 휘날렸다. 가시는 피하고 사슬은 쳐냈지만, 어깨 끝을 스치고 말았다.
'2절 영창을 병행한다고?'
그것도 수인만으로? 구진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가일의 마법사로서의 기량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까처럼 추격할 여유 따위는 없다.
'미쳤군.'
기량 그리고 역량. 그 모두가 여명 최고의 마법사인 홍유리보다도 위에 있었다.
'이게 스퀘어인가?'
그 저력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숨을 가다듬은 구진하는 세검을 팔꿈치와 직각이 되도록 세웠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아가일이 양손으로 쥔 보라색 마력이 형태를 이뤄갔다. 곧 가시 돋은 채찍으로 변하자, 아넬라는 입술을 씹었다.
'영창도 없이 나보다 빨라!'
3년 만에 재회한 동생과의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벌어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재능의 차이. 아연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아넬라와는 반대로 내려다보는 아가일의 표정은 싸늘했다.
"너는 여전하군. ―Obsedat de fantezie."
수인을 맺고, 주문을 영창한다. 그러면서도 말을 걸어왔다. 아직 여력이 남았다는 증거. 또다시 지독한 열등감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아넬라의 앞을 펄럭이는 코트가 가렸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영창하십시오."
채찍이 휘둘러진 순간, 아넬라의 눈이 커졌다.
규칙성 없이 괴이하게 다가오는 궤적. 구진하는 그 하나하나를 전부 쳐냈다. 코트 자락이 쉴 새 없이 휘날렸다.
"당신에겐 하나도 닿지 못하게 할 테니."
검 끝을 감싼 마력은 국소범위에 한정되었으나, 그런 만큼 집중되어있다. 마법사로서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곳에 있는 아가일. 그의 마법을 검사로서 아득히 높은 경지에 있는 세검사가 하나하나 맞받아쳤다.
"Deveniți o închisoare care vă reține."
아가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여명의 3팀장.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아무리 공격해본들 정면에서 뚫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아넬라가 준비하는 건 환상 파기. 세검사는 마법을 피할 테고, 휘말렸다 해도 아넬라가 깨울 터. 결국 아까와 같은 결과가 반복될 뿐이다.
'그럼 방식을 바꾸지.'
아가일은 구현하고 있던 마법을 대기시켰다. 뛰어난 마법사의 기교인 주문 보류. 아가일이 그럴 수 있다는 걸 아넬라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놀라게 한 건 새로이 시작되는 마법이었다.
"Sicriul pentru îngroparea morților."
"너 설마?"
"Trandafirul negru este un lucru al morților."
"안 돼요! 막아요!"
영창중에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머리가 징징 울렸다. 그럼에도 아넬라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마법! 저것만은 반드시!"
영창중인 아넬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분명 아가일의 마법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닿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에게 여력은 없다. 수인으로 맺은 마법을 쳐내는 게 고작이었다. 아넬라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그렇다면.
'내가… 막아야 해!'
가능할까? 아넬라는 시험대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꼈다.
"Plâng în fața mormântului"
벌써 3절. 그녀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력에 대한 지배력이 부족한 아넬라는 아가일처럼 마법을 보류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마법을 발현하나 예상했다는 듯 쳐낸다. 아넬라는 순간, 아가일이 입꼬리를 끌어올린 것을 보았다.
'아.'
속았다. 아니, 조급했다.
아넬라는 뒤늦게 후회했다. 자색 마력은 그 자체가 환영의 속성을 띈다. 만약 침착하게 마법을 완성했더라면?
'그랬다면.'
수 싸움에서 밀렸다. 환상 파기로 수인을 맺는 손만 없앨 수 있었다면 세검사는 분명 아가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또 망쳤다.
5년 전과 똑같은 결과였다.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눈앞의 일에만 급급했다. 조급함이 발목을 잡아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녀의 억장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Frigul care îți umple locul vacant."
마침내 4절. 아넬라는 마음이 꺾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허공을 가득 메운 한기속에서 검은 장미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암담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이젠… 틀렸어.'
드리워진 절망.
그 날 말리지 못한 동생은 괴물이 되었다.
ㅡ선자는 쓰러졌고 세검사의 발은 묶여 있다. 그리고 동생을 막기에 자신은 비참하리만치 부족했다.
처음부터 오면 안 됐다. 무엇을 바랐던 걸까?
'3년 동안 내가 아가일을 따라잡았을 거라는 착각?'
망상이다.
하루종일 걷더라도 누군가는 그 노력을 비웃듯 뛰어서, 날아서 지나가버린다. 아가일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왜 아가일을 쫓았을까? 어머니를 위해? 설마하니 날 죽이진 않을 거라는 헛된 기대? 어쩌면 이야기를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기적이라도 일어날 거라 믿었던 걸까.'
아넬라는 자조했다.
기적이란 도통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O liniște nesfârșită va cădea…?"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기에 기적이라 불리는 법이다.
***
환상을 부수고, 늑대는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웅크린 몸을 일으키자, 반갑다는 듯 페어리 드래곤이 뺨을 부볐다.
"그래. 너였구나."
"뀨루룩?"
"여기서 잠깐 기다려."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녀석이 비틀거렸다. 이젠 나는 것조차 힘든 모양인지 바닥에 내려앉아 색색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중앙 통로.
페어리 드래곤이 여기까지 데려다준 모양이다. 덕분에 환상에 갇힌 동안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다. 녀석도 자신의 상태를 아는지 시무룩하게 날개를 접었다.
"걱정하지 마."
힐끔 통로 저편의 싸움을 보았다. 잠깐 바라보다 녀석과 시선을 마주했다.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늑대는 어둠 저편으로 내달렸다. 배웅하듯 뒤따라가던 어린 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꾸룩?"
자신과는 상극의 기운이 느껴졌다. 호기심을 느낀 페어리 드래곤이 다가간 곳엔 여자가 괴로운 신음과 함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뀨륵?"
페어리 드래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여자의 상처를 좀먹는 부패가 어린 용에겐 더없이 맛있는 간식으로 보였다.
***
늑대는 어둠 속에 자신을 숨겼다.
제아무리 놈이라 한들 격렬한 싸움 중에 자신을 찾는 건 어려울 터.
"Frigul care îți umple locul vacant."
영창이 이어짐에 따라 여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가일의 자색 마력은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검게 번져갔다.
'조금 더.'
환상에 빠지기 직전, 돌풍과 함께 일으켰던 잿불이 아지트 가득 번져있었다. 오직 나만은 태우지 않는 불꽃. 검은 잿불을 가득 두르고, 놈에게로 도약했다.
"O liniște nesfârșită va cădea…?!"
놈과의 거리가 좁혀지기 직전, 돌풍을 일으켰다. 해방된 바람에 온몸에 두른 잿불이 거세게 휘날렸다. 뒤늦게 아가일이 눈치챘으나, 잿불에 휩싸여 검은 장미는 피어오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알파?"
구진하가 눈을 부릅떴다. 표정이 어둡던 여자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비볐다.
"크르르르."
스산한 살기― 세검사는 알파를 예의주시하며 검을 앞세웠다. 당장에라도 충돌할 것 같은 둘.
서로가 서로를 인지한 가운데.
"하."
어이없어하는 허탈한 웃음이 긴장의 끈을 끊었다. 늑대와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왜? 내 손목은 노잣돈으로 부족하던가?"
늑대는 속으로 침음했다.
'설마 저렇게 할 줄은 몰랐는데.'
로브에 실처럼 얇은 마력을 둘러 탈피하는 것처럼 잿불에서 벗어났다.
마력에 대한 발상과 이해도가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아가일이 잠깐 비틀거렸다.
'어쩌면.'
늑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상처나 고통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정신 고갈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만 끝내지."
지겹다는 듯 씹어뱉은 아가일이 보류했던 마법을 다시 불러일으키자 아넬라가 황급히 외쳤다.
"마, 막아요!"
이미 늦었다. 아가일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둘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동공에 빛이 사라졌다.
"질릴 정도로군."
아가일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너는 왜 환상에 빠지지 않는 거지?"
그래. 둘.
아넬라와 구진하는 환영 속에 갇혔지만, 늑대는 짙은 살의를 드러냈다.
***
[아가일 모레스트(인간)]
[신장 182.1cm] [체중 74.6kg]
[힘 389] [민첩 396] [체력 416] [마력 704]
[보유 스킬]
[강욕(B)] [대마력(B)] [수납(E)] [암시(F)]
700을 초과하는 마력. 심지어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스테이터스가 꼬리였던 이백섬을 능가하고 있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놈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놈의 안색이 창백한 게 그 증거였다. 특히 4절 영창을 마저 사용한 뒤엔 더더욱.
'그래도 불리해.'
그나마 잿불이 아니었다면 성립되지도 않았을 싸움. 끔찍하게 불타오른 놈의 어깨에서 진물이 흘러 내렸다.
'구진하. 깨울 수 있을까?'
힘들겠지. 페어리 드래곤과 달리 나는 환영에 개입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럼 놈의 마력이 다하기를 기다린다.'
싸움의 양상은 소모전.
놈의 마력이 다할 때까지 살아남는 게 조건이었다.
아가일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5절 영창을 극복하고 4절 영창은 막혔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는 늑대에게 환영이 통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Lanțul corupției."
아가일은 동시에 셋이나 되는 사슬을 만들어냈다. 불길한 사슬이 서로 얽혀 철퇴가 되었다. 커다란 철퇴가 바닥을 내리찍자 우지끈 무너져 내렸다.
'살벌하게.'
그에 그치지 않고 서서히 썩어들어갔다.
'저건 재생이라도 힘들 것 같은데.'
단 한 번 공격을 허용하기만 해도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얼마나 까다로운 상대인가?
"잘도!"
까다로운 상대ㅡ 그건 늑대만 느낀 게 아니었다.
"Fereastra de foc."
화르륵 타오른 불의 창. 예상은 했지만, 놈의 검은 불꽃이 순식간에 불의 창을 집어삼켰다. 환영은 통하지 않고, 화염은 연료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아지트 전체가 놈의 영역이다.'
어딜 둘러봐도 검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칠흑 같은 불 속에 제멋대로 활개 치는 늑대. 점점 거세지는 두통. 정신 고갈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설령 이 늑대를 죽인다고 해도 머지않아 세검사와 누이가 환상에서 벗어날 터. 어쩔 수 없는 선택. 아가일은 부서진 바닥, B동으로 몸을 던졌다.
'나중을 기약한다.'
여기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언제든 일을 도모할 수 있다. 통로를 지나던 아가일은 발아래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
엘릭서 연구실.
아가일의 가슴이 철렁였다. 분명 모조 엘릭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디에?'
적막을 깨는 발소리. 뒤늦게 아가일은 자신의 발을 적신 게 피와 뇌수였다는 것. 그리고 방 안에 검은 털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
힘없는 웃음을 터뜨린 아가일이 얼굴을 덮었다. 실소는 점차 커지며 이내 광소로 변했다. 한참을 웃던 그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축 늘어졌다.
"그래. 설마 전부 네가 했다는 거냐?"
그에 늑대는 공간을 열어보였다. 아가일의 눈이 뒤집혔다. 슬쩍 보였을 뿐이나, 그건 틀림없는 모조 엘릭서였다.
"……."
아가일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 환영이 먹히지 않는지. 어떻게 저만한 지성과 힘이 있는지. 모든 의문이 단번에 날아갔다. 늑대가 굳이 모조 엘릭서를 보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약속하지."
놈의 도발에 아가일은 최후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상황과 자존심이 물러나는 걸 용납지 않는다. 아넬라가 그리도 경계했던 검은 마력이 스멀거렸다. 기세 좋게 타오르던 잿불도 불길한 마력 앞에 사그라진다.
"너! 절대 쉽게 죽이진 않겠다!"
혈안이 된 눈에서 타오르는 건 광기였다.
바닥을 드러냈다 하나 여전히 압도적인 힘이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당장에라도 늑대를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마력에 담겨있었다.
그러나 그건 마찬가지였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아직도 끓어오르는 감정.
치솟는 울분, 사육장의 풍경. 눈과 혀가 없이 바닥을 기는 사람들.
살려달라고. 버리지 말라고. 문을 닫던 마지막 그 순간까지 손을 뻗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광경. 늑대는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 가장 어두운 때. 아지트 지하에서 울분에 찬 늑대는 강하게 염원했다.
―놈을 죽일 수 있는 칠흑의 불꽃을.
살기가 들끓고, 늑대의 빈 눈두덩이에서 검은 귀화(鬼火)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은 스킬 포인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