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28 추측은 하나가 되어가고
[진화 루트를 공개합니다]
목 빠지게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진화했던 게 도대체 언제였더라?
'제법 오래된 것 같은데.'
아마 아라네아와 싸우면서였던 것 같다. 사실 며칠 되지 않았는데 되게 오랫동안 스컬 울프로 지내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 진화한 건 아니니까 설레발치진 말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진화 루트를 확인했다.
[진화 루트]
[환영의 길(幻影)] - 조건 불충족 (Lv.30)
[부정의 길(不定)] - 조건 불충족 (Lv.30)
'이번에도 두 개네.'
양자일택. 시스템이 제시한 두 개의 진화.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부정의 길이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지냈으니까.'
부정. 부정형. 슬라임부터 워그까지 전생한 이후 부정형으로 지내온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편하긴 했지만…'
통각 무효도 얻었고 변형도 있는데 이제 와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게 사실이다.
'일단 환영의 길부터.'
환영이라고 하면 역시 아가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설레는 마음으로 통찰을 사용했다.
[환영의 길 : 그림자를 두른 마랑으로 진화한다]
'그림자를 두른 마랑이라.'
환상(幻)보다는 그림자(影)에 치중된 느낌이 아닐까? 퍼플 스퀘어의 환영과는 다소 다른 느낌인 것 같다. 이어서 부정의 길을 확인했다.
[부정의 길 : 산과 독으로 이루어진 마랑으로 진화한다]
'산과 독?'
산(散) 그리고 독(毒)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랑?
'슬라임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처음 진화에도 부정형 점액체 말고 포이즌 슬라임이 있었다. 어찌됐건 마랑의 길로 들어선 이상 늑대를 벗어날 순 없는 모양이다.
'길. 아마도 갈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이 이어지듯 거기서 다시 갈래가 나뉘는 거라고. 인간의 길이 아니라 마랑의 길로 들어섰을 때부터 정해진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별다른 생각이 들진 않았다. 대신, 지금껏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래서 슬라임. 부정형 점액체. 워그. 스컬 울프.'
새삼스레 꽤 멀리 왔다는 실감이 들어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던전의 공포(스컬 울프) Lv.20] [EXP 101406 / 142455]
[업 1.97%]
[체장 2.71m] [체고 1.02m] [체중 174kg]
[힘 196] [민첩 220] [체력 275] [마력 207] [극기 10]
[보유 스킬 목록]
악식(D) Lv.9, 촉수 다발(E) Lv.8, 감지(D) Lv.6, 재생(D) Lv.3, 뛰어난 은신(C) Lv.3, 통찰(D) Lv.3, 약한 청각(E) Lv.8, 약한 육감(E) Lv.2, 약한 시각(E) Lv.7, 모든 피해 감소(D) Lv.6, 경화(D) Lv.6, 변화(E) Lv.7, 약한 독 내성(E) Lv.1, 위압(E) Lv.2, 식탐(D) Lv.6, 수영(F) Lv.8, 잠수(F) Lv.8, 뛰어난 탄력(D) Lv.3, 간파(E) Lv.8, 돌풍(C) Lv.3, 약한 후각(E) Lv.6, 뛰어난 직감(D) Lv.5, 암시(F) Lv.8, 마력재생(D) Lv.3, 귀화(C) Lv.2, 통각무효(D), 요정어(F), 수납(E) Lv.1
[남은 스킬 포인트 1]
20레벨을 달성하면서 체격이 커진 건 물론이요, 전체적인 스테이터스가 크게 상승했다.
'특히 마력이.'
17레벨이던 당시 180이었는데 고작 3레벨 만에 27이 올랐다.
'환계에서 배웠던 게 컸어.'
그리고 스테이터스보다 더 큰 성장을 이룬 건 스킬이었다.
'귀화.'
스킬 포인트를 사용한 거긴 하지만 D등급 잿불이 C등급 귀화로 상승했다. 거기에 더해 악식도 C등급으로 오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슨 능력이 생길지도 궁금하고.'
진화하기 위해서 달성해야 할 30레벨…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본래 계획은 아카데미로 갈 생각이었지만,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진화할 길이 열렸으니까.'
목표가 보이게 됐으니까. 사실 이제 던전이 아니면 경험치를 충당하긴 어려워졌다. 20레벨이 되고 나선 포만감을 치환하더라도 하루에 1000도 올리기 힘들어졌다. 그에 나는 물끄러미 페어리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뀨룩?"
무슨 일이냐는 듯 갸웃거리는 녀석을 보며 백록의 말을 떠올렸다.
[자네는 환계로 돌아올 수 없다네]
[하지만… 흠. 아무것도 아닐세]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페어리 드래곤을 염두에 두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을.
'아무튼 함께라면 환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겠지.'
환계에는 일부러 방치하고 있는 던전들이 있다. 과도한 마력이 영물에게 해를 끼칠까봐 침식을 통해 마력을 현계로 보내고 있는 던전들.
'어차피 클리어해야 하는 던전이라면.'
다른 환수들이 처리할 바에야 내가 처리하고 경험치를 얻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먼저 환계를 들렀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아카데미로 갔다가 그사이 놓치는 던전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리고 사실 환계로 이동하는 게 더 편하기도 해.'
촉수로 쓰다듬자, 똬리를 튼 녀석이 방긋 웃었다.
***
"뭐냐? 너 병상 아니었어?"
"하이고~ 신경 끄시죠?"
거한의 말에 홍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옆구리를 감쌌다. 그에 찔리는 게 있던 거한이 찔끔 시선을 돌렸다. 장내를 둘러보니 웬 여자가 있어 눈초리를 좁히고 잠깐 살피던 홍유리가 툭 뱉었다.
"뭐야. 아넬라잖아?"
"알고 있었어?"
구진하의 의아하다는 듯한 말에 홍유리가 코웃음 쳤다.
"나도 스퀘어 출신이거든?"
당연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아넬라를 힐끔거린다. 그에 그녀는 어색해하며 말했다.
"아, 예. 홍유리 씨?"
그럼 그렇지.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홍유리가 착석했지만 구진하는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초면인 반응이었기에.
"늦어서 미안합니다. 상황은 다들 들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클랜장의 말에 거한이 끄덕였다.
"고원이 딴 주머니 찼는지 아닌지 의심된다는 거 아뇨?"
"쉽게도 요약하는군. 그래. 맞다."
갈래는 많았지만, 핵심은 그거였다. 클랜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을 안내했다. 한 명은 갑옷을 입고, 다른 한 명은 모발이 없다.
"오, 형씨!"
거한이 반갑다는 듯 아는체하자 성기사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입니다."
"회포는 나중에. 자기소개부터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칼같이 자르는 말에 그가 끄덕였다.
"성대운입니다. 신전의 성기사고, 이 친구는 박요한. 몽크입니다."
곧 클랜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분들이 몸담고 있는 전쟁의 신전에서 탕아들의 말단이라 여겨지는 인물을 찾았습니다."
"탕아들? 그게 뭔데요?"
전혀 모르는 듯한 홍유리의 반응에 클랜장이 구진하를 지그시 보자 그는 뒤늦게 아차 하고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라 생각해 회복에 전념할 수 있게끔 말하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구진하는 홍유리를 불러 상황을 알렸다.
"그러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브리핑은 계속됐다.
"저희 신전의 신부님과 내통하고 있던 1급 신자인 구마준이라는 자입니다."
"흠. 일단 그 신부는 어찌 됐소?"
거한의 물음에 성기사가 말없이 웃었다.
"허. 여전하구먼."
잠깐의 정적. 클랜장이 말을 이었다.
"난 상당히 높은 확률로 구마준이 탕아들의 일원이었다고 생각한다."
"왜? 뭐라도 찾았소?"
거한의 의문에 성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습니다. 아무것도. 신전의 내부 정보가 담긴 카피본을 제외하면 이상하리만치 깨끗했습니다."
좌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단체라면 그런 조심성 정도는 당연하겠지.
"거기서 더 찾을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
성기사가 몽크의 등을 치자 그가 앞으로 나섰다.
"바, 반갑습니다. 형제님들. 저는 박요한이라고 합니다."
"긴장하지 마쇼. 우리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흠흠.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좀 긴장이 되는군요."
옆에 있던 성기사가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으니. 심호흡 한 박요한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전 스컬 울프에게 구해졌습니다."
"구해졌다?"
거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현공원의 숲의 던전에 나타났던 살덩이 괴물. 구마준이 변했던 괴물이 절 집어삼키려고 했을 때, 스컬 울프가 절 구해줬었죠."
보란 듯이 소매를 걷은 박요한의 손목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무언가에 꿰뚫린 듯한… 마치 짐승에게 물린 듯한 자국이었다.
"허. 몬스터가 구해줬다라."
쉬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스컬 울프… 알파라면 말을 할 정도로 고도의 지성을 가진 놈이라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모든 의문은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부끄럽지만, 제게 미망(迷妄)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몬스터에게 구해졌다는 사실이 신전의 사람으로서 절대로 가져선 안 되는 의혹을 품고 말았다. 몬스터는 척결해야 할 존재. 있어서는 안 되는 악. 인류가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사라져야 하는 괴물들… 그런 괴물이 어째서 자신을 구한걸까?
고민하던 박요한은 결국 주교에게 고해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주교님은 그 몬스터가 여명이 쫓고 있는 '알파'라는 스컬 울프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구진하와 거한이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공공연히 퍼진 소문이었거니와, 주교에겐 직접 가서 알파를 쫓겠다고 이현공원의 던전 출입을 요청한 적도 있었으니.
"그리하여, 저는 그 몬스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자 여명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검사를 만났습니다."
구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찮은 만남이었죠. 서로 말을 맞춰보다가 구마준이 소속된 곳이 알파가 말했던 '탕아들'이라는 의문의 조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현공원의 던전에서 알파는 강태호에게 '탕아들'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언급했었다.
"탕아들이라. 그래서 실존하는 조직이라는 보장은 있나?"
고작 몬스터의 말을 듣고 섣불리 움직일 순 없다. 그런 의미를 담은 클랜장의 물음에 구진하의 시선이 아넬라를 향했고 이내 그녀가 목을 가다듬었다.
"전 아넬라라고 해요. 이미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퍼플 스퀘어 마스터… 아멜리아 모레스트의 딸이죠."
아넬라는 면목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뜸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멋대로 세검사를 이용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올리겠습니다."
"아넬라."
그저 거래였을 뿐이다. 그런 구진하의 만류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이 찾아올 것까지 저는 알고 있었어요. 당신을 기다리기까지 했으니까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과하고 싶었어요."
"……."
"죄송해요. 사족이 길었네요. 탕아들이라는 조직이 있다는 건,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보증한다?"
"…퍼플 스퀘어에서 추방당한 제 동생은 사각지대라는 조직을 만들었어요. 절대 용서받을 수 없고, 씻을 수 없는 믿기 어려운 일들을 벌이고 말았죠."
"아가일 모레스트."
대전의 밤. 얼마 전의 그 끔찍한 사건을 들어 떠올린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일… 저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아가일을 쫓았어요. 그러던 중에 동생이 만든 조직이 어떤 조직과 손을 잡게 됐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게?"
"네. 이단의 탕아들이라는 조직이에요. 한참을 쫓았지만, 그다지 밝힌 게 없네요. 하지만 실존한다는 것만큼은 감히 보장할 수 있어요."
그리고 구진하는 시선을 돌렸다.
"왜?"
거한이 심드렁한 투로 되물었다.
"알파가 말을 했다고 하셨죠. 떨어진 용의 비늘도 발견하셨고."
"비늘은 성훈이가. 근데 왜?"
"여기에. 알파가 말하는 것을 본 사람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 가만히 있던 은자림이 입술을 달싹였다.
"은자림이에요. 서로 초면은 아니니 긴말은 필요 없겠죠."
거한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클랜장이 눈치를 주자 그는 딴청피우며 머리를 긁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차피 알고 있던 거 아니냐는 말이오."
"아뇨. 조금 달라요. 알파는 제게 죽은 아가일의 시체를 건넸어요."
각자의 단서가, 하나가 되어 길을 만들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퍼즐 조각. 은자림은 테이블 위로 웬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이건 클랜원이었던 이백섬 헌터의 핸드폰이에요."
"흠. 근데?"
"이백섬 헌터는 알파라는 늑대에게 죽었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정황이 그렇고 무엇보다 아가일 모레스트의 시체의 웃옷 주머니에 이 핸드폰이 들어있더군요."
아넬라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은자림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문제는."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에 올려둔 게 많아졌다. 그 숫자가 열을 넘어갔을 때, 사람들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설마 그게 다?"
"그래요. 클랜을 샅샅이 뒤져 찾아냈어요. 그것보다도 뚫느라고 고생 좀 했죠. 보안이나 암호는 물론 기종도 전부 다르고 각 핸드폰마다 연락처가 하나씩밖에 없더군요."
"미친."
철두철미를 넘어 병적인 집착이었다. 퍽 불쾌한 눈빛으로 은자림은 한숨 쉬었다. 자신의 클랜에 끄나풀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 사실이 불쾌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명백하게 수상하죠. 심지어 전부 두절돼있었어요. 저는 이백섬. 그가 탕아들의 일원이었다고 생각해요."
기꺼이 클랜의 치부를 드러내는 듯한 은자림의 말에 좌중이 침음을 흘렸다.
"은자의 숲에도 있었다라…"
전쟁의 신전. 은자의 숲.
신전은 겉으로 종교를 표방하나 실질적으로 대구의 대표 클랜이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은자의 숲은 창선의 제자인 은자림이 이끄는 고원의 2중대나 마찬가지였다.
어느하나 만만한 곳이 없건만 끄나풀이 있었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걸까?
"더 있을지도 모르죠. 경계하고 움츠러들 테고요. 찾기는 더 어려워질 거에요."
은자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놈들이 우리 사이에 숨어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 모든 열쇠는 분명."
클랜장의 안광이 폭사했다.
늑대가 보인 여태까지의 행보. 그가 죽인 이들이 전부 끄나풀이었다면 그 늑대는 탕아들의 조직원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알파. 놈이 쥐고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알파가 탕아들을 쫓는 이유. 그리고 어떻게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요정용은 왜 그를 돕는지. 아직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놈은 탕아들을 쫓고 있다는 거죠."
다시 시선이 은자림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스승되시는 창선께 찾아갔을 때."
"…불가하다고 했어요."
익명으로 알파의 정보를 넘겼던 것은 고원. 그 고원과 연결고리가 있는 그녀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구진하의 말에 고원에게 의구심을 품은 그녀는 결국 자신의 스승을 찾아갔고 '알려줄 수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만약 몰랐다면 모른다고 하셨을테죠."
"제자에게도 알려줄 수 없다라."
거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꼈다.
"전 스승님께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요."
그게 못내 분하다는 듯, 은자림은 주먹을 쥐었다. 그에 클랜장이 끄덕였다.
"우리가 당신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성품을. 그리고 여태까지의 고원의 행보를 보아 믿고 싶군요. 분명 무언가 다른 진실이 있을 거라고."
또한, 알파가 그녀에게 시체를 넘겼기 때문에. 적어도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아무 확신도 없는 그런 어쭙짢은 기대였다.
하지만 그 기대로 인해 원래라면 모일 리 없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가 모인 이 자리에서 추측은 하나가 되었다. 알파가 죽인 이들은 탕아들이라는 조직의 일원들. 그리고 강태호와 은자림에게 말한 경고까지. 알파는 명백하게 탕아들을 쫓고 있다.
'그리고 고원은 어떻게 그 알파를 알았느냐.'
풀어진 의문도 많았지만, 남은 의문도 있었다.
회의가 조금 더 이어지고 클랜장은 외인들을 내보냈다. 어설프게나마 맞춰진 퍼즐에 그는 깍지를 낀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일단 행동방침을 정하지. 3팀장 구진하."
"예."
"너는 알파를 계속 쫓아라. 3팀 부팀장. 홍유리. 상처가 나으면 바로 합류해라. 알파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을 테니."
"알겠습니다."
이견 없는 두 사람. 클랜장은 고개를 돌렸다.
"2팀장 강태호."
"왜?"
"네버랜드 공략을 준비해라.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클리어한다."
"시간 참 빨리도 가는구먼."
"정확한 시기는 모른다. 당장 내일일지 아니면 내년이 될지. 머지않아 다시 열릴 거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 그래. 제법 오래됐지. 이번엔 정말 철저히 준비해야 할 거다."
"맡겨둬."
잠깐 좌중을 둘러본 클랜장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최우선 순위는 알파다. 놈이 열쇠를 쥐고 있다.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알겠나?"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해산한 자리에서 클랜장은 낮은 어조로 말했다.
"하연. 너는 혹시라도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는지 찾아내라."
"설마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신전에도 은자의 숲에도 있었다. 우리라고 놈들의 끄나풀이 없을 거란 보장이 없다."
"……."
"당연히 저들만이 아니라 클랜 전체를 뒤져야 할 거다."
"맡겨주세요."
그 대답과 함께 클랜장은 혼자가 되었다. 잠깐 올려다보던 클랜장은 눈을 감았다.
'창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의 얼굴이었다.
칠영웅의 리더이자 죽은 아버지의 동료였던 인물. 그리고 고원이라는 최고의 클랜을 이끄는 헌터….
'설마하니 당신이 정말로…'
클랜장은 음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부디, 이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