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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59화 (59/407)

〈 59화 〉 #29 수련

"……."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봤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는 도심의 풍경. 아름다운 환수와 영물들이 뛰노는 곳. 환계에서 보는 풍경은 현계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아마 이 광경만큼은 절대 잊히지 않으리라.

"뀨루룩~"

돌아와서 기분이 좋은 걸까? 녀석이 살랑살랑 꼬리로 귀를 간질였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담담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돌아보니 하얀 사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록."

"올 거라 생각했네. 어떤가? 다시 돌아온 환계는."

"…나쁘지 않아."

백록은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가? 기다린 보람이 있군."

기다렸다고? 그러고 보니 여기는 대전이다. 이현공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설마 계속 따라왔나?'

의문을 묻기도 전에 백록이 대뜸 부탁했다.

"자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네. 들어주겠나?"

"해줬으면 하는 일?"

"그렇다네."

백록은 천천히 걸었다.

"던전일세. 하지만 강요할 순 없지. 들어주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자네 선택일세."

잠깐 생각했다. 던전 클리어는 오히려 바라마지않는 일이었다. 백록도 그걸 얼추 알고는 있을 텐데 왜 저렇게 조심스럽지?

'뭔가가 있는 건가?'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백록에겐 배운 게 있으니까. 끄덕이자 백록은 말을 이었다.

"함께 던전에 들어가 줬으면 한다네."

그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백록이 혼자 처리하기 힘든 던전이 있다는 걸까? 내 반응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백록이 고개 저었다.

"자네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군."

환계 던전에서 백록은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힘들다고 할 정도면.

'저번 던전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다는 건데.'

동굴 포식자가 있던 던전도 엄밀히 말해 수준이 낮은 곳은 아니었다. 어쩌면 경산의 아라네아의 던전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대체 어떤 던전이기에? 의아해하는 내게 백록이 말했다.

"조금 까다롭고 버거운 곳이라네."

'버겁다라.'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던전의 수준이 높더라도 백록이 몬스터를 먹을 리는 없을 테니.

'그런 던전의 몬스터라면.'

분명 먹어 치울 가치가 있을 터. 생각보다 빨리 레벨을 올리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부탁은 들어줄 모양이군."

손해 볼 게 없으니까. 그런 시선을 알아챈 모양인지 그가 담담히 끄덕였다.

"결행은 사흘 뒤일세."

'사흘 뒤라.'

시간이 애매하다. 아카데미를 찾아가기엔 부족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아까운 시간이었다.

"다른 던전들은?"

"자네는 정말."

백록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갈 필요 없는 곳들이라네."

환계의 사정을 뻔히 알고도 강요할 순 없다.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백록이 말했다.

"자네가 탐식 스킬을 가지고 있단 건 알지만 조금 조급해하는 것 같군."

탐식이 아니라 악식인데. 잠시 나를 보던 백록이 끄덕였다.

"강해지는 걸 원한다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

"도와준다고? 어떻게?"

"일전에 싸우는 걸 보며 느꼈네. 자네는 유독 피하는 게 과하더군.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야 여태 싸워온 녀석들이 하나같이 강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확실하게 피하는 게 어설픈 것보다야 낫네. 하지만."

갑자기 백록이 사라졌다. 녀석이 가진 B등급 스킬 축지. 직감과 간파로 미리 읽고 있었으니 놀라진 않았다. 대신아래로 몸을 숙였다.

'다음은?'

"감이 좋군."

위에서 아래로 발이 내려온다. 그것도 읽고 탄력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ㅡ

"?!"

마력의 벽에 막혀 미끄덩 내려왔다. 어떻게든 피하려던 순간, 이미 백록의 발이 머리 위에 멈춰 있었다.

'이 정도라고?'

마냥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이렇게 순식간에 당할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군."

백록이 짧게 감탄했다.

그의 턱 아래에도 송곳처럼 날카로운 촉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반응은 했지만 과연 촉수로 녀석을 죽일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제 좀 알겠나?"

백록의 물음에 머리를 주억였다. 녀석이 말했던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굳이 탄력이 아니라도 피할 수 있었어.'

하지만 확실하게 피하려 탄력을 발했다. 결과는 지금과 같았고.

'이럴 수도 있구나.'

과연. 오래 산 환수답게 백록은 노련했다. 수 싸움에서 밀린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스테이터스가 전부는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 스테이터스도 나보다 터무니없이 높지만.'

"자네의 이 버릇을 교정시켜주겠네."

"왜?"

"사정이 어찌 됐든 부탁한 건 나니까. 게다가 내게도 손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네."

어쩐지 저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저번에 마력을 가르쳐달라 했을때, 백록은 던전 클리어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물론 그 자체가 내겐 득이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고.

'이번엔 반대란 거구나.'

던전 클리어를 부탁하는 대가로 가르쳐주겠다 한다.

'…….'

갑자기 덤벼들었을 때는 놀라긴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좀 더 싸울 수 있었을 것 같다. 조금만 더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탄력이 아니라 그냥 피했었다면?'

그 사이 귀화나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이리 쉽게 제압당하진 않았으리라.

'…다시 싸워볼 수 있다면.'

그런 아쉬움이 남았다.

심유한 눈빛의 백록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고개를 주억이자 기다렸다는 듯 백록이 앞장섰다.

"좋네. 따라오게."

***

"야! 똑바로 안 하냐?!"

복부에 붕대를 감고 있는 홍유리가 소리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씻팔… 존나 쓰라리네."

가볍게 벽을 두드리고 있던 우택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왜 벌써 퇴원하셨습니까? 아직 며칠 안 되셨는데."

"신경 끄지? 쟤 굴리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왜? 너도 근질근질해? 오랜만에 존나 굴려줘?"

우택이 움찔 눈을 돌렸다.

"어이구 등신. 전에는 지가 시켜달라더니. 아주 빠져가지곤."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름 망설임 없는 대답에 홍유리는 코웃음 쳤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좀 어떻습니까?"

"재능은 있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홍유리는 잠깐 고민했다.

"마력에 대한 재능은 있어. 센스도 있고. 이해도 곧잘 해. 근데 마법사는 아니야."

"무슨 뜻입니까?"

팔짱 끼며 손가락을 두드리던 홍유리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몸치만 아니었음 어떻게 써먹었을 거 같은데…"

곧 그녀가 분필을 던지곤 나머지를 우택에게 떠넘겼다.

"야. 나 시간 다 됐거든? 네가 보고 있어."

"예?"

"알아서 던지라고!"

문을 발로 차고 나가다 옆구리를 얼싸안은 홍유리를 보고 우택이 한숨 쉬었다.

"…그러게 발로 차지 마시라니까."

성격 참.

다시 시선을 돌린 우택은 방금 그녀가 던졌던 분필이 가루가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오."

맞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 허공에서 가루로 만들었단 뜻인데. 호기심을 느낀 그가 분필을 던지자 예상했던 대로 가루가 되어 으스스 떨어졌다.

'잘하는데.'

마력 감지.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상태에서 날아오는 분필을 감지하고 허공을 점유한 마력으로 으깬 것이다.

'하나는 쉬운 것 같고.'

두 개까지 아슬아슬하게 성공. 세 개를 던지자, "악!"하고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불퉁한 눈초리로 몸을 돌린 은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 부팀장님은요?"

"글쎄. 급하게 나가시던데."

문을 차고 나갔는데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이거. 시작한 지 얼마나 됐어?"

"네? 글쎄요…?"

고개를 갸웃거린 은하가 시계를 보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갔다. 접힌 손가락이 세 개가 넘자 그런가 보다 하던 우택은.

"다섯 시간?"

"뭐?"

뒤이어 들려온 말에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시간이라고? 닷새가 아니고?"

"이게 뭐라고 닷새를 해요?"

의아하다는 듯한 반응에 우택이 실소했다.

'하연 씨도 이틀이 걸렸는데.'

일견 쉬워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다.

세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가 언제 얼마나 날아올지 모른다는 점. 그 때문에 마력 감지를 계속 유지한 채 집중해야 한다. 두 번째는 반응. 감지하더라도 반응하는 건 다른 문제다. 날아오는 분필이 닿기 전에 감지하던 마력으로 분필을 으깨야 한다.

'부수는 건 사실 문제가 아니지.'

집중과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그것도 못 할 거면 홍유리는 애초에 시키지도 않는다. 정말 문제인 건 마지막 세 번째인 마력의 양. 움직일 수 있는 마력량은 분필과 동일한 정도로 한정한다는 것. 즉, 분필과 동일한 부피의 마력으로 분필을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어려워.'

완벽한 타이밍이 아니면 전부 가루가 되진 않는다. 조각이 남아버리니까. 그걸 성공시킬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다.

'예측이나 직감.'

마치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5시간 만에 두 개째라. 우택은 쓰게 웃으며 자신이 했던 때를 회상했다.

[마력이 남아돌아? 또 낭비하네?]

[어쭈. 그래 해봐. 왜? 해보라니까? 네가 나보다 마력 많으면 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절 죽이겠단 말씀입니까?]

[꼽냐?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해야지]

심드렁한 말 이후 날아왔던 건 무식한 마력이 담긴 분필이었다. 그나마 2팀의 기준 씨가 개겼다고 들었지만, 그 다음 날 뒤통수에 구멍 나 실려 갔다고 들었다. 아무튼 이 훈련이 보이는 것만큼 쉽지는 않다는 거다.

'근데 다섯 시간 만에 두 개째?'

과연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재능이었다. 대체 홍유리는 무엇이 불만이었을까?

"……."

우택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자 은하가 갸웃거렸다.

"선배. 안 던져요?"

"어. 던질게."

어떻게 사무팀에서 수색 3팀으로 돌아왔더니.

'당시에는 고민했지만.'

성격이 맞지 않더라도 그걸 덮을 재능이 있다면… 속으로 끄덕인 우택이 다시 분필을 던지기 직전, 요란하게 휴대폰이 울렸다.

"아. 잠깐만."

은하를 세워두고 액정 화면에 뜨는 이름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팀장님."

[우택아. 그거 봤어?]

봤냐니 무얼 말인가?

[그래. 아직 안 본 모양이네]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파. 알파가 찍힌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뉴튜브에 있으니까]

"……."

[계속 퍼지고 있는데… 일단 보고 다시 연락해]

"알겠습니다."

검색하려다 그럴 필요도 없이 급상승 동영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영상이 있었다.

"……."

짧은 영상. 고작 1분도 되지 않는다. 며칠 전 있었던, 일명 대전의 밤이라 명명된 사건. 바로 그 장소였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휘청이자 우택은 시선에 힘을 주었다.

'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눈에는 영상 속 검은 물체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영상 자체의 프레임 문제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자신조차 겨우 보았을 정도. 이것뿐이라면 영상이 화제가 됐을 리 없다. 예상했던 대로 슬로우 모션으로 영상이 한 번 더 재생되더니 화면이 정지했다.

'역시.'

하얀 두개골을 가진 커다란 검은 늑대가 흐릿하게 찍혀있다. 구멍 난 바닥으로부터 솟아올라 인파를 넘어 사라지는 건 고작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강한 강풍에 사람들의 시선이 가려진 순간을 틈탄 것이다.

'아마 놈의 스킬.'

숲의 던전에서 보았던 바람을 일으키는 스킬이다. 우택은 잠깐 영상의 매개체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아마 건물에 부착된 CCTV인 것 같은데.'

알파가 은신 스킬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건 거의 확정적이다. 하지만 은신은 투명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바람에 휘청이던 사람들과는 달리 알파를 찍을 수 있었던 모양.

잠깐 댓글을 보니 조작이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몬스터가 풀려난 게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컸다.

"선배. 뭐 해요?"

"알파가 뉴튜브에…"

반사적으로 답했던 우택이 뒤늦게 말을 끊었다.

"알파요?"

되묻는 그녀의 눈빛에 서늘한 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사방팔방에서 수십 수백개나 되는 마력탄이 쏘아졌다.

'옆으로?'

아니, 아래로 피했다. 세 개의 마력탄이 무위로 돌아가 지면에 박혔고, 멈출 새 없이 계속해서 마력탄이 쇄도했다.

'오른쪽에서 넷.'

직감과 간파가 다가오는 마력탄의 경로를 읽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피할 수 있었다. 곧바로 등을 돌리자.

'……!'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기함하며 탄력을 발해 가까스로 피했으나, 다시 뒤에서 날아온 마력탄에 꿰뚫리고 말았다.

'언제?'

마력탄 하나에 꿰뚫린 순간, 움직이기도 전에 두 번째 마력탄에 당했다. 하는 수 없이 돌풍을 일으키자 날아오던 마력탄 전부가 허공에서 갈가리 찢겨 사라졌다.

"괜찮은가?"

"괜찮아."

고통은 없다. 상처도 재생으로 회복할 수 있다.

'열 세 번째.'

13번째 실패. 바닥을 내려보자 마치 기관총으로 난사한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이걸 전부 피해야한다고?'

정말 가능한 일일까? 차라리 달려서 피하는 거라면 할 수는 있었다. 날아오는 마력탄보다 빠르게 움직일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백록이 제시한 조건 중에 '가능한 제자리에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려운가?"

어렵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런 의문을 담아 백록을 보자 그는 담담히 답했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시키지도 않았을 걸세."

하지만 어떻게? 거의 동시에 날아오는 마력탄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어느새 준비된 마력탄이 다음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려 하지 말게."

"……."

"훈련의 목적을 떠올리게."

'훈련의 목적.'

과한 동작이 아니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는 것. 백록은 보려 하지 말라고 말했다. 분명 거기에 해답이 있을 터.

'느끼라고?'

보지 않고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를 어떻게 보지 말고 피하라는 말인가?

'감지를 말하는 건가?'

날아오는 마력탄을 감지하려 시도해봤지만, 실체가 없는 걸 감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열 네 번째 실패를 맞아야 했다.

[재생(D)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재생(D) Lv.3 → 재생(D) Lv.4]

피하기는커녕 재생의 숙련도만 오르고 있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자니 백록이 휴식하자 말했다. 괜찮다고 답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아니라 내 마력이 부족하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백록도 마력 재생이 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 바닥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페어리 드래곤이 날아와 머리 위에 똬리를 틀었다.

"참 잘도 따르는군."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에 왜 그러냐고 물었다.

"페어리 드래곤은 남을 잘 따르지 않네. 무엇보다, 우화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지."

"용벌레는 많잖아?"

환계는 물론 현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생각에 묻자 백록이 웃었다.

"그중에서 우화하는 게 얼마나 될 것 같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보다 더 드물 수도 있다네. 애초에 우화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평생을 유충으로 살아간다고?"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우화할 필요가 없으니까."

알이 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말한 백록은 그 긴 다리를 접어 웅크렸다.

'그럼 현계에 용벌레들이 있었던 이유는.'

만약 페어리 드래곤으로 우화하는 조건이 레벨업과 비슷한 거라면? 확실히 경험치를 얻어야 하는 거라면 환계에서 이루는 건 불가능하다.

'먹을 게 없으니까.'

여기서 마력은 쌓을 수 있을지 몰라도 동족상잔이라도 하지 않으면 경험치는 얻을 수 없다. 용벌레보다 약한 몬스터, 아니 영물은 환계에 없을 테니.

"정작 우화해도 대부분은 요정과 함께 지낼 뿐 성장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네. 하지만 그 아이는 다르군."

자기 얘기가 나온 걸 알았는지 녀석이 관심을 보였다.

"이미 성장했어."

그 말에 통찰로 확인해보니 정말 성장해있었다.

'왜 몰랐지?'

바빠서 그랬나? 어느새 126g이던 체중이 182g으로. 특히 76이던 마력도 82가 되어있었다.

"몰랐던 모양이군."

페어리 드래곤이 심통난 듯 꼬리로 귀를 때렸다. 그래봤자 토닥이는 느낌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부정한 것을 먹고 자란다네."

"부정한 것?"

문득 떠오르는 건 은자림의 상처였다. 아마 부패의 사슬에 당했을 거라 추측되는 상처. 그 부패가 단순히 치료가 아니라 녀석의 먹이였다는 뜻일까?

'부정한 것?'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가능할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다시 백록이 말을 걸었다.

"그것보다 궁금하진 않은가?"

"뭐가?"

"던전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는데."

물어볼 틈도 없이 다짜고짜 마력탄을 날렸던 게 누구였더라. 기막힌 내 눈빛에도 백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은근 뻔뻔한 구석이 있다.

"사실 던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 그저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바위산이 있을 뿐."

그 말에 떠오른 건 이현공원이었다.

아마 경계를 넘으면 공간이 달라지는 형태가 아닐까?

"다른 괴물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네만, 보스가 문제라네."

"알고 있어?"

"내가 달리면 잡을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으니까."

축지. 그 스킬을 떠올리자 수긍할 수 있었다. 확인하고 곧바로 나오는 것만이라면 어렵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보스는?"

"땅을 기는 '큰 뱀'이라네."

땅을 기는 뱀?

'뱀은 다 그렇지 않나?'

그러다가 백록이 강조한 부분은 땅을 기는 게 아니라 큰 뱀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말인즉,

"서펜트?"

"그렇다네. 어스 서펜트. 그게 던전의 우두머리라네."

그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펜트는 좀…'

특출날 것 없는 커다란 뱀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 커다랗다는 점이 문제였다.

'너무 과하게 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몸집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기였다. 코끼리가 육상 최강의 동물인 건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라 커다란 덩치 때문이었다. 하물며 코끼리와 비교하는 게 민망한 서펜트라면?

"슬슬 마력이 회복되는군. 바로 시작하겠나?"

그 물음에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끄덕였다.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수련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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