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30 용의 황무지 (2)
"랩터들이군."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와중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녀석들이 무리 지어 우리를 둘러쌌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감지로 느껴지는 기척은 더 많았다. 황무지 바위 틈새마다 놈들이 숨어 노려보고 있다.
'…숫자가 많네?'
이 황무지에서 대체 뭘 먹고 살길래. 생각하는 사이 랩터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어떡하겠나?"
대답 대신 페어리 드래곤을 백록에게 보냈다. 통찰로 확인하는 사이 녀석들이 자기네들끼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토랑이랑 비슷한 수준.'
러닝 랩터. 숲의 던전에서 보았던 녀석들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별로 강하진 않다. 특이사항이라면 하나같이 질주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 이름에 러닝이 붙었는지 알 것 같네.'
종일 달리는 게 러닝 랩터들이 살아가는 법이 아닐까. 단숨에 파고들자, 깜짝 놀란 랩터들이 주둥이를 벌렸다. 예리한 손톱과 발톱. 위협적인 몸놀림. 야생의 본능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도.'
그래 봤자다. 이미 수준 차이가 벌어져있다. 새삼 놈들에게 당하는 게 더 힘들 정도로. 점프해 뛰어오른 랩터를 촉수로 꿰뚫었다. 심장과 목. 확실한 절명이다.
'일단 하나.'
그대로 들어올려 왼쪽에서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내동댕이쳤다. 반대쪽에서는 돌풍에 가죽이 찢기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키야아악!"
마침내 이빨이 닿기 직전, 검은 불꽃이 이글거렸다. 이현공원의 던전에선 불이 번질까 봐 맘 놓고 사용할 수 없었지만, 이곳 용의 황무지에선 그럴 걱정은 없다.
'얼마든지 쓸 수 있어.'
타오른 불길에 랩터들이 혼비백산했다. 불길에 휩싸인 랩터 두 마리가 순식간에 불타자 진형이 붕괴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랩터의 목덜미를 물어뜯자 차게 식은 피가 흘러나와 입안을 적셨다.
'비린데.'
살점과 피를 뱉었다. 미각을 없애는 걸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몰래 등 뒤에서 접근한 랩터의 발톱을 피하고 앞발로 머리를 찍어눌렀다. 바닥에 처박혀 버둥거리던 녀석은 살아있는 채로 악식의 제물이 되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랩터들이 이젠 승산이 없다고 느꼈는지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을 텐가?"
돌아보니 백록의 발 아래에도 머리가 터져 죽은 랩터가 서너 마리 있었다.
"아니."
어차피 어스 서펜트를 유인하다 보면 알아서 휘말릴 테니 굳이 쫓을 필요는 없다. 애초에 코아틀과 와이번같은 몬스터들을 보았을 때부터 경험치 걱정은 버렸다.
'30레벨은 무조건 달성할 수 있어.'
던전의 수준이 높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몬스터의 수가 많다.
"그래서 어떤가?"
백록의 물음에 아까의 전투를 회상했다.
"……."
간파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간파한 듯한 느낌이었다. 자연스레 눈에 보였다. 마치 게임 같았다. 익숙해지면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스킬로 발현된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의 효과였다. 사흘 내내 이어진 회피 훈련은 감각을 예민하고 또 날카롭게 갈고 닦았다.
[러닝 랩터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죽은 랩터들을 전부 먹어 치우자 레벨업까지 남은 경험치는 정말 적었다. 한 마리만 더 먹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을 정도로. 황무지를 달린 끝에 바위산을 칭칭 휘감은 놈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본 놈은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거대했고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이었다.
[폭군(어스 서펜트)]
[체장 80.4m] [체고 7.16m] [체중 429t]
[힘 662] [민첩 513] [체력 582] [마력 416]
[보유 스킬]
[바위 가죽 B] [모든 피해 감소 D] [가속 D] [저항 E] [수영 F]
'예상은 했지만….'
스테이터스가 정신이 나가 있다. 가장 낮은 마력조차 416. 심지어 B등급 스킬까지 보유한 괴물이었다.
'아무리 보스라지만.'
자세가 불편하기라도 했는지 바위산을 감고 똬리를 튼 녀석이 몸을 비틀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땅이 울렸다.
'어이가 없네.'
진동이 아니라 지진에 가깝다. 662에 달하는 힘도 힘이지만, 400t이 넘어가는 어스 서펜트의 무게는 그 이상의 무기였다. 저건 깔리기만 해도 이승 하직이다. 떠오르는 불안감에 슬쩍 백록을 봤지만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 말게. 이미 한 번 도망친 바 있으니."
"설마."
"멀리서 마력을 쏘아봤더니 화나서 쫓아오더군."
환수가 다 그런 건지 아니면 백록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친놈.'
아무튼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문제는 없을 터. 내가 생각해도 백록이 잡힐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가속인데.'
어스 서펜트가 가진 스킬.
백록이 언급한 적 없는 걸로 보아 가속을 얻은 건 비교적 최근이 아닐까? 용의 황무지를 오랫동안 방치했다고 한 만큼 새로운 스킬을 얻어도 이상하진 않다― 이 점을 말했더니, 백록은 괜찮다고 끄덕였다.
"가속 정도라면 문제는 없네. 그보다 상위 감정도 가지고 있었는가?"
그 호언장담에 불안이 조금 가셨다. 그래도 민첩 513. 단순 스테이터스만 따지면 백록보다 위에 있으니 방심은 할 수 없다.
"이제 충분한가?"
"조금만 더."
만전을 기하고 싶었다. 놈이 눈치채기 전에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서 최대한으로 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저 덩치로 땅에 비비면 불이 꺼질지 모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백록이 멀어졌다. 은신을 사용하고 천천히 어스 서펜트의 몸 위를 기어올랐다. 바위 가죽이라는 스킬답게 감각도 둔한지 놈은 내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바위라서 불을 일으키긴 어려워.'
욕심을 내자면 비늘을 뚫고 놈의 몸 안에 직접 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순간, 놈이 꿈틀거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바위산이 으스러지며 파편이 굴러떨어졌다.
쿠구구구!
파편이라고 해도 수 톤은 나갈법한 거대한 바위였는데 놈에게 있어선 늘상 있는 일인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미친.'
떨어지는 바위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시 놈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짝 귀화를 일으키곤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냥은 안 되겠어.'
처음 생각과 달리 불꽃으로 태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몸 내부― 비늘이 없는 곳이 아니라면 귀화는 허망하게 꺼지고 말리라. 그렇다해도 비늘을 뜯을 순 없다. 아무리 둔해도 그 정도는 눈치채고 덤벼들 터.
'뭔가 방법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후각을 사용했다. 빙고. 찾았다. 그러는 와중 창공을 활보하는 코아틀이 시끄럽게 울부짖었다.
'망할.'
어스 서펜트가 깨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가능한 조용히 지나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위압을 사용했다. 칭호에 더해진 효과에 녀석이 잔뜩 놀라 도망치려는 순간, 천지가 진동했다.
'……!'
어스 서펜트의 꼬리 끝이 움직이기 전에 반대편으로 무작정 달려 가까스로 놈의 꼬리가 닿지 않을 곳까지 벗어났고.
"키에?!"
날갯짓하던 코아틀이 순식간에 휘감겼다. 마치 귀찮은 모기라도 잡는 듯 당연하게. 압사당한 코아틀의 핏물과 깃털이 허공에 비산했다.
'이게 662?'
그리고 민첩 513. 코아틀도 약한 몬스터는 아니건만 상대가 되질 않는다. 아니, 비행하고 있어도 도망치지 못했다. 잠깐 숨을 죽이고 은신을 활성화하니 눈치채지 못한 어스 서펜트가 다시 몸을 뉘었다.
'…좋아.'
그리고 마침내 찾은 구멍. 맨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스가 새어 나왔다. 후각을 다시 비활성화하고 각오를 다졌다.
'후우.'
이제 시작이다.
귀화― 잿불을 넘어 C등급에 도달한 스킬. 아가일의 검은 마력조차 집어삼켰던 검은 불꽃.
'…여기까지 끌어낸 건 처음이야.'
아가일과 싸웠을 때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싸움이었고 조금의 여유도 없었으니까. 넘실거리는 검은 불꽃을 한계까지 끌어냈다. 서서히 일그러지며, 형상을 이뤄간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언뜻 보이는 모습― 결국 귀화(鬼火)는 그 이름에 걸맞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거라면…!'
대기가 빠르게 익어간다. 어스 서펜트도 느낀 모양인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귀화!'
시간이 없다. 완연한 귀신의 모습으로 빚어진 귀화를 유일하게 비늘이 덮여있지 않은 구멍으로 밀어넣었다.
'이제 탈출만 하면 돼!'
망설일 시간이 없다. 몸 속에서 타오르는 귀화. 어스 서펜트가 고통에 몸부림친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거센 움직임. 바위산이 꺾일 것처럼 휘청였다.
'온다!'
감지로 느낄 필요도 없을 만큼 거대한 풍압이 나를 밀어낸다. 그리고 풍압을 뚫고, 그보다 끔찍한 속도로 어스 서펜트의 꼬리가 휘둘러졌다.
'……!'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다. 500이 넘는 민첩은 장식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피한 순간, 눈앞이 어두컴컴해졌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
꼬리 다음은 머리. 큰 뱀(Serpent)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계까지 벌려진 턱이 시야를 가렸다. 넘실거리는 붉은 혀에 휘감기기 직전, 굴러떨어진 바위를 밟고 탄력과 함께 뛰어올랐다. 뒤늦게 서펜트의 턱이 다물어졌을 때, 놈이 삼킨 것은 바윗덩어리 뿐.
'다음은?'
떨어지는 모든 바위, 파편의 위치를 감지하고 구체화했다. 떨어지는 경로를 간파하고 최적의 동선을 그려야 한다.
'7시 방향!'
뒤따라오는 꼬리와 머리. 바위산에 똬리를 틀었던 녀석이 완전히 몸을 일으켜 분노를 감추지 않고 추격해왔다. 놈의 민첩을 생각하면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을 사용해도 도망치는 건 지난한 일이다.
'백록!'
저 멀리서 백록이 달려오고 있다. 바위를 씹어 삼킨 어스 서펜트가 갑작스레 빨라졌다.
'…가속!'
놈이 가지고 있던 스킬. 아연해 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촉수를 뻗었다.
[촉수다발(E) Lv.8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촉수다발(E) Lv.8 → 촉수다발(E) Lv.9]
뻗어진 촉수로 바위를 당겼고, 촉수에 당겨질 리 없는 무거운 바위에 내가 당겨져 끌려갔다.
'좋아.'
신경써야 할 건 어스 서펜트뿐만이 아니다. 떨어지는 바위들도 피하며 생로(生路)를 찾아야 한다.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어디지? 생각하는 와중에도 바위 파편을 끊임없이 밟고 촉수를 뻗었다. 돌풍으로 시야를 가리는 먼지를 흩었다.
'저기로!'
파편 하나 없는 허공. 잡을 것도 없고 밟을 것도 없다. 결국 놈의 속도가 훨씬 빨랐고, 잡히는 건 시간문제.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 셈이지만―
"뀨우우!"
―울음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백록의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아슬아슬했군. 괜찮은가?"
심장이 철렁였다. 괜한 객기를 부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
짧게 답하고 숨을 골랐다. 바위 같은 비늘이 뒤덮고 있는 놈의 유일한 약점― 즉, 몸 내부로 이어진 유일한 구멍. 귀화는 놈의 항문으로부터 들어가 불태우고 있었다.
'…불을 끄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지금도 귀화가 타올라 녀석을 내부에서부터 잠식하고 있을 터. 겉으로 퍼진 불이라면 땅에 몸을 비벼서 마찰로 끌 수 있겠지만,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은 그렇게는 안 된다.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어.'
아슬아슬했지만, 도박은 성공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어스 서펜트는 결국 불을 끌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눈을 붉히고 쫓아왔다. 그래봤자 백록을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D등급의 가속을 아무리 써봤자 B등급 축지를 가지고 있는 백록에겐 닿지 못한다.
'그래도 섬뜩하네.'
가속을 사용할 때마다 미친 듯 거리가 줄어든다. 황무지 지면에 놈이 끌린 자국이 마치 계곡처럼 남았다. 특히 가속을 사용하는 순간마다 그 흔적은 깊어졌다.
"백록!"
끝없는 황무지에서 갑작스레 계곡이 나타난 순간, 백록이 높게 뛰어올랐다. 여태까지 달린 것을 도움닫기로 뛰어오르자 하늘을 날아오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뀨우우우!"
페어리 드래곤이 좋다고 울었다. 반대로 나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껴야했다.
[약한 육감(E) Lv.2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육감(E) Lv.2 → 약한 육감(E) Lv.3]
수십 미터를 뛰어올랐으나 어스 서펜트는 80m가 넘는 기다란 몸을 가지고 있다. 그 전부를 뻗지는 못하더라도 능히 수십 미터는 쫓아올 수 있을 터. 예상했던 대로 놈도 계곡 끝에서부터 도약한다. 뻗어진 육중한 거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허공에 떠오른 상태에서 백록의 등을 밟고 탄력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자네!"
놀란 백록의 허리에는 촉수가 감겨있다. 탄력의 힘까지 더해 가까스로 들어 올리자, 아슬아슬하게 어스 서펜트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콱 다물어진 놈의 턱이 애꿎은 허공을 씹었다.
"고, 고맙네."
백록의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이를 악물었다. 아직.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놈은 아직 내려가지 않았다.
'가속이 남았어…!'
얼마나 올라올 수 있을까? 이번엔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서펜트는 가속으로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에 놈은 지면으로 추락을 가속했다.
'……?!'
미친 짓이다. 아무리 강한 몬스터라도 400t 이상의 체중을 가지고 땅에 들이박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다. 설령 B등급 스킬을 가지고 있더라도…?!
'뭔가 확신이 있는 건가?!'
어스 서펜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놈이 대지와 충돌한 순간 문득, 공룡이 멸종한 이유가 떠올랐다. 소행성 충돌. 먼지가 피어올라 천지를 뒤덮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에 화들짝 놀란 날개 달린 괴물들이 힘껏 퍼덕였다. 도망치던 랩터들과 공포새가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 바위 파편에 휩쓸렸다. ―그건 백록도 예외가 아니었다.
"큭!"
제아무리 축지 스킬이라도 공중에서 사용할 순 없다. 돌풍으로도 막지 못한 파편들이 백록을 강타했다.
"끼아아아악!"
비행하는 괴물들도 충격으로 부서진 지면, 그 솟아오른 파편에 맞고 추락할 정도다. 당연 백록도 멀쩡하진 않았다. 그나마 돌풍으로 먼지에 휩싸이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추락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대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끔찍한 무기였다.
'망할.'
충돌하기 직전, 페어리 드래곤이 점멸을 사용한 덕분에 안전히 착지할 수 있었다.
"…끔찍한."
내려선 지상은 아비규환이었다. 비행하던 괴물들이 추락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충돌의 충격이 지면을 타고 퍼져나가 바닥이 뒤집혀있었다.
'미친.'
땅을 디딘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형언하기 힘든 모양새로 죽어있었다. 근방에 있던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했다. 상상력이 빈곤했다. 분노한 어스 서펜트는 그 자체가 재앙이었다.
'이 망할 세계관.'
자색의 흑호나 바다의 재앙처럼 답도 없는 괴물도 아니다. 고작 어스 서펜트 한 마리가 일으킨 결과가 이거였다. 여태껏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게 용하게 느껴진다.
'일단 놈은?'
감지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백록! 계속 달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백록이 절뚝이며 달렸다. 어스 서펜트― 만약 충돌로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찾았을 터. 그러지 못했단 건 놈이 죽지는 않았단 거다. 그걸 반증하듯 지면이 진동하고 있었다.
'설마.'
침을 삼킨 순간, 발아래가 들썩였다. 황무지를 뚫고 튀어나온 커다란 턱이 우리를 집어삼켰고. 다음 순간, 우리는 놈의 입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뀨우우우우…!"
페어리 드래곤이 마지막 마력을 쥐어 짜내고 이젠 완전히 지쳤다는 듯, 색색 잠들었다.
'마력 재생이 있는데도.'
견디지 못할 만큼 피로를 느꼈다는 뜻. 고작 82밖에 되지 않는 마력으로 여태까지 버텨준 게 기적이었다.
"도망칠 수 있겠어?"
"…어렵겠군."
백록이 침음했다. 인제 보니 녀석의 뒷다리가 기이하게 꺾여 있다. 충돌로 인해 어스 서펜트도 멀쩡하진 않았지만…
'겨우 비늘 좀 벗겨진 정도에 불과해.'
고작해야 그 정도다. 바위 파편이 하늘까지 치솟을 정도로 큰 충격에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려운데.
'도대체.'
모든 피해 감소 그리고 바위 가죽. 방어에 특화된 듯한 스킬 구성― 얕봤다. 그렇게 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트였을 때, 이미 어스 서펜트는 기다란 몸으로 우릴 빙 둘러싸고 있었다.
'젖어있어?'
눈살을 찌푸리고, 녀석을 다시 보았다. 몸이 젖어있다―? 어째서? 아니, 그것보다 도망치는 게 먼저다.
"백록. 뛸 수 있겠어?"
귀화는 내부에서 녀석을 태워 가고 있다. 무식한 크기와 체력에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네."
"빨리!"
놈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위끼리 부딪히는, 아니 지면과 비늘이 스치는 소리였다. 백록은 뒷발에 마력을 가득 담아 부러진 상태로 억지로 도약했다. 아까처럼 높게 오르진 못했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백록의 등을 밟고 탄력을 발해 뛰어올랐다. 촉수를 감아 탄성을 부여하고 백록을―?!
'망할.'
오산이었다. 당장이라도 촉수가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방금과는 다르다. 단순히 들어 올리는 거라면 경화를 사용하면 됐지만, 탄성을 이용해 백록을 던져야하니 경화는 사용하기 힘들다.
'서펜트!'
놈이 뛰어올랐다. 안간힘을 다해 마력을 폭발시켜 가까스로 던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저 멀리 황망해하는 백록의 표정이 보임과 동시에 가까스로 견디고 있던 촉수가 끊어지고 말았다.
'제기랄.'
그렇게 늑대는― 큰 뱀의 입속으로 삼켜져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