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32. 음영랑(蔭影狼)
모처럼 산뜻한 아침을 맞은 은하는 홍유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라면 눈을 부라리고 왜 이리 늦었냐며 소리쳤을 텐데. 지각이라도 한 걸까? 혹시나 해 3팀으로 간 은하가 문을 열자, 팀원이 반갑다는 듯 말을 걸었다.
"어.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혹시 부팀장님 안 오셨나요?"
그는 뒷머리를 긁더니, 닫힌 문 너머로 말했다.
"아저씨. 부팀장님 오셨어요?"
"그 양반은 왜 찾냐? 없으면 좋은 거지. 그것보다 자식아. 뉴스 좀 봐라. 뉴스."
"뉴스는 왜요?"
"아주 난리도 아니야. CCTV에 찍혀 있는 알파 영상들. 이젠 뉴스로까지 나오네."
"얼마 전에 뉴튜브에 떴던 거요?"
"그래. 인마. 그거 말고도 자꾸 나오더라."
없는 모양이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끄덕인 은하가 다시 문을 닫았다.
"알파…"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말. 지금은 수련에 매진할 때였다. 속을 가라앉힌 은하는 먼저 혼자서라도 하고 있자고 생각했다.
'곧 돌아오시겠지.'
그렇게, 하루를 통째로 보냈을 때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도 없이 이럴 사람은 아닌데?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
연결되지 않는 통화에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두 동강 난 나무가 바위산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무쇠 같은 다리가 지면을 움푹 파고들었다.
멈추지 않는 돌진. 걸음마다 땅을 울리는 거력. 측면으로 몸을 날린 늑대를 향해 갑룡의 꼬리가 회전력을 싣고 날았다. 공기의 벽을 뭉개버린 무식한 힘― 다음 순간, 한 차례 일렁이던 늑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쿠오오오오!"
보이지 않는 늑대. 갑룡이 울부짖자 천지가 떠나가라 울렸다. 때마침 정오에 뜬 해가 내리쬐어 등갑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 짧은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늑대가 갑룡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하지만 두꺼운 갑주에 보호받는 목을 물어뜯긴 힘들다. 갑룡이 크게 몸부림치자,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하던 늑대로부터 수십 개의 촉수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것들이 각자 의지를 가진 것처럼 기이하게 비틀리더니 갑룡의 전신을 옥죄고, 꿰뚫었다.
"―――!"
비명 지른 갑룡이 바위산을 향해 달려들자, 다시 늑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바위산에 충돌한 갑룡. 그 충격으로 바위산이 무너져 내렸다. 떨어지는 바위 파편들에 그림자가 짙어지자, 갑룡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피어오른 먼지속에서 피 분수가 치솟고, 뜯어진 갑옷 조각이 흩날렸다.
―곧 거센 바람이 불어와 먼지를 걷어냈을 때, 갑룡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암갑룡(巖鉀龍)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몸을 돌린 늑대. 이미 무너진 바위산 아래엔 핏자국만이 남아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으음."
침음하는 백록. 환계에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젠 도무지 승부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아니, 십중팔구…
'지는 건 나겠군.'
백록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의미로 괴물이 되고 말았다. 암갑룡이라고 하면 와이번도 싸움을 피하는 괴물이거늘. 그렇게 형상 없이 일렁이던 늑대가 그림자를 거두자, 마침내 그 모습이 드러났다.
[폭군(음영랑) Lv.9] [EXP 120628 / 120628] [업 0.97%] [영량(影量) 179.59cm³]
[체장 2.37m] [체고 91.1cm] [체중 126.6kg]
[힘 216] [민첩 245] [체력 289] [마력 251] [극기 10]
[보유 스킬 목록]
탈식(C) Lv.2, 촉수 다발(E) Lv.9, 감지(D) Lv.7, 재생(D) Lv.4, 뛰어난 은신(C) Lv.5, 통찰(D) Lv.5, 뛰어난 청각(D) Lv.1, 약한 육감(E) Lv.3, 뛰어난 시각(D) Lv.1, 모든 피해 감소(D) Lv.8, 경화(D) Lv.7, 변화(E) Lv.9, 약한 독 내성(E) Lv.1, 위압(E) Lv.5, 식탐(D) Lv.8, 수영(F) Lv.9, 잠수(F) Lv.8, 뛰어난 탄력(D) Lv.4, 간파(E) Lv.9, 돌풍(C) Lv.5, 뛰어난 후각(D) Lv.1, 뛰어난 직감(D) Lv.6, 암시(F) Lv.9, 마력재생(D) Lv.4, 귀화(C) Lv.3, 통각무효(D), 요정어(F), 수납(E) Lv.2, 그림자 지배(B)
[남은 스킬 포인트 20]
둘러보듯 자신을 확인한 늑대가 끄덕였다.
'겨우 다 채웠네.'
30레벨에서 진화 후, 1레벨로 줄어들면서 스테이터스가 낮아졌었다. 다시 9레벨까지 달성하면서 높아졌지만, 용의 황무지에 남아 있는 몬스터 대부분을 먹어 치워야했고. 1레벨부터 상당량의 경험치를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몬스터로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러닝 랩터 같은 몬스터론 경험치를 얻기 힘들어.'
어지간한 몬스터론 그랬다. 아예 못 얻는 건 아니지만, 효율이 별로였다. 차라리 다른 몬스터를 잡고 말지.
'그리고 1%.'
진화하는 데 소모한 업의 양이 1%. 스컬 울프로 진화할 때 필요한 업의 정확히 10배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보았던,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 많은 업을 사용한 만큼 그것을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알 것 같아.'
그것은 '무언가'가 아니라― 휘휘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 문제는 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답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깨어난 페어리 드래곤이 길게 하품하며 머리 위에서 똬리를 틀었다.
"뀨루루룩!"
처음엔 두개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당황하더니, 오히려 털이 생겨 좋다는 듯 몸을 비벼댔다. 외형은 검은 늑대― 거기서 곳곳에 푸른 털이 새치처럼 돋아난 모습이다. 그림자를 장막처럼 두르자, 그늘이 생긴 페어리 드래곤이 좋아라했다.
'내가 무슨 호텔도 아니고.'
점점 안락해지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영량.'
그림자의 보유량. 단위가 세제곱인 걸 보면 부피인 모양이었다. 처음엔 지름 3cm 정도로 작았지만, 몬스터를 쓰러뜨릴 때마다 점점 크기가 커져 이제는 7cm 정도의 작은 구가 되었다.
'메커니즘이 신기해.'
그림자의 면적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크기를 늘릴 수 있다는 게 고무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자 지배.'
진화의 특전이자 최초로 얻은 B등급 스킬. 그 등급에 걸맞게 스킬의 효용성이나 위력은 더할 나위 없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림자엔 실체가 없다 보니 촉수처럼 귀화를 옮길 순 없다는 점일까?
'그게 조금 아쉬워.'
사실 모독자로 진화할까도 생각했었다. 액체인 몸이라면 얼마든지 귀화를 퍼트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집채만 한 모독자로 진화하게 되면 여태까지의 스타일과는 전혀 달라지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만약 음영랑의 크기도 모독자처럼 거대했다면 모독자를 선택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부정형이 될 이유가 없기도 했고.'
부정형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자유자재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변화 스킬이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으니 큰 의미가 없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메리트도 통각 무효가 대신하고 있고.
'마안은 아쉽지만.'
B등급, 그림자 지배에는 그 이상의 포텐셜이 있다. 아쉬움을 가라앉히고 백록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갈텐가?"
내 의중을 눈치챈 듯이 백록이 물었다. 아직 던전을 클리어한 건 아니었지만, 와이번, 어스 서펜트, 암갑룡까지. 골치 아픈 몬스터들은 이미 다 처리했으니 클리어하는 데는 문제 없을 터. 떨친 듯,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래."
무엇보다 레벨 업이 달성 조건에 막혀버린 이상, 환계에 머물 이유가 사라졌다.
현계, 아카데미로 갈 시간이었다.
***
"됐습니다. 이제 타시면 됩니다."
"…진짜 이렇게 간다고?"
야음을 틈타 띄워진 배는 정말 조막만 했다. 나룻배. 나름 최신 소재를 사용해봐도 결국 나룻배는 나룻배였다.
"다 알면서 왜 그래? 얼른 타. 목소리 낮추고."
바다의 재앙ㅡ 그것이 출현한 이후, 더 이상 바다는 인류의 것이 아니게 됐다. 설마하니 이런 좁은 영해까지 나타날 리는 없겠지만, 바다를 근거지로 삼는 다른 몬스터들도 있다. 만약 배가 반파되기라도 한다면 최악. 들키지 않으려면 모터나 추진 장치가 달린 것들은 사용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노를 저어야만 했다.
"염병."
한숨 쉰 홍유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배에 올라탔다. 어지간한 거리라면 마력으로 날아서 가면 되겠으나, 30km 가까이 이동해야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두 사람이 탑승하자 우택이 천천히 노를 저었다.
"소리 안 나게. 알지?"
우택이 끄덕였다. 그렇게 고요한 밤바다에 노질하기를 1시간, 마침내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진짜 여기에 광휘가 있다고?"
"모르지. 믿어볼 수밖에."
사각지대를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구진하는 아넬라, 퍼플 스퀘어에 고원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었다. 그렇게 돌아온 회신이 '광휘가 덕적도로 향했다'라는 것. 짤막하지만 광휘라면 고원에서 셋째가라면 서러운 인물. 어쩌면 탕아들과 고원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섬은 황량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바다에 그것이 나타난 이후, 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본토로 돌아왔다. 그렇게 50년 가까이 지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제주도만큼 큰 섬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작은 섬에 사람이 남아있을 리 없다. 그리고 머지않아 홍유리가 눈을 빛냈다.
"찾았다."
추적의 마안ㅡ 그녀가 가진 스킬이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냈다. 발자국과 어렴풋이 남은 흔적을 따라가자,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기운 표지판에 '덕적면 덕적남로'라고 적혀있었다.
"덕적남로?"
"거의 다 왔어."
홍유리가 일행을 이끌었고, 평평한 해안선이 보이고 머지않아 바닷가에 도착했다. 넓은 모래사장 대신― 그들이 가장 먼저 본 건 끔찍한 살의 향연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살점이 바닥 여기저기에 꾸물거리고 있었다.
"…설마."
"예. 이현공원에서 봤던 녀석과 같습니다."
살덩이 괴물. 이미 재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아직 꿈틀거리고 있다. 우택이 살점을 집어 들자 홍유리가 기겁해 소리쳤다.
"야! 미쳤어?! 씻팔, 징그럽게!"
살피던 우택이 주먹을 쥐자, 살덩이가 으스러졌다. 그에 구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일단 탕아들이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구진하가 고개를 저어 주변을 살폈지만, 그 외에 보이는 건 없다. 다시 홍유리에게 시선을 주자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으로 고갯짓했다.
"저쪽. 얼마 안 남았어."
"팀장님. 혹시라도 이현공원의 던전에서 봤던 녀석이랑 같다면…"
"네가 확인했잖아. 아마 열화판 이겠지."
그에 우택이 작게 끄덕였다. 던전에서 봤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면 떨어진 살점조차 재생하고 있었을 터. 조금 더 걷자 시내가 나왔고, 길 곳곳에 마찬가지로 흩뿌려진 살점이 널브러져 있었다. 구진하는 검집째로 살점을 찍어 눌렀다.
"얼마나 남았어?"
"이제 코앞."
추적의 마안이 아니라도 쫓을 수 있는 정도였다. 마력 감지로도 확인할 수 있는 기척들― 무엇보다, 건물 너머로 보이는 살덩이들.
"우택아."
"먼저 부두로 가겠습니다."
짧은 호명에 알겠다는 듯 우택이 끄덕였다. 뭍에 정박시킨 배를 다시 띄우기 위해 우택이 뛰어가자 구진하는 홍유리에게 물었다.
"광휘는?"
"…저기."
홍유리의 시선이 머무른 곳을 향해 구진하가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했다. 그러자 어떤 남자가 건물 벽과 지붕 사이를 날렵하게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광휘? 그리고 저건?"
광휘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시종일관 유리하기는 했으나, 어째선지 광휘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영문 모를 상황. 광휘를 쫓았을 뿐인데 그는 어째선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광휘의 화살이 남자의 심장을 관통한 순간, 그는 커다란 살덩이로 화했다.
"……!"
몽크가 말하기를, 숲의 던전에서 만났던 살덩이 괴물은 구마준이 변한 것이라 했었다. 믿기 어려웠는데 눈앞에서 보니 부정할 여지가 없다. 살덩이가 되었다는 건 탕아들의 끄나풀이라는 뜻. 한데 광휘는 왜 저들과 싸우고 있단 말인가? 고원은 탕아들과 손을 잡은 게 아니었나?
순간, 광휘의 눈이 빛나더니 시선이 마주쳤다. 상황을 모르는데 굳이 얽힐 필요는 없다고 판단을 내린 구진하는.
"홍유리. 일단 빠지고 다시…?"
"―Alb pur Stelele sunt sa explodeze!"
"너 지금 뭐 하는?"
"Iată moartea ta―!"
3절. 어느새 영창을 마친 홍유리가 마법을 발했고, 순백의 빛과 함께 살덩이 세 마리가 처참히 불살라졌다. 눈을 부릅뜬 구진하는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당겼다.
"뭐 하는 짓이야?!"
"늦었어. 이 등신아."
그녀가 고갯짓한 곳으로부터 우택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피와 살점 범벅으로 변했다. 물론 그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만 보아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던 구진하가 이마를 짚었다.
"망할. 유인당했군."
한 명은 배를 지켰어야 했다. 배가 반파됐을 건 뻔하다. 이젠 섬을 빠져나가긴 어렵게 됐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자 직감적으로 발검한 구진하의 아래, 화살이 반 토막 나 떨어졌다.
"……!"
벨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경고사격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력이 담겨있었다면? 생각하기만 해도 섬뜩했다.
'역시 광휘.'
"여명의 세검사군. 여긴 왜 왔지?"
집중을 흩트리지 않았는데도 어느샌가 사라진 광휘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마치 메아리 같은 소리로 물어왔다.
"홍유리."
"알아. 보고 있어."
광휘만이 아니다. 홍유리 또한 저 먼 곳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제법 멀리 떨어진 교회 옥상― 거의 300m는 떨어진 곳에서 광휘는 태연히 말을 걸어온 것이다.
'이 거리에서라면.'
화살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300m는 간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정도. 두 번째 시위가 당겨지기 전에 구진하가 크게 외쳤다.
"당신을 쫓아왔습니다!"
살덩이 괴물의 시선이 집중된다. 하지만 홍유리의 3절 영창에 재생하지 못했던 걸 보면 숲의 던전에 있었던 놈의 열화판인 모양. 설마하니 그 괴물이 줄지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사태는 아니었다.
"나를 쫓아왔다고?"
의아해하는 광휘가 시위를 놓자 구진하는 쳐낼 생각으로 앞을 가로막았으나 기이한 궤도로 꺾인 화살이 살덩이를 꿰뚫었다. 그러더니, 몸 안에서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살덩이가 폭사했다. 순식간에 빛무리와 화살이 나부끼며, 살덩이들이 하나둘 스러졌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살덩이들을 모두 처치했을 무렵.
"여명에 스퀘어 출신 마법사가 있다고 듣기는 들었지. 소문대로 굉장한 눈이군."
한순간도 자신을 놓치지 않았다며 탄식하며, 얼굴에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를 가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광휘."
"사족은 집어치우지. 날 쫓아왔다는 것부터 설명해보게."
"이 미친…!"
그에 구진하가 홍유리를 제지했다. 물론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 대체 누가 누구를 추궁한다는 말인가? 헛웃음을 터뜨린 구진하가 광휘에게 되물었다.
"일의 전말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설마 발뺌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미안하지만 모르겠군."
담담히 답한 광휘가 활에 시위를 걸었다. 방금과는 달리 웅혼한 마력이 끓어오르고 있다.
"너희가 이들에게 붙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알고 계실 텐데요. 대전의 밤에 있었던 게 바로 접니다. 그리고 오히려 수상한 건 당신 아닙니까? 설명해줘야겠습니다."
구진하는 난장판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이 살덩이들이 뭔지. 당신, 아니 고원과 탕아들이 무슨 관계인지를."
광휘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 셋을 살폈다.
―붉은 머리 소녀는 이미 영창을 마친 지 오래. 몇 절이나 될지 모를 주문을 보류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굳건해 보이는 젊은 헌터가 주먹을 쥐고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세검사만 해도 까다로운데 이대로 싸웠다가는 승산이 희박하다. 섣불리 모습을 드러낸 게 실수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광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군. 말하겠네."
***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꿈. 점점 꿈을 꾸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현실로 다가올 것처럼 생생히.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벗어나려 해봤다.
어떻게 한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악몽에서 벗어날 순 없다고, 이젠 체념하고 말았다.
"……."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가슴이 아리는 것도 언젠가부터 받아들였다. 이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게 됐다. 다만, 나는 이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