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33 마녀의 재앙 (3)
섬 전체에 있는 살덩이들이 몰려드는 듯 하자, 구진하는 이를 악물었다. 빨리 본토로 돌아가 아카데미 습격을 막는 데 손을 보태야 하는데 여기서 발이 묶여있을 순 없다.
'홍유리는.'
아직 마법을 발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린다. 스물을 넘었을 때 더 이상의 살덩이는 몰려들지 않았지만― 침묵하는 입은 한참이나 주문을 영창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이 발해질지 생각하면 불안함이 남는다.
'설마…'
이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광휘가 보조 무장을 꺼내 들고 앞을 달렸다. 살의 벽이 가로막았지만, 오히려 발판밖에 되지 않는다. 현존 최고의 궁사, 광휘가 빠르다는 건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사실.
"Spiritul tunetului coboară aici―"
그리고 침묵하는 입의 마법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쯤, 살덩이의 벽을 헤집은 광휘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몰려온 먹구름에서부터 꾸멀거리던 뇌전 또한 낙뢰가 될 준비를 마쳤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준비를 마쳤을 때, 구진하는 생각했다.
'영창하게 둬서는 안 된다.'
광휘가 놈을 찌르는 것보다 마법이 발해지는 것이 한순간 먼저라고 판단한 구진하는 코트 속에서 또 하나의 검을 꺼냈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준비해두기로 한 여분의 검. 힐트를 붙잡고 팔을 어깨 뒤로 팽팽히 당긴 그가 있는 마력과 없는 마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광휘가 놈을 쓰러뜨릴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혈관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문 구진하는 놈이 마법을 발하기 직전, 세검을 투척했다.
빛살처럼 날아간 세검이 마력의 중심을 뚫는다― 그렇게 불완전한 마력을 침묵하는 입이 억지로 구현하려 할 때, 광휘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끝이다."
심장 어림에 틀어박힌 단검. 그런데도 놈은 중얼거렸다.
"O fereastră de tunete… și fulgere care acoperă cerul și pământul."
최후의 최후, 억지로 뱉은 영창에 마법이 폭주한다. 그 집념에 구진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5절 영창의 대마법이 광휘를 덮치기 전, 순식간에 활을 집은 광휘가 먹구름을 향해 화살을 쏘아 올렸다.
"……!"
천지를 뒤덮는 천둥·번개와 광휘가 쏘아낸 빛의 화살이 충돌한다. 마력의 폭풍에 구진하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 천둥·번개가 화살을 소멸시키고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거기엔 아무도 없다.
'역시.'
당연하다는 듯, 마법의 범위 밖으로 벗어난 광휘. 화살이 대마법에 견디지 못할 것을 알고 발을 뺀 것이다. 그 판단과 노련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스물이 넘는 가까운 살덩이가 꿀렁거렸다. 마치 살의 해일 같은 끔찍한 모습에 구진하는 숨을 뱉었다. 아까 투척의 여파로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일대가 진홍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놈들이 밀려들기 직전, 홍유리가 크게 소리쳤다.
"Arzând în abis și transformându-se în cenușă!"
홍유리가 준비한 마법. 숲의 던전에서 사용했던 5절 영창은 나름 자제한 것이었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다. ―잠시 후, 주변을 둘러본 구진하가 혀를 찼다.
"어차피 버린 섬이라지만…"
덕적도 전체가 놈들의 아지트였으니 불태운다고 나쁜 건 없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을까. 구진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홍유리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속 시원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인제 좀 깨끗하네."
살덩이는커녕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시가지를 보고 광휘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만한 마법사는 정말 보기 힘든데… 스퀘어 소속이 아니라는 게 더 믿기 힘들군."
"출신은 스퀘어거든요?"
"…그렇겠지. 터무니없군."
불의 마법. 진홍의 마력. 레드 스퀘어. 스퀘어 중에서도 파괴에 특화된 그들다운 위력이었다.
"그래서 침묵하는 입은 어떻게 됐습니까?"
"분명 심장은 뚫었네. 방금 마법으로 소멸했겠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도대체 뭘 믿고…"
침묵하는 입은 분명 강했다. 5절 영창까지 사용한 거로 보아 어떻게든 스퀘어와 연관 있는 인물이었으리라.
'하지만.'
광휘와 자신까지 있는데 뭘 믿고 싸운 걸까. 그냥 도망치는 게 옳은 판단이었을 텐데. 꿰뚫어 본 듯, 광휘가 말했다.
"죽었다고는 안 했네. 아마 살아있을 걸세."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소멸했다고 한 거 아닙니까?"
"그래. 소멸했네. 나도 침묵하는 입을 죽였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네. 그것도 세 번이나."
"……."
"그런 마법이 있는 건지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이 네 번째. 죽었을 거로 생각하긴 어렵군."
"진심입니까?"
"듣지 못하는 귀. 굳은 발가락. 여태 처치한 간부만 둘일세. 하지만 침묵하는 입은 달라. 놈만큼은 몇 번이고 끈질기게 돌아오더군."
반사적으로 구진하가 홍유리와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딴 개사기가 어딨어? 아마 스킬이겠지."
이런 놈이 죽지도 않고 계속 나타난다는 건가? 어디선가 나타나 매번 5절 영창을 시가지에 뿌리기만 해도 답이 없다. 구진하의 표정이 굳어갈 무렵, 저 멀리서 우택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일단 돌아가죠. 정말 아카데미를 습격한 거라면 한시가 급하니까."
그들은 배를 정박시킨 곳ㅡ 밧지름 해변까지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에 꼬리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바닥에 비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일렁이는 늑대의 모습을 한 그림자.
'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꼬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은 모두 죽일 생각이라는 것이다. 죽이지 못하면, 죽고 만다.
"막아! 어떻게든 막으라고!"
그림자가 일렁이며 놈이 뻗은 촉수가, 그리고 촉수가 바닥에 닿아 만들어진 그림자가 이중으로 쏘아졌다. 어쩐지 연락이 안 되더라니… 십중팔구 이 늑대의 소행이리라.
"Stâncă uriașă!"
단문 영창. 커다란 바위가 떨어지는 것에 늑대가 멍하니 올려다본다. 꼬리는 어쩌면 이라는 희망을 품었으나, 그 희망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바위는 허망하게 바닥만을 찧었으니까.
'어디로?'
어느새 늑대는 부하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무수한 촉수와 그림자. 난폭한 돌풍과 검은 불꽃. 모든 저항이 무의미했다. 터무니없는 힘의 차― 그때, 꼬리는 직감했다. 이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괴물이라고. 도망치려는 그의 등을 늑대가 짓밟았다.
"그르르―"
뚝뚝 떨어지는 침이 머리 옆에 떨어지자 꼬리는 미친 듯 발버둥 쳤으나, 강한 힘에 짓눌려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 아으, 아으으."
가까스로 떠오른 주문. 하지만 벌벌 떨리는 턱 때문에 영창할 수 없다. 등을 짓누르고 있는 괴물의 발이 당장에라도 척추를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포 속에 늑대가 말을 걸어왔다.
"―나머지 놈들은 어디냐."
짐승 특유의 끓는 듯한 소리가, 거기에 담긴 살의가 꼬리의 등줄기를 서늘케 했다. 말을, 말을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백지로 물들어가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그를 일깨웠다. 갈비뼈 사이를 찢어발긴 그림자가, 그 사이로 파고든 촉수가― 뇌를 파고드는 것 같은 고통에 꼬리는 비명을 질렀으나, 턱을 위아래로 짓누른 그림자에 소리조차 나오지 못했다.
붉게 충혈된 눈만이 꼬리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턱을 누른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꼬리는 울부짖었다.
"올림피이이익! 올림픽 대교! 올림픽 대교다아악!"
―동시에 꼬리는 검게 불타올랐다. 잿더미로 변한 꼬리를 보던 늑대는 생각했다.
'올림픽 대교.'
진실을 판별할 능력은 없다. 다만, 놈이 고통에 솔직했기만을 바랄 뿐.
'아직 도망가진 못했을 거야.'
처음엔 기숙사 건물로 가 보았으나 남아있는 건 무너진 건물의 잔해뿐이었다. 만약 백소율과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후각으로 찾을 수 있을 테지만 백소율과 만난 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했는데.'
백소율을 찾을 수 없다면 그녀를 쫓는 탕아들을 쫓자고. 어찌 됐든 놈들을 모조리 죽이기만 하면 마녀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을 테고, 백소율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태 백소율은 보이지 않는다.
진실이건 아니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올림픽 대교를 향해 달렸다.
***
"여기! 여깁니다!"
가까스로 구급차가 들어왔다. 난리 중에 출동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살아있는 학생을 급한대로 구조하던 중, 젊은 헌터는 걸려온 전화를 받아 턱과 어깨 사이에 끼웠다.
"은하냐?"
화면을 보지도 않고 답한다. 아카데미에서 합류하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못한 건가?
"왜 이리 늦어? 아직 도착 못 했어?"
[아뇨. 그게 아니라 잠깐 일이 있어서]
일이 있다? 젊은 헌터의 표정이 굳었다. 이 난리, 난장판에 있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탕아들에게 쫓기고 있나? 아니면 살덩이랑 마주쳤나?
"무슨 일이야? 넌 괜찮고?"
[전 괜찮아요. 그런데 일이 좀…]
곧 그가 들은 설명은 놀라운 것이었다.
"정말 선생이었어?"
[네. 누군진 모르겠지만…]
"골 때리네."
젊은 헌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지만 아카데미의 교사직은 아무나 맡는 게 아니다. 실력과 인성 면에서 검증된 인간ㅡ 즉, 최상위 헌터들만이 맡을 수 있는 영광된 자리라는 건데.
'근데 거기서 변절자가 나왔다 이거지.'
[죄송해요.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소율이라는 애를 쫓고 있는 키가 큰 남자였는데…]
그 정도만 알아도 나중에 찾을 수 있다. 끄덕이려던 젊은 헌터가 구급차로 실은 학생 하나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유창백."
"유창백?"
"소율이 좀 살려주세요. 제발…!"
혼동하듯 말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군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죽은 건 아니었고 그냥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아저씨도 들었죠?"
늙은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창백… 그래. 분명히 들었다."
"일단 연락 돌려야죠?"
진위는 나중에 판별하면 된다. 의심 가는 정황이 있다면 먼저 억눌러야 한다― 그 말에 늙은 헌터가 끄덕였다. 어느샌가 끊긴 전화를 보던 젊은 헌터는 문득 드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아저씨. 아까 그 괴물 말인데. 분명 탕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 않았어요?"
"이 자식아. 그 말은 꺼내지도 마라!"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다는 듯, 늙은 헌터가 몸서리쳤다. 젊은 헌터가 진짜로 입을 다물자 무안해진 늙은 헌터가 헛기침했다.
"흠. 근데 그건 왜 꺼내냐?"
"알파. 알파 아닐까요? 늑대였잖아요."
"그게 말이 되냐? 자식아. 워그에서 스컬 울프로 진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설마하니 또 종을 뛰어넘었겠는가에 대한 의문에 젊은 헌터가 더 큰 의문으로 답했다.
"그럼 탕아들을 쫓는 늑대가 알파 말고 또 있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시발."
탕아들을 쫓는 또 다른 늑대 몬스터가 있거나 알파가 진화했거나―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프다. 늙은 헌터는 긴 한숨을 쉬고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
담을 넘은 백소율은 망설이지 않고 달렸다. 단거리 질주하듯 끝없이 마력을 담아서. 숨어봤자 마력 감지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길을 따라 올라가자 한강이 보인다. 선생, 유창백이 쫓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어디로?'
경찰로는 안 돼. 저 사람이 맘먹으면, 진심이라면 어떻게든 날 데려가고 말 거야. 백소율은 아까 자신을 구해줬던 헌터의 클랜 마크를 떠올렸다. 그 언니는 괜찮을까?
'새벽의 여명.'
고원의 뒤를 잇는 2위 클랜. 설령 B클래스라도 여명에선 어쩌지 못할 터. 거기로 가야 한다. 유창백이 날 데려가지 못하도록. 백소율은 달리면서 휴대폰으로 검색해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 새벽, 이 난리 통에 남은 사람이 있는 게 더 이상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백소율은 초조해졌다.
'…어쩌지?'
사람이 없다면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달리다가 뒤에서 들려온 소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벌써?!'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화들짝 놀란 백소율이 재빨리 영창했다.
"Ascunde."
곧바로 지붕 위로 몸을 숨기고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곧이어 유창백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눈을 감더니,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소율아.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나오려무나."
여기서 마력이 갑자기 끊어졌다면 십중팔구 근처에 숨어있다는 뜻이다. 그건 알겠지만… 유창백은 혀를 찼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었고 또한 추적 계열의 스킬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렇게 흔적이 끊겼다면 직접 찾는 수밖에 없었으니.
'이래서 마법사는.'
한숨 쉰 유창백이 손을 털었다. 그러더니 마력을 담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무식한 힘과 마력에 바닥이 깨지고, 그 충격이 퍼져나갔다. 어차피 살덩이가 일으킨 소란 덕분에 인근 주민들은 전부 대피소로 갔을 터.
눈을 감고 집중하던 유창백이 피식 웃었다.
'밑에 없으면 위겠지.'
재능이 있어도 시간과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아무 의미도 없다. 단숨에 지붕으로 뛰어오른 유창백은 머지않아 달리고 있는 백소율을 발견했다.
"소율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소율은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학생과 헌터 사이에는 도무지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아무리 도망 쳐봤자 백소율은 유창백을 따돌릴 수 없다. ㅡ그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유창백의 손이 백소율의 어깨를 짚은 순간, 그녀의 모습이 허상처럼 사라졌다.
"환영 마법까지?"
퍼플 스퀘어의 마법. 간단한 눈속임이지만, 유창백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마법 자체가 쉬운 게 아닌데. 하물며 아카데미에선 가르친 적도 없는 마법이다. 도서관의 서적을 보면서 혼자 공부한 정도일 텐데 훌륭히 성공하다니.
"그래도 소율아."
유창백이 휙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달리고 있는 백소율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 마력 감지가 그리 말하고 있다.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단번에 거리를 좁힌 유창백의 주먹이 백소율의 정수리 위를 아슬아슬히 스쳤다. 그 풍압에 나가떨어진 백소율이 바닥에 등허리를 찧었다. 잠깐 내려다보던 유창백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놀랐다. 여기까지 할 줄 몰랐어."
하지만 어차피 갈 길이었다. 백소율의 도망은 발악밖에 되지 않는다. 정신 고갈이 다가오는지 기진맥진하는 백소율을 어깨에 들춰맨 유창백이 픽 웃었다. 그렇게 끌려가는 와중, 백소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발악해보려해도 어딜 잘못 부딪친 모양인지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올리고 싶어도 남은 마력이 없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소용없었구나.
악몽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말했던 꿈.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았던 악몽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몇 년간, 단 한 번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던 나만의 진실, 악몽, 꿈― 그래. 이젠 차라리 편해졌다고 백소율은 생각했다.
'이럴 것 같았어.'
처음에는 믿어줬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고, 일어날 리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나는 양치기 소녀가 되고 말았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어도 믿지 않았으리라. 무엇 하나 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말이었다. 누구도 날 믿어주지 않았고, 가슴이 아려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력했다. 혼자 열심히 노력해서, 어려운 마법도 익혔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노력했지만― 결국 악몽을 벗어날 순 없었다.
'싫어!'
그 악몽이 반복되는 게 싫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꿈. 그래서 바랐다. 내가 다른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끝나기를. 이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죽이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럴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믿기 힘든 꿈 때문에 죽는 게 두려웠고, 무서웠다. 그래서, 그래서 죽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붉었던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이제 모든 게 끝난다.
대교 아래, 배를 타면 정말로 끝. 돌이킬 수 없다.
마침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체념한 소녀는― 눈을 감기 직전,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았다.
***
노인은 한숨 쉬며 말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게."
"……."
"정말 끝까지 가 볼 심산인가? 어떤 멍청한 놈이 짜둔 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엔 무노, 그 친구가 있음을 잊은 겐가!"
일갈하는 노인의 목소리에도 그는 담담했다.
"알고 있지."
"그럼 일이 허사가 될 걸 알면서도 그랬다는 겐가!"
그 말에 답하듯, 그가 천천히 아공간을 열었다. 찢어진 공간의 균열 사이로 무언가를 꺼내든 그가 그것을 노인의 앞에 던졌다.
"많이 늙었더군."
데굴데굴 구르던 그것이 발치에 닿아 멈췄을 때, 노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자넨 정말 미쳤군."
"원하는 것이 상충됐을 뿐이지."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가, 감흥 없다는 듯한 반응이 노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ㅡ그에 맞춰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