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34 꺾인 손가락
기이하게 변형된 손가락이 백소율을 가리켰다.
"―그거, 주면 놓아줄게."
기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꺾인 손가락의 입에서 언어가 흘러나왔다. 당연한 일. 애초에 지성이 없다면 조직의 간부 자리에 앉는 건 불가능하니까. 지목당한 백소율이 헛숨을 들이켰다. 덜덜 떨리는 몸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려줬다.
―대답하는 대신, 백소율의 앞을 가리고 페어리 드래곤과 눈을 맞췄다. 작게 끄덕이자 녀석이 알아들었다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잠깐…!"
급하게 무어라 말하려는 백소율을 데리고 페어리 드래곤이 환계로 모습을 감췄다. ―이걸로 걱정할 건 없다. 설령 여기서 내가 무너지더라도 마녀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 꺾인 손가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묻고 있다. 대답해주는 대신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미 일대를 뒤덮고 있는 귀화에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틈을 줘선 안 돼.'
574라는 민첩은 그런 의미다. 착각하면 안 된다. 민첩 513의 어스 서펜트에게서 도망쳤던 건 내가 아니라 백록이었음을. 설령 공격을 예측하더라도 반응할 수조차 없는 속도라면 의미가 없다.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놈만을 노려보았다.
놈은 기이하게 변형된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당겨 헤 벌렸다. 그렇게 장난치던 놈의 눈이 일순 녹색 광기를 보였다. 스산한 웃음을 짓더니, 아까처럼 새하얗게 웃었다.
순간, 놈의 모습이 사라졌다. 보이지 않더라도 감지와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어느새 배후로 이동한 놈이, 검은 불을 뚫고 팔을 집어넣었다. 타오르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커다란 손톱이 다가오는 것에 예측해 물러났다. 생각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빨랐다.
'망설이지도 않아.'
귀화에 타오르는 팔을 보며 그것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거 보라는 듯, 팔을 허공에 마구 휘두르고 마력으로 덮는다. 그래도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에 놈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
점점 번져가는 불길. 처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검게 불타오르는 팔을 어깻죽지에서부터 뜯어내고 허리춤에 있는 고기― 누군가의 머리였던 것을 씹어 삼켰다. 그러더니 곧 팔이 자라난다. 자라난 팔의 감각을 확인하던 놈이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배부른데 너 때문에 또 먹었네…?"
'…거짓 불멸.'
놈이 가진 B등급 스킬. 그것의 효과였다. 타인의 피와 살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시체식을 권장하는 스킬― 구울(Ghoul)을 모티브로 키메라로 만들어진 놈에게 더 없이 어울리는 스킬. 놈의 허리춤에 메달린 다섯 개의 머리를 보며 안도했다.
'다행이야.'
―승산이 없다고 했었다.
구진하 정도가 아니면 이길 수 없다고. 맞다. 평소와 같았다면 그랬을 거다. 이 소란에 사람들이 대피하지 않았더라면 승산은 없었을 거란 뜻이다. 몇 번을 쓰러뜨리더라도 놈은 인간을 먹어 치우며 끝없이 몸을 재생할 테니까.
놈을 쫓을 수 있는 발이 없다면 결국 불사신과 싸우는 꼴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난리 중에 사람들이 대피한 지금이라면― 거짓 불멸의 스톡은 놈의 허리춤에 매달린 저 다섯 개가 전부다.
"살려주겠다고 했었는데… 내 말을 무시해?"
그것이 붉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려왔다. 당장에라도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스산한 살기가 놈에게서 퍼져 나왔다.
"죽여버리겠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한기를― 끝없이 타오르는 귀기(鬼氣)가 덮었다.
'너만 열 받은 게 아니야.'
이 도시에서 살덩이들이 피어올랐다. 모조 엘릭서의 미완성품― 그것에 몇 명이나 희생당했을지 모른다.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엉켜있는 학생들의 시체를 보았을 땐, 폭발할 듯 들끓던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그래. 참고 있었다.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을 애써 눌렀다. 그러지 않으면 마녀의 재앙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백소율을 구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페어리 드래곤과 백소율은 이 자리에 없다.
―지킬 것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젠 참을 필요가 없다.
마침내 늑대가 광란(狂亂)하기 시작했다.
***
먼저 움직인 것은 늑대였다.
그에 꺾인 손가락이 당황했다. 검은 불꽃을 두르고, 붉은 안광이 잔상처럼 남는다. 하지만 당황했던 것은 일순― 늑대가 먼저 달려들 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느리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어디선가 피어오른 그림자가 그의 발바닥을 꿰뚫고 있었다.
"……?!"
늑대와는 다르다. 꺾인 손가락은 통각이 없는 게 아니라 촉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언제 그림자에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뿌리쳤을 땐, 이미 늑대가 지척에 있었다. 어디선가 난폭한 바람이 불어오자 검은 불꽃이 꺾인 손가락을 뒤덮었다. 가득히 번져가는 불길 속에서도 꺾인 손가락은 당황하지 않았다.
고통이 없으니까. 재생할 수 있으니까. 대신에 늑대를 마주 잡아 그것의 앞다리를 찢어발겼다― 고 생각한 순간, 그의 손에 남은 건 꿈틀거리는 촉수뿐이었다.
'뭐?'
뒤늦게 늑대의 턱이 어깨를 물어뜯었다.
아까 재생했던 어깻죽지를 물고 늘어지더니, 이빨 사이로 일어난 검은 불길이 자신을 휘감았다. 결국 또 한 번 팔을 자신의 손으로 뜯어내고, 머리를 집어삼켰다.
남은 머리는 둘. 영리하게도 놈은 불을 일으키면서 스톡까지 태웠다.
"너…!"
함부로 능력을 보여준 건 실수였다고 꺾인 손가락은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손톱 사이에 낀 털과 살점에 꺾인 손가락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어깨를 물어뜯겼을 때, 다른 손으로 늑대의 배를 갈랐다. 그래서 늑대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거고.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독조(毒爪). 이 손톱 끝에 발라진 극독이 놈을 좀먹을 테니까. 인간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몬스터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꺾인 손가락은 하얗게 웃었다.
"이길 거라 생각했어?"
변형된 커다란 손이 크게 휘둘러졌다.
이제 끝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는― 검은 귀신을 보았다.
***
[약한 독 내성(E)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독 내성(E) Lv.1 → 약한 독 내성(E) Lv.2]
극독을 모든 피해 감소와 독 내성이 막았다. 데미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놈의 손톱에 찢어발겨진 배가 더 문제였다. 경화를 사용해도 압도적인 놈의 힘에 헤집어졌다. 만약 한 치만 더 들어갔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귀화를 일으켰다. 빨리, 더욱 빨리. 그 염원에 답하듯, 귀기가 타올랐다. 드러난 귀신의 형상이 검게 웃으며 귀곡성을 흘렸다.
[귀화(C)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귀화(C) Lv.3 → 귀화(C) Lv.4]
일렁이는 그림자와 검은 귀신이 겹쳐 더욱더 검게 변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칠흑.
"……!"
한계까지 타오른 귀화에도 불구하고 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스톡을 미리 씹어 삼키며 턱을 벌린다. 촉수와 그림자를 압도적인 마력으로 찍어누르고, 단숨에 쇄도했다.
'남은 건 하나.'
탄력을 발해 벗어나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기껏 아물고 있던 상처가 충격에 다시 벌어졌다.
검은 귀신에 뒤덮인 놈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달려드는 집념을 보였다.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어 놈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
이미 일대는 영량이 뒤덮고 있다. 날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놈의 그림자 아래서 튀어나와 발목을 물어뜯었다.
"너… 거기 있었구나!"
불길 사이로 시선이 교차한 순간 놈의 눈빛이 반짝였다. 알고 있다. 놈이 가진 현혹의 마안. 정신을 어지럽히고 집중을 잃게 만드는 눈.
'―기다리고 있었어.'
이미 그보다 더한 환영을 맛본 적이 있다. 어느 마법사가 만든 모방한 세계를 떠올리자 놈의 마안이 처참히 깨져나갔다. ㅡ마안은 마력이 기반이 된 것. 그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작용한다. 슬라임이던 내가 정신 고갈을 느꼈듯, 놈 또한 마력의 반동에 두 눈을 감싸 쥐었다.
"―――!"
고통이 없다는 건 그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뜻. 괴로워하는 놈의 틈을 노려 셀 수 없는 촉수가 놈을 꿰뚫기 직전― 마력의 폭풍에 휩쓸리고 말았다.
'망할.'
역시 쉽게는 안 된다. 500이 넘어가는 마력. 그것을 폭발시키니 어지간한 마법 못지않은 위력이었다. 촉수가 하나도 남김없이 산산이 으스러지고, 나도 나가떨어졌다. 고작 여파에 휘말렸을 뿐인데 아까 독에 당한 것과 더불어 도무지 재생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수 싸움과 스킬로도 극복할 수 없는 압도적인 스테이터스의 차.
"그르르―"
늑대의 낮은 울음이 꺾인 손가락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파고든 꺾인 손가락이 늑대를 짓눌렀고, 둘은 불탄 초목 위를 몇 바퀴나 굴렀다. 그러는 와중, 꺾인 손가락이 턱을 벌려 늑대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원래는 목덜미였으나, 거센 저항에 그러지 못했다.
꺾인 손가락이 다시 팔을 들어 올릴 때, 그제야 늑대는 뒤늦게 턱을 벌리고 있었다. 미리부터 움직인 변형된 손에는 늑대의 머리를 부수고도 남을 힘이 있었다.
"죽어…!"
광기가 담긴 녹색 안광이 빛난다. 압도적인 민첩은 불합리한 차이를 보인다. 서로가 맞붙어있는 지근거리에서 예측은 아무 소용도 없다. 아무리 간파해봤자 그 이상의 속도로 늑대를 찢어발길 뿐. 즉, 늑대에게 뒤는 없다는 소리다.
따라서― 늑대는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서지 않고 다가오는 무식한 힘을 정면에서 받았다. 턱을 벌려 놈의 손을 물어뜯었다. 변형된 손을 물어 뜯는 이빨과, 늑대의 턱을 찢어발기는 변형된 손. 늑대의 머리가 반파되는가 싶었더니, 그림자와 촉수가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필중의 일격은 늑대의 입안을 완전히 찢어놓고, 뇌를 꿰뚫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춰 섰다.
낮게 우는 짐승의 소리와 귓가를 파고드는 귀곡성이 꺾인 손가락을 비웃는다. 분노한 놈의 손을, 늑대의 이빨이 목구멍 너머로 씹어 삼켰다. 그러자― 바닥을 드러냈던 마력이 샘솟았다.
"……!"
거대한 마력과 마력. 정면에서 폭풍이 충돌했다. 놀랍게도 늑대가 발한 마력은 꺾인 손가락의 마력에 밀리지 않았다.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부딪쳐, 서로 나가떨어지고 흩날린 검은 불꽃은 꺾인 손가락만을 처참하게 불태웠다.
'탈식.'
C등급으로 상승한, 먹어 치운 대상의 체력과 마력을 한시적으로 빼앗는 스킬. 충돌했던 마력은 내 것이 아니라 놈의 마력이었다. 덕분에 마력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날숨을 뱉으며 서로 간의 거리를 가늠한다. 불타오르는 와중, 놈이 허리춤에 있던 머리를 집어삼켰고 거짓 불멸이 꺾인 손가락의 상처를 되돌렸다.
'지금부터야.'
이제 그것은 웃지 않았다. 허리춤에 쟁여놨던 마지막 스톡마저 사용했으니 놈에게도 더는 뒤가 없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내가 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놈은 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젠,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됐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놈도 진심으로 움직일 테지만― 내게 남은 마력은 진작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놈의 발끝이라도 쫓기 위해, 매번 억지로 마력을 끌어올려야 했으니까.
반대로 놈의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긴커녕, 아직 절반도 사용하지 않았다.
251. 그리고 545. 단순 수치로만 두 배가 넘는 마력. 이 압도적인 마력의 차이야말로 둘을 가르는 가장 큰 벽이었다.
'그러니까.'
[대마력(B)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남은 스킬 포인트 20 → 4]
ㅡ그 벽을 뛰어넘기 위해 그동안 쌓아왔던 것을 사용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