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35 걷힌 악몽
압도적인 마력이 솟구치고 살기가 전신을 쿡쿡 찔렀다. 그 사이, 좀먹던 극독이 가라앉아 평정을 되찾았다.
끝을 모르고 타오르는 불길이 공원 전체를 불태운다. 살기가 교차하는 가운데, 꺾인 손가락이 마력을 폭발시켰다.
난폭한 마력의 폭풍을 두른 구울이 발바닥에 마력을 집중 시켜 뛰어올랐다.
'……!'
보았다. 보았는데도, 미리 본 예측에서조차 순식간에 당하고 말았다. 황급히 그림자로 숨어든 순간, 꺾인 손가락의 변형된 손이 허공을 찢어발기고 독을 흩뿌렸다.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는 놈이 바닥을 파헤쳐 그림자 속을 깊게 파고든다. 변형된 손에 끄집어내지기 전에 다른 그림자를 통해 빠져나와야 했다.
"거기 있었구나?!"
뒤가 없다고 했었다. 그 말대로 놈은 마력을 아끼지 않고 사용했다. 폭주하듯 소용돌이치는 마력이 돌풍과 맞부딪쳤다. 시종일관 밀리는 돌풍과 흩어지는 검은 불꽃. 지척까지 다가온 거대한 손이 늑대를 헤집기 전에, 불길이 기세를 키운다. 크게 일어난 귀화가 꺾인 손가락을 집어삼키기 위해 넘실거렸다.
"……?!"
황급히 물러났지만, 불길에 닿고 말았다. 이 검은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빠른 판단으로 구울은 불이 붙은 손가락을 비틀어 뽑았다.
'어떻게 갑자기?'
갑자기 타오른 검은 불꽃을 이해하지 못하던 꺾인 손가락이 늑대를 살폈다. 분명 바닥을 보이던 마력이 아직 남아 있었다. 꺾인 손가락이 그동안 느꼈던 늑대의 마력은 잘 쳐봤자 C클래스 언저리. 그것을 절제 없이 폭주 시켜 사용했을 뿐. 한데 갑자기 늑대의 마력이 차올랐다.
'아니야.'
차오른 게 아니라 바닥이 깊어진 것이다.
눈살을 좁힌 꺾인 손가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늑대를 보았다. 나약했었다. 방금까지는. 보잘것없는, 바닥을 드러내던 마력이 그 한계를 쳐부수고 심층의 마력을 드러냈다.
'도대체 어떻게!'
늑대가 쌓아온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꺾인 손가락에게 있어 늑대는 불가해한 존재였다. 심층을 드러낸 마력조차 자신에게 닿기엔 부족했으나, 꺾인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일말의 패배를 점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스톡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꺾인 손가락에게 있어 부담을 가져왔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럴 가치가 없다― 발길을 돌리려던 그는 늑대가 보인 아공간 속, 언뜻 보이는 '부수적인 성과'에 눈을 부릅떴다.
***
'모조 엘릭서.'
탕아들의 최종 목적인 엘릭서의 모조품.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비약이며 저 살덩이들조차 모조품의 미완성품일 정도다. 놈들의 엘릭서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라면.
"너! 그걸 어디서…?!"
꺾인 손가락의 안광이 녹색 빛을 흩뿌렸다. 모조 엘릭서, 모방한 신의 피. 사각지대의 아지트에서 탈취한 이 물건은 본래 놈들의 것이었다. 그걸 눈앞에 들이 밀어져서 흥분하지 않을 리 없다. 그동안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겠지. 어쩌면 궁지에 몰렸다는 생각에 이처럼 일을 벌인 걸지도 모른다.
―마녀의 재앙조차 일으키지 못한다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너였구나!"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가래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글거렸다. 놈의 머릿속에 이제 물러난다는 생각은 남아있지 않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럴 생각은 없다. 여기서, 무조건 끝을 본다.
"사사건건 방해하던 게 너였어…!"
꺾인 손가락이 두 손과 발을 바닥에 짚었다. 짐승과 짐승. 늑대와 구울이 서로를 노려보고 틈을 살피는 순간― 구울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지만, 되려 그 폭발적인 마력이 꺾인 손가락의 위치를 알렸다. 난폭한 마력에 휩싸인 꺾인 손가락의 위치를 찾아낸 순간, 늑대로부터 무수한 촉수가 돋아났다.
"이까짓 것!"
마력을 일으켜 쳐부수려 하나, 이번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경화에 더불어 변화로 강성(剛性)을 부여한 촉수는 귀찮으리만큼 질겼다.
"―――!"
짐승의 소리를 내며 구울은 촉수를 씹어먹었다. 촉수. 그 본질은 변형된 털이기에 아무리 먹어도 거짓 불멸은 사용할 수 없다. 이를 가는 놈의 발아래, 촉수의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날카로운 가시로 변한 그것들이 구울을 쫓았으나 미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너무 빨라.'
지척까지 다가온 놈이 입을 벌렸다. 급히 돌풍과 귀화를 일으켰을 때, 놈은 그것을 모두 감수하고 달려들었다. 리스크를 짊어지고, 놈의 안구가 돌풍에 으깨졌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크게 입을 벌린다.
'……!'
놈의 시각 또한 마찬가지로 스킬에 의해 발현된 것. 안구가 뭉개지더라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 망가진 눈이 녹색 빛을 뿌린다.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구울에 맞서 늑대 또한 턱을 벌렸다.
아까의 교환― 마력을 빼앗겼던 것이 떠오른 꺾인 손가락이 재빨리 물러났다.
"너!"
거리를 두고 자존심이 상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그러자 검은 돌풍을 두른 늑대가 질주했다. 늑대가 지나는 자리마다 검은 불길이 세차게 일어났다. 모든 것을 태우는 칠흑의 화마가 꺾인 손가락에게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반드시 여기서 죽인다.'
살려둬서는 안 된다. 앞으로 놈에게 희생당할, 그리고 이미 희생당한 목숨을 떠올리자면― 절대 그럴 수 없다. 들끓는 울분이 늑대의 심장을 펌프질했다.
―놈과는 상성이 좋다.
체력은 육체의 강인함에 기여한다. 400에도 미치지 못하는 놈의 체력은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다. 그 이유는 놈이 키메라이기 때문에. 덕분에 촉수와 그림자는 놈에게 위협적인 무기일 수 있었다.
본래 구울은 시체를 탐하는 괴물. 여태까지는 거짓 불멸이 부족한 체력을 덮어 불사의 존재로 만들었겠지만, 놈들이 일으킨 특수한 상황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니까.'
아직 A클래스에 미치지 못하는 내가, 놈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찬스. 그 때문에 모조 엘릭서까지 보였다. 서로가 배수를 치고 앞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서로에게 쇄도하는 두 짐승이 교차한 순간, 구울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
얼빠진 듯한 소리는, 잃어버린 한쪽 팔에 대해서. 그리고 반대로 늑대는 왼쪽 견갑골이 통째로 뜯겨나갔다. 즉, 다리 하나를 잃었다. 서로가 사지 하나씩을 잃은 상황에서 구울은 늑대의 다리를 단숨에 씹어 삼키려 했으나― 귀화가 늑대의 다리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본래, 귀화는 늑대를 태우지 않는다.
하지만― 늑대에게서 떨어져 나간 다리를 늑대라고 부를 순 없는 것처럼, 검은 귀신은 늑대의 다리를 탐욕스레 먹어 치웠다. 거짓 불멸을 사용할 기회를 허탈히 놓치고만 구울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하…?"
반대로 재생은 빠르게 늑대의 다리를 복구시키고 있다. 복부를 갈라놓았던 자상도, 독조의 극독도. 턱을 찢어발긴 상처조차 거의 완치되어 가는 와중― 늑대는 보란 듯, 구울의 팔을 씹어 삼켰다. 치밀어오르는 역겨움을 그보다 더한 울분이 덮었다. 그렇게 탈식의 효과로 앗아온 마력은 변화와 함께 잃어버린 늑대의 다리를 재구성했다. 그 이전, 아가일이 마력으로 손목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거, 내 팔이잖아? 그거 내 팔이잖아? 그거 내…"
고개를 모로 꺾고 망가진 듯, 그것이 몇 번이고 물어온다. 늑대는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꺾인 손가락은 고개를 꺾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이 싸움을 불합리하다고 판단했다. 모조 엘릭서가 걸려있다는 걸 안 이상, 도망칠 수도 없게 됐다. 만약 그랬다가 놈이 모조 엘릭서를 마시면?
'공격도 통하지 않잖아.'
현혹의 마안은 통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반동을 감당해야 했다. 독조의 극독도 어째서인지 효과가 옅다. 가장 중요한 거짓 불멸조차 사용할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페널티를 지고 싸움에 임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까지 불리한 상황이 있었던가.
'없었어.'
그 불합리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늑대가 달려들었다. 탈식으로 구울의 마력을 뺏은 늑대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마력의 폭풍이 또 한 번 충돌하고 거센 충돌과 함께 상쇄된 순간, 구울의 시야를 늑대의 커다란 턱이 가렸다. 재빨리 물러나려는 순간, 아까와 마찬가지로 촉수와 그림자가 구울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미 공원 일대는 늑대의 영역이었다. 대교의 커다란 그림자가 비치는 이상, 영량을 퍼뜨리긴 손쉬웠으니.
"그거! 그거! 내 팔이잖아! 돌려내! 돌려내라고!"
뭉개진 눈이 끝없는 광기와 여태 없던 살기를 보인다.
타인의 피와 살을 먹어 치우는 시체식(屍體喰)― 평생을 빼앗아왔던 구울에게 있어 빼앗긴다는 건 불합리함의 극치였다. 울분에 찬 변형된 손이 늑대를 죽일 듯 휘둘러졌고.
"내! 팔이잖아!"
그 집념에, 늑대는 기껏 만든 다리를 포기했다. 기쁜 얼굴로 늑대의 다리― 자신의 팔이었던 것을 쟁취한 꺾인 손가락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으나,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흐, 하?"
끔찍한 살기가, 그보다 더한 귀기가― 무엇보다 어느새 일대를 뒤덮고 있는 그림자에 붙잡혔다. 등 뒤에 있는 것을 괴물이라 생각한 구울이 버텼지만― 그림자는 억지로 꺾인 손가락의 목을 비틀었고, 구울은 자신의 뒤에서 웃고 있는 검은 귀신을 보았다.
"―――!"
빼앗은 마력을 연료 삼아 한계 이상으로 타오른 귀화. 그것이 순식간에 꺾인 손가락을 덮쳤고, ―발광하던 구울은 최후, 귀곡성과 함께 불살라졌다.
***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하지만 정말 아름답다고 백소율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늘에 떠오른 바다, 날아다니는 신비한 동물들. 심지어 이 공간에 온 이후로,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진 것 같다.
'마력의 농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처음엔 물속으로 들어온 줄 알고 숨이 턱턱 막혔는데 알고 보니 그 전부가 마력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백소율이 가만 생각했다.
'난… 이제 괜찮은 걸까?'
날개 달린 보랏빛 용이 날아올랐다. 나를 이 세계로 데려다준 용이 아름다운 빛가루를 뿌렸다. 움직이기 힘들었던 몸이 낫는듯한 기분.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을 때, 용이 내려앉아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뀨루룩."
현실감이 없는 환상 같은 세계.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용이 이젠 갈 때가 되었다는 듯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아름다운 세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다가 사라지고 구름이 생겨났으며, 아름다운 환수들이 사라지고 불 켜진 건물들의 빛이 대신했다. 마치 꿈에서 깬 것 같은 상실감에 백소율은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아…"
현실로 돌아오자, 그녀는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또다시 끌려가는 게 아닐까. 유창백은 살아있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상상하기만 해도 무서웠다. 자신도 모르게 떨고 있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마음이 부서질지도 모른다. 이젠 더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버틸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때―
"―이제 네가 마녀가 될 일은 없다."
들려 온 목소리에 백소율의 눈이 떠졌다.
뇌리를 파고드는 것 같은 저음. 눈을 뜬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일렁이는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림자에 뒤덮인 늑대의 형상을 보았을 때, 백소율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섬찟한 붉은 눈과 시선을 마주하자,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네 재앙은 끝났다."
선고하는 늑대의 목소리에 가슴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어느샌가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어린 용이 위로하듯 핥아주었다. 평생을 옥죈 속박이 이젠 사라졌다는 믿기 힘든 말. 꿈이, 악몽이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찬 선고. 그에 백소율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뇌를 거치지도 않고 내뱉은 말. 자신이 멀리서 보이는 듯한 착각. 말리고 싶었지만, 백소율은 어느새 늑대를 껴안고 있었다.
그러자 착각이 사라지고, 현실감이 돌아왔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나의 꿈. 나조차 믿을 수 없던, 결국 현실로 다가오고 만 악몽.
―나를 송두리째 앗아간 악몽을 걷어준 늑대.
나는 울고불고 소리치며 늑대를 껴안았다.
"나는, 나는 살아도 괜찮은 건가요? 내가, 내가…!"
목이 메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현실로 다가왔던 악몽처럼 언젠가는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게 아닐까. 끔찍한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그럴 바에야 지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평생을 안고 살아온 걱정과 불안에 그는 담담히 답했다.
"마녀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몇 번이고 막을 테니까."
붉은 안광과 마주한 나는 영혼이 요동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굳어버린 나를 보고 늑대는 이제 되었다는 듯,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기다려줘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홀로 남는 게 무섭다. 함께 가고 싶었다. 데려가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당신의 옆에서라면 나는 양치기 소녀가 아닐 수 있다. 누구도 믿지 않은 내 악몽을 걷어 간 늑대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 남은 그녀는 뒤늦게 그녀를 쫓아온 이은하가 올 때까지 멍하니 사라진 늑대를 바라보았다.
***
"뀨루룩."
시무룩히 페어리 드래곤이 칭얼거렸다. 녀석이 칭얼거리는 일은 잘 없는데. 백소율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어쩔 수 없잖아.'
백소율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녀에게는 그녀의 세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영 아쉬운 모양인지 페어리 드래곤이 꼬리로 토닥이며 심술을 부렸다. 한숨을 쉬고 있는 와중, 시스템이 메시지를 보냈다.
[멸망 확률 97.93% → 96.19%]
[1.74%만큼의 업을 획득합니다]
[업(業) 2.71%]
꺾인 손가락을 죽였기 때문인지 혹은 마녀의 재앙을 막았기 때문인지 멸망 확률이 내려갔다. 그리고.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9 → Lv.10]
10레벨에 도달하지 않아 혹시 몰라 기다리고 있었더니 조건이 달성됐다.
'이제 됐어.'
마녀의 재앙을 막으라는 게 조건이었으니, 백소율이 마녀가 되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어느새 서울을 뒤덮었던 소란도 가라앉은 모양. 오히려 여명과 고원이 버티고 있는 서울에서 지금까지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게 선전한 거였다.
'꺾인 손가락…'
덕분에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탕아의 간부답게 두말할 여지 없이 강했다. 아마도 꺾인 손가락의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건 아카데미 교사들의 머리일 터. 내가 탕아들을 사냥하고 있었던 것처럼 녀석도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의 교사진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래서 살덩이들을 처리하는 게 늦어졌던 모양인데… 그에 자연히 떠오르는 의문 하나.
'무노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
"……!"
별안간 일어선 광휘가 화살을 쏘았다. 마력을 가득 담은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훨씬 먼 거리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날았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구진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광휘. 지금 무슨?"
묻기도 전에, 구진하는 식은땀을 흘렸다. 화살이 날아간 건 아주 먼 거리다. 수 킬로미터는 바깥에 있었을 그 존재가 어느새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을 두른 흑청색 갑주를 입은 누군가.
"당신이 왜 여기에 있소?"
이를 악문 광휘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서서히 끌어올린 광휘의 마력에 그 존재의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망토가 휘날렸다.
"……."
답하지 않는 그에게 광휘는 다시 한번 마력을 담아 시위를 당겼다. 빛무리가 일렁이는 인류 최강의 궁사가 쏘는 화살. 그가 누구이든 간에 저 화살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순간, 무한하게 느껴지는 마력이 그들 모두를 짓눌렀다. 광휘의 화살은 허망하리만치 쉽게 막히고 말았다.
"……!"
압도적인 마력에 너 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오직 광휘만이 버티며 눈을 부라렸다.
"대답하시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느냔 말이오!"
"…걱정하지 마라."
그 존재의 말은 마치 귓가에 꽂히는 듯 낮게 울려 퍼졌다.
"네 아비는 죽지 않았으니까."
그가 손으로 갑주의 균열을 쓸어내리자, 거대한 마력이 갑주를 복구시켰다.
"과연 창선이더군. 무노와는 달랐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등줄기가 오싹해진 일행이 침을 삼켰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금 저 남자가 말하는 게 사실이라면― 무노를 죽였단 말인가? 칠영웅의 일원이자 아카데미의 학장인 그 무노(武老)를? 거짓말이 틀림없다. 하지만 광휘는 그 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어째서 그런 게요. 왜 당신이. 하필이면 당신이 이렇게까지…"
"원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지."
"…망령 들었구려."
"네 아비도 그리 말하더군."
그가 좌중을 한번 둘러보자, 모두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노를 죽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
하지만 곧 흥미 없다는 듯, 그 존재는 저편으로 걸어갔다. 시야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압박이 사라졌고 일행은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곧 호흡을 되찾은 구진하는 광휘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대체… 대체 누구입니까?"
"……."
"대체 저건 누구냔 말입니까! 어떻게 저런, 저런 존재가…!"
광휘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굳게 닫힌 광휘의 입은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도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