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38 Lava Volcano (2)
돌풍을 일으키며 달리지만 늦는다. 떨어지는 용암이 둘을 삼키기 직전, 백록이 마력을 일으켜 막을 만들었으나 500이 넘는 마력으로도 완전히 막는 건 힘든 모양인지 압도적인 중량의 용암과 마그마에 침식되어 갔다.
"페리!"
의도를 눈치챈 페리가 백록과 함께 점멸을 사용해 가까스로 흘러내리는 용암을 피했지만, 놈이 곧바로 추적해 뒤쫓아오고 있다.
'…노려지고 있어.'
무엇보다, 발밑으로 하나둘 용암지대의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프로미넌스 크로커다일]
[체장 ―] [체고 ―] [체중 ―]
[힘 ―] [민첩 ―] [체력 ―] [마력 401]
[보유 스킬]
[수영 (F)]
'읽을 수 없다?'
아니, 읽었다. 다만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을 뿐. 이런 경험은 저번에도 있었다.
'태동하는 악.'
놈이 두른 용암의 양에 따라 스테이터스와 체격이 변하고 있다. 얼추 확인한 스테이터스는 레서 드레이크와 비슷하지만, 문제는 스테이터스가 아니라 놈의 생태 그 자체. 스킬이 아니라 종 자체가 용암을 둘러쓴 상식을 벗어난 존재. 애초에 체중이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부터가 생물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백록! 멈추지 말고 달려!"
"자네는?!"
"신경 쓰지 말고!"
황망한 표정이 된 백록을 뒤로 하고, 나는 앞으로 달렸다. 용암이 치솟는 대지를 내달리며 크로커다일의 움직임을 읽었다. 바닥과 부딪혀 치솟아 오른 용암. 그 순간, 거센 돌풍이 불어 튀어 오른 불꽃을 날려버렸다.
'―놈은 무적이 아니야!'
분명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촉수는 닿는 순간 녹아버릴 테니 촉수는 사용할 수 없다. 용암 혹은 마그마를 두른 놈에게 귀화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백록은 마력으로 놈을 막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실체가 없는 공격이라면…!'
세찬 돌풍에 용암이 흩날렸지만, 아주 조금이었다. 놈의 마력이 용암을 응집시키고 있다. 허나 일순 놈의 실체가 드러났다.
'홍염(Prominence).'
증기처럼 일렁이는 기체. 악어(Crocodile)는 형태일 뿐. 놈의 본질은 생물보다 정령이나 유령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용암을 두를 수 있는 거야.'
영량에서부터 그림자가 뻗어 나갔지만, 용암에 막히고 만다.
'이것만으론 힘들어.'
놈은 망설임 없이 지하의 용암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림자가 붙잡았지만, 힘이 부족하다. 결국 또 한번 용암과 마그마를 두르고 뛰쳐나온다. 놈뿐만이 아니라 용암 아래 괴물들이 관심을 보인다. 언제라도 바닥을 부수고 솟아오를지 모를 상황에서, 늑대는 눈을 빛냈다.
'기다리고 있었다.'
[돌풍(C) Lv.5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돌풍(C) Lv.5 → 돌풍(C) Lv.6]
한층 거세진 바람이 용암을 걷어낸 순간, 그 사이를 영량이 파고 든다. 실체 없는 그림자가 용암 속에서 놈을 자르고 가르고 찢어발겼다.
'온다―!'
늑대는 높게 뛰어올랐다. 눈앞의 크로커다일 때문이 아니라, 지면을 부수고 예상했던 대로 용암 괴물들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보스는?'
늑대의 통찰이 전장을 두루 살폈다. 프로미넌스 크로커다일 이상의 괴물들은 많았지만, 보스로 보이는 놈은 없다. 용암 아래에 숨어있다고 여겼는데, 도대체 어디에?
'망할.'
생각할 시간이 없다. 곧잘 탄력으로 착지한 늑대는 그림자로 엉망이 된 크로커다일을 향해 바람을 두르고 뛰어들었다.
늑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당연히 근원지에 가까울수록 그 힘은 커진다. 한층 거센 돌풍이 용암을 날려버린 순간, 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물어뜯었다.
"……!"
용암을 떨쳐내도, 그걸 둘렀던 열기만큼은 남아 식지 않는다. 입안은 화상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통각무효가 있다. 어차피 곧 재생될 거란 생각에 늑대는 멈추지 않았다.
[프로미넌스 크로커다일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3 → Lv.14]
증기를 모조리 삼킨 늑대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대지를 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록의 등에 올라탄다. 제아무리 빨라봤자 백록의 축지를 따라잡을 순 없었고 머지않아 놈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자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뛰어든 건가?!"
"안 죽었잖아."
태평한 대답에 백록은 속이 뒤집어진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걸세! 왜 바로 탈출하지 않았는가!"
빤한 늑대의 붉은 눈을 보면서도 백록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늑대는 백록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단지 시스템의 메시지를 읽고 있을 뿐.
"어차피."
[EXP 84126 / 212478]
"…전부 먹어 치울 거니까."
***
"여명 47. 광명 25. 거암 18. 옥연 11. 신전 6. 은자 3."
총합 110명의 수준 높은 헌터. 하지만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어? 이걸로 공략하겠다고?"
고원은 물론, 화성의 외봉, 인천의 천주, 광주의 망월도 참여하지 않는다. 심지어 스퀘어에서는 공략 중지를 권고했을 정도였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기껏해야 3구획에 진입할 때면 폐쇄될 터. 아니, 그 이전에 전멸할지도 모른다.
"네버랜드가 만만해 보여? 자살하고 싶음 혼자 가시지?"
어이없다는 듯한 홍유리의 말에 강태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흠. 확실히 조금 작기는 한데."
"조금? 평소의 절반도 안 되는데 조금?"
대표 클랜들은 발을 뺐지만, 일반 클랜들은 오히려 신청을 넣은 상태. 거암에서 보낸 서류를 읽고 있던 구진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써먹을 수 있는 클랜이 없군요."
확실하게 참가가 결정된 대표 클랜들만 110. 그 외 대표 클랜들은 발을 뺀 상황. 하지만 반대로 일반 클랜들의 참가 요청은 많다. 자리가 빌 거라 생각하고, 자기네 클랜 헌터들에게 경험을 쌓게 하고 싶다는 얄팍한 생각이겠지만.
"D클래스…?"
그 대부분이 D클래스라는 사실에 홍유리는 어이없이 실소했다.
"뒤지고 싶으면 다른 방법도 많을 텐데."
B클래스 아래로는 네버랜드에서 도움이 되기 힘들다. 여명에서 데려가는 C클래스 헌터는 함정을 간파하는 등 전투 외의 방면에서 도움이 되는 이들일 뿐이었고. D클래스가 참가해봤자 짐 덩이밖에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강태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도움이 안 되냐?"
그 말에 구진하가 갸웃거렸다.
"설마 고기 방패로 쓸 생각은 아닐 테고. 어디다 써먹겠단 겁니까?"
"미끼. 도매가로 묶어서 머리도 데려와야지."
"진심입니까?"
"어차피 걔네만 오면 쓸모없잖냐."
강태호가 하는 말은 경험을 쌓게 해주는 대신, 각 클랜의 로드까지 데려오겠단 말이다. 진심인 듯한 그 말에 구진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이니까 부리는 배짱이기는 한데.'
약소 클랜이라도 클랜장이라면 B클래스 언저리는 될 터. 데려올 수 있다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겠다는 심산. 암담한 상황이기에 부릴 수 있는 배짱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참가할 클랜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너네 이러고 있어도 되냐? 일은 안 해?"
의아하다는 듯 강태호가 묻자 구진하가 되물었다.
"무슨 일 말입니까?"
"나는 네버랜드 준비하는 거고. 너희는 알파 쫓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
잊고 있었던 건 아니다. 서해안의 사람들을 구한 이후, 당연히 홍유리와 함께 대전으로 찾아갔었다.
'문제는.'
구진하는 홍유리를 곁눈질 해 살폈다. 그녀가 가진 B등급 스킬 추적의 마안은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 어떤 것도 쫓을 수 있다. 하지만.
'흔적이 없었다는 게 문제지.'
엄밀히 말해 흔적이 있기는 했다. 다만, 어느 지점을 끝으로 사라졌을 뿐.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정용이 있는 이상 정면으로 알파를 쫓는 건 무리다.'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한 꼴밖에 되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홍유리는 시선을 돌렸고, 구진하는 한숨을 쉬었다. 알파를 쫓을 수 없게 된 이상, 처음 생각했던 대로 대표 클랜의 꼬리를 잡고 놈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게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네버랜드 공략을 준비하는 지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이 암담한 상황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는 없으니 결국 그들에게 알파를 쫓을 방법은 남아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
한참이나 이어진 백록의 잔소리를 넘기고, 다시 사냥을 재개해간다. 어차피 더 이상 던전을 방치할 수는 없는 법. 결국 백록은 늑대에게 협력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제발 무리하지 말았으면 좋겠네만.'
뒤늦게 어린 용이 걱정하는 게 이해가 됐다. 레서 드레이크 정도야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었지만, 아까 늑대가 혼자 달려들 때는 심장이 철렁였다. 그의 싸움은 아슬아슬한 사선 위에서 뛰노는 줄타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화산이 출렁이며 재와 연기를 마구 뿜어내는 가운데, 다시 용암지대로 돌아온 그들을 보고 몬스터들이 곧잘 달려들기 시작한다.
"백록."
"…알겠네."
미리 준비했던 대로 백록이 뒤에서 기다리고 늑대는 놈들을 향해 달렸다. 거대한 턱들이 벌려지는 순간, 늑대와 백록이 거대한 마력탄을 쏘아냈다.
'이거라면.'
대마력. 가지고 있는 마력의 양만이 아니라 마력을 사용하는 모든 행위 자체가 강화되는 B등급 스킬. 그럼에도 백록의 마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용암을 터뜨리기엔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돌풍에 남은 용암의 잔재가 흩날렸다. 영량에서부터 펼쳐진 그림자가 그 사이를 파고 들어 난도질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죽었을 테지만, 용암을 둘렀던 열기만큼은 감수하고 씹어삼키는 수밖에 없다.
[프로미넌스 크로커다일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이게… 정답이야.'
먹어 치운 늑대의 아래는 용암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까 거대한 마력탄과 함께 그나마 남아있던 지면이 사라졌기 때문. 발 디딜 틈 없는 상황에서 저 멀리, 미리 약속했던 대로 백록이 뛰어올랐다.
"…잡게!"
그리고 늑대는 촉수를 뻗었다. 그러는 사이 화산이 한번 꿀렁이더니, 커다란 재와 먼지를 가득 토해냈다. 촉수로 백록을 휘감자 페리가 기다렸다는 듯 점멸을 사용했지만 그 아래에서 상어가 뛰어올라 턱을 한계까지 벌리고 있었다.
"……!"
점멸 자체의 거리가 짧아 어쩔 수 없는 일. 그렇다고 백록의 등을 밟아 뛰어오르기에는 거리가 멀다. 순간, 이쪽을 본 백록의 눈이 빛을 발했다.
"뛰게!"
먼 거리에서 백록이 늑대의 발치 아래 마력으로 이루어진 발판을 만들어냈다. 늑대는 안간힘을 짜내 탄력과 함께 공중으로 한 번 더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반동과 충격에 마력의 발판이 처참하게 부서졌고.
'경화!'
경화로 단단해진 촉수. 그리고 그림자가 백록을 끌어당긴 순간, 용암 상어의 턱이 애꿎은 허공만을 씹어 삼켰다.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그들이 용암 지대에서 멀어지자마자 백록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이건 무리라고 했잖은가! 이러지 말고 천천히 한 마리씩 처리해도…?"
그에 백록이 의아해했다. 늑대가 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좀 더 먼 곳에 있는 무언가였기 때문에. 그의 눈에 비치는 것― 시선을 따라간 백록의 눈이 한계까지 부릅떠졌다.
'……!'
마침내 모든 걸 토해낸 화산의 분화구로부터― 무언가가 서서히, 화산 그 자체를 부수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