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38 Lava Volcano (4)
해와 달이 뜨지 않는 던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는 건 어려웠지만, 체감상 한나절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8 → Lv.19]
[EXP 3214 / 300000]
19레벨까지 도달했다. 20레벨까지 요구 경험치 30만. 슬라임이던 시절엔 1만도 되지 않았던 경험치가 터무니없이 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지만.'
20레벨 달성 조건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왕 온 김에 20레벨까지 필요한 요구 경험치를 이 던전에서 맞춰 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스킬들의 잇단 성장이 있었는데.
[가시촉수(D) : 가시처럼 날카로운 촉수를 발사할 수 있다]
먼저, 그동안 오래 사용했던 촉수 다발이 드디어 D등급에 도달했다는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사실 많이 늦은 거지만.'
그나마도 음영랑이 되고 나서 그림자 지배와 시너지가 좋아 사용 빈도가 늘었기 때문. 진화 이전엔 촉수보다 귀화와 돌풍에 훨씬 더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포식을 제외하면 처음 획득한 스킬이었으니 그만큼 애착이 있다.
'가시 촉수.'
이전과 달리 끝부분이 창처럼 날카로워지고 장미의 줄기처럼 가시가 돋았다. 당연히 원한다면 이전처럼 평범한 촉수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발사할 수 있다는 것.'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쏘아진 그것이 순식간에 공기를 가르고 날았다.
'위력은 마력탄보다 조금 더 높아.'
다만, 어디까지나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촉수도 내 몸의 일부이기에 당연히 마력을 담아 그 이상의 위력을 발할 수 있었다. 훌륭한 원거리 무기가 생긴 셈.
"―――!"
발사한 가시에 맞은 지네가 색색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잔뜩 화가 난 모양인지 몸을 비틀더니 무수한 다리가 꿈틀거리며 기어 오는데, 용암으로 뒤덮여 있는 게 아니었다면 어지간히 징그러웠으리라.
그래. 용암. 놈들이 위협적인 건 어디까지나 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달라.'
자세를 낮추고, 촉수를 발사했다. 마력을 머금은 수십 발의 가시가 순식간에 놈에게 적중했다. 지네의 속도는 빨랐고 놈의 움직임은 기괴했지만, 가지고 있는 스킬과 상성이 좋았다.
'직감과 간파.'
그리고 백록에게 배웠던 예측. 속도 자체가 빨라서 보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거의 무조건 적중한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다. 틀어박힌 가시는 용암 지네를 관통하고 그 아래 바위까지 관통해 부르르 떨었다.
"키이이잇―!"
용암이 흘러내려 괴로워하는 지네의 구멍을 덮었지만, 촉수는 쉽게 녹지 않았다. 등급의 상승과 함께 내구성과 견디는 힘 또한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
만족스러운 성장이다. 마치 놈을 박제하기라도 하듯 바위에 박아놓고 움직일 수 없는 놈을 향해 거대한 마력탄을 쏘아냈다.
"―――!"
용암이 터져나간 사이, 틈새를 파고든 그림자가 갈기갈기 찢어발겨 머잖아 숨을 거뒀다.
'이젠 좀 익숙해졌어.'
처음엔 암담하게 느껴졌던 용암의 몬스터들이었지만, 이젠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달라진 스킬이 있었는데.
[라바 센티피드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용암 지네를 먹어 치우면서 아주 약간이지만, 일시적으로 스테이터스가 상승했다.
'영구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C등급에서 바라기엔 너무 양심이 없는 것일 터. 성장한 스킬은 이랬다.
[만복(滿腹) : 섭취한 상태에서 한시적으로 강해진다]
강해지는 정도는 마력을 제외하고 체감상 스테이터스 20 정도. 식탐이 C등급으로 성장해 변한 스킬이었는데 증가하는 능력치는 조금 아쉬웠지만, 만성적인 스테이터스 부족에 시달리던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스킬이었다.
'딱 하나 아쉬운 건.'
만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먹어 치워야 한다는 점. 접촉 섭취로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내 체중의 사분지 일은 포식해야 한다.
'그래도 충분해.'
저 너머, 화산 각룡은 아직 잠들어 있다. 방금 먹은 라바 센티피드까지 대략 24만 정도 되는 경험치가 남은 셈. 화산각룡이 등장하고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그 여파로 전멸하다시피 한 지상의 몬스터들의 사체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한시라도 빨리 던전 안으로 들어왔던 건 정답이었다.
'그러니까 이젠 사냥해야 해.'
여태까지는 가능한 한 숨어서 포식했을 뿐. 사냥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녀석들이 죄다 숨어들었다는 점이다. 다 먹어 치웠으니 이제 굳이 용암 밖으로 머리를 내밀 이유가 없어진 셈.
'유인해야 하는데.'
슬쩍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유일한 부담은 이곳의 지배자인 화산각룡. 유인하려면 은신을 풀어야 할 테고, 용암 아래 몬스터들이 몰려들 테니까.
'어차피 방법이 없어.'
가능한 한 조용히. 놈이 깨어나기 전까지 경험치를 채우고 던전 밖으로 나간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은신을 해제하자마자 발아래 기척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먹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거리를 좁혀온다. 금세 몰려든 몬스터에 화성암의 구멍으로부터 마그마가 출렁이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온다.'
긴장하고 몸을 날린 순간, 그 자리에 용암이 솟구쳤다.
'마그마 샤크.'
당장 근처에 있는 기척은 놈을 포함해 넷 정도였지만, 금방 더 몰려들 게 뻔하다. 주의해야 할 점은 지면을 잘 확인해야 한다는 것. 가장 먼저 바닥을 깨부수고 나왔던 용암 상어가 높게 뛰어올라 공중에서부터 낙하하고 있었다.
'좋아.'
오히려 놈이 나를 노릴 수 있도록 유인했다. 턱을 한계까지 벌리고 마침내 나를 집어삼키기 직전, 아래서 느껴지는 기척.
'이걸로 됐어.'
탄력을 발해 몸을 날린 순간, 지면에서 뛰쳐나온 크로커다일과 용암 상어가 부딪쳤다. 턱을 벌리고 있던 놈들이 서로 수평과 수직으로 맞물려 물어뜯었고, 낙하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 아래로 처박혔다.
그렇게 놈들이 엉켜있는 사이, 어느샌가 지면에 기어오른 용암 지네를 향해 가시를 발사했다.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놈을 쓰러뜨렸을 때 용암 속으로 처박힌 두 마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만, 상처는 쉽게 복구하지 못한 모양. 뛰어오른 상어를 향해서는 가시를, 솟아오른 크로커다일을 향해서는 그림자를 뻗었다.
그때―
'……?!'
거대한 땅 울림에, 그림자가 흩어질 뻔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에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얼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화산각룡이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망할.'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몰려들던 몬스터들이 화산각룡이 일어난 걸 느끼고 멀어지는 게 다행한 점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가지고 있던 마력을 아낌없이 끌어내 크로커다일에게 퍼붓고 용암이 벗겨져 실체인 증기가 드러난 순간, 그림자가 놈을 도륙했다. 순간, 발아래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영량이 아니야.'
이건 내 그림자가 아니다. 고개를 들려 확인해보니 저 위에서부터 커다란 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지네. 크로커다일. 용암 상어. 세 마리였지만, 처음부터 느껴지는 기척은 넷이었다. 용암 상어는 처음부터 두 마리였다는 뜻. 그 중 한 마리는 아래서부터 뛰어오르고, 다른 하나는 위에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탄력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온 순간, 낙하하던 용암 상어가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어 꺾었다.
'……!'
몸이 뼈와 살이 아닌 용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움직임. 탄력은 방금 썼으니 다시 사용하는 건 무리였다. 하물며 촉수로 붙잡고 끌어당길 만한 곳도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형상화― 순식간에 형태를 이뤄가는 마력.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마력탄을 쏘아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실체를 부여해야 해.'
밟고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미 백록이 보여줬다.
'부족한 부분은…!'
대마력이 보충한다. 마력을 사용하는 모든 행위를 돕는 B등급 스킬― 그 보정을 받아 어설프게나마 발판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형태는 일그러지고 어설펐지만, 발판을 밟고 뛰어올랐다. 처참히 깨져나간 마력의 발판만을 씹어 삼킨 용암 상어가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이, 마력을 담은 가시를 발사했다.
꿰뚫려 아래로 처박히자 그 충격에 용암이 솟구쳐올랐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열기를 돌풍으로 흩어내고 아슬아슬하게 지면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한 마리.'
아직 살아있는 용암 상어와 시선이 교차한다. 땅 울림은 서서히 가까워져 온다. ―속전속결. 마력을 끌어올리자 놈은 재빨리 용암 아래로 숨어들어 멀어져갔다.
'…….'
화산각룡의 눈치를 본 건지 아니면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은 나중에. 시간이 없다.
[마그마 샤크를…]
[프로미넌스 크로커다일을…]
[라바 센티피드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EXP 267234 / 300000]
세 마리를 모두 먹어 치웠을 때, 경험치가 거의 한계치까지 다다랐다. 화산각룡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바위 파편 뒤로 숨어들어 은신을 사용했지만.
"―――!"
그에 화산각룡이 노했다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충격. 미친 듯한 땅울림은 그 자체가 진도 높은 지진이었다. 차마 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닥이 모두 부서져 내리고 놈이 용암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충격에 솟구친 용암이 대지를 뒤덮었지만, 화산각룡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린다.
'빨리!'
육중하면 느리다고들 하지만, 저만큼 거대하다면 얘기가 다르다. 한걸음에 수십 미터를 나아가는 놈에게 400의 민첩이 있다는 건 악몽 그 자체였다.
'……!'
전력으로 달리는 나보다도 빠른 속도. 그것도 용암 속에서 지면을 깨부수면서 달리는 게 그 정도였다. 어스 서펜트도 그랬지만 거대함은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 용암은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건지 끝도 없이 치솟아 화산지대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나가더라도…!'
설마 쫓아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별안간 놈이 멈춰 섰다.
'어째서?'
놈이 멈춘 곳. 거긴 아까 내가 숨어 은신을 사용했던 장소였다. 거기서 화산각룡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은신을 눈치채지 못한 건가?'
C등급 은신이 그리 쉽게 발각될 리는 없겠지만, 화산각룡정도 되는 괴물이라면 눈치채더라도 이상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내가 있던 곳까지 쫓아왔을 뿐인 모양.
'확실한 건…'
침입자를 쫓는다는 것. 다른 몬스터들도 많은데 굳이 내가 사라진 장소까지 와서 멈췄다는 게 그 증거였다. 둘러보니, 놈이 돌진한 여파로 바닥이 무너져 커다란 용암 호수가 만들어졌다. 경계 앞에서 화산각룡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보며 생각했다.
'역시 지금 쓰러뜨리는 건 무리야.'
화산각룡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남은 경험치는 3만. 이 정도라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바다로 나가기만 해도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산지대의 던전은 일단 여기까지.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분명 놈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당장은.'
목표는 달성했으니, 던전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풍경이 변했고―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Lv.20 달성 조건 : 숨어있는 변절자를 뿌리 뽑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