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80화 (80/407)

〈 80화 〉 #39 뿌리 뽑기

"……!"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벌떡 일어선 백록이 괜찮으냐고 물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근데."

안에서 확인한 사항들을 백록에게 알려줬다. 먼저, 보스인 화산각룡은 침입자를 쫓으니 어지간하면 들어가지 말라는 것. 그리고 지상에 서식하던 몬스터들은 거의 전멸했다는 것. 또 용암 아래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어지간하면 던전 밖으로 나올 일이 없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까지.

"……."

그에 백록은 어쩐지 말이 없었다. 내가 알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페리가 다가와 앉았을 때, 확인해보니 어느새 녀석의 무게가 600g을 돌파했음을 알 수 있었다.

'먹으면 먹는 대로 큰다는 느낌인데.'

살이 찌는 건 아니었고 거의 날마다 100g씩은 성장하고 있었다. 이 성장세가 어디까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요정이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뀨우우웃~!"

한참 녀석을 쓰다듬어 주던 중, 시스템의 메시지― 20레벨 달성 조건을 떠올렸다.

'숨어있는 변절자를 뿌리 뽑으라 했었지.'

변절자라는 건 탕아들을 이르는 말일 테고.

'숨어있다는 건.'

애초에 탕아들은 전부 숨어있다. 그런데도 구태여 '숨어있는'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각 클랜에 잠입해있는 변절자들을 말하는 것일 터.

'적절한 조건이기는 해.'

네버랜드 공략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놈들이 날뛰면 곤란해진다. 외부의 적보다 두려운 건 내부의 적이니까. 원래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지만, 미래가 뒤틀린 지금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어떻게 놈들을 찾느냐는 건데.'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탕아들은 이미 진작에 걷어냈다. 구상섭, 구마준, 이백섬까지. 하지만 생각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뀨?"

녀석을 쳐다보자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페리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서해안의 섬을 정리했을 때 살덩이를 찾았던 것처럼 무언가 느낄 수만 있다면. 물론 탕아들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인류에 등 돌린 쓰레기들이라고 페리가 느낄만한 기운을 품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백록은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 거기에 악의가 담겨있다고 했었지.'

요정용은 바로 그 악의를 찾아서 먹는다고 했었다. 탕아들은 몰라도 미완성품은 찾을 수 있을 터.

'그렇게만 된다면.'

놈들을 추적하고 정보를 캐낼 수 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놈들을 쫓을 수 있는 단서가 되리라. 놈들을 찾기만 한다면 처리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인제 다시 현계로 돌아갈 시간이 됐어.'

생각을 정리했을 땐, 백록도 정신 차린 뒤였다.

"…돌아갈 생각이겠지?"

"그래."

목표를 달성했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에 별안간 백록이 바다를 올려다보더니, 감정이 담긴 숨을 뱉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 고맙네."

"……?"

"언제든, 언제든 환계로 돌아오게."

담담한 어투였지만, 여태 백록을 봐왔으니 그 속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돌아오라는 말― 그게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조금, 감정이 벅찼다. 내게 있어 백록은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이요, 선생이었으니까. 수련을 시켜준 것만 아니라 전생하고 불신에 걸려 남을 믿지 못하고 있던 내게 타인을 믿어보라고 말해 준 것도 백록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페리와 함께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진작에 마모되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깊은 상념의 끝에 나도 마찬가지로 긴 숨을 뱉었다.

'―일단 현계로.'

세계가 변해가는 와중, 어렴풋이 백록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 도우러 가겠네."

***

"……."

백록의 말을 곱씹는 것보다도 당장 처리할 급한 일이 있다. 페리와 함께 현계로 돌아왔음을, 은신이 유지되고 있음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남산.'

환계의 던전은 남산에 있었고 여긴 그 근방이었다. 사람들이 있다는 걸 눈치챈 페리가 내게서 조금 멀어져 높게 날아올랐다.

'일단 고원은 무리겠지만.'

소설 속 내용에서도 고원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은 없었다. 어쩌면 주인공이 몰랐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고원 근처엔 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광휘가 있으니까.'

다행한 점은 고원의 위치만큼은 소설 속에서도 제법 자세히 묘사돼있다는 점이다. 아마 도봉구의 산 어디라고 했던 것 같은데.

'거기로 가지만 않으면 돼.'

광휘가 있는 이상, 도봉구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부담이다. 화산각룡을 속인 C등급 은신이라지만 광휘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만약의 상황이라도 페리가 있기는 하지만.'

환계로 돌아갈 수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일단 도봉구를 제외하고 움직이기로 하고, 페리에게 혹시 저번과 같은 기운을 느끼면 알려달라 일렀다.

"뀨우우웃!"

맡겨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말은 알아듣는 것 같은데.'

반대로 내가 녀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답답하다. 혹시 환수어 같은 스킬이 있을지 몰라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요정어도 없고.'

여왕이 선물했던 스킬이지만, 시스템의 획득 가능 스킬 목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이상 숙련도를 올릴 수 없는 스킬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백록은 페리와 대화하는 것 같았는데…'

다음에 환계로 돌아가면 물어보자. 지금 당장은 서울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

[네버랜드 개방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현재 공략에 참여할 거라 알려진 클랜들은…]

TV의 소식은 온통 네버랜드에 집중되어 있다. 무노의 장례식이 끝나고, 또다시 네버랜드 공략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벌써 끝났어요? 아직 2주나 남았는데…"

2주― 네버랜드가 열릴 거라 예상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미 필요한 물자들을 비롯 여명은 지금 당장 네버랜드가 열리더라도 참가할 수 있게끔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러니까 한 거지. 기억하고 있지? 너도 간다는 거."

"알고는 있는데요…"

자신 없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는 이은하에게 홍유리는 망설임 없이 딱밤을 갈겼다.

"어쭈."

반사적으로 마력으로 보호했지만, 홍유리는 딱 그걸 상쇄할 만큼의 마력을 담아 딱밤을 때리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로 이은하는 주저앉아 이마를 감싸야 했고.

"헌터가 쫄아서 어쩌려고?"

"그야… 전 D클래스잖아요."

"누가 너보고 싸우래? 그냥 넌 감지 셔틀이라니까."

감지 셔틀― 이은하가 가진 C등급 마력 감지 때문이었다. 굳이 스킬이 없더라도 마력만으로 감지를 사용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마력으로만 사용하는 것엔 부족함이 있다. 성능도 마력의 소모도. 모든 면에서 효율이 다르다.

"…그건 알고 있지만요."

15년이나 클리어하지 못한 최악의 던전. 하물며 이번에는 다들 실패할 거로 예상하니 이은하가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쫄지 마. 이 등신아. 됐으니까 커피나… 아니다."

이제야 끝난 물자 준비. 그 때문에 며칠간 클랜에만 틀어박혀 있었지 않나. 잠깐 기분 전환하러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발."

얼마나 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면 햇살에 눈이 부실 정도다. 퀴퀴한 자신의 얼굴을 핸드폰으로 확인한 홍유리가 긴 한숨을 쉬었다.

"…커피는 개뿔이."

***

'이렇게 쉽게 찾을 줄은…'

당연히 서울 내에 끄나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서울 한복판에 미완성품을 가져다 둔 얼간이가 있을 줄이야.

'사실 기대도 안 했는데.'

탕아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어째서? 곰곰이 생각하다 이전에 언뜻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다섯. 각기 성동구, 도봉구에 사용할 예정입니다]

마녀의 재앙. 아카데미를 교란하기 위해 서울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탕아들. 그리고 마침 여기는 성동구. 이게 전부 우연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내가 놈들을 죽였으니까?'

원래 사용하기로 했던 놈들을 죽였다면. 그래서 미리 준비해둔 미완성품을 사용하지 못한 거라면? 뒤늦게 미완성품을 회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생각하면 얼추 아귀가 맞다.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일이 잘 풀렸어.'

그렇게 내리 이틀을 기다렸을 때, 마침내 폐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확실한 건 아니야.'

우연히 들른 건물 관계자일 수도 있다. 정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기다렸지만, 굳이 여기까지 올라와 미완성품을 보고 밝아지는 표정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통찰로 확인해 본 결과 놈이 일개 말단에 불과하다는 점. 꼬리라면 B클래스 정도 되는 스테이터스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

곧바로 덮치려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놈을 처리하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꼬리도 이젠 상대가 아니게 됐는데 고작 말단쯤이야. 수거했다면 분명 무언가 행동을 취할 터. 어쩌면 본거지까지 가지고 갈 수도 있고 다른 탕아에게 전해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간에 지금 놈을 덮쳐서 처리하는 것보다.

'뒤를 밟는 게 맞아.'

말단이 알고 있어 봐야 얼마나 알고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면에서 놈의 뒤를 쫓는 게 더 효율적이다. 최악의 경우, 고작 말단에 불과한 놈은 잠입에 대해서 아예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

미완성품을 품속에 집어넣고 끝까지 나를 발견하지 못한 놈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혹시라도 고원이 있는 도봉구 쪽으로 가면 어쩔 수 없이 몰래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금호역의 지하철 아래로 들어갔다.

'여긴 들어가기 힘든데.'

지하철이라면 CCTV를 살피고 있는 직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은신으로 속일 수 있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지 카메라의 렌즈가 아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거리를 뒀다. 무언가를 여는 듯한 기척― 머잖아 놈이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다른 출구를 통해 나왔다.

'어차피 미완성품의 냄새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후각만이 아니라 감지도 있다. 누군가 미완성품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곧바로 쫓을 수 있다. 미완성품은 놈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물품이니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으리라.

'일단 저것부터 처리하고.'

아마 락커에 미완성품을 집어넣은 얼간이. 놈을 뒤쫓아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으로 들어섰고 놈이 통화를 끝냈다.

[…예. 끝났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란 것을 확인하고 놈을 덮쳤고.

'꽝일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 꽝이었을 줄은.'

―다시 금호역 지하철까지 금세 돌아와 근처 건물 옥상 위에 몸을 웅크렸다. 그나마 건진 거라고는 놈의 핸드폰과 방금 통화했던 번호 정도. 일단… 좀 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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