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39 뿌리 뽑기 (3)
"……."
위압의 효과로 얼추 필요한 정보는 다 뽑아낸 것 같다. 붙잡은 꼬리가 하나 더 있었다면 더 많은 정보를, 비교하면서 신빙성까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못내 아쉬웠다. 생각하는 사이 위압에 압도됐던 꼬리가 정신 차리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뒤늦게 정보를 주절주절 내뱉었단 걸 깨닫고 자괴감에 빠지는 놈.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만.
'…생각보다 클랜에 잠입한 녀석들이 많은데?'
고작 꼬리 하나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감안하자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이 클랜에 숨어있다는 건지. 생각할수록 어이없어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정보를 캐낸 이상 사실상 놈들을 죄다 뿌리 뽑은 거나 다름없다.
'하나가 엮이면.'
결국 나머지도 굴비처럼 엮여 떨어져 나갈 테니까. 그 순간,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넋이 나가 자괴하고 있던 꼬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마치 광명이라도 찾은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언가 뒤늦게 떠올렸다는 듯. 놈의 표정에 희망― 아니, 독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너도 결국엔 죽을 거다…!"
독기와 광기. 두 눈에 일렁이던 것은 늑대의 시선과 마주하더니 곧 두려움으로 덧씌워졌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놈이 발악하고 몸부림쳤다. 그래봤자 손목 발목의 힘줄이 모두 끊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결국 꼬리는 아무 의미도 없는 몸부림을 치다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됐다.
"……."
캐낼 건 다 캐냈다. 이제 강화도에 볼일은 없지만, 아까 들려왔던 소리가 신경 쓰였다. 방금 들은 소리는 분명 커다란 무언가가 무너지고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였으니까. ―들려왔던 방향과 소음의 크기로 추측건대 십중팔구.
'무언가가 다리를 무너뜨렸다?'
그것말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안전을 생각하자면 이대로 환계로 물러나는 게 옳은 판단이겠지만, 어쩌면 놈들의 꼬리를 더 잡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리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무척이나 거대하다. 십중팔구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일 텐데…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늑대는 곧장 기척을 향해 달렸다.
***
"여기선 더 가기가 힘들겠는데요."
"됐어요."
계산하고 택시에서 내린 홍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가 더 갈 수 없는 이유는 다리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인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
끊어진 다리에서 무언가를 느낀 홍유리가 다가갔을 때,
"여러분! 물러나세… 얘야. 위험하니까 다른 길로 가."
"하…?"
인파를 통제하던 헌터가 홍유리를 제지했다. 그에 어이없다는 듯 홍유리가 아미를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애새끼로 봤다는 소린데…? 온갖 욕설이 튀어나오기 직전, 그녀는 마력의 일렁임을 감지했다. 제법 먼 거리지만, 물보라가 치솟는 게 똑똑히 보인다.
퍼져가는 그녀의 마력이 수중에서 싸우고 있는 두 기척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여태 찾아다니던 늑대임을 확인한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찾았다."
***
[심연 아귀]
[체장 45.6m] [체고 11.4m] [체중 251t]
[힘 514] [민첩 250] [체력 501]
'이 정도라면야.'
다리를 무너뜨린 거대한 몬스터― 생김새는 아귀라기보다는 복어와 고래를 합쳐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스테이터스는 높은 것 같지만.'
힘과 체력이 높기는 하지만, 민첩이 낮고 무엇보다 마력이 없다. 수륙양용을 가지고 있는 내게 놈은 그저 거대한 샌드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딱 경험치 채우기 좋겠는데.'
남은 3만을 채우고도 남을 터. 곧바로 물속에 뛰어들었고 물보라가 치솟았지만, 은신이 유지되고 있어 심연 아귀는 날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놈의 지척까지 다가갔을 때도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눈부터.'
저번처럼 촉수와 돌풍이 프로펠러와 와류를 만들었다. 그 속도를 더해 나아가, 순식간에 놈의 정면에 자리했다. 가시를 발사하자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놈이 커다란 입을 벌렸다.
"――?!"
놈의 이름에 왜 심연이라는 단어가 붙었는지 알겠다. 시야가 놈이 가득 벌린 입에 검게 변했다. 그러더니 엄청난 흡입력으로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발사한 가시가 힘을 잃고 물살에 휩쓸린다. 집어삼킨 물이 그대로 아가미로 빠져나가자 놈이 추진력을 받고 쇄도했다.
'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추진력으로 다가온 놈. 그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입을 닫았다. 물살의 흐름에 저항하는 게 어렵다. 마력과 탄력을 발해 정면으로― 물살의 흐름을 타고 놈의 아가미를 비집고 빠져나왔다.
'너무 얕봤나?'
그래도 여전히 놈을 쓰러뜨리는 게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통찰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고작 스테이터스일 뿐인데 조금 안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니. 안일한 게 아니라.'
아가미에서 빠져나오는 물살의 추진력으로 움직이는 몬스터. 그딴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아가미가 얼마나 튼튼한 건지. 다리를 무너뜨린 것도 아마 저 추진력을 이용했으리라.
'정면에서 싸우는 건 위험해.'
측면과 후방을 이용해야 한다. 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가시를 발사했지만, 물의 저항을 받은 데다가 놈의 저 터무니없는 덩치 때문에 효과는 미미했다.
'이걸로는 힘들겠고.'
좀 더 강한 데미지를 줄 필요가 있다. 와류를 일으키며 놈의 주변으로 접근했고, 가능한 많은 가시 촉수를 만들었다.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놈이 몸을 틀어 방향을 돌리는 것보다 내가 놈의 주변을 도는 게 훨씬 빨랐다.
'속도는 비교가 안 돼.'
놈이 빠른 것은 아가미의 추진력으로 물살을 뱉을 때. 즉, 직선으로 이동할 때뿐이었다. 가시 촉수 하나하나를 경화 시켜 더욱더 단단하게. 촉수의 그림자와 영량이 합쳐져 무수히 많은 칼날을 만들어내고, 접촉하는 부위를 실시간으로 섭취한다.
'됐어.'
탈식이 체력을 앗아오고, 만복으로 인한 스테이터스의 상승까지 적용된다.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심연 아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거라면.'
돌풍으로 일으킨 와류와 함께 나아간 순간, 놈의 비늘을 뚫고 그 아래 살점을 수십 갈래로 찢어발겼다. 괴로워하는 놈이 물살을 내뱉자 오히려 그 추진력을 이용해 놈의 몸을 갈랐다.
"―――!"
주변 바다가 심연 아귀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거대한 덩치와 500의 체력. 아직도 죽지 않은 놈을 보고 약간의 감탄을 흘렸다.
'끈질긴……?!'
달려들기 직전 느껴지는 오싹함에 재빨리 탄력으로 물러나야 했다.
[약한 육감(E) Lv.4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육감(E) Lv.4 → 약한 육감(E) Lv.5]
재빨리 물러난 순간, 바다가 또 한 번 붉게 물들었다. 놈의 피 때문이 아니라…! 주변 수온이 몇십 도는 올라간 것 같다. 어느샌가 검게 타오른 심연 아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마력. 물살을 가르고 더 깊은 수중으로 잠수했다. 뒤늦게 가라앉은 심연 아귀가 바닥에 닿았다.
'홍유리.'
이 마력은 분명 그녀의 것. 수면 위, 붉은 마력을 마치 구름처럼 뭉쳐 그 위에 떠 있는 홍유리의 모습. 어떻게 쫓아왔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추적의 마안.'
이전에는 확인할 수 없었던 그녀의 스킬까지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
[홍유리(인간)]
[신장 143.6cm] [체중 32.7kg]
[힘 221] [민첩 247] [체력 281] [마력 643]
[보유 스킬]
[추적의 마안(B)] [마력 강화(C)] [마력 집중(C)] [마력 재생(D)] [직감(E)] [안목(E)] [미약한 독 내성(F)]
새벽의 여명 최고의 마법사 홍유리. 그 실체가 이번에야말로 똑똑히 보였다.
다른 스테이터스는 나와 엇비슷하거나 못한 정도였지만, 마력 하나만큼은 비교할 수조차 없다. 비록 대마력이 없다지만, 가지고 있는 스킬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특히 마력과 연관된 대부분의 스킬은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심연 아귀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선홍색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직시한다. 당장 나오라고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
내가 적대하는 건 어디까지나 탕아들이다. 헌터가 아니라 변절자. 홍유리는 여명의 헌터였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와 싸울 이유는 없다.
'애초에 승산이 적어.'
냉정하게 평가해 지금의 나는 A클래스 헌터와 비슷한 수준. 그리고 홍유리는 어지간한 A클래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힘은 스테이터스로는 표시되지 않는 마법의 힘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와 싸울 이유가 없다. 대화로 풀어가는 게 옳다는 건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안 나와? 그럼 이건 죽여도 된다는 거지?"
―그 말에 눈이 돌아갔다. 참으려 했었다. 이현공원. 숲의 던전에서 이미 납득하고 넘어갔던 일이다. 수변공원에서 날 죽이려 했던 것은 헌터로서 옳은 일이었다고.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했던 거라고. 그러니까, 참기로 했었다. 그랬는데…
"―――!"
이가 맞물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비웃듯 입꼬리를 비튼 홍유리의 손을 보았을 때부터. 붉은 마력의 장막에 억눌러진 페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뇌가 멋대로 페리의 죽음을 상상하고 홍유리의 말이 몇 번이나 메아리쳤다. 붉은 마력에 휩싸여 무기력하게 늘어진 페리의 모습을 본 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팽팽해졌다.
참았다. 참았었다. 죽이려 했던 것도 이해했다. 먼저 걸어온 싸움. 마법을 발한 것에 대해서도 이해했다. 그녀는 헌터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넘어가려고, 납득하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뀨우우웃…!"
―마력에 갇힌 페리의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여태까지의 정황. 앞으로의 행보. 탕아들에 대한 생각. 그따위 계산적인 것들이 모조리 날아갔다. 하나 둘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친다. 혈류가 빨라지고, 피가 거꾸로 솟아 혈관을 뜨겁게 달궜다. 그렇게 끓어오른 피가 전신을 돌았을 때, 간신히 늑대를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 그 최후의 한 줄기가 끊어졌다.
"―――!"
***
요정용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은자의 숲 클랜 로드는 요정용이 알파에게 협박당하고 있다고 했지만, 홍유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 얼빠진 년이 이 꼬라지를 봤어야 했는데.'
정말로 협박당했던 거라면 요정용이 알파를 도울 리가 없다. 그랬다면 강태호와 숲의 던전에서 마주쳤을 때 진작 붙잡았을 테니까. 분명 알파와 요정용은 협력관계라고 생각한 홍유리는 요정용부터 잡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
'그래. 맞긴 했는데.'
…너무 적중해버린 모양. 애초에 클랜에서도 생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니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도망치지 못하게끔 붙잡고 대화의 물꼬를 틀 셈이었는데…
'…귀찮게.'
이미 알파의 눈동자에 이성이라곤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슴을 서늘케 하는 이 살기는 놈이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라 말하고 있다.
"야…?"
혹시나 해 말을 걸어봐도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역린(逆鱗). 아무래도 너무, 너무 적중해버린 모양. 단순한 협력관계가 아니라 가족 혹은 그 이상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느샌가 그녀의 붉은 마력을 밀어내고 검은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산한 살기가 퍼지고 귀기가 타오르자― 아주 잠깐, 홍유리의 머릿속에 실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씨발…"
입술을 짓씹은 홍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