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40 vs 진홍 (2)
―늑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온전해진 정신, 괴물의 본성이 물러가고 이성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가장 먼저 늑대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홍유리의 옆, 페리를 가두고 있는 붉은 장막이었다.
"페리."
동료, 친구, 가족.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유대 관계. 서로가 서로를 구했다는 굴레 속에서 탄생한 신뢰. 마모되어가는 마음을 지탱해줬던 서로의 버팀목.
"기다려."
흑린이 말을 걸어왔을 때부터, 아니 홍유리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늑대의 시선은 오로지 페리만을 향해 있었다. 입 다물고 끼어들지 마라. 흑린에게 했던 말은, 페리를 구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다. 어찌 됐건 흑린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대마법은 당장에라도 구현될 것처럼 생생했고, 진홍의 마력을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대1의 상황에서, 마법사라는 페널티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늑대와 홍유리 사이에는 그만한 격차가 있었다.
"죽을 준비는 됐겠지…?!"
5절― 대마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서로를 향하는 흉흉한 살의. 새삼 대화로 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럴 생각이 없어…!'
이성이 돌아왔다고 감정이 가라앉은 건 아니다. 울분이 치솟아 혈류를 가속하는 와중, 늑대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리고 지운다. 부족하면 보충하고 닿지 않는다면 더한다. 뇌가 과부하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끈거렸다. 마력은 전부 사용했다. 다만, 바닥을 긁어 심층의 마력을 억지로 끌어내고 있을 뿐.
"Stâlp de flacără în creștere―!"
홍유리가 읊은 주문이 현실에 드러나기 전, 늑대는 높게 뛰어올랐다. 그 스킬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홍유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봤자 짐승. 비루하고 아둔한 머리에서 쥐어 짜내봤자 한계가 있다고. 붉게 타오르는 진홍의 눈동자가 반짝였을 때, 지하에서부터 화마의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뛰어오른 상태에서 이걸 피할 순 없다. ―그게 세 번째 오산이었다.
"……?!"
솟구쳐오르는 불기둥. 늑대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화산 지대. 용암을 두른 불합리한 괴물들을 상대로 늑대가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를.
'발판을?!'
마력의 발판을 만들어 재차 뛰어오른다. 허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듯한 기동, 움직임이었다. 한 손으로 맺는 수인. 그런데도 순식간에 마법을 만들어냈다. 우주에 붉은 별을 수놓듯, 수많은 불의 마법이 늑대를 향했으나, 귀기를 드러낸 검은 불꽃이 그 모두를 집어삼키고 거세게 타올랐다.
홍유리의 동공이 커진 순간, 그녀의 귓가로 귀곡성이 들려왔다.
오싹―!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서서히 벌어지는 늑대의 입과 송곳니를 본 홍유리의 숨이 거칠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뛰었다.
거대한 턱이 벌어져 지척에서 멈췄다. 붉은 마력의 장막이 늑대를 막아섰기 때문에. 그런데도 늑대는 멈추지 않았다. 귀화로 이글거리는 송곳니가 진홍의 막을 꿰뚫자 홍유리는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튕기듯 밀어냈다.
그렇게 손가락을 튕긴 순간, 불꽃이 튀었다. 마침내 홍유리의 대마법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
그것은 흡사 별의 마지막을 보는 듯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별조차 불사르는 극한의 홍염. 붉은 육망성이 빛을 발할 절체절명의 순간이 찾아오기 전― 늑대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다음 그리고 다음을 잇는 발판을 타고, 지면을 달리듯 허공을 내달렸다.
뻗어 나간 그림자가 하늘을 검게 물들여 늑대의 주변만이 어둑해졌다. 스멀거리는 그림자와 검게 타오르는 불길이 황혼이 저물지 않은 지금, 성급한 밤을 불러왔다.
'놓치지 않아!'
홍유리가 벗어나는 것보다 더욱더 빠르게 그녀를 쫓았다. 한 번 발현된 마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구현된 대마법은 늑대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늑대는 악착같이 달라붙어야만 했다. 마법사가 만들어낸 수많은 마법이 불살라지고 늑대의 눈에 불길이 들어찼다.
감정을 연료로, 심장이 박동했다. 검은 선이 된 늑대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나아가 또 한번 홍유리를 쫓았다. 마법은 완성되었지만, 조준하는 것은 다른 문제. 태동하는 악과 싸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국 맞추지 못한다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뿐.
'게다가…!'
멍청해서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 거리에서. 지금 마법을 사용했다간 자신도 휘말리고 만다. 그걸 서로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늑대는 달리고, 홍유리는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
"꺼져!"
두 사람이 교차한 순간, 진홍의 마력을 휘저어 늑대를 쳐낸 홍유리는 공중에서 비틀거렸다. ―늑대에겐 진작 찾아왔던 정신 고갈이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
'망할.'
남은 마력은 많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알파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으니까. 이제 조준하기만 하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홍유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머릿속이 멍하고 붕 뜨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옆구리를 꿰뚫고 수많은 가시가 틀어박혀 있었다. 그에 마력이 흩어져 또 다시 바닥에 추락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땅을 짚고 일어선 홍유리는 세상이 흔들린다고 느꼈다. 아니, 자신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파는 나를 죽이지 못했다. 냉정하게 판단해 아직 유리한 건 자신이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옆구리의 상처는 쓰라렸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홍유리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
어느샌가, 가두어 놓았던 요정용이 사라졌었으니까.
***
―처음부터 홍유리를 노린 게 아니었다. 페리를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지면에 내려선 늑대는 페리를 가둔 적색 마력을 씹어 삼켰다. 억눌러진 몸이 풀려나자 페리는 힘겨이 고개만 들어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뀨우우…?"
힘 빠진 목소리에, 늑대는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먼저 돌아가 있어."
어린 용은 싫다는 듯 고개 저었지만, 늑대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고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한 걱정으로 가득 찬 눈빛. 그리고 결판을 짓고 말겠다는 결의. 그걸 본 페리가 무언가를 전하듯 울었다.
"……."
늑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마침내 어린 용은 안심하고 환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페리가 풀려났음에도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고 끔찍한 살기가 장내를 뒤덮고 있을 뿐. 붉은 육망성― 당장 발해지기만 해도 이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일 수 있는 겁화가 담긴 대마법. 하지만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쓸 수 없을 테니까.'
쏘지 않는 게 아니라 쏠 수 없는 거다.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면 모르겠지만, 바닥을 디딘 홍유리가 저 마법을 사용했다간 자신 또한 말려들고 만다. 결국 그렇게 된다면 함께 죽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반드시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홍유리의 살의에는 그럴 각오가 담겨있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홍유리는 알파를 죽이는 데 자기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홍유리가 하나 남은 손으로 툭툭 옷을 털었다. 뜯겨나간 손목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리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작게 중얼거린 주문에 손목을 태우고 억지로 지혈했다.
"씨발…"
그 사이, 늑대는 정신 고갈의 여파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어지러웠던 두통이 가라앉고 부족한 마력이 서서히 차올랐다. 그건 홍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보유한 마력에 비하자면, 마력 재생이 회복시키는 양은 미미했지만 숨을 가다듬을 정도는 되었다.
입술을 짓씹던 홍유리는 결국 준비해뒀던 대마법을 거뒀다. 사용할 수 없는 마법에 미련을 가지는 건 어리석음의 극치. 실시간으로 계산을 반복해야만 했던 홍유리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만약 대마법이 아니라 3절 혹은 4절의 마법을 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조그마한 틈을 만들 정도의 마법만 있었더라도 진작 싸움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양자가 끝이 다가온다고 느꼈다. 최후의 순간, 서로의 틈을 노린 늑대와 홍유리의 시선이 교차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늑대였다.
'먼저 움직여야 해.'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강화도와 김포시를 잇는 두 다리는 모두 심연 아귀가 무너뜨렸지만, 그 정도로 다른 헌터들이 오지 못할 거로 생각하긴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아가일과 싸웠을 때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영량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춘 늑대. 그를 찾듯 진홍의 마력이 지면을 더듬었다. 어느샌가 배후에서 뛰쳐나온 늑대를 쫓아 화염의 사슬이 향했다. 타오르는 검은 화염.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다.
"Multiplexare cu lanț de flacără!"
순간, 홍유리가 무언가를 끌어올리는 흉내를 내자 거미줄처럼 엉킨 붉은 실타래 아니, 그 하나하나가 진홍의 마력을 담은 사슬이었다. 셀 수 없는 사슬들이 엮이고 엮여 그물을 만들어냈다.
'……!'
그 하나하나가 2절의 마법. 이런 숫자라면 귀화와 돌풍으로도 전부 태우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선홍의 마력을 띄던 사슬과 달리 진심을 드러낸 진홍의 사슬은 격이 달랐다. 한둘이라면 피했을 테지만, 대지를 가득 메운 이 숫자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결국 들러붙은 붉은 사슬은 늑대를 좀먹고 으스러뜨릴 것처럼 압박했다. 검은 불꽃이 그것들을 서서히 태우고는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사슬이 조여들고 있었다.
"끝이야."
선고하는 홍유리의 말. ―흑린이 말했던 대로다. 그녀와 늑대 사이엔 넘어설 수 없는 격차가 있다. 제아무리 예측하고 뛰어넘더라도 늑대가 그녀에게 승리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보라는 듯, 흑린이 비웃었다. 지금이라도 힘을 빌리라고 그것이 속삭여왔다.
그에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홍유리는 이제 알파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사슬에 둘러싸여 이미 한 줌의 마력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당장에라도 정신 고갈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오히려 왜 아직 쓰러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 지긋지긋한 새끼."
홍유리는 사라진 손목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이미 이 싸움이 끝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늑대는 달랐다.
'끝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늑대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바닥난 자신의 마력이 아니라 홍유리의 마력을. 탈식(奪喰)― 칠흑의 귀화에 진홍의 마력이 끼어들었다.
바람은 더 거세게, 마력은 더 붉게, 불꽃은 더 검게. 모든 것을 토해낸 늑대가 최후의 순간,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를 속박하고 억눌렀던 홍염의 사슬이 모두 끊어지자 홍유리는 눈을 부릅떴다. 굴레를 벗어던진 늑대가 달려든다. 그에 홍유리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몰아치는 진홍의 마력이 폭풍이 되어 당장에라도 늑대를 집어삼킬 듯 쇄도했고.
―다음 순간, 홍유리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선혈을 토한 홍유리는 자신의 가슴 위에 얹힌 늑대의 다리를 보았다. 흉골이 으스러져 숨을 쉬는 게 힘들다. 부러진 늑골이 폐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다량의 출혈에 뇌가 부웅 뜬 기분이었다. 홍유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언제?'
모르겠다. 그러다가 홍유리는 자신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걸 보았다.
"……."
그림자. 여태 허공을 부유하던 홍유리에게 자신의 그림자는 위협적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면에 내려선 상태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홍유리는 독기를 담아 늑대를 노려보았다.
허나, 진홍의 눈동자는 마력을 잃고 본래의 선홍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늑대의 망막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본 홍유리는 허탈이 실소했다.
'내가, 졌어?'
―지고 말았다. 그럴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자신의 패배를 곱씹으며, 자존심으로 똘똘 뭉쳤던 그녀의 에고가 조금씩 껍질을 벗어던져갔다.
"……!"
독기를 품은 선홍의 눈동자가 늑대를 노려보았다. 어서 죽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그러나― 시선이 교차한 순간, 홍유리는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귀기와 살기가 파고들어 정신 고갈의 영향으로 나약해진 그녀의 마음을 좀먹어가고 있단 증거였다.
"―――."
낮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홍유리는 죽기 싫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살고 싶다고 떠올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잘, 살…"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 각오도 있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다가왔을 때, 자신은 오들오들 떨며 빌고 있었다.
"잘, 살려…"
최후의 자존심에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러자, 마치 자신을 비웃듯 고작 몇 시간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헌터가 쫄아서 어쩌려고?'
'쫄지 마. 이 등신아.'
순간, 여태 그녀를 지탱해오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친 호흡으로 홍유리는 늑대의 다리, 검은 털을 쥐었다.
"잘못, 살려…!"
늑대의 눈동자에 비친, 엉엉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홍유리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말았다. 살고 싶다는 집념과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수치가 공존하는 모순된 상황에서, 마침내 그녀의 에고가 산산이 부서졌다.
"잘못, 했어요…! 살려, 주세요!"
굴복의 말― 차마 자신이 뱉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있지도 않은 손으로 눈물을 닦고 울고불고 소리친다. 욕을 하고 울부짖고 빌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홍유리의 머릿속에 전기가 흘렀다. 그러자, 그녀의 의식이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뚝, 끊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
[위압(E) Lv.7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위압(E) Lv.7 → 위압(E) Lv.8]
'정신 고갈…'
마력은 아직 남아있을 텐데. 쓰러진 홍유리를 본 나는 감정을 토해내듯 깊은 숨을 뱉었다. ―죽일 생각은 없다. 아니, 정확히는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게 됐다.
'뀨우우웃…!'
환계로 돌아가기 직전, 페리의 마지막 말 때문에. 비록 언어로 들린 건 아니었지만, 마치 주박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페리.'
페리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홍유리의 목숨을 거두지 못했다.
'…….'
홍유리를 죽이게 되면 여태 해왔던 일이 모두 꼬여버린다― 같은 계산적인 게 아니다. 그냥, 페리 때문에. 그녀를 죽임으로써 내가 마모되는 것은 아닐까. 변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며 걱정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여태껏 제법 많은 사람을 죽여왔다. 살인. 하지만 살인이라고 해도 여태 죽인 모든 이들은 악인이요, 변절자들, 인류를 좀먹는 쓰레기들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래야만 했던 일이다.
하지만 홍유리는 그렇지 않다. 그녀 나름의 정의와 신념과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게 일그러지고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죽이려고 했는데.'
이미 의식을 잃은 홍유리를 보자니, 그럴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번엔 페리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빌어서도 아니다. 좀 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냥, 김이 빠졌다. ―앳된 소녀가 엉망이 된 채로 쓰러진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그냥, 다 허탈해졌다.
"……."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잠깐 고개를 떨궈 코를 킁킁거린 늑대가 시큼한 냄새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죽이지 않을 거라면 홍유리에게 마지막 친절 정도는 베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바닷물을 퍼 올려 그녀를 흠뻑 적셨다.
[극기(克己) 10 → 15]
쓰러진 홍유리를 홀로 내버려 둔 채 늑대는 서서히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