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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86화 (86/407)

〈 86화 〉 #42 Inverted Skyscraper

"드디어…"

몸이 힘든 건 아니었지만, 정신이 피폐해진다. 초고층 빌딩. 무려 120층을 넘게 오르고서야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위일세."

아득한 최상층에서 옥상으로 오르자 세찬 바람이 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전경. 에메랄드빛 바다가 상당히 가까워졌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찔함이 밀려왔다. 고소공포증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길 것 같다.

"뀨우웃!"

그런 나와는 반대로 페리는 높은 곳에서 맞는 바람이 기분 좋다는 듯 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500m가 넘는 상공. 로테월드 타워의 꼭대기였으니까. 그 사이, 백록은 마력으로 발판을 생성해 계단을 만들어냈다. 이어진 계단의 끝― 옥상에서 30m 정도 더 높은 곳에 마치 아지랑이처럼 공간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저건?"

"저게 바로 던전의 입구일세."

땅이 아니라 공중. 거의 600m 상공에 출현한 던전이라는 뜻. 하기야 바닷속에서도 던전이 나타나는데 공중이라고 안 될 것 있겠냐마는.

'…로테월드 타워가 없었으면 오르기 힘들었겠는데.'

600m를 오르기 전에 마력이 다했을 거다. 그렇게 발판을 밟고 오르는 중에 백록이 담담히 말했다.

"조심하게."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던전에서 일어날 일은 예측할 수 없고 화산지대처럼 예상치 못한 난적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경계의 틈을 넘었을 때―

"……?"

―갑작스레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놀라 발판을 만들어 추락을 막았다.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이 던전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바닥이?'

바닥이 없다. 즉, 발 디딜 곳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있기는 했다.

"까아아악―!"

들려오는 소리. 사방팔방, 한 마리의 들짐승도 없이 오로지 창공을 활보하는 날짐승들로 가득하다. 그도 그럴것이 바닥과 천장이 거꾸로 뒤집어져 있었으니까. 바닥이 있어야 할 곳엔 마치 거대한 싱크홀처럼 끝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있었고, 천장에는 도시의 전경이 거꾸로 붙어있었다.

뒤집힌 마천루― 거꾸로 된 도시. 그게 바로 이 던전의 정체였다.

애초에 날개가 없다면 생존이 불가한 곳이라는 뜻. 그렇게 던전을 둘러보고 있을 때, 다가온 백록이 안부를 물었다.

"괜찮은가?"

"이런 건 미리 말해."

"조심하라고 했잖은가?"

들어오기 직전, 분명 "조심하게"라고 말하기는 했었다. …당연히 던전이니까 방심하지 말라는 뜻인 줄로 알았는데. 한숨이 나오는 나와는 달리 페리는 기분 좋게 울었다. 우리 중 유일하게 날개 달린 페리에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던전이니까.

'…한 1년 뒤에 왔더라면.'

페리를 타고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리는 내 빤한 시선을 읽기라도 한 건지 황급히 백록의 머리 위로 날갯짓했다.

'어차피 지금은 무리인데.'

픽 웃으며 마력의 소모량을 확인했다. 대략 1시간 정도는 발판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싸우게 된다면 그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 터. 가능한 한 빨리 마천루까지 오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거의 500m는 되는 것 같은데.'

가장 높은 건물― 로테월드 타워 옥상까지도 그 정도는 올라야 한다. 이를 악물고 발판을 만들려는 무렵, 우릴 발견했는지 방향을 트는 새 한 마리.

'…망할.'

가능하면 마천루에 오를 때까지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놈은 맹렬히 비행하며 가일층 속도를 높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시력을 집중했을 때,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커다란 매를 볼 수 있었다.

[천둥매]

[체장 1.16m] [체고 38.6cm] [체중 29.8kg]

[힘 211] [민첩 524] [체력 447] [마력 251]

[보유 스킬]

[뛰어난 가속(C)]

524의 민첩. 거기에 더해 뛰어난 가속까지. 그렇게 점점 더 빨라지더니, 마침내 귀를 시끄럽게 하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

순간, 늑대의 눈빛이 달라졌다. 여전히 들리는 굉음은 공기의 벽을 뚫고 음속을 돌파했다는 뜻. 즉, 소닉 붐(Sonic Boom)이다. 과연 천둥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상당하군.'

가만히 보고 있던 백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닉 붐만이 아니라, 그 무시무시한 속도에 수증기가 응축해 천둥매의 몸에 들러붙어 마치 구름을 두른 듯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날개가 젖어 비행하기 어려울 테고, 그 이전에 소닉 붐의 충격을 감당치 못해 죽고 말겠지만, 놈이 가진 마력과 높은 체력이 그 여파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다.

'만약 충돌한다면.'

설령 늑대라 한들 무사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백록은 걱정하지 않고 그저 태연히 구경했다. 추락에 가까운 직선적인 하강. 백록의 눈에는 천둥매의 비행 동선이 뻔히 읽히고 있었다. 자신이 그러할진대 늑대에겐 오죽하겠는가? 곧 늑대로부터 쏘아진 무언가가 순식간에 놈이 두른 구름을 뚫었다.

'가시.'

마력을 집중해 시력을 높이자, 발출한 가시가 천둥매를 관통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허공에 붉은 피가 흩뿌려지고, 미리 펼쳐둔 그림자가 놈을 동강 내 저 낭떠러지로 추락시켰다. 그에, 늑대는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아."

천둥매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바닥이 없는 곳임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결국 추락해 점이 되어가더니, 끝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늑대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경험치."

까다로운 페널티가 하나 더 추가된 셈. 바닥이 없는 이곳에선 포식하기 위해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늑대는 갑갑하다는 듯 감정이 담긴 한숨을 흘렸다.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이 소모되고 있다. 무엇보다 마천루에 오르는 게 급선무. 늑대와 백록은 번갈아 발판을 만들어 허공을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깨어나기는 했는데."

"거, 조금 문제가 생겨서 말이우?"

강태호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뭐, 아무튼 유리는 힘들 것 같고 그냥 우리끼리 갑시다."

"미쳤냐?"

돌아오는 반문에 강태호는 머리를 긁었다. 솔직히 말해 네버랜드의 몬스터가 아무리 강해봤자 보스가 아닌 이상, 최상위 헌터들에겐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사실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봉쇄할 뿐이라면 1, 2구획 정도만 신경 쓰면 되니 홍유리의 불참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아예 가보지도 못한 5구획 얘기는 넘어가더라도. 3구획은? 또 4구획은? 안 그래도 스퀘어도 불참하는데. 태호야. 자살은 혼자 해라."

"……."

"다른 놈들도 너보고 손가락질할 거다. 물론 지금 내려도 욕은 먹겠지만, 속으로는 다들 안심할걸?"

다른 누구도 아닌 강태호였기에 강행된 일이다. 하지만, 그를 믿고 준비한 백군태와 신전의 주교를 비롯해 참가하는 전원이 불안을 품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타 클랜이 경험을 쌓게 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더 옳은 선택이었다. 그에 백군태는 진지한 눈빛으로 강태호를 마주했다.

"네가 내 말뜻을 모를 놈은 아닐 거다. 만약 여기서도 고집 피울 거라면."

"후…"

아예 선을 긋는 말에 강태호는 입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뜨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백군태가 하는 말은 잘 알고 있다. 상황이 변했는데 계속 고집부리는 건 그냥 철없는 애새끼가 징징대는 것일 뿐이라는 것도.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고 한번 찔러봤을 뿐.

"거, 알겠수다."

그래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강태호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의 목표가 공략에서 봉쇄로 변한 순간― 물론 그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태 네버랜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클랜들이 뒤늦게 참가를 표명하는 계기가 된 순간이기도 했다.

***

달려드는 놈을 그림자가 찢고, 뒤늦게 촉수가 받았다. 아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안도도 잠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발판이 부서지려 하자 좀 더 마력을 사용해야 했다.

[코아틀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타이밍이 좋아.'

화산지대에서 발판을 만드는 법을 익혔고, 홍유리와의 싸움에서 숙달했다. 쉽지는 않지만 행보하는 데 무리가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이 던전에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속수무책이었을 텐데.

"익숙해졌군."

백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백록처럼 먼 거리에 발판을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어쩌면 생각보다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때. 이변은 마천루에서 고작 100m 밖에 남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종종 덤벼드는 몬스터는 있었지만 하나같이 만만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창공을 누비는 것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용?"

수십 미터는 되는 기다란 몸. 마치 신령처럼 구름을 두르고 유유히 창공을 노니는 모습. 착각할 리 없는 용의 외형― 아니, 아니다. 무척이나 흡사했지만, 결정적으로 놈에겐 다리가 없고 뿔이 없었다.

그래. 용이라기보다는.

"용이 되지 못한 것."

[비천망(飛天蟒)]

[체장 35.4M] [체고 2.52M] [체중 38T]

[힘 511] [민첩 430] [체력 479] [마력 511]

[보유 스킬]

[용린(C)] [가속(D)] [고속 비행(D)] [질긴 피부(E)]

창공을 누비는 이무기. 분명, 놈이 이 던전의 보스일 거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어스 서펜트와 비교하면 다소 부족했지만,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여긴 공중이야.'

지상에서 싸우는 것과 공중에서 싸우는 것의 난도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만약에 놈을 쓰러뜨렸다 해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먹을 수 있을까? 나와 백록이 함께 발판을 만들더라도 30T이 넘어가는 놈을 지탱하는 건 1초도 불가능하다 장담할 수 있었다. 아연히 보고 있자니 놈도 우릴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백록!"

끄덕인 백록이 수십이나 되는 발판을 만들었다. 발판마다 수 미터씩 떨어져 있지만, 전혀 문제 없는 거리다. 계속해 뛰어올랐지만, 결국 따돌리지 못해 놈의 커다란 아가리가 들이밀어졌고. 그 순간, 페리의 점멸이 기지를 발했다.

"뀨우우웃…!"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다시 발판을 밟고 공중으로. 뒤쫓아 온 놈의 아가리가 들이밀어지기 전, 또 한 번 페리가 점멸을 사용했다. 10M. 허공으로 더 높게 오른 순간, 촉수로 백록을 집어던지는 데 성공했다.

'됐다.'

백록은 놀라는가 싶더니, 금세 의도를 파악하고 마천루 건물의 끝을 씹어 물었다. 꽉 다물린 백록의 턱이 부들거리며 우릴 지탱했고, 탄력을 발해 최대한 빠르게 마천루에 오를 수 있었다.

"―――!"

아직 따라오는 비천망. 놈이 우릴 씹어삼키기 전에, 재빨리 쏘아낸 가시가 안구에 틀어박혔다.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촉수로 옥상을 부수고 들어가 백록을 끌어당겼다.

"아슬아슬했군."

백록이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었다. 비천망은 기억하겠다는 듯, 한참이나 우리를 노려봤지만 차마 건물의 안까지 따라오진 않았다. 그에 나는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왔으면 했는데…'

공중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사냥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게 못내 아쉬웠다. ―아무튼, 우리는 마침내 마천루의 끝자락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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