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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87화 (87/407)

〈 87화 〉 #42 Inverted Skyscraper (2)

―마천루 건물 내부.

던전 밖에서와는 달리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희미했다. 관리되지 않아 녹슬고 더럽혀져 있는 모습.

'환계는 거울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사람들의 손길이 닿는 대로 건물이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던전은 달랐다. 제아무리 날개가 달려있다 해도 평생 날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연히 쉬어야 했고, 쉼터라고는 거꾸로 뒤집힌 건물들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 온갖 배설물과 치밀어오르는 악취에 후각을 비활성화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건물이 추락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거꾸로 매달린 마천루라면 당연히 뒤집힌 무게 중심 때문에 무너져야 정상일 텐데.

'의문이 드는 게 한둘은 아니지만.'

애초에 내 짧은 식견으로 밝혀내는 건 무리이리라. 던전이라는 것 자체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 가득하니까. 백록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작게 끄덕였다. 여기까지 오르느라 상당한 마력을 소모했으니 회복되기 전까지 밖으로 나가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나가는 즉시 비천망이 습격해 오리라. 아직 놈이 우릴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올라가자."

배부른 소리겠지만, 로테타워를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고스란히 120층을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고역으로 다가온다. 잠깐 올려다봤다가, 몬스터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빛냈다.

'이건.'

백록과 페리에게 따라오지 말라 고개를 젓고, 은신을 사용해 계단을 올랐다. 10층 가까이 올랐을 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몬스터를 볼 수 있었다. 내 이전 진화와도 비슷한 모습.

비록 늑대와 새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딱 그 정도. 검은 털빛과 두개골이 드러난 모습이 무척 흡사했다.

사각지대 연구소에서 보았던 스컬 울프처럼 놈도 그리 강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아직 잠들어있는 놈의 목을 단숨에 절단해 먹어 치웠다.

[스컬 버드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심지어 이름도 판박이였다. 은신 그리고 기습. 마천루를 오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몬스터를 포식해갔다. 수준은 고만고만했고,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이따금 잠에서 깨어 덤벼드는 예민한 녀석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놈들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호. 그립군."

백록의 짧은 감탄과 함께 달려들던 놈이 바닥에 추락해 몸부림쳤다.

"―――!"

일으킨 거센 바람이 날개 피막을 찢어발겨 더 이상 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돌풍의 여파로 창문이 깨져나가고 바람에 휩싸인 유리 조각이 동굴 포식자의 몸 곳곳을 파고든다. 머잖아 놈이 바닥에 몸을 뉘었고.

[동굴 포식자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20 → Lv.21]

"……!"

환계의 던전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보스… 그런 감상에 빠지기도 전에 깨진 창문 너머로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포효가 울렸다. 두말할 것 없이.

'비천망.'

놈의 눈동자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마주했다. 짙은 살의와 약간의 불안이 담긴 눈빛. 짐승의 감일까? 놈도 본능적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간 당할 거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더니 우리가 바깥으로 나올 생각이 없다고 느낀 건지 포기하고 멀어져갔다.

'건물을 부술 거로 생각했는데…'

그러지는 않은 모양. 아무튼 놈이 사라지는 동안 재빨리 층계를 올라 1층에 다다랐을 때, 쓸린 자국과 깨진 창문에서 놈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들어오지 않았던 거구나.'

로테월드 타워. 이 거꾸로 된 도시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 바로 이 장소야말로 던전의 주인인 자신의 보금자리로 합당하다 여긴 모양. 그게 우리가 습격당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였다.

'…….'

어느새 멀어진 비천망. 창공을 누비는 날짐승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감지로 느껴지는 기척은 지상에도 있었다.

'잠들어 있어.'

몬스터라고 해도 당연 휴식은 필요하다. 마천루 안은 깔끔히 청소했지만, 아직 남은 건물들은 한참이나 있다.

'…혼자 가야겠는데.'

슬쩍 뒤돌아보자, 백록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야 마천루를 오르는 동안 레벨이 오른 덕분에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백록은 아니었다. 슬쩍 돌아보자 걱정 말라는 듯 끄덕이는 백록. 곧바로 페리를 맡기고, 발판을 만들어 뛰어올랐다.

그리고 길게 심호흡하며 촉수를 뻗어냈다. 기다란 촉수는 건물의 기둥을 붙잡아 휘감았고, 촉수에 돋아난 가시가 빠지지 않겠다는 듯, 촉수를 단단히 고정했다.

'이거라면.'

불안은 있었지만, 촉수를 당기자 이어진 건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외벽을 밟아 균형을 잡았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망할…'

애써 아래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기척을 쫓아 건물 사이를 누볐다.

***

백소율이 여명에 체류한 지도 어느새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언제까지 보호관찰의 명목으로 그녀를 붙잡아둘 수는 없는 법. 불만을 품을 법도 하건만, 백소율은 되려 반기는 눈치였다. 비록 클랜 밖으로 나가는 게 허락되진 않았지만, 그 시간만큼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

'힘들기는 하지만.'

홍유리가 시키는 건 하나같이 무리라고 생각될 만한 일들이었지만, 막상 하게 되면 기진맥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여태 제법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맹탕이었다. 상념에 빠진 그녀를 깨우듯 문이 열리고 이은하가 들어왔다.

"어? 소율아. 너 또 마력이…?"

요즘 들어 급증하는 백소율의 마력에 놀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그녀. 그에 백소율은 쓰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은하에게 칭찬을 듣는 건 묘한 기분이 든다. 여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녀와 비교하면 괜히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그 재능이 부럽기도 하고 살짝 질투가 나기도 했었다.

―얼마 전까지는.

"고마워요. 요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어제…"

"응. 맞아. 어제 부팀장님 병문안 갔었는데~"

클랜을 나갈 수 없는 그녀 대신 이은하가 홍유리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알고 있다. 뉴스로까지 보도되는 데 모를 수가 없다.

"……."

참 복잡한 기분이었다. 임시 스승인 홍유리와 자신을 구해준 늑대가 맞붙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가슴이 철렁였고, 홍유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머릿속이 새하얘졌을 정도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홍유리가 다쳤다는 말보다 늑대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던…

"……."

백소율은 품 안에 손을 넣고 긴 숨을 들이켰다.

더 이상 밤이 찾아오는 게 두렵지 않았다. 늑대에게 구원받은 이후, 악몽을 꾸지도 않는다. 그리도 싫었던 밤인데. ―백소율은 어젯밤 꾸었던 '몽환적인' 꿈을 떠올리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느새, 매일 같이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구나 싶어서.

***

그렇게, 나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천둥매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24 → Lv.25]

"정말 질리지도 않고 먹어대는군. 자네를 보고 있으면 나중엔 나까지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네."

실없는 농담에 실소하며 감지를 펼쳤을 때, 우릴 제외하고 느껴지는 기척은 단 하나뿐이었다.

'드디어.'

지난 며칠. 비천망은 때때로 우릴 습격했으나, 로테타워 안으로 숨어들 때면 분통을 터뜨리고 몸을 돌렸었다. 그렇게 놈을 피해가며 노력한 나흘― 그 시간이 마치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이젠.'

모든 준비가 끝나 놈을 사냥할 일만 남았다. 제아무리 몬스터라 한들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할 수는 없는 법. 창공으로 올라갔다간 비천망의 표적이 될 테니 날짐승들이 지쳐 둥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나흘이란 시간이 걸린 이유였다. 페리는 크게 하품하며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했나?"

"아직 어리니까."

백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먹고 많이 자랄 시기. 용벌레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정용으로 우화한 페리는 아직 3개월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뭔가?"

분명 페리는 내 말을 알아듣는 듯한데 나는 아니라는 점. 녀석의 행동과 제스쳐에서 이제 다소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됐지만, 말이 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환수끼리 하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백록은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환수어? 그런 건 없네."

"넌 페리랑 말이 통하잖아?"

요정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백록은 페리와 말이 통하는 듯했었는데. 내 의문에 백록은 고개를 저었다.

"말이 통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걸세. 우리 환수들은 그 방면에 능통해 서로의 감정을 언어처럼 느낄 뿐일세."

"…느낀다고?"

"이건 잘 설명하기 어렵군. 그냥 내 눈을 보게."

그에 백록이 시선을 맞춰왔다. 흰 사슴의 오목하고 깊은 눈이 침잠하듯 내려앉았다. 백록 망막에 비치는 거라곤 나 하나뿐. 멀뚱히 시선을 교환하고 있으니 백록이 다시 물었다.

"무언가 느껴지는가?"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별달리 느껴지는 게 없다. 차라리 무언가 의도를 파악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에 백록은 짧은 숨을 뱉고 아쉽다는 듯 눈을 감았다.

"…내 설명이 부족했군. 눈에 담긴 감정만을 읽으라는 게 아니네. 여태 그런 경험이 없는가? 시선을 교차했을 때, 상대의 눈에서 의도를 읽었던 경험이."

그에 곰곰이 생각하며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자 비슷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투.'

목숨을 걸 때면 상대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짙은 살의와 적의. 언어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렴풋이 의도와 다음 행동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나흘 전, 비천망의 눈이 그랬었다. 거기서 느낀 적의와 두려움― 그래서 놈이 로테타워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거라 알 수 있었다. 이같은 경험을 말해주자 백록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네."

"……."

"자네가 걸어온 삶은 투쟁이니 유독 그런 쪽으로 발달한 모양이로군."

어쩐지 아쉽다는 듯한 백록의 말에 짧은 숨을 뱉었다. 페리와 말이 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환수들끼리 가능한 거라니.

'아쉬운데.'

그렇게 마침 대화가 끝났을 때, 우릴 제외한 유일한 기척― 비천망이 고도를 높여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네버랜드에 앞선 마지막 준비. 이젠, 그 결착을 지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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