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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90화 (90/407)

〈 90화 〉 #44 Never Land

한참을 조잘거리던 요정들이 우화하는 알을 들고 멀어진 뒤에야 소란이 가라앉고 평화가 찾아왔다. 페어리 드래곤의 탄생이 얼마나 멸망 확률을 낮출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천망의 고기 30kg 정도를 여분으로 건네주었다.

'페어리 드래곤이 계속 늘어난다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비록 마천루를 무너뜨리긴 했지만, 휘말린 환수나 영물도 없고 어차피 곧 복구된다고 하니 밉보이진 않았을 거다.

"…고맙네."

한참을 잔소리하던 백록이 별안간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환계를 위해 이렇게나 힘써 주는데 염치없게도 내가 자네를 도울 방법이 없군."

가끔 생각하는 건데 백록의 사고회로에는 환계가 항상 끼어 있었다. 환수라 그런지 다소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환계에 대한 애정이 남다름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래.'

환계를 도와줬는데 내게 갚을 방법이 없다는 말. 마치 환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듯한 그 태도에선 강한 애착이 느껴진다. 거기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걸 생각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먼저 공개된 루트부터 확인했다.

[진화 루트]

[비람의 길(飛嵐)] - 진화 가능

[겁화의 길(劫火)] - 조건 불충족

[공허의 길(空虛)] - 조건 불충족

'세 가지라.'

래서 슬라임에서 진화했던 이후로는 계속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는데, 이번엔 세 가지. 심지어 곧바로 진화할 수 있는 루트도 있다.

'비람의 길…?'

[비람의 길 : 폭풍을 두르고 창공을 활보하는 마랑으로 진화한다]

통찰로 확인한 설명. 폭풍을 두르고 창공을 활보하는 마랑― 비(飛)라는 것에 떠오르는 것은 당연 비천망이었다. 어쩌면 녀석을 포식했기에 이 길의 가능성이 열린 걸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 마음이 묘한 것이 당장 열려있는 길은 다소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에 별다른 장점을 느끼지 못하겠다.

'그림자와 시너지가 맞지 않으니까.'

비행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공중에선 그림자를 활용할 방법이 줄어든다. 그걸 감안하고 비람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을까? 아마 폭풍은 십중팔구 돌풍과 관련이 있는 것일 테지만…

'끌리지는 않아.'

돌풍의 활용도는 분명 높고 전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활용도가 높고 언젠가는 다음 스킬로 진화할 텐데.

'고려는 하겠지만…'

일단 다른 진화들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겁화의 길 : 굴복시키는 불의 마랑으로 진화한다]

'굴복(劫) 그리고 불(火)이라면…'

십중팔구 위압과 귀화를 말하는 것일 터. 그제야, 이번 진화의 갈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최초의 진화 루트는.'

늑대 인간과 마랑이었다. 둘 사이에서 어디로 나아갈지를 정해야 했고, 결국 마랑이 되고 말았다. 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종족. 길이라는 것은 계속해 나아가는 것. 마랑의 길을 걸은 이상, 아마 앞으로도 마랑의 길에서 벗어날 리는 없지 않을까.

'두 번째 길은…'

여왕이 직접 보여주었던 루트.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다루는 음영랑과, 산과 독으로 이루어진 부정형의 모독자. ―그 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형상 혹은 본질이었다.

'그리고 이번 진화는.'

특화. 가진 장점을 더욱 부각하는 것. 순서대로 종족, 형상, 특화였다. 앞으로 열릴 진화의 길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가 아직 루트가 하나 더 남아있음을 떠올렸다.

[공허의 길 :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마랑으로 진화한다]

공허(空虛)란 그 어떤 것도 없이 비어있는 상태를 뜻한다. 즉, 먹어 치움으로써 공허를 만든다는 뜻이리라. 마지막 공허의 길은 십중팔구 탈식과 관련된 진화일 거라 느껴졌다.

'비람. 겁화. 공허.'

일단 진화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맘 같아선 당장 여왕을 만나고 진화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Lv.30 달성 조건 : 네버랜드 공략대의 괴멸을 막을 것]

―그럴 시간이 없게 됐으니까.

***

"시발. 진짜…"

더듬더듬 문이 열리더니 별안간 홍유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녀의 수련실을 대실하고 있던 백소율이 반색하며 홍유리를 반겼다.

"선생님! 이젠 괜찮으세요?"

"누구? …아."

홍유리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한 선글라스같지만, 잘 보면 마치 유성 매직을 몇 겹이나 칠해놓은 듯 과하게 어둡다. 지금 반응을 보면 앞도 보이지 않는 모양인데…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저리 가. 그 말 한 번만 더 들었다간 진짜 노이로제 걸릴 것 같거든?"

걱정해주는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 말에 귀 딱지에 눌어붙을 것 같아 홍유리가 한숨을 쉬었다.

"너 혼자야? 다른 사람들은?"

"다른 분들은 대부분 네버랜드로…"

아. 그렇겠지. 잠깐. 그럼 지금 클랜에 남아있는 사람은?

'죄다 쭉정이잖아.'

B클래스 이상은 거의 다 데려갔을 터.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미치지 않고서야 여명이 습격받을 일이 있겠냐마는.

'와서 망정이지.'

"너 혼자 어디까지 하고 있었어?"

"3절 영창 수식이랑 말씀하셨던 체력 단련이랑…"

나름 빠른 속도기는 하지만, 아카데미가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진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다. 이왕 가르치기로 한 거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가르친 연놈들이 똥오줌도 못 가리는 건 자존심이 용납지 않으니까.

'어디 한 번.'

확인해볼 겸, 습관적으로 딱밤을 날리려던 홍유리는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없는 쪽이었다. 홍유리의 사라진 손목을 본 백소율이 놀라 입을 가렸다. 상처를 입었다고는 들었지만, 손목이 잘렸단 건 듣지 못했으니까.

"선생님! 손이…?!"

"시끄러. 신경 쓰지 마."

입술을 씹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홍유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라진 손목을 보았더니, 떠오르고 말아서.

"…됐으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잠깐 밖으로 나간 홍유리를 보던 백소율이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 걸까? 그러다가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떨고 있는 것 같아서.

―밖으로 나온 홍유리는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심호흡하며 떨림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

이를 악문 그녀가 벽에 등을 기댔을 때는,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좆같네."

눈시울이 붉어져도, 무릎이 떨려도, 울지 않고 굽히지 않는 게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시이발…"

…그래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

백록의 도움을 받아 로테월드 타워에서 용인시 네버랜드까지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조심하게."

언제나의 당부와 함께 다소 떨어진 곳에서 현계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감지를 펼쳤다.

'문제는 이건데.'

감지로 포착한 수많은 기척에 한숨을 쉬었다. A클래스라 여겨지는 이들만 셋. 그 외에도 B클래스 이상의 헌터들이 포진해 있다. 공략조도 아닌 던전을 틀어막는 봉쇄조에 불과하건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네버랜드. 최악의 던전이자 여태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선 A클래스 헌터가 봉쇄조로 남을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들어가느냐…'

봉쇄조가 여기 남았다는 건 공략대는 이미 던전에 진입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따라서, 그들의 괴멸을 막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던전에 진입해야 하고 필연적으로 이들을 뚫어야 한다. 그동안 제법 성장했다지만, A클래스 셋이 포함된 공략조를 상대로 정면돌파를 생각하는 건 미친 짓이다.

'은신을 사용해봤자.'

저 많은 헌터가 던전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데 버젓이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페리까지 있으니 100% 들키고 말 거다.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어.'

확신도 없이 경계 너머에서 몬스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은 없다. 그나마 다행한 점은 일대의 사람들이 다 대피했다는 것.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

소란을 일으켜야 한다. 가능한 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대로변에 일으킨 불꽃이 서서히 크기를 불렸다. 거기에 위압을 발하자 헌터들이 웅성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 명이라도 좋은데.'

[감지(D)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감지(D) Lv.9 → 감지(D) Lv.10]

[감지(D)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감지(D) Lv.10 → 탐지(C) Lv.1]

10레벨에 도달해 감지가 탐지로 변했을 때, 먼저 은신을 사용했다. 문제는 B클래스 이하가 아니라 A클래스 헌터들. 그들이 몇이나 움직일지가 관건이었고―

'됐다…!'

두 명의 A클래스 헌터가 움직였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셋 중 둘이 움직였다면 경계를 지키고 있는 A클래스는 딱 한 명. 둘도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곧바로 내달려 대로변으로 접근하는 A클래스들 경계로 접근했고―

"……!"

―내 접근을 느낀 헌터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돌린 순간,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대부분이 B클래스 이상인데 그 숫자가 스물은 훨씬 넘는 것 같다. 거기에 더해 A클래스 헌터까지 있으니 방심은 금물. 마력까지 사용해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봉쇄조의 그 많은 인원이 맞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귀화와 돌풍을 함께 일으킨다면 떨쳐내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그랬다간 본말전도다. 공략대의 괴멸을 막으러왔는데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건 어불성설. 그래서 돌풍을 최대한으로 일으키고 그림자로 하여금 헌터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헌터들이 마력을 끌어올려 저항하기 전에 순식간에 지나쳤고.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다른 이들은 제쳤지만, 정면에 선 A클래스 헌터를 뚫는 게 문제였다. 그의 주먹에는 어느새 웅혼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저걸 맞으면.'

일격필살의 철권. 분명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헌터는 발바닥 아래에도 마력을 담더니 폭발 시켜 단번에 쇄도해왔고―

"뀨우우!"

―페리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함께 어쩐지 낯익은 A클래스 헌터를 지나쳤다. 그렇게 던전의 경계 앞까지 도착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경계 너머로 뛰어들었다.

***

일렁이는 그림자. 등골에 돋은 소름이 감히 대적해선 안 된다고 경고해왔다. 분명 지금의 소란을 일으킨 것은 저 늑대이리라.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진홍을 쓰러뜨렸다는 늑대이리라. 그 스산한 붉은 안광과 마주친 이들은 얼어붙지 않을 수 없었다.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늑대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헌터의 외침이 그들을 일깨웠다. 그림자를 퍼뜨린 늑대의 발걸음을 막으려 했으나, 거센 돌풍에 가로막혀 쉽게 다가갈 수 없다. 순식간에 헌터들을 제친 늑대는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박차를 가해 내달렸다.

'던전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어.'

착각할 여지 없이 늑대는 오로지 일직선으로 던전의 경계를 향해 달리고 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헌터는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철권을 말아진 헌터는 발아래 마력을 모아 단숨에 터뜨렸다.

만약 놈이 네버랜드로 들어갔다가 어떤 이변이 생길지 모른다. 최대한의 힘으로 주먹을 뻗은 순간, 시야에서 늑대가 사라졌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헌터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알파가 부팀장님을 이겼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였다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 느끼지도 못했는데 대체 어떻게…! 뒤늦게 그가 몸을 돌렸을 땐, 이미 늑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망할."

입술을 짓씹으며 헌터, 우택이 골머리를 싸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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