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44 Never Land (3)
"뀨우우."
지친 페리가 힘 빠진 듯 울었다. 잠이 오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네버랜드에서 편히 잠들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쓰다듬어주며 녀석이 잠깐이라도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미로를 돌파하는 건 어렵진 않아.'
냄새를 쫓아 한참을 다녔지만, 아직 끝이 보이진 않는다. 다만 탐지로 느껴지는 밀집도로 볼 때, 머잖아 미로의 끝이 다가오리라. 미로를 돌파하는 게 미궁을 가로지르는 것보다 쉬운 이유가 있었는데.
'스틸레톤은 부서져도 복구되니까.'
미궁 내부에 있는 한, 스틸레톤은 아무리 부서지고 뭉개져도 어지간해선 죽지 않는다. 심지어 죽더라도 다시 되살아난다. 바로 그게 이미 공략대가 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놈들이 남아있는 이유였고.
'미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공략대라도 미로의 모든 몬스터를 쓰러뜨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기척은 적다. 그리고 그중 하나. 발아래서 슬그머니 올라오려는 것을 그림자로 찔렀고.
[땅굴 벌레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단번에 먹어 치웠다. 미로에 짙게 퍼진 오감을 교란하는 안개가 있더라도, 내 감각은 D등급 스킬로 발현된 것이며 완화에 탐지까지 있으니 감각을 헝클어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지하 마귀도 처치한 모양이고.'
미궁의 스틸 자이언트처럼 이 미로의 보스 아닌 보스였다. 그렇게 안개를 걸어 머지않아 처참하게 갈라지고 으깨져 헝클어진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
죽은 지하 마귀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언뜻 머릿속에 불로소득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이 미로 속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는 땅굴 벌레와 놈들을 통솔하는 지하 마귀. A클래스를 훨씬 웃도는 능력을 가진 미로의 보스임에도 불구하고 공략대를 막을 순 없었던 모양. 역시 아직까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그럼 도대체 뭣 때문에 괴멸한다는 거야?'
공략대도 바보는 아닐 터. 괜한 무리는 하지 않았을 거다. 네버랜드가 열린 지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쌓인 정보들도 있을 텐데 무리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그나마 가능성이라면 폐쇄 직전의 광란이겠지만.
'일단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지하 마귀부터 먹어 치웠다.
[지하 마귀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27 → Lv.28]
'겨우 이걸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지하 마귀는 땅굴 벌레를 통솔하며, 수십 미터나 되는 벌레와 용이 섞인 듯한 괴물이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건 찌꺼기라고 불릴 만큼 잘게 흩어져있는 일부에 불과한데도 수십 만에 달하는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도대체…'
어쩌면 어스 서펜트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괴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새삼, 이곳이 최악의 던전이었음을 되새기고 미로에 남아있는 흔적을 따라 다시 공략대를 뒤쫓았다.
***
"와. 진짜 끝도 없네."
휘파람을 불며 휘두른 패태검의 일격에 밀림이 갈라졌다. 아니, 밀림이 아니라 그 일부로 둔갑하고 있던 늪의 주인이라 불리는 괴물. 칼로 물을 베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머지않아 재생하고 만다.
"징하기는… 아직 멀었냐!"
슬쩍 돌아보니, 마법사들의 영창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역시 홍유리가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그러는 사이, 누군가가 크게 외쳤고.
"Add! 7시 방향 2. 1시 방향 3!"
"7시는 우리가 막을 테니, 1시는 은자… 망할. 없었지. 신전! 가능하겠소?!"
"그럼요. 맡겨주시지요."
확답하는 주교의 말에 끄덕인 백군태가 지휘봉을 쥔 채 전장을 살폈다.
"5시에 잡것들 흘러나오잖아! 이 자식들이! 똑바로 안 틀어막아?!"
"시발, 진짜! 재장전!"
"병아리들은 보급 투척 안 하냐!"
병아리. 별도의 역할이 부여되지 않은 C클래스 이하의 헌터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일견 멸칭처럼 들리지만, 제발 나대지 말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처음 네버랜드에 입장했을 때, 스물에 가까웠던 그들은 어느새 절반도 남지 않았다.
'죽기도 죽었지만.'
대부분은 겁을 집어먹고 후발대에 합류했다. 병아리가 있다는 건 강태호가 풋내기들에게 네버랜드의 경험을 쌓게 해주는 대신, 각 클랜의 머리를 빼 오자고 했던 게 통했다는 뜻. 덕분에 인원 부족을 겪지는 않았지만, 백군태로서는 저들 전부가 후발대에 남아주었으면 싶은 마음이었지만, 클랜의 눈치를 본 건지 아니면 무모한 건지 기어코 따라오고 말았다.
어차피 네버랜드에서 C클래스 이하 헌터가 도움이 될 방법은 극히 적다. 그런 풋내기 헌터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싸우고 있는 헌터들에게 보급품을 투척하는 정도뿐.
'그나마…'
"Distort!"
힐긋 돌아본 백군태가 소리친 여성, 이은하를 보았다. C등급 마력 감지. 감지 셔틀로 왔던 만큼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제법 도움이 되고 있었다. 왜곡된 공간에 아주 잠깐 괴물들이 흠칫거린 사이, 헌터들이 여유를 찾고 반격을 개시했지만, 이어진 이은하의 목소리에 백군태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Add! 3시에 한 마리!"
"돌릴 클랜이… 망할!"
여유가 없다. 지휘권자인 백군태가 뛰어나가자 마력 감지를 펼치던 이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력이 슬슬…'
이를 악물고 견뎌도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거의 이틀간 잠깐도 쉬지 못했으니까. 이 네버랜드에서 휴식이란 구획을 완전히 끝내기 전까지는 있을 수 없으니까. 그나마도 1구획의 특수성 때문에 거기선 쉬지도 못했고.
그 순간, 아까 백군태가 틀어막으라 했던 5시 방향에서부터 헌터들이 던진 보급품을 뿔로 꿰뚫은 호른 매머드가 무자비한 돌진과 함께 진형의 중앙까지 밀려 들어왔다.
"산개! 산개하라고!"
체고가 10m에 달하는 거대한 매머드를 감히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혼비백산 흩어지는 헌터들. 그러나 늦고 말리라. 매머드가 빨라서가 아니라, 헌터들이 느려서.
아주 잠깐. 아주 잠깐의 시간만 벌면 된다는 생각에 이은하는 한발 나서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
"Explosion―!"
그녀가 외침에 따라 지면에 폭발이 일어났고, 매머드의 앞발이 제법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 그대로 달려오던 매머드는 자신의 추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앞발이 빠진 상태에서 기괴하게 허공에 뜨고 말았다.
'됐…?!'
생각대로라면 그대로 빠졌어야 한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한 힘에 매머드의 거대한 몸체가 떠오르고, 그러고도 멈추지 않는 힘에 뒤집어져 높게 뜨고 말았다. 그렇게 공중을 반 바퀴를 돈 매머드의 등이 지면과 부딪히려 했고.
"Detrude!"
마력의 힘으로 자신을 밀어낸 이은하는 가까스로 매머드의 그림자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뒤늦게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폭음에 귀가 먹먹해 질 정도였지만, 놈은 아직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
그렇게 몸을 일으킨 매머드가 두 번째 돌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뒤늦게 진형이 붕괴했음을 눈치챈 구진하가 빠르게 다가와 놈의 숨통을 끊었다.
일섬. 뇌를 관통한 두말할 것 없는 절명의 일격에 매머드가 기우뚱 쓰러지고, 구진하는 검 끝의 피를 털었다.
"잘했어. 은하야."
"……감사합니다!"
"근데 아직이다. 계속 감지해. 알겠지?"
작게 끄덕인 이은하는 다시 마력 감지를 펼쳤다. 네버랜드 2구획― 본래는 주토피아, 동물원이었으나 끔찍한 정글이 되어버린 이곳. 몬스토피아.
끝도 없이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Add! 9시 방향에 둘!"
쉬어버린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
미로를 헤치고 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다. 감각이 교란되어 멀미도 느꼈을 테니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이곳, 광장이었다. 미궁과 미로를 지난 끝에 1구획 최후의 구역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광장이라기보다도 콜로세움 아니 제단에 가깝다. 1구획 공평한 죽음- 제 3구역인 광장의 특수성. 스틸레톤이 부서져도 다시 복구한다면, 광장의 몬스터는 끝도 없이 쏟아져나온다.
'이것만큼은 싸울 수밖에 없어.'
광장에서 2구획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광장에 죽음을 흩뿌리는 것. 1구획의 '공평한 죽음'이라는 건 그 죽음이 공략대이건 몬스터이건 상관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광장에서 필요한 만큼의 생명, 존재가 사그라질 때, 마침내 2구획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내 경우에는 둘.'
페리와 내 몫만 채우면 된다. 공략대처럼 대규모로 쓸어버릴 필요는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한 점이었지만 그마저도 쉽지는 않으리라.
{Эми тест тапшыруучу келгендиктен, тест башталат!}
알 수 없는 목소리. 그것이야말로 광장의 개전을 알리는 음성이었다.
{Өзүңүздү кан жана өлүм менен далилдеңиз!}
외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들- 하나같이 만만한 녀석은 없다. 최소가 아라네아 이상이고, 어지간해선 숲의 던전에서 보았던 보스, 늪의 용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행이야.'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고작 이 정도라면 문제는 없을 테니까. 검게 일어난 귀화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
"느낌이 이상해요."
"뭐가 말입니까?"
후발대의 대장인 은자림의 말에 대구의 대표 클랜, 옥연의 로드인 김주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에요."
"……."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초입은 진작 쓸어버렸으니까 문제 될 건 없습니다. 기껏해야 1, 2시간? 그 안에 본대와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후발대의 목표는 진지의 구축 및 배의 건조에 있다. 3구획까지 나아간다면 모르겠으나, 목표가 2구획의 봉쇄인 이상 베이스캠프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2구획의 구조는 거대한 밀림. 그리고 그 밀림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강이 있는 형태였다. 편의상 강을 넘기 전까지를 1구역. 그 이후를 2구역이라 칭하고 있고.
먼저 진행한 선발대와 본대가 강 이전까지의 몬스터를 모두 정리하면 미리 설치한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취하고, 후발대는 건조한 뗏목으로 강을 넘어 먼저 2구역의 초입을 정리해야 한다.
그렇게 휴식을 취한 선발대와 본대가 합류하고 2구역의 몬스터까지 전부 처치했다면, 마침내 2구획의 공략이 종료된다. 즉, 이번 원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확실히 이번 원정은 성공적이야.'
무리하지 않았으니까. 은자림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변수를 떠올려봐도 3, 4구획도 아닌 2구획에서 실패할 확률은 높지 않다.
애초에 2구획의 봉쇄가 목표인 이상, 다음 구획으로 갈 리도 없는데. 설사 광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상념에 빠진 그녀에게 김주섭이 말을 걸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죠. 앞으로 하루 이틀이면 공략은 종료될 테니. 조금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잠깐 쉬시겠습니까?"
"…괜찮아요. 그냥 제가 과민한 거겠죠."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강행군이긴 해도 이대로라면 무리 없이 끝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도대체 왜. 분명 순조롭게 진행 중인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 같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
은자림은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