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44 Never Land (4)
[타우루스(Taurus)]
[신장 3.98m] [체중 1.1t]
[힘 406] [민첩 365] [체력 429] [마력 214]
[보유 스킬]
[질긴 피부(E)] [약한 재생(E)]
―황소와 사람을 섞은 듯한 외형의 타우루스. 그리고 그보다는 조금 약한, 도마뱀과 사람을 섞은 듯한 외형의 추적자(Stalker)가 넷.
'…이 정도라면 문제는 없어.'
다만, 겨우 이걸로 끝일 리는 없다. 더 귀찮은 녀석들이 나오기까지. 아니, 보스가 나오기 전까지 나와 페리의 몫을 달성하고 가능한 한 빨리 2구획으로 넘어가야 한다.
"구오오오오오오오―!"
X자로 교차한 두 팔을 떨치며 기합성을 내지른 타우루스가 육중한 보폭으로 달려온다. 거대한 신체와 400이 넘는 힘을 오롯이 발휘한 타우루스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무쇠 같은 팔을 어깨 뒤로 당기더니 무시무시한 힘으로 주먹을 내리찍었다. 그에 아찔한 풍압을 느끼며 그 위로 올라탔다.
"――?!"
소의 눈이 믿기 힘들다는 듯 부릅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의 팔을 타고 오른다. 달리는 발걸음을 뒤따라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단번에 목 뒷덜미까지 오르자, 타우루스가 기함하며 팔을 휘둘렀다. 머리 양쪽으로 난 뿔이 나를 떨어뜨리려 들이받았으나, 이미 촉수는 녀석의 뒤통수를 파고들었고 그림자는 질긴 가죽을 뚫고 경추를 절단한 뒤였다. 곧 타우루스는 돌바닥에 몸을 뉘어 허망하게 숨이 끊어졌다.
'…스틸레톤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들에 급소는 없다. 스테이터스나 스킬 이전의 문제였다. 게다가 귀화, 그림자, 촉수, 돌풍. 가지고 있는 스킬들로도 놈들을 상대하는 건 껄끄럽다. 그나마 하나 있는 방법이라곤 탈식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들은 달라.'
어느새 추적자들이 모습을 감췄다. 과연 이 탁 트인 광장의 어디에 숨을 수 있겠느냐 싶겠지만, 스토커라는 이름에 걸맞게 놈들은 D등급 은신을 가지고 있다. 다만, 탐지를 속일 수는 없다. 그렇게 놈들을 찾아낸 순간, 다시 놈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고민되겠지.'
사라진 자신들을 보고도 내가 당황하지 않았으니 은신을 눈치챈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을 거다. 그런 묘한 대치 속에서, 일단 타우루스부터 집어삼켰다.
[타우루스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적당한 경험치를 획득했으나, 슬쩍 바라본 곳에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역시 타우루스 하나로는 안 되나?'
순간, 고민하던 추적자들이 무릎을 굽혀 높게 뛰어올랐다. 높게 도약해 은신과 함께 덮치는 기습적인 공격. 양팔을 크게 펼친 위압적인 모습. 놈들의 기다란 손톱에 빛이 반사되었다.
'멍청하긴.'
사방에서 덮쳐오는 놈들을 향해 가시를 발출하자 벌집이 되어 추락했다. 바닥과 충돌한 놈들을 파고든 가시가 더욱더 깊게 파고들었다. 이미 경기장의 바닥은 영량이 가득 메우고 있다. 놈들의 숨통을 끊었지만,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래도 아직 부족하다고?'
[Бул экинчи сыноо!]
어느새 외곽에서 다른 몬스터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슬쩍 둘러봐 통찰을 사용했지만.
[Чечкиндүүлүгүңүздү далилдеңиз!]
아직, 아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아직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 때.
[Өлтүргөн адам менен таанышуу!]
'……망할.'
외곽 너머로부터 그토록 꺼렸던 놈, 처형자의 실루엣이 드러나고 있었다.
***
"……일단락되기는 했는데."
돌아본 곳에, 공략대의 인원들이 다들 지쳐 뻗어있었다. 이틀가량의 강행군. 그것도 최악의 던전이라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이 네버랜드에서 느낀 피로는 차원이 다르다.
"뭐 하는 거냐! 여기가 네놈들 안방이야?!"
백군태의 호통에 공략대가 표정을 구겼다. 헌터라면 사흘 밤낮을 새더라도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건 평상시의 이야기였다. 이미 헌터들은 하나같이 포션을 들이키고 또 각성제를 마셔가며 억지로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다 죽고 싶은 거냐! 아직 1구역 공략은 끝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몬스터를 맞이하고 싶나!"
당연히 이 상황을 백군태를 비롯한 공략대의 수뇌들 또한 이해하고 있다.
'순조롭다고 생각했는데…'
스퀘어의 불참과 고원의 부재가 상상 이상으로 큰 구멍이었다. 여타 클랜들이 뒤늦게나마 참가를 결정했다지만, 공략대의 질과 양이 전체적으로 부족하다. 거기에 더해 지켜야 할 병아리까지 있으니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서 피로가 가중된다.
'결국, 한번 물러서야 하나.'
처음 계획에서 다소 어그러졌지만, 어차피 목적은 클리어가 아니라 2구획까지의 봉쇄였으니 시간이 부족하진 않다. 차라리 한 번 후발대와 합류해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공략을 이어나가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은하의 외침에 날아가고 말았다.
"Add! 1, 1시 방향 6!"
―몬스토피아.
끝없는 밀림으로 이루어진 여기서 몬스터를 모두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쉴 틈이란 없다. 그 사실을 다시 깨달았을 뿐. 공략대원들은 지친 몸을 다시 한번, 억지로 일으켜야만 했다.
***
처형자― 산양의 머리를 가지고, 사람의 몸이 섞인 반인반수의 괴물. 또한, 놈이 들고 있는 대낫은 끔찍한 절삭력을 자랑한다. 바로 놈이야말로 이 광장의, 아니 두말할 것 없는 1구획의 보스였다.
[바포메트(처형자{Executioner})]
[신장 2.67m] [체중 448kg]
[힘 651] [민첩 628] [체력 641] [마력 611]
[보유 스킬]
[강신(A)] [거짓 불멸(B)] [대마력(B)] [사역(C)] [완화(C)] [재생(D)] [안목(E)] [간파(E)]
"뀨, 뀨우우웃…!"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페리가 털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고, 놈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른데.'
어쩌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광장에 오른 건 공략대가 아니라 나와 페리 둘뿐이니까. 어쩌면 난이도가 맞춰질지도 모른다고.
'……오산이었어.'
스틸 자이언트. 지하 마귀. 둘 다 강력한 몬스터였지만, 감히 1구획의 보스라고 칭할 순 없다. 그 이유는 바로 놈. 처형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역시 쓰러뜨리는 건 무리야.'
정말 운이 좋아서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결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놈과 싸우게 되면 확실하게. 100% 사망한다. 하물며, 정말 운이 좋아서 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한들, 가지고 있는 거짓 불멸이 상처를 메꿀 터. 꺾인 손가락조차 고작 5, 6개의 스톡만으로 그렇게 골치가 아팠는데 이 광장에서 놈은 불멸자나 다름없다.
'꺾인 손가락 따위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
탕아들의 간부였던 꺾인 손가락이 약했다는 게 아니라, 이 네버랜드라는 던전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칠영웅과 스퀘어가 포함된 공략대가 도전했음에도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몬스터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다.
'무시하고 나머지 놈들을 쓰러뜨리면 돼.'
곧장 처형자의 반대로 달렸다. 의아한 듯 놈의 고개가 모로 꺾일 때, 검은 불꽃이 타오르며 몬스터를 잠식해갔다. 광장에 나타난 온갖 반인반수의 괴물이 스러지는 중에도 처형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여유로웠다.
다만, 천천히 대낫을 들어 올렸고.
"……!"
그걸 휘두른 순간, 벽을 지탱하던 기둥을 갈라 외벽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미친…!'
무슨 특수한 방법을 쓴 게 아니라, 그냥 참격에 마력을 담았을 뿐. 다만, 그 마력이 규격 외의 것이다. 비록 마법을 사용하진 못한다지만, 놈이 가진 대마력까지 생각하면 홍유리 이상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것도 신체 능력이 A클래스를 크게 상회하는 불사의 괴물이.
'……!'
놈은 자신의 공격이 닿지 않은 게 불만인 모양인지 산양의 머리를 갸웃거렸다. 다시 들어 올린 낫의 끝이 섬뜩한 예기를 발했고.
'온다…!'
예측한 순간, 놈의 대낫이 휘둘러졌다. 거리를 둔 상태에서의 일격. 아까와 같은 무식한 참격-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격이었으나, 직선적인 참격을 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공격이 무산되자, 잠깐 멈춰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놈으로부터 불온한 공기가 퍼져나간다. 스산한 기운에 대기가 솟구치고, 돌바닥의 파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중얼거린 놈으로부터, 불온한 공기가 불길한 회색 마력으로 바뀌는 순간, 무너진 외벽 아래 깔린 녀석들의 숨통을 끊었다.
'됐다…!'
마침내, 처형자의 배후로부터 공간이 일그러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처형자의 손발이 기이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동공의 경계가 사라진 것처럼, 눈이 온통 검게 물들어간다.
'강신…!'
"Биринчи өлүм жазасы…"
그 두개골을 찢고, 높게 치솟은 뿔이 머리 중앙에서 돋고, 마력이 더욱 짙어진다.
"―――!"
서서히 변형되어가는 놈.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력으로 달리며 마력을 한껏 담은 가시를 쏘아냈고, 전부 적중했다.
'망할.'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변형은 멈추지 않는다. 놈이 가진 재생이 가시를 밀어 뽑아내고,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검은 불꽃에 둘러싸여 잠식되어 가는데도. 가시에 꿰뚫렸음에도 이깟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빨리!'
열린 차원의 틈새을 향해 페리가 점멸을 사용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절한 시기에 사용한 페리의 점멸은― 처형자의 불길한 마력을 뚫지 못하고, 처음으로 막히고 말았다.
"뀨우우…?!"
홍유리가 페리를 장막 안에 가뒀을 때처럼 점멸을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페리를 억눌러 점멸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점멸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내를 뒤덮은 회색 마력에 막혀 이동하지 못했다.
'망할…'
처음으로 실패한 점멸에 페리가 공포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돌풍을 최대한으로 터뜨렸다. 마침 강신이 끝나 진심을 발휘하려는 놈을 지나쳤고―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 산양의 발굽이 바닥을 찧으며 뒤쫓아왔다.
"―――!"
강신― 안 그래도 괴물같았던 놈이 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숨 막힐 듯한 회색 마력이 조여드는, 당장에라도 으스러질 것 같은 압박. 환계에서 마력을 흘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분명 쓰러졌으리라. 그럼에도 의지를 가진 마력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지만, 탈식으로 하여금 놈의 회색 마력을 먹어 치울 수는 있었다.
"……!"
뇌를 파고드는 것 같은 침식에 눈을 부릅뜨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의 질이, 너무나도 다르다…! 먹어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독이라도 삼킨 것처럼 눈이 충혈됐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완화와 마력이 가까스로 몸 상태를 되돌렸을 때.
"……!"
[약한 육감(E) Lv.6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육감(E) Lv.6 → 약한 육감(E) Lv.7]
순간, 섬뜩한 기운에 몸을 낮췄다.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끔찍한 마력 덩어리. 그렇게 늑대를 지나친 처형자의 참격은 열린 차원의 틈새를 갈랐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듯, 갈라진 차원의 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느새 등 뒤까지 따라온 처형자의 턱이 단번에 늑대를 집어삼키고 말겠다는 듯, 한계까지 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센 돌풍이 처형자의 시야를 가렸고.
"―――!"
다음 순간, 돌풍에 흩날린 검은 불길에 휩싸여 분하다는 듯 울부짖는 산양을 뒤로한 채, 늑대는 마침내 1구획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게 급박한 순간이었기에 느끼지 못했다.
―무언가가 네버랜드의 1구획에 진입했음을.
***
감지를 펼치고 있던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럴 리 없겠지만, 어째선지…… 묘하게 익숙한 마력을 느낀 것 같아서. 하지만, 다시 감지에 집중했을 때 이미 그 기척은 사라져있었다. 이은하는 자신이 지쳐 착각했던 거라 여기며 포션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