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45 암운(暗雲) (3)
"……이건 도대체?"
검게 물든 하늘 아래, 은자림이 아연한 듯 중얼거렸다. 김주섭과 얘기를 나눈 짧은 사이에 후발대의 일원이, 아니 정확하게는 공략대원의 상체가 날아와 널브러졌다. 대략 20명― 후발대의 절반 가까이가 순식간에 살해당한 이 믿기 어려운 상황에,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물론 그런다고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변할 거라 믿는 건 아니었다. 은자림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굳은 결의가 담겨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느낀 피투성이 괴인이 일그러지게 웃으며 울부짖었다.
"―――!"
그 손에 쥐어진 하체― 아까 날아왔던 후발대원의 남은 몸뚱아리를 육포라도 씹는 것처럼 질겅질겅 씹어 삼킨다. 그 끔찍한 광경에 침음을 흘린 김주섭이 활을 꺼내 들고, 은자림 또한 창을 쥐며 소리쳤다.
"후발대 전원! 후퇴하세요!"
잠깐 머뭇거리던 후발대는 은자림이 한 번 더 재촉하자 그제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에 김주섭이 눈을 치뜨고 되물었다.
"선자, 지금은 같이 싸우는 게…"
"위를 보세요. 어차피, 저건 미끼에 불과해요."
김주섭이 뒤늦게 뇌전이 어린 먹구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급박한 상황에 판단이 늦었지만, 2구획에 먹구름이 떴단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십중팔구 적의 마법이리라. 만약 저게 완성된다면…?
"…마법사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어요."
마법사를 잡는 데는 궁수가 제격. 옥연의 로드 정도 되는 궁수라면 금방 추적에 성공할 테고, 마법사를 처치할 수 있을 터. 그게 은자림의 계산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 혼자 저 괴물을 막아 서야 하는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창을 쥔 은자림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괴인의 앞에 맞섰다.
"……어차피 숫자는 의미가 없는 것 같네요."
―후발대가 반항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다만, 의미가 없었을 뿐. 기어코 후발대원을 씹어 삼킨 괴인의 상처가 사라졌다. 십중팔구 1구획의 보스, 처형자와 같은 스킬. 거짓 불멸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더 묻지 않겠습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당신도요."
김주섭이 자리를 뜨자, 은자림은 곧바로 달렸다. 세차게 달려 내찌른 창에는 끝을 모르고 요동치는 마력이 담겼고.
"Suliţă pentru a-l ucide pe diavol!"
―당장에라도 창이 터질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순간, 은자림은 힘차게 투창했다.
"마를 멸하는 창!"
크게 외치자, 빛이 폭사 되었고 새하얀 빛이 천지를 뒤덮었다.
대전의 밤, 아지트 지하에서 통로를 가득 메웠던 슬라임과 같은 키메라를 단번에 소멸시켰던 일격은―
"……!"
―괴인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다만, 괴인이 입고 있던 로브만을 없애버렸을 뿐. 피투성이 로브가 사라지고 드러난 그 모습은 끔찍한 괴물의 형상이었다.
순간, 은자림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영상으로만 보았던 아카데미를 습격한 살덩이들이었다. 대못, 철갑, 사슬, 철판… 온갖 것들로 살덩이들을 찢고, 찍고, 묶어서 거대한 괴인의 형상을 만들었을 뿐. 아니, 만들어진 뼈대 위에 살덩이들을 붙여 놓은 것 같은 기괴한 형상이었다.
"……!"
그 모습을 본 은자림은 침을 삼켰다. 그 끔찍한 모습에 놀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공격이 사실은 통했었다는 사실에.
'상처는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동안 순식간에 회복해버렸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C… 아니 B등급 이상의 재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막는 것에 집중해야 해.'
은자림은 순순히 인정했다. 만약, 저 재생이 정말로 스킬이라면 자신에게 놈을 쓰러뜨릴 힘은 없다고. 다만, 시간을 끄는 거라면 가능할 거라고.
손을 뻗자 그래야 한다는 듯, 그녀의 손에 창이 돌아왔다. 괴인은 그걸 붙잡으려 했으나 놓치고 말았고.
"―――!"
그에 열 받은 모양인지 은자림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
'…아직 괜찮아.'
넓게 펼친 탐지가, 전장의 상황을 읽었다. 후퇴하는 후발대를 뒤로하고 은자림이 남아 시간을 버는 모양. 그녀라면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벌어줄 거다.
'괜찮아.'
본대는 강을 넘고 있다. 머지않아 2구역까지 도달할 테니 은자림은 내버려 둬도 괜찮을 거다. 더 급한 문제는 드리운 암운이었다. 제아무리 강한 마법이라도 적중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하지만, 고작 뗏목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게다가 숲으로 달렸다가는 몬스터의 먹이가 될 터.
'그리고 이 강은 길어.'
강은 길고, 스크롤이 있더라도 벗어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결국 놈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집중한 끝에.
'찾았다…!'
머지않아 놈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암운과 이어진 마력― 틀림없다.
"Spiritul tunet…"
마법이 완성에 가까워짐에 따라 마력이 커진다. 먹구름은 한계까지 어두워져 어느새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럴 리 없지만, 이 던전에 밤이 드리운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거대하고 끔찍한 마력이 서서히 차오르는 걸 보며 망설이지 않고 불꽃을 일으켰다.
***
검은 불꽃이 늑대를 덮고 일어나는 가운데, 늑대는 바람을 두르고 달렸다. 전력으로 달리는 그 발걸음에 망설임이란 없다. 순식간에 밀림의 절벽을 오른다. 불길이 타올라 검게 일어났으나, 가면의 시선은 늑대에게 있지 않았다.
아니, 늑대의 C등급 은신은 가면이라 한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가면, 침묵하는 입은 정말로 늑대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창에 집중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늑대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으며, 세 번째 이유는―
"Spiritul tunetului coboa―?!"
단번에 뛰어오른 늑대는 영창하고 있는 침묵하는 입의 머리를 쳐부쉈다. 귀화는 놈의 머리를 재 하나 남기지 않고 불살랐다. 그렇게 영창하던 마법은 멈췄고, 가면째로 머리가 날아간 침묵하는 입은 바닥에 몸을 뉘었다. 목 없는 몸에도 옮겨붙은 귀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
그런데도 늑대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없는 시체가 일어날 리가 없다는, 그런 상식을 깨부수고 시체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몸을 일으킨 놈은 머리 없이 목만을 갸웃거렸다. ―그게 세 번째 이유. '어차피 당해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툭툭, 마치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간단히 털어내는 동작에 귀화가 꺼지고 말았다. 아니, 스푼으로 무언가를 떠내듯 마력으로 귀화가 덮인 부분만을 분리한 것이다.
[날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만, 마력을 진동 시켜 소리를 만들었을 뿐. 자신을 경계하는 늑대를 보며 침묵하는 입은 잠깐 떠올리더니,
[아. 우릴 쫓고 있는 잡것이 있다더니… 흥미롭기는 해도 시간이 없는데…]
침묵하는 입―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놈은 주절주절 나불대기 시작했다. 반대로, 나는 놈을 통찰하고 있었다.
[안형섭(인간)]
[신장 176.5cm] [체중 64.7kg]
[힘 243] [민첩 331] [체력 336] [마력 ―]
그걸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B클래스 최하위권이거나 C클래스 최상위권. 딱 그 정도였으나, 마력은 통찰할 수 없다. 그야 당연하다. 놈은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송받은 마력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니까.
'여기까지 오고도 본체는 아니었나.'
네버랜드까지 왔으니 혹시나 싶었지만, 꼭두각시. 죽은 몸을 마력으로 연결해 조종하고 있을 뿐.
'망할.'
결국, 심장을 꿰뚫든 머리를 쳐부수든 급소가 아니라는 뜻. 몸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마력을 전송받는 매개체를 부서야만 한다.
'그게 가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분명 어딘가 다른 곳에 있으리라. 사지를 자르건 분해하건 결국, 매개체를 부수지 않으면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나마 영창을 이어갈 마력까지 실시간으로 전송할 순 없는 모양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살피는 사이, 침묵하는 입의 목이 아주 살짝 돌아가자 곧장 앞으로 달렸다. 뒤늦게 바닥에서 솟아오른 뇌전이 날카롭게 뻗친다. 예상했기에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지만, 그 속도가 비상식적이었다.
놈은 내가 피했다는 게 의외라는 듯 손을 앞으로 뻗더니, 그 손에서 강대한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죽어라]
검은 마력이 회전해 뒤섞이더니, 손을 터는 순간, 그것이 순식간에 날아왔다. 달리고 있던 내 움직임과 동선을 꿰뚫어 본 듯한 공격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건 나 또한 마찬가지. 몸을 돌려 피한 순간, 마력의 구체는 밀림을 일소시키고, 타오른 나무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Spiritul tunetului coboară aici―]
그러는 와중에도, 놈은 영창을 멈추지 않는다. 아까 겨우겨우 막았던 네 번째 영창을 기어코 읊고야 만다. ―마법사에게 시간과 거리를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 철칙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섣불리 들어갈 수는 없다. ―어떤 함정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들어가더라도.'
설사 뚫고 들어가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거리를 둔 채, 마력을 담은 가시가 허공을 갈랐다. 대기를 파고드는 가시는 마력의 벽을 뚫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됐어.'
그림자와 마력탄은 실체가 없어 불가능하지만, 가시라면 귀화를 담을 수 있다. 검은 불꽃은 밀림을 집어삼키고 불살라가며, 마력의 벽을 갉아먹어 갔다.
다만― 놈의 시선이 닿은 순간, 검은 불꽃은 허망히 꺼지고 말았다. 돌풍을 두르고, 다음 순간 놈의 등 뒤로 돌아 팔 하나를 뜯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
―물어뜯은 팔이 폭발해 위턱과 아래턱이 날아가고 말았다. 완화와 경화가 없었더라면 그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으리라. 계속해서 날아오는 수많은 마력과 뇌전을 그림자로 파고들어 피하려 했으나, 지면에 들어찬 마력이 그걸 막고 있었다.
'언제?!'
결국 탄력으로 뛰어올라 피하는 것밖에는 없다. 짜놓은 연극처럼, 당연하다는 듯 쇄도하는 뇌전의 사슬. 곧바로 일으킨 귀화가 사슬을 집어삼켰다. 다만― 홍유리의 홍염의 사슬과는 다르게 놈의 사슬은 기어코 귀화를 뚫고 뻗쳐왔다.
'이건…!'
돌풍까지 일으키고 나서야,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지면에 착지한 순간, 놈과 시선을 마주했다.
[호…]
퍽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턱을 쓰다듬는 그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머릿속에 떠오른 어쩌면 하는 생각을 집어넣었다. 어설픈 추측을 밀어 넣었다. 어차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돌풍으로는 닿지 않는다. 가시는 막혔고, 그림자가 놈의 마력에 막혀 다루기 힘들다.
검은 불꽃만이 이글거리는 가운데, 놈의 시선이 닿자 불이 꺼지고 만다.
―귀화조차 닿지 않는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뿐.
[스킬 포인트 23 → 7]
***
저 멀리, 강을 도하하는 공략대를 보며 갑주는 아공간을 열었다.
기어코 대검을 손에 쥔 그는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저 사이에 있었던 때를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