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97화 (97/407)

〈 97화 〉 #45 암운(暗雲) (4)

이제 뗏목이 2구역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백군태는 크게 소리쳤다.

"도착하는 즉시 후발대와 합류한다! 진형을 구축해라! 선발대로 뽑힌 인원들은 바로 출발할 준비부터 해!"

공략대에는 병아리들이 포함되어있다. 행군이라는 것은 가장 느린 이의 속도에 맞춰야 하므로 빠를래야 빠를 수가 없다. 때문에, 먼저 움직일 선발대를 뽑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발대의 대장은 당연하다시피 선봉대장인 강태호가 맡게 됐다. 곧, 둘러보던 강태호는 자신과 함께할 선발대의 인원을 호명했다.

"구진하. 하연. 유태정. 그리고…"

하나같이 공략대의 주요인원인 A클래스 헌터들의 이름. 그렇게 마침 뗏목에서 내렸을 때, 머나먼 곳에서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드리운 암운은 끝도없이 커지더니 세상을 검게 물들여갔다.

"가능한 한 빨리…?"

빨리 합류할 필요가 있겠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백군태는 전신을 짓누르는 마력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력을 일으키지 않으면 견디는 것조차 쉽지 않은 압박. 단순한 마력이 아니라, 심신을 짓누르는 힘. 돌아본 곳에 공략대는 이미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쓰러진 이들조차 많다.

그중에는.

'……괴물!'

이은하도 있었다. 그나마 그녀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마력에 한해서만은 어지간한 B클래스 헌터와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인 것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병아리들이다. 아무리 마력을 일으켜도 위압되어 숨도 쉬지 못한 채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내가 뭐라도 해야만…!'

이은하는 간신히 마력을 펼쳤다. 마력이란, 그녀에게 있어 도화지와 같다.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리느냐- 이 끔찍한 마력을 감히 정면에서 받을 수 있다곤 생각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부드러운 유선형의 돔- 완충재를 만들었다. 벽을 만들어 충격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흘릴 수 있도록.

"……!"

가까스로 숨이 돌아온 헌터들을 보고 이은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다만ㅡ 마력을 행사한다는 건 그만큼 지쳐간다는 뜻. 서서히, 그녀의 안색이 희게 질려가는 중에 몸을 가누는 게 한결 편해진 구진하가 코트 자락에서 세검을 꺼내 쥐었다.

'그 괴인이다…!'

칠영웅의 일원인 무노를 죽였던, 그리고 창선에게 중상을 입힌 갑주의 괴인. 그가 창염이 타오르는 대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질식할 것 같은 압박에 구진하는 정신을 집중했다. 일섬. 그가 마력의 결을 벤 순간, 마력이 흩어지고 짓누르던 압박은 씻은 듯 사라졌다.

"―――!"

그러자, 창백한 안색으로 공략대 전원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에 백군태는 목청껏 소리쳤다.

"전원! 발사!"

떨어진 명령에 궁수들이 망설임 없이 시위를 놓았다. B클래스 이상으로 구성된 헌터 중에서도 손에 꼽는 궁수들의 사격. 일제히 쏘아진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직선에 가깝게 날았다. 화살임에도 불구하고 소총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 인간의 눈으로 좇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속도였지만.

"……!"

괴인이 검을 내리그은 순간, 마력은 참격을 형상화하고, 거대화시켰다. 대지를 가르고 덩쿨과 수목이 잘려나갔다. 압도적인 풍압에 날아오던 화살은 벽에 막힌 듯 떨어지거나, 되려 반대로 날아갔고. 기겁한 헌터들의 대열이 흐트러진 순간, 강태호가 패태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둘의 검풍이 부딪치자, 하늘까지 뻗친 바람이 폭풍을 일으켰고 바람이 멎었을 때는 이미 지형이 바뀌어있었다.

무성한 밀림이 모두 사라지고, 흙더미 위에 갈기갈기 찢긴 초목이 흘러내렸다. 잠깐의 정적. 강태호가 고개를 모로 꺾었다.

"이거, 아무래도 나는 못 가겠는데?"

직감적으로, 강태호는 자신이 아니라면 괴인을 막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곧 강태호가 주교를 지목했다.

"할멈이랑 아재는 잠깐 나 좀 도와주고. 나머지는 먼저 가쇼."

강태호의 말에 구진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어지간한 헌터들은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 ―거기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거암의 로드와 주교밖에 없으리라. 저 싸움에 끼기에는 세검사라는 이름조차 부족하다. 그에 구진하는 잠깐 망설였다.

'…지휘권자들이.'

실력 있는 헌터이기 이전에, 선봉대장과 공략대장. 그들이 이탈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 다음 우선순위의 지휘권자는 자신. 갑작스레 공략대 전원을 이끌게 된 셈이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상대는 무노를 죽이고 창선에게 중상을 입힌 괴인. 어깨가 무겁다는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심지어, 저 셋이라 한들 괴인을 이기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진하는 다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거, 얼렁 갔다 와라."

패태검(覇太劍)― 강태호는 자신의 애검을 쥐고 어깨에 올려 받쳤다.

"갔다 오면, 어차피 다 끝나 있을 테니까."

믿음직한 그 모습에 구진하는 고개를 끄덕이곤 소리쳤다.

"지금부터 공략대 전원! 후발대와 합류합니다!"

그렇게, 공략대가 멀어지는 중에 강태호는 옆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괴인의 모습이 낯익은 것 같아서.

"거, 착각이겠지…?"

***

뛰어오르는 늑대. 이미 불타버린 일대. 침묵하는 입은 불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끌리다니.'

처음에는 길게 잡아도 1분이라고 생각했다. 첫 일격을 피했던 건 우연 혹은 짐승의 감이라 여겼다. 결국 본능이라고 해봤자 쌓아놓은 탑에 무너지는 법. 이 싸움이 오래갈 거라 여기지 않았다.

허나 여전히 놈은 버티고 있다. 어지간해서 놈을 죽이는 게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침묵하는 입은 속으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렇게 머지않아 손을 들어올렸을 때.

[Șarpe Fulger Roșu]

본래라면 3절의 주문이었으나, 입 밖으로 뱉어진 것은 마지막 영창 뿐. 보류가 아닌 영창파기. 고작 그것만으로 마법이 완성됐다. 그 순간, 손끝에서 무언가가 번쩍이더니 이내 섬전처럼 쏘아졌다. 붉은 번개― 어렵지 않게 피했으나, 그것은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늑대를 뒤쫓았다. 그 끝이 갈라지는 것이 마치 뱀의 혀처럼 보인다. 날름거리는 혀는 또 하나의 혀를 만들고 무수히 이어져 수십 수백의 붉은 뱀이 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것들은 나뉘고 더해지기를 반복했다. 늑대가 피해 지형을 건드리면, 어김없이 타올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늑대가 피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늑대가 기어코 붉은 뱀을 끝까지 피하자 침묵하는 입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유 없이 숲을 불태우고 있던 게 아니다. 밀림을 태우고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여태 구름에 스며들어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제 충분한 마력이 모여들었을 터. 마력의 준비가 끝났다면 구현하면 끝. 제법 질기게 방해해줬지만, 대마법은 완성됐다. 높게 떠오른 암운이 그 형태를 갖췄고, 침묵하는 입은 최후의 영창을 내뱉었다.

[O fereastră de tunete și fulgere care acoperă cerul și pământul―!]

그렇게, 천둥을 동반한 뇌정의 창은 세상을 뒤덮었다.

―아니, 그랬어야만 했다. 다만, 암운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연히 올려다보던 침묵하는 입은 이내 노성을 터뜨렸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렇게,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늑대의 붉은 안광이 폭사했다.

***

본래, 모조 엘릭서를 마시게 되는 건 놈이었다. 그렇게 불완전한 괴리를 모두 털어낸 놈이 가져왔던 재앙은 악랄하고, 강렬했다. 놈 하나를 막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헌터가 희생됐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순간, '보았을 리 없는 광경'이 뇌리에 떠오르자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

반드시, 여기서 놈을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여태 공방을 나누며, 계속 떠올리고 있던 '어쩌면'이라는 생각은 이미 확신으로 변했다.

'본체는 멀지 않아.'

놈은 꼭두각시가 맞다. 하지만 본체가 먼 곳에 있다면 회복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까지 싸우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분명 놈의 본신은 머지않은 곳에 있다. 놓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돌아오게 두지 않겠다. 여기서 반드시 놈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 첫 번째는 성공했어.'

대마법은 먹어 치웠으니까. 적어도, 지금 당장 후발대가 괴멸할 일은 없어졌다는 거다.

'흑무(黑霧).'

늑대의 생각에 호응하듯, 먹구름이 흩어졌다. 아니, 흩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먹구름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드리운 암운에 스며들었던 건 연기가 아니라.

[흑무(B)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귀화(C) Lv.7이 흑무(B) Lv.1에 통합…]

[흑무(B) Lv.1 → 흑무(B) Lv.3…]

[남은 스킬 포인트 23 → 7]

―검은 안개(黑霧)였다는 거다.

떠오른 메시지들은 한데 치워버렸다. 노성을 지르는 침묵하는 입을 보며 늑대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스며든 안개는 기어코 먹구름을 집어삼켰다. 5절 대마법. 2구획 전체를 어둡게 물들였던 밤은 처참히 스러졌고, 드리워졌던 암운은 걷히고야 말았다.

다시, 빛이 밝혀지는 가운데 늑대는 안개를 불러들였다. 먹구름을 집어삼킨 검은 안개를 두른 늑대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

'―여기서부터야.'

늑대는 방심하지 않았다. 싸움은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여태까지는 방심을 이용했을 뿐이다. 또, 대마법에 정신을 집중하고 마력을 할애하고 있느라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놈은 진심을 드러내리라.

그 말인즉, 한때 스퀘어 마스터였던 이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

여명의 클랜장, 강태준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방 안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베일 너머에 앉아있는 창선이 허탈히 중얼거렸다.

"결국 오고야 말았는가."

인사치레도 없이 자리에 앉은 강태준의 얼굴에 한 점의 동요가 생기더니, 드물게 표정을 드러냈다.

지금 그 한마디가 대답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게, 검성과 창선이 마주 앉은 자리엔 긴 침묵과 정적이 내려앉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