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46 이단의 탕아들 (2)
"……!"
괴인의 공격은 어떻게든 흘렸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바퀴나 굴러 나무에 부딪쳐 쓰러졌다. 뒤늦게 은자림이 떠올린 생각은 인류, 아니 생명체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라는 거였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전투의 열기에 몸이 달아오른 것인지 고개를 꺾고 한껏 소리치는 살덩이 괴인.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은자림은 자신의 손아귀가 찢어졌음을 알아채곤 소매를 물어뜯어 창과 손을 묶었다.
"……."
―창대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어져 있다. 연성이 뛰어난 합금이 아니었다면 두 동강 났으리라. 슬쩍 고개를 돌린 은자림은 다시 창을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며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알파?'
늑대의 상징과도 같은 검은 불꽃. 마법사와 싸우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역시 이들이 탕아들이라는 뜻일까? 보고 있던 사이, 괴인의 울부짖음이 멎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지를 박차고 걸음마다 땅이 울렸다.
"……!"
아무리 뛰어난 연성을 지녔다고는 해도 한번 휘어진 창으로는 흘리기 어렵다. 다음 순간, 은자림의 손목이 기이하게 꺾였다. 괴인의 공격을 받아넘기면서 은자림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식한 힘. 그렇다고 도망쳤다가는 후발대를 쫓을 거란 생각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잠깐 움츠린 사이, 괴인이 돌진해왔다.
'빨라졌……!'
쿵―! 무지막지한 폭력과 막을 수 없는 힘에 나가떨어진 은자림은 늑골이 완전히 가루가 되고 내장이 진탕되었음을 느꼈다.
"커흑…!"
피를 토하자 시야가 흐려졌다. 은자림은 폐속에 남은 숨을 쥐어짜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마력으로 창을 움직여 억지로 자신을 밀어냈다. 뒤늦게 괴인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찍었고, 은자림은 그 풍압에 몇 바퀴나 더 굴렀다. 가까스로 연명했으나 여기까지. 이제 다음은 없으리라.
'……!'
성큼성큼 다가오는 괴인. 그래도 단념하긴 싫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신의 결연함을 증명하듯 두 눈을 감지 않았다. 그렇게, 은자림의 시야를 가득히 메운 건 살덩이 괴인의 주먹이 아니라―
"일제 사격!"
―밀림을 뒤덮은 화살 세례였다.
"궁수! 재장전!"
그 호령에 맞춰 궁수들이 다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어느새 괴인을 꿰뚫은 수십 개의 화살. 그사이에 재빨리 달린 헌터 하나가 은자림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았을 때, 구진하는 시선을 돌렸다.
'바닥나기 시작했나…'
남은 화살은 많지 않다. 도망치던 후발대와 합류하면서 정비를 마쳤지만, 앞으로 쏠 수 있는 횟수는 기껏해야 2, 3번.
"괜찮습니까?"
안부를 묻는 말에 은자림은 쓰게 웃었다. 뭐가 잘못된 건지 말하는 것도 힘겨워서. 최후까지 힘을 쥐어짜 낸 그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불사… 처형, 자."
그 목소리는 헌터의 귀에는 똑똑히 들린다. 불사. 처형자. 곧바로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털어내듯 가벼운 손짓에 우수수 화살이 떨어지고 순식간에 재생하는 거로 보아…
'…정말 자신이 있었다는 거군.'
진심으로, 네버랜드 공략대를 몰살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갑주의 검사. 살덩이 괴인. 그리고 아마 절벽 위에 있을 침묵하는 입과…
'…알파.'
검은 불꽃. 분명, 알파는 저곳에 있으리라. 드리운 암운을 걷어낸 것이 알파였다는 것을 알아채곤 구진하는 이전, 섬을 정리했을 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말했던 끝을 막는다는 게.'
정말 우리와 같은 뜻이라면… 구진하는 고개를 털어 상념을 지웠다. 생각하는 것보다 당장 급한 일이 있으니까.
세검사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타오르는 불길 속,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돌풍에 섞여 흩날리는 흑무는 여태까지와는 다르다. 두 스킬의 조합― 늑대는 돌풍으로 하여금 흑무를 움직이고 있었다. 걷어진 밤. 침묵하는 입은 한계까지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법사의 강대한 마력. 내면에서 요동치는 그 힘을 주문을 통해 영창하고, 마법으로 구현한다.
[Fulger mare, îmi vei distruge dușmanii―!]
손끝에서 쏘아진 벼락이 안개와 부딪친다. 검은 안개는 기어코 마법을 갉아먹었으나, 마법은 기어코 안개를 뚫어냈다. 고속 영창과 주문 파기― 주문 보류 이상가는 마법사의 비기. 비록 위력은 줄었으나, 기어코 안개를 뚫어낸 3절의 마법이 늑대를 향해 날았다.
'……!'
늑대는 벼락을 보았다.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마법은 공기의 저항 없이 음속을 훨씬 뛰어넘어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온다. 그 속도는 눈으로 보고 쫓을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미리 보았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간파와 직감이 읽은 대로 경로에서 벗어나자, 절벽을 감싼 귀화를 뚫고 그 너머까지 날아가고 말았다.
아무리 빨라봤자 동선이 뻔하다면 늑대에게 닿지 않는다. 전투 속에서, 마법사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inversare]
반전의 주문. 불길을 뚫고 지나갔던 벼락이 다시 돌아온다. 마법사를 향해 달리던 늑대는 돌아오는 벼락을 느끼고 탄력을 발했다. 아슬아슬하게 지면에 틀어박힌 벼락은 스멀거리며 잔디를 태우더니, 땅 아래 스며들어 사라졌다.
'접근하기 힘들어.'
팔 하나를 잃고 머리가 없음에도 이렇다. 흑무는 놈을 파고들었으나, 벽에 가로막힌 듯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실제로 가로막혀 있다. 흑무가 집어삼키는 양만큼 마력을 계속해 발산하고 있으니까. 그 마법사답지 않은 무식한 발상과 끝을 모르는 마력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래된 마법사.'
천둥과 벼락을 다루는 옐로우 스퀘어. 한때, 옐로우 스퀘어의 마스터였던 이. 더 정확히는 전(前) 옐로우 스퀘어 마스터'였던 것'. 그게 놈의 정체였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마력을 쌓아왔을까? 감히 나와는 비교하는 게 불가능하리라.
―그래도 지금은 내가 유리하다. 놈의 마력이라고 무한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역시 있었나.'
저 멀리, 눈으로 보기도 어려운 곳에서 무언가가 격돌할 때마다 터져나가고 있었다. 네버랜드 공략대를 치러 왔다는 시점에서 예상하기는 했다.
고작 저거노트(Juggernaut)와 침묵하는 입 둘이서만 왔을 리는 없을 테니까.
칠영웅이었던, 검성이었던 강훈이라면 네버랜드 공략대를 치는 데 그 이상의 인물이 없다.
'강태호가 막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균형이 오래가지는 않으리라. 숲의 던전에서 보았던 강태호는 분명 강했지만, 지금의 강훈 정도는 아닐 거다.
…상념의 끝에,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놈에게 접근했다. 안개와 마력이 대치를 이루고 있을 때, 몇번이나 가시를 발사했으나 뚫지 못해 바닥에 떨어졌다.
가시에 둘린 검은 불꽃조차 너무나 쉽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결국 흑무뿐이야.'
하지만, 발산한 마력이 수 겹의 벽이 되어 놈을 감싸고 있다. 안개와 마력의 대치. 흑무가 놈의 마력을 뚫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정작 문제는 그 시간이었다. 마력에 둘러싸인 침묵하는 입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Dumnezeul tunetului și al fulgerelor, coboară]
거대한 마력의 솟구침. 이 상황에서, 놈은 또 다른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 흑무에 마력을 갉아 먹히면서도 놈에겐 영창할 여유가 남아 있다는 거다.
'…망할.'
분명 주문의 영창이 끝나면, 놈의 마법이 발해진다면 상황은 또 한번 반전하고 말리라.
―또다시, 선택의 때가 다가오고 말았다.
[나아갈지 혹은 멈추어 설지를]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보았을 리 없는' 광경이 또 한번 뇌리를 스쳤다. 작게 숨을 뱉은 늑대의 눈이 붉게 빛나 안광을 흩뿌렸다.
'……알겠어.'
―네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겠다. 이것은 내가 아니라 네가 보았던 광경이니까. 네가 바라는 대로 이 싸움이 끝나면 너를 찾아가겠다.
다만, 지금은 놈을 쓰러뜨리는 게 더 급하다.
모든 진실을 뒤로하고 늑대는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했다.
의지를 다진 순간, 침묵하는 입의 마력을 갉아 먹던 흑무가 늑대의 의지에 반응해 되돌아왔다.
안개가 거둬지자 영창이 빨라진다. 금세 주문을 외운 마법사의 내면은 한없이 일그러져있었다.
'……!'
안개에 가려진 시야가 되돌아왔을 때, 침묵하는 입은 삼킬 수 없는 침을 삼켰다.
일렁이는 그림자. 끓어오르는 마력. 타오르는 검은 불꽃. 난폭한 바람과 검은 안개. 그 모든 것을 두르고, 늑대는 자세를 낮춰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뚫을 수 없다면.
'나아가야만 해.'
―목숨을 걸고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마법사와 늑대는 끝을 준비했다. 그 최후를 향해, 늑대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
"뀨우우웃…!"
진작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어린 용은 불안한 듯 울었다. 끝도 없는 불길한 마력이 솟구치는 와중, 어린 용은 그 마력의 근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본래, 요정용이란 부정한 것을 먹고 자라는 생물. 누구보다 그에 민감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은 여전히 어렸고 미숙했으니까.
―결국,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늑대가 싸워 이기고 돌아올 것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어린 용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싸움이 끝났을 때, 늑대를 노리는 화살이 닿지 않게끔 하는 것뿐이었다.
숨어서 시위를 당기는 궁수를 보는 어린 용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
"……자네 말대로, 그는 분명 죽은 게 맞네."
틀림없는 사실이다. 2055년― 던전에서 홀로 남겨진 강훈이 살아남을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공략하지 못한 최악의 던전. 심지어 당시에 아예 정보조차 없던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홀로 남겨진 강훈은 죽었다고,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남겨진 두 아들, 강태준과 강태호는 그의 시신 없는 장례를 치렀다.
그 당시에도 뛰어난 헌터였던 둘은 '네버랜드의 광란'에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두고 던전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둘은 늑대가 했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왔더군."
창선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네. 던전에서 돌아온 그는 괴물이 되어 있었어."
인간이 아니게 되고 말았다. 강훈은 창선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내가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어느 조직에 협조해달라고.
강훈은 오랜 친우이자 인류의 기둥. 그의 귀환은 인류에게 더없는 빛이 될 터.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조직이란 게 [이단의 탕아들]입니까?"
"그렇네. 그들의 목적은 신의 피, 엘릭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네. 그게 가능하다면 부활의 기적을, 신의 이적을 발할 수만 있다면… 강훈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 여겼네."
그래서, 창선과 광휘는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도왔다. 하지만 머잖아 그들이 깨달은 것은 그래서는 안 됐다는 후회뿐이었다. 강훈을 도와야한다는 일념에 정작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엘릭서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 채 탕아들을 도왔으니까.
"그들 조직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어째서 엘릭서를 원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네. 다만, 강훈이 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만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
"…칠영웅."
인류의 정신적 지주인 칠영웅. 그 일원인 강훈이 변절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인류에, 사회에 더 없는 혼란을 야기할 테니까.
"그래. 그 때문이었네."
같은 클랜원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다름 아닌 창선과 그 아들, 세계 최고의 궁사 광휘였으니까. 탕아들의 두 간부를 처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거기까지였을 뿐.
"…결국 얼마 전, 아카데미를 습격했을 때 그는 무노를 죽이고 말았네."
그 말을 들었을 때, 강태준은 으스러지라 두 주먹을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영웅으로 살았고, 마지막까지 영웅으로 죽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인류를 배신했다는, 동료를 죽였다는 참혹한 진실.
"……그리고 나를 찾아왔더군. 그는 강했네. 아니, 괴물이 되면서 더 강해졌더군. 아마 시간이 더 있었다면 나 또한 무노와 같은 꼴이 되었겠지."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는 진실을 확인한 검성의 은빛 외안경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어째서, 아버지께서는!"
그 순간, 창선의 방 문이 급하게 열리며 둘의 대화가 끊어졌다.
"큰일입니다! 클랜 로드! 지금, 네버랜드 봉쇄조가 당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강태준의 얼굴까지 확인한 고원 클랜원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검성께서 왜 여기에?"
ㅡ더 대화를 나눌 분위기도, 상황도 아니었다.
"가려는가?"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준이 끄덕였다.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창선."
방문을 나서는 강태준의 뒤를 보며 창선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부디 조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