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47 공동 전선 (3)
ㅡ늑대를 탄 은자림은 자신이 바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녀의 묶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거센 돌풍과 검은 안개 속에서 은자림은 몸을 숙여 알파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떨어질 것만 같아서. 날아오는 마법에 반사적으로 창을 휘두르려던 그녀는 이내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완벽해.'
알파는 때때로 허공에 발판을 만들어 밟고, 발판에 촉수를 이어 끌어당기기도 하며 입체적으로 움직였다. 기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은 움직임. 직접 느껴보니 알파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알게 됐다.
'이게…'
괴인의 손을 피하더니, 허공을 밟고 곧바로 뛰어오른다. 휙휙 바뀌는 풍경을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찬데 늑대는 그 사이에 무수한 마법을 피하고 때때로 쳐내며, 검은 마력을 안개로 밀어내며 길을 만들어간다.
한낱 짐승의 감이 아니라 확실한 지성이 느껴지는, 미래를 보는 것만 같은 놀라운 예측.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등 위에 올라탄 자신까지 커버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개안하는 것만 같았다. 같은 광경을 같은 시선으로 보고 있자니 알파가 원하는 것,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움직이는 건 전부 알파한테 맡기자. 다만, 그가 바랐던 것처럼 투창을 준비하자. 부정한 것을 없애는 멸마(滅魔)의 창을.
'…….'
눈을 감은 은자림은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남은 마력은 많지 않았지만, 아직 사용할 수 있다. 끌어올린 마력이 창에 담기기 시작하자 늑대는 슬쩍 고개 돌려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걸로 됐어.'
눈에 불을 켜고 쫓는 괴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며 늑대는 판금과 사슬, 대못을 밟으며 내달렸다. 저거노트는 점점 출렁이는 살덩이처럼 변해가고 있었지만, 늑대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놈의 마법이 완성되는 게 먼저인가 혹은 은자림의 창이 저거노트를 뚫는 게 먼저인가. 이미 저거노트의 갑주는 7할 이상 분리됐지만―
[Acolo, moartea ta a fost destinată, așa că acest tunet va fi ultimul sunet pe care îl auzi―!]
ㅡ놈 또한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일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하는 게 아니다.
'이게…'
전조가 없었던 게 아니다. 놈이 퍼뜨렸던 검은 마력, 그 전부가 전조였다. 대기가 차갑게 가라앉고 일대를 덮었던 검은 마력은 높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흑무에 돌풍을 둘러 쫓았으나, 저거노트의 손이 안개를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침묵하는 입이 불러일으킨 바람의 마법이 기어코 안개를 흩었다.
'…망할.'
쫓을 수 없다는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검은 마력은 한데 뭉쳐 이글거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세상의 끝에서나 볼 법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검은 태양.
마력이 이글거리며, 점차 거대해져간다. 만약 저런 게 떨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무언가가 뒷덜미를 강하게 쥐었다.
"Suliţă pentru a-l ucide pe diavol―"
은자림의 손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창에 담긴 웅혼하고 정결한 마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여전한 감정을 읽었다. 소설 속에서 보았던 고결함.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과 강직한 성격을 간직한 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괜한 불안과 의심이 모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끝나지 않았어.'
머지않아 검은 태양은 내려앉으리라. 그때가 되면 확정된 죽음이 찾아올 터. 흑무라 한들 태양은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세상은 멸망할 테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다. 그런 암담함 속에서 늑대는 있는 힘껏 내달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아직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
―투창할 준비를 끝마쳤다. 정신 고갈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진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시야가 흐릿해지자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거친 털의 감촉을 느끼며 영창했다.
"Suliţă pentru a-l ucide pe diavol―"
빛이 번져가기 시작하기 시작하자 한껏 어깨를 당겼다. 들어 올린 창에 담긴 마력이 끓어 부글거렸지만, 이미 몇 번이나 막힌 공격이다. 또 순식간에 재생하고 말리라.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걸까?
살짝 눈을 내렸을 땐, 오로지 정면만을 보고 있는 알파의 시선을 볼 수 있었다. 같은 광경, 같은 눈높이. 불안해하는 자신과는 달리 알파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붉은 눈에 의심 따위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그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자.'
―그저 던질 뿐. 의혹이 사라지자 숨을 가다듬으며 투창할 적의 모습을 확인했다. 괴인의 모습을 확인하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흐려진 시야가, 날아오는 마법이 조준을 방해하고 있다.
'좀 더…!'
앞이 트여야만 한다. 눈살을 찌푸린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어디선가 휘몰아친 바람이 모든 마법을 걷어낸 순간.
"……!"
마침내, 그녀는 창을 던졌다.
***
"빨리 들어가! 빨리!"
좁은 차원의 틈새를 비집으며, 공략대가 하나 둘 1구획으로 되돌아간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2구획의 하늘, 아득히 높은 곳에 떠오른 검은 태양― 이은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저런 게 떨어지면.'
대마법이라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법을 배운 건 아니었지만, 궁금증에 대마법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에 홍유리는 코웃음치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며 핀잔을 줬지만, 심심했는지 흘리듯 말한 적이 있었다.
'대마법이란.'
마법사가 추구하는 궁극과 이상을 드러내는 것. 따라서, 대마법을 일으킬 수 있는 마법사의 숫자만큼 대마법이 있다고. 어렴풋이 흉내 낼 수는 있지만, 동일할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도대체 저 검은 태양은 무엇을 바랐던 걸까? 보기만 해도 아득해지고 불안감이 전신에 감돈다. 만약 자신이 저 앞에 서 있었다면?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그와 동시에 그럴 수 없음이 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저주하며 이은하는 이를 악물었다.
'…알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뿐이었으니까.
***
끝까지 물고 늘어지던 늑대도, 창선의 제자도 여기서 끝이라고 마법사는 확신했다. 범위는 다소 조절했지만, 그래도 대마법.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서서히 검은 태양이 타오르며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에 마법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니, 겨우 이런 게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둔한 것들. 결국 찾아올 끝은 고작 이런 게 아니다. 그녀가 보여주었던 필연적으로 찾아올 '종말'은 이런 것과는 달랐다. 그녀는 종말을 막을 셈으로 엘릭서를 만들려는 모양이지만, 사실 마법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끝이 찾아오건 아니건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게 됐으니까. 조직이 목표로 삼은 엘릭서를 만드는 것도 그에게 있어 차치할 문제일 뿐이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다만, 그가 바랐던 것은.
한때 마도의 끝을 탐했고, 그 일념에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도 버렸을 만큼 마법을 탐구했던 마법사. 평생을 매진했고 이런 모습이 되어 사후에도 마도를 걸었으나,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질될 만큼의 충격.
―종말.
그것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녀가 보여주었던 끝은 마법사의 심상을 뒤틀었다. 마도의 끝을 추구했던 마법사는 그 순간부터 종말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법사는 또 하나의 대마법을 익혔다.
모든 것에 끝을 고하는 검은 태양. 마법사는 그것을 보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실제에 비하면 이 얼마나 초라한가. 그가 보았던 것은 고작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마법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태양이 내려와 끝을 고하기 시작했으니까.
[끝이다. 이 버러지들아…!]
그리고, 그것보다 빠르게 무언가가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
창은 공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늑대를 믿고 던졌던 창은 빛살이 되어 나아가 단숨에 뻗어졌지만, 괴인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양손을 겹쳐 막고 있었다.
'……!'
궤도를 읽혔다. 뚫을 수 없을 거다. 이미 몇 번이나 똑같이 막혔으니까. 은자림이 입술을 짓씹었을 때,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
어느샌가 검은 안개가 창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창의 끝이 검게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괴인의 손바닥과 맞닿았고, 순식간에 꿰뚫고 나아갔으나 은자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틀렸어.'
창에 여력이 적다. 분명 꿰뚫었으나, 그 탓에 궤적이 흔들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빗나가고 말 터. 은자림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예상한 것을 늑대라고 모를 리 없다. 언뜻 마주친 알파의 눈은 여전히 확신에 차 있었다.
"―바람?"
은자림의 외마디 소리. 창의 끝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나더니, 검은 안개가 흩날리며 나선의 흐름이 커졌다. 마침내 창자루의 끝에서 한계까지 압축된 돌풍이 터지자, 부족했던 여력과 비틀렸던 궤도를 모두 바로잡았다. 그 순간, 은자림은 목청껏 소리쳤다.
"마를 멸하는 창―!"
그렇게, 빛이 폭사했다.
***
천지를 덮은 빛 속에서 늑대는 발판을 밟고 뛰어올랐다. 점차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늑대는 저거노트의 몸속에 숨은 짙은 악의를 보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지만 그러기 전에 검은 태양이 내려앉고 말았다.
오로지 저거노트만을 제외하고 일대의 모든 것을 검은 태양이 뒤덮었다. 결국, 암흑 속으로 사라진 늑대를 보며 침묵하는 입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안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창선의 제자도, 짜증 나는 늑대도 처리했다. 지면에 내려앉은 검은 태양은 지면을 몇십 미터나 꿰뚫고 한없이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
'끝났다.'
마법사가 확신했을 때, 저거노트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래. 머잖아 이 상처 또한 낫게 될 거다. 마법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제 남은 공략대의 오합지졸을 쓸어버리기만 하면 전부 끝이다.
"―――."
그 순간, 낮은 울음소리가 들리자 마법사의 시선이 돌아갔다.
'……!'
분명 대마법에 휘말렸을 텐데… 어떻게? 늑대의 등 뒤, 창선의 제자와 그녀의 어깨 위에 있는 작은 용을 보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 이…!'
―원래라면 불가능했다. 검은 마력이 덮고 있는 이상, 점멸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검은 마력은 전조가 되어 검은 태양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대마법이라 한들 반드시 안전한 곳이 있다. 함께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술자를 휘말리게 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대마법은 저거노트를 제외한 모든 것을 뒤덮었고 휘말리기 직전, 점멸로 저거노트의 드러난 상처, 깊숙한 내부까지 기어이 들어오고야 말았다. 타오르는 불길과 검은 안개가 저거노트의 재생을 늦추고 있었다.
"―말했었지."
전부 보인다는 듯, 살덩이를 거칠게 물어뜯은 늑대는 그 속에서 검게 물든 구슬을 꺼냈다.
[투시(E)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투시(E) Lv.3 → 투시(E) Lv.4]
자신의 육신을 잃은 마법사의 말로. 침묵하는 입의 본신(Life Vessel)을 마주하며 늑대는 더 없는 살기를 드러냈다. 포횰했던 살의는 오롯이 마법사에게 향해졌고, 검게 물든 저거노트의 안에서 늑대의 눈이 붉은 안광을 흩뿌렸다.
"기다리라고."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영창, 주문, 마력, 종말― 모든 것을 잊고 단지 공포와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무전기 너머로 들었던 말을 떠올렸을 때, 마법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발버둥 치며, 마법사는 모든 마력을 뿜어냈지만, 검은 안개가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그렇게 늑대의 송곳니가 드러났을 때, 침묵하는 입은 최후의 발악으로 내부의 마력을 모두 폭주시켰으나.
"내가, 네 목숨을 거두러 갈 때까지…!"
―그 전에 늑대는 마법사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