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49 마랑 강림
"……!"
1구획으로 돌아온 온 은자림이 틈새를 돌아봤지만, 이미 닫힌 뒤였다. 돌아오는 건 자유지만, 2구획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다시 광장을 돌파해야만 한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혹시 처형자가 나온다면? 100% 확실한 죽음을 맞는다.
'검공…'
일견 껄렁해 보이던 태도와는 달리 초연한 눈동자는 분명 죽음을 각오한 이의 것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알파의 말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분명, 알파 또한 마찬가지로 2구획에 남아있을 터. 암운을 드리웠던 마법사와 살덩이 괴인 말고도 무언가가 있을 거다. 여전히 이 불길함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선자. 얼른 공략대와 합류하죠."
김주섭의 재촉에 은자림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
"―오셨소?"
태연히 바위에 앉아 있던 강태호가 몸을 일으켰다. 뻐근하다는 듯, 목을 비틀고 꺾고 두드리며 태연하게 하품하는 모습에 강훈이 물었다.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
"거, 오랜만에 효도나 할까 하고."
드르륵- 패태검이 지면을 긁었다. 가벼운 투로 말하지만, 강훈은 강태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먼 옛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각오한 눈빛. 결의가 담긴 눈동자에 강훈은 서로에게 대화는 필요 없으리라 느꼈다. 다만, 결과는 불 보듯 뻔하리라. 싸움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강훈이 검을 휘두르자 창염이 거세게 휘날렸다. 양자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묘하게 온도가 낮아져 간다. 타오르는 창염을 밀어내며 강태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어쩌면 인류 최강일지도 모르는 힘. 그것만큼은 강훈이라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발길질하려는 순간, 이미 강훈이 발등을 밟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태호는 힘으로 발을 들어 올려 균형을 무너뜨렸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해 밀어붙인 순간, 이글거리는 창염이 튀어나와 강태호는 혀를 차곤 마력을 끌어올렸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강태호가 두른 마력의 갑옷을 창염이 이글거리며 갉아먹었다. 그 전에 어깨를 앞세운 강태호가 달려들었다. 위압적인 돌진― 강훈이 몸을 돌려 피했을 땐, 그 풍압에 창염이 흩어지고 말았다. 마력은 모르겠지만 신체 능력만큼은 전성기의 칠영웅에 가까울 정도로 단련되어 있다. 하지만…
"어설프구나."
적어도 강훈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근본적으로 검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뿌리가 같다고 모두 같은 나무가 되는 건 아니다. 그게 무엇보다 극명한 둘의 차이였다.
"망할…"
얕긴 했지만, 복부가 베이고 말았다. 가지고 있는 스킬이 서서히 회복시키겠지만, 그럴 여유는 주지 않을 터. 양자의 검이 다시 맞부딪친 순간,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간격을 벌렸다. 그 사이로 커다란 폭음이 터지며 거대한 발이 지면을 내리찍고 있었다.
"――――――!"
격노한 백사자가 천지를 떨치며 울부짖었다. 2구획의 주인, 스노웰이 강훈을 뒤쫓아 전장에 난입한 것. 그에 강태호는 혀를 차며 굴렀다.
"……."
강훈은 구태여 강태호를 쫓는 대신 차원의 틈새를 넘었고, 그 모습을 본 강태호는 이를 갈았다. 선택해야만 한다. 강훈을 쫓아 1구획으로 넘어갈지. 아니면 던전이 폐쇄될 때까지 몬스터를 막다 장렬히 전사할지를. 상황은 달랐지만, 예전 강훈이 그랬듯 네버랜드에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실소가 나왔다.
"좆까고 있네."
당연히 전부 다 한다. 노망 든 영감탱이도 막고 기어나오는 몬스터도 전부 막고 말겠다. 강태호는 망설임없이 차원의 틈새를 향해 몸을 던지며 마력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하다못해 놈들이 바로 쫓아오지 못하게끔. 갈라진 틈새, 사라진 강태호를 보며 광란에 물든 괴물들이 울부짖었다.
***
차원의 틈새를 넘은 강태호가 곧바로 굴렀다.
"……!"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검이 바닥을 찍었다. ―쫓아온다. 황급히 패태검을 옆으로 눕혀 막았지만, 강한 충격에 근육이 찢어졌다.
"황급히 가던데 바쁜 거 아니었소?"
"어차피 오래 가진 않는다."
강훈이 대검을 휘둘렀고 강태호가 받았다. 충격에 손목이 저릿해졌지만, 그것보다도 패태검의 상태가 좋지 않다. 금이 가는 것을 넘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걸 노리기라도 하듯, 집요하게 검의 중심부를 노리고 있다. 검과 검이 맞부딪쳐 울린 순간, 낭패를 금치 못한 그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언제 닫히는 거지? 아니면 이미 닫혔나?'
―모르겠다. 여기서 던전의 폐쇄를 알 방법은 없으니까. 다만 있는 힘껏 발버둥 쳐서 강훈이, 아버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강태호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 사실을 강훈이라고 모를 리 없다. 어차피 길어봤자 1분. 그 안에 결착이 나리라. 패태검이 부러지거나, 참지 못한 강태호가 달려들거나― 강태호의 선택은 후자였다.
파괴적인 돌진.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 몸을 던져 달려들었다. 그렇게 바닥에 강훈을 눕히고 순식간에 마운트 자세를 취한 강태호는 주먹에 한껏 마력을 담아 내리쳤다. 광장 바닥이 산산이 깨져나가는 충격. 그렇게 갑주가 부서진 순간, 강태호는 눈을 빛냈다.
'기회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절호의 기회. 어깨 뒤로 한껏 팔을 당겨 내뻗다가 강훈의 갑주에서 나온 것을 본 강태호는 재빨리 물러났다.
"3구획의…!"
망령(Shade). 정신을 침식해 끔찍한 환영을 보여주는 몬스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강훈이 그것들을 두르고 있었다.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시야가 흐릿했다.
'망할…'
피한 게 아니다. 갑주 자체에 망령이 스며들어 있었을 터. 어쩌면 일부로 주먹에 맞아 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태호는 이를 갈았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가…'
환각과 환영을 보면서 강훈과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물러서고 물러난 끝에 강태호는 결국 복부를 관통당하고 말았다.
"……끝이다."
끝을 알리는 목소리에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강태호가 유일하게 앞서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 힘. 무시무시한 악력이 강훈의 대검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깨 뒤로 팔을 한껏 당기고 주먹을 내뻗으며, 그는 마력을 터뜨렸다.
'이걸로 끝낸다…!'
혼신의 일격은, 당연하다는 듯 붙잡히고 말았다.
"망할…"
타오르는 창염의 정체는 극한(極寒)의 냉기를 품은 서리불꽃. 어느새 꿰뚫린 복부에서 순식간에 피어오른 얼음이 전신을 얼려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과 같은 힘을 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한 줄기 섬전이 끼어들었고 강태호의 복부에 박힌 검을 거세게 뽑아낸 강훈이 섬전을 막아냈다. 그렇게 시간을 번 사이, 강태호가 눈을 부라렸다.
"왜, 왜! 가라고 했잖아!"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지만, 강태호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녀가 자신을 도와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데 그걸 모른단 말인가? 은자림이 손을 뻗자 튕겨 나간 창이 그녀의 손에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며 강훈은 이채를 띠었다.
"…그렇군. 창선의 제자인가."
강태호는 은자림에게 소리치며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가! 지금이라도 가라고!"
이제 더는 누군가가 죽어선 안 된다. 영웅으로 남았던 아버지의 명예와 혈육으로서 짊어져야 할 마땅한 책임. 이미 무노 영감탱이가, 주교 할멈이 죽었다. 더 이상 그에게 죽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강태호는 이를 악물었지만, 은자림은 묘한 확신과 함께 눈을 빛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혼자가 아니니까."
그녀의 뒤로 발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미로의 안개를 뚫고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 은빛 검을 늘어뜨린 그 모습에 강태호는 아연한 듯 중얼거렸다.
"…형님?"
―공략대와 합류하려 미로를 되돌아가던 그녀가 여명의 인원과 합류했던 것. 강태준의 시선이 잠깐 강태호에게 향하더니 이내 강훈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시린 눈동자로 그는 한 때 자신의 아버지였던 이를 바라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투항해라."
차갑게 뇌까리는 목소리에 강태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과 자신. 그리고 뒤늦게 깨어난 백군태. 선자와 하연을 비롯한 여명의 일원이 속속들이 모여있다. 아무리 그라 한들 이 포위망을 벗어나진 못하리라. 강태호는 싸움이 끝났다고 확신했고, 적막함이 내려앉은 광장에서 강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한 가지 잊은 건 없느냐?"
―그 순간, 광장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Эми тест тапшыруучу келгендиктен, тест башталат!}
아직 대가를 치르지 않은, 시험을 치르지 않은 이가 이 광장에 딱 한 명 있으니까. 강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광란에서도 광장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건가? 어느샌가 광장의 벽면으로부터 타우루스와 추적자를 비롯한 몬스터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Өзүңүздү кан жана өлүм менен далилдеңиз!}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강태준이 강훈에게 쇄도했다. 단숨에 간격을 좁혀 휘두르는 검을 쳐낸 강훈이 창염에 휩싸이자, 강태준은 물러나야만 했다. 그렇게 두 검성이 싸우기 시작할 때, 여명의 클랜원들과 함께 광장의 몬스터를 쳐내던 강태호는 이를 악물었다. 마력으로 베었던 차원의 틈새가 제 모습을 찾아가고 그 사이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강훈을 쓰러뜨리는 게 쉽지 않겠다 여긴 강태준은 입술을 짓씹었다. 폐쇄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물러나 입구를 막는다면. 강훈이 네버랜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면…
"퇴각한다!"
그 말에 반 토막 난 패태검으로 타우루스를 벤 강태호가 꿰뚫린 복부를 부여잡았다. 빙결된 덕에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쓰라린 건 어쩔 수 없다.
"거, 괜찮으십니까?"
"아, 이 뺀질이 자식이. 괜찮아 보이냐?"
이기준의 부축에 강태호는 실소했다. 혼자 죽으려 했는데… 잠깐 생각하던 그는 황급히 이기준을 쳐냈다. 손잡이를 잡고 팔목으로 지탱해 가까스로 회색 참격은 막았지만, 울혈을 토해냈다.
"시벌, 처형자…"
1구획의 보스. 산양의 머리가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태준이 강훈을 붙잡고 있는 사이, 모두가 광장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미로에서부터 거대한 백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노웰?!"
어째서 미로에서? 바포메트의 마력이 담긴 참격에 차원의 틈새가 갈라지고 2구역에 떨어졌던 늑대처럼 백사자 또한 엉뚱한 곳에 떨어졌던 것. 강태호가 시간을 벌겠다고 날린 참격은 그 의도대로 잠깐의 시간은 벌었으나 스노웰을 미로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되돌아온 백사자가 미로의 경계를 틀어막으며 울부짖었다.
"――――――!"
전방에 백사자. 후방에는 처형자. 최악의 던전. 네버랜드의 보스를 앞뒤로 두고 끝도 없는 괴물의 무리가 몰려든다. 괴물과 헌터가 치고받는, 광란(狂亂)이 시작됐다.
"탈출할 수가…!"
두 검성이 싸우는 순간, 백사자는 발을 내리찍으며 그들을 몰아붙였다. 포위망이 좁혀지기 시작하자, 헌터들은 이를 악물었다. ―이젠 빠져나갈 수 없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최악.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 여기가 무덤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때,
"……안개?"
서서히 장내가 어둡게 물들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강태준이 그 존재를 보자마자 그의 안경― 마력을 담아 D등급 감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스퀘어의 걸작이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먹어치우는 자(Swallower)]
오직, 그것만이 그가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