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08화 (108/407)

〈 108화 〉 #49 마랑 강림 (2)

한기가 차오르고, 어느새 스멀거리는 검은 안개가 널리 퍼져 일대를 뒤덮기 시작했다. 공기가 가라앉는다― 홀로 차원의 틈새를 비집고 나타난 그것이 입김이 서린 숨을 뱉었다.

"―――."

숨소리는 대기를 타고 퍼져나가 광장 전체를 낮게 울리자 살육을 탐하던 광란의 무리가 우뚝 멈췄다. 헌터들을 몰아붙이던 백사자와 처형자조차 그 존재를 감지하고 시선을 돌렸다.

"……!"

또한, 그것은 무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소슬한 살기에 헌터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진원지를 찾기는커녕 두려움에 떨며 전율하는 몸을 주체할 수 없다. 영원히 멎지 않을 것만 같은 떨림- 이성을 잃은 광란의 도가니를 멈춘 아찔한 존재감.

"아, 알파…"

이미 쉬어버린 목소리가 그 존재의 이름을 거론했다. 검은 털빛. 타오르는 칠흑의 불꽃과 스산한 검은 안개― 장내의 시선이 집중되자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더니 일순, 모든 것이 해방됐다.

검은 불꽃과 안개가 터지듯 퍼져나갔고, 화마와 안개가 순식간에 광장을 가득 채웠다. 정적을 깨며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지고, 붉은 꽃이 피어올랐다. 무리의 그림자는 이미 영량에 침식당해 늑대의 지배 아래 주인을 꿰뚫었다. 비명과 단말마는 붉게 물들어 가라앉았다. 광장에는 다시금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렸다. 괴물들은 그저 공포에 떨었지만, 헌터들은 아연해 했다.

"…미친."

적어도 그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림자는 모두 예외 없이 급소를 꿰뚫었음을. 하나하나에 의지가 깃든 것처럼 일렁이고 넘실거리는 그림자. 헌터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흘깃거렸다.

…그럴 리 없는데도, 움직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 정적을 깬 것은 하나의 발소리. 쓰러진 무리 위로 커다란 늑대가 시체를 짓밟았다. 흥건한 피 웅덩이를 밟았음에도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 증발시킨다. 그렇게 잠깐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차원의 틈새 너머로 작은 용 한 마리가 튀어나와 늑대를 뒤따랐다. 검은 불길이 덩치를 키웠고 단숨에 소각되어가는 무리― 그 매캐한 연기가 퍼지자 무리는 생물로서의 본능을 완전히 되찾았다.

"―――!"

각기 다른 비명을 지르며 무리는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길이 자신을 뒤덮어도 멈추지 않고 비좁은 틈새를 비집는다. 서로가 서로에 얽히고 엉망진창으로 날뛰며 차원의 틈새를 향해 달렸다.

"……."

믿기 힘든 광경에 어느샌가 소강된 싸움. 강태준은 부서진 안경의 테를 잡아 찌그러뜨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먹어치우는 자(Swallower)?'

수십 년을 헌터로 살아온 그조차 들어본 적 없는 존재.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몬스터― 스퀘어의 걸작이, 감정이 통하지 않는 괴물.

'마치 자색의 흑호처럼…'

이질적이다. 생물로서의 격이 다른 듯한 이질감. 놈과 자색의 흑호는 유사한 점이 많다. 정보를 읽을 수조차 없었던 몬스터는 이걸로 둘. 붉은 안광이 자신을 쳐다본 순간, 강태준은 소슬한 한기를 느꼈다. 살의는 없고 광기도 없었지만, 위압되는 듯한…

'…….'

생각이 깊어지던 순간, 강태준은 손목을 꺾어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비스듬히 칼날을 마찰 시켜 흘려냈고 창염이 이글거리며 타오르자 발길질로 강훈을 차 냈다.

'역시.'

―찼다고 생각했는데 발목이 꺾이고 말았다. 둘의 싸움은 수 싸움. 빈틈을 노리고 순간을 꿰뚫는 일순의 싸움. 다만, 승패는 점점 기울어져 간다.

'…쉽지 않다 이건가.'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 일격을 주고받더라도 쌓이는 데미지가 다르다. 아직은 호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일 터. 하지만 이길 필요는 없다. 스노웰을 뚫고 클랜이 물러날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되니까.

―그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강훈의 시선이 돌아갔다. 강태준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로.

***

그림자 속으로 쓰러진 몬스터들이 가라앉았다. 본래라면 불가능했던 일이지만, 늑대의 전신을 덮은 검은 문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자 그것을 가능케 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 → Lv.8]

'―여기까지는 좋아.'

그림자 속으로 빨아들인 몬스터를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그걸 확인하며 재차 눈을 빛냈다. 여기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점. 어디까지나 잔챙이를 걸러냈을 뿐이니까.

'흑무.'

몬스터를 미쳐 날뛰게 만드는 광란 또한 마력이 만들어낸 현상일 뿐. 그렇다면, 흑무가 광란을 잠재우지 못할 리가 없다. 광란이 진정된 몬스터들에게 공포를 심어줘 도망치게 했을 뿐. 어디까지나 연출이었고 그 실상은 대단한 게 아니다. ―터무니없지만, 적어도 늑대는 그리 생각했다. 무리를 걷어낸 늑대는 다시금 상황을 살폈다.

'스노웰.'

둘만의 싸움을 이어가는 강태준과 강훈. 미로로 통하는 입구를 틀어막은 백사자와 싸우고 있는 공략대. 남은 몬스터는 아직 제법 있었지만,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리라.

'……문제는.'

―내가 놈을 쓰러뜨릴 수 있는가 없는가. 단 1%의 승산도 없었던 괴물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놈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마지막으로 스테이터스를 점검했다.

[폭군(먹어치우는 자{Swallower}) Lv.8] [EXP 65123 / 224670]

[업 2.61%] [영량(影量) 17.67m³]

[체장 4.61m] [체고 1.79m] [체중 486.9kg]

[힘 306] [민첩 347] [체력 385] [마력 447] [극기 15]

[보유 스킬 목록]

탈식(C) Lv.7, 가시 촉수(D) Lv.4, 탐지(C) Lv.2, 재생(D) Lv.7, 뛰어난 은신(C) Lv.8, 통찰(D) Lv.9, 뛰어난 청각(D) Lv.4, 약한 육감(E) Lv.7, 뛰어난 시각(D) Lv.4, 완화(C) Lv.2, 뛰어난 경화(C), 변이(D) Lv.1, 약한 독 내성(E) Lv.1, 위압(E) Lv.9, 만복(C) Lv.4, 수륙양용(D), 뛰어난 탄력(D) Lv.8, 뛰어난 간파(D) Lv.4, 돌풍(C) Lv.8, 뛰어난 후각(D) Lv.5, 뛰어난 직감(D) Lv.8, 투시(E) Lv.4, 마력재생(D) Lv.8, 흑무(B) Lv.3, 통각무효(D), 요정어(F), 수납(E) Lv.5, 그림자 지배(B), 대마력(B) Lv.2, 공허(A)

[남은 스킬 포인트 15]

―여태 쌓아온 성장.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처형자를 보며 늑대의 붉은 안광이 폭사했다.

***

"산개!"

수백 톤에 달하는 거대한 사자의 앞발이 휘둘러지자 공략대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광란을 멈춘 늑대가 공간을 만들어 준 덕분에 그럴 수 있었다. 맞지는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풍압에 서로 지탱하며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백사자는 바닥을 쓸듯 휘저었고, 강태호는 앞발에 휘말릴 뻔한 이기준의 목덜미를 당겨 끌었다.

"가, 감사―악?!"

―다음 순간, 그는 하늘을 날았다. 말할 것도 없이 강태호가 집어던졌기 때문에. 수십 미터를 뛰어오른 헌터가 백사자의 등에 내려앉자 강태호는 크게 소리쳤다.

"거기서 까불고 있어라!"

그 말에 이기준은 한숨을 쉬었다. 스노웰이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거대하기만 한 아둔한 동물 같은 게 아니다. 구획 보스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검을 든 이기준은 마력을 담아 단숨에 내려찍었고 스노웰은 불쾌하다는 듯 뛰어올랐다.

"씹!"

양손으로 검을 찍어 내렸지만 털밖에 흩날리지 않는다. 스노웰이 가진 높은 체력, 바위가죽과 완화를 뚫기엔 무리였다. 그나마 칼끝이라도 가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게 그의 강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칼끝에 마력을 응축 시켜 내부로 밀어 넣은 순간 이기준은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비틀거리더니 털을 잡고 가까스로 견뎠다.

고통이 아니라 불쾌감에 울부짖는 괴물. 스노웰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고 기어코 떨어지게 했다. 수십 미터 상공에서 떨어진 이기준은 눈을 부릅떴다. 지척까지 다가온 스노웰의 아가리가 그를 기어코 집어삼켰으니까. 새빨간 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는 삶을 포기했다.

"이 씨발 강태호 개새…!"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지면에 내려서 있었다.

"……?"

죽은 게 아니었나? 환각이라도 봤나? 그럴 리가 없다. 스노웰의 입안에 들어갔을 때, 흥건히 묻은 침이 그게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어안이 벙벙했던 이기준은 귓가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뀨우우웃!"

감사하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몬스터 한 마리― 요정용의 모습에 그는 허탈히 실소했다.

"이게 뭔…"

"은공!"

그러다가 비키라는 듯 자신을 쳐내며 요정용을 껴안는 선자의 모습. 소중한 것을 껴안는 듯한 모습에 뒤늦게 떠오르는.

'…그러고 보니 요정용이랑 같이 다닌다더니.'

역시 광장에 홀연히 나타나 광란을 쳐부쉈던 늑대는 역시 알파였던 모양. 다시 요정용을 바라보자, 은자림의 어깨에 당연하다는 듯 내려앉은 그것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뀨우우~!"

무언의 압박에 이기준이 실소했다.

"고맙다. 죽는 줄 알았는데…"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게 실로 거만하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날개를 펄럭였다.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건 사실. 몬스터에게 목숨을 구해졌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겨우 이런 걸로 목숨값을 치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때, 뒤통수를 쥐어박는 주먹에 이기준이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강태호가 주먹을 쥐고 서 있었다.

"하늘 같은 상관한테 뭐? 개새? 이게 미쳤나."

"……아. 누구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뭐. 인마. 니가 등신이라 그런 거지."

주먹을 가리키는 모습에 구시렁거리던 이기준이 합죽이가 됐다. 그러는 와중, 스노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를 먹은 것 같은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없어서. 의뭉스러워하던 스노웰이 지면에 내려선 이기준의 모습을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너 왜 살아있냐는 듯이.

"……."

태평스러운 그 모습에 이기준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상처 사이로 마력을 흘려 넣기까지 했는데… 스노웰이 고통을 못 느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굳건한 모습에 질려버렸다.

"뭐 뾰족한 방법 없습니까?"

그에 강태호가 턱짓했다.

"―――Când coboară florile de zăpadă"

이어지는 영창, 대마법을 준비하는 하연. 그녀의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 버티라는 뜻. 확실히 스노웰 정도 되는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대마법은 필수― 솔직히 대마법으로도 스노웰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이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니까.'

이렇게라도 싸울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유… 저 멀리 처형자와 신경전을 벌이는 알파의 모습에 이기준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몇 달 전엔 일개 워그였을 뿐인데 네버랜드의 구획 보스와 당당히 맞서는 괴물이 된…

'…아무튼 지금은 호재다.'

생각은 나중. 지금은 던전을 탈출하는 게 먼저다. 그렇게 헌터들이 스노웰과 다시 맞설 때, 광장의 중앙에서 산양과 늑대가 격돌했고.

―검은 늑대(魔狼)가 울부짖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