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49 마랑 강림 (4)
바포메트의 미간에 뿔이 돋았다. 반인반수 이족보행의 괴물이었던 산양의 몸이 기이하게 꺾여 변형되더니 불길한 사족보행의 짐승, 완연한 산양의 형상을 취했다. 갈색 털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산양과는 어울리지 않는 예리한 이빨을 드러내며 진한 입김을 내뿜었다. 동공은 검게 물들고 3m가 채 되지 않던 체격은 점차 거대해졌다.
'…….'
강신― 전혀 다른 모습이 된 산양이 대지를 박찼다. 끝도 없이 커다래지더니 족히 수십 톤이 되어 달리는 괴물에 의해 그나마 남아있던 광장 바닥이 완전히 깨져나갔다. 거의 지진에 가까운 땅울림. 그림자로 숨어드는 건 불가능하다. 발판을 밟고 뛰어오른 늑대는 단번에 수십 미터를 도약했고 산양도 뒤따라 뛰어올랐다. 영량을 퍼뜨려 산양의 얼굴을 덮으려 했지만 거대한 마력이 퍼져나가더니 그림자를 휩쓸었다. 입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돌풍과 탄력을 이용해 벗어난 늑대가 높이 뛰어올랐다.
"……!"
추락한 산양이 거대한 먼지를 피워올리더니, 그 실루엣이 진해졌다. 분명 뛰어오르고 있다. 늑대는 타오르는 가시를 쏘아냈으나 거대한 산양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 커다란 턱이 벌려지자, 부정의 무리가 날아올랐고 새빨간 혀가 넘실거렸다.
가시와 무리가 맞부딪쳐 재가 되어 떨어지고, 잿빛 산양은 늑대보다도 훨씬 더 높게 뛰어올라 추락하기 시작했다. 드리운 그림자― 늑대를 삼키겠다는 듯 고개를 뻗는 괴물의 모습에 안개가 파고들었으나 아무리 흑무라도 저 거대한 덩치를 다 덮을 순 없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산양은 금세 다시 뛰어오르며 늑대를 쫓았다. 딴에는 사뿐사뿐 뛰는 듯 했지만, 주변이 초토화되어간다.
'멀어져야 해.'
산양의 발굽이 지면에 닿을 때면 매번 바닥이 깨져 크레모아 수십 개를 터뜨린 것처럼 파편이 비산했다. 헌터들을 향해 날아가던 파편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집어삼킨다. 그에 산양은 눈살을 좁혔으나, 곧 잊어버리고 늑대를 향해 뛰어올랐다.
'……!'
검은 동공은 오직 늑대만을 비추고 있다. 헌터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최대한 멀어지려 했으나 그게 쉽지가 않다. 결국 한껏 입을 벌린 산양에게 잡히기 직전, 늑대는 영량를 펼쳤다.
산양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보다 빠르게 바람을 두른 안개가 마력의 폭풍을 억눌렀다. 먹히기 직전, 늑대는 안개가 억누른 위로 영량을 펼쳐 덮었다.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 늑대를 삼키지 못한 산양이 바닥에 내려와 분하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바람에 흩날려 안개가 흩어지기 전, 먼저 뛰쳐나온 늑대가 산양의 머리 위를 달렸다. 한없이 달리는 늑대를 떨쳐 내기 위해 미친 듯 머리를 흔들지만, 고작 그 정도에 떨어질 늑대가 아니다.
기어코 머리 위로 올라선 늑대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경계 없는 검은 동공을 마주한 늑대가 낮게 울었다.
"―――."
산양은 떨쳐낼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고 그 전에 검은 안개가 동공을 파고들어 괴롭게 했다. 산양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가볍게 착지한 늑대는 수납 스킬로 아공간을 열었다.
―길고 예리한 대낫. 사신의 것을 본떠 만든 것만 같은 처형자의 낫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산양은 자신이 원하던 대로 늑대를 떨쳐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미간에 자라난 뿔이 바닥에 깊게 박혀 머리를 빼는 게 쉽지 않았다. 그사이, 늑대는 여러 가닥의 촉수로 꺼낸 낫을 단단히 쥐었다.
동공이 안개에 갉아 먹혀 보이지 않게 된 산양이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늑대가 쥔 낫에 회색 마력이 담기기 시작했다. 탈식― 아까 허공에 뛰어오른 산양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때 빼앗은 마력이었다.
처형자의 낫이 주인을 찍어내렸다. 두껍고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커다란 목을 단번에 자르는 건 무리였지만, 산양이 그랬듯 회색 마력이 참격이 되었다.
거의 반쯤 목이 잘려 나갔을 때, 몸부림친 산양이 바닥에서 뿔을 뽑아내 고개를 들었고,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재생이라도 이런 상처는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 하물며 검은 안개가 파고 들어있는 있는 지금에서야. 산양은 입을 열며 모든 부정의 무리를 쏟아냈고, 곧 우글거리는 그것들이 산양의 침과 함께 끝도 없이 쏟아져 바닥을 기었다.
거짓 불멸. 산양이 믿을 스킬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몬스터를 느끼고 화색을 띠었던 산양보다, 한발 빠르게 그림자가 몬스터를 뒤덮어 사라지게 했다. 그에 성난 산양이 발을 굴렀고 선명하고 거대한 발굽이 자국을 남겼다.
한 마리. 딱 한 마리만 먹으면 된다는 생각에 산양은 두리번거렸으나, 뒤늦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자각했다. 남아있던 몬스터들마저 산양의 움직임에 휘말려 파편이 박혀 생을 달리했고, 늑대가 삼킨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산양은 바닥을 씹어삼켰다.
"……?!"
―아까 쏟아낸 부정의 무리. 산양은 그것을 되새김질이라도 하듯 먹어 치웠고, 거짓 불멸이 상처를 되돌려 갔다.
'뭔…'
산양이 사역하고 있는 부정의 무리, 뱀과 벌레들은 분명히 생명체가 맞다. 다시 생각해보면 거짓불멸이 발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늑대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몸속에 사역하고 있던 뱀과 벌레들을 먹어 치웠다고 거짓 불멸이 발동하는 건 사기가 아닌가 해서. 투시로 보았을 때, 다행히 더 사역하고 있는 무리는 없는 것 같아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모든 상처를 회복한 산양이 울부짖었다. 그러더니 덩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강신을 포기하고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강신으로 거대해진 상태에선 늑대와 싸우는 게 불리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에 늑대는 보란 듯이 낫을 흔들었다. 어디 뺏고 싶으면 뺏어 보라는 듯한 태도에 산양이 눈을 부라렸다.
'이걸로 됐어.'
광장의 반대편. 헌터와 백사자가 싸우는 장소에서 상당히 멀어졌다. 그 때, 싸라기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상공에는 마력이 형상을 이뤄 눈꽃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눈팔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산양이 달려든다. 잡아 비틀어 버리겠다는 듯 두 손을 뻗는 모습에 늑대는 대낫을 수납으로 아공간에 집어 넣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무기를 사용하다가 산양에게 대낫을 빼앗기는 것보단 나으리라. 이를 드러낸 늑대는 곧바로 탄력을 사용했다. 그래도 산양을 따돌리는 건 무리.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순간, 돌풍을 터뜨리자 산양이 눈을 감았다. 그림자가 높게 일어나 산양을 뒤덮었고 그가 마력을 터뜨리기까지 그림자는 전신을 난자했다.
곳곳이 피로 물들자 산양은 격노하며 울더니 마력을 사용해 쇄도했다. 한 번은 피했지만, 산양이 뛰어다니며 끈질기게 쫓아오는 걸 계속 도망칠 수는 없다. 다시 일어난 그림자로 산양을 뒤덮으려는 순간, 기어이 늑대를 붙잡은 산양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헤아릴 수 없는 악력이 늑대의 발목을 조여왔다. 늑대는 급히 산양의 손을 물어뜯었다. 악식으로 산양의 손목을 물어뜯어 끊어낸 것과 동시에 산양 또한 늑대의 발목을 무식한 힘으로 뜯어냈다.
떨어진 신체. 기이하게도 늑대의 발목을 산양이 손목이 잡고 있는 모양새. 서로가 으르렁거렸고 그림자가 떨어진 신체를 집어삼켰다. 설마 발목 하나로 거짓 불멸을 사용할 수 있겠냐 싶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크르르―"
두 짐승이 서로를 향해 울부짖는 중, 산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선지 상처의 재생이 느리다……. 순간, 산양의 눈에 무언가가 일렁였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고 산양은 그렇게 느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무언가. 스멀거리는 검은 안개가 그것을 감추듯 의뭉스레 덮었을 때, 늑대가 달려들었다. 이미 발목의 재생이 끝난 늑대와는 달리 산양은 손바닥도 재생시키지 못했다. 역관절의 다리를 높게 든 산양이 늑대를 걷어차기 직전, 딱 닿지 않는 거리에서 늑대가 멈춰 섰다. 거센 바람이 늑대의 털을 휘날리게 했지만, 발은 닿지 않았다.
…그랬을 터다.
다리를 내린 산양이 비틀거렸다. 균형이, 높이가 맞지 않는다. 빤한 시선으로 고개를 내린 산양은 자신의 발굽이 무언가에 먹혔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늑대를 보는 산양. 분명 시선은 서로에게 향해 있었으나 늑대의 초점이 맞지 않다. 마치 산양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이제 알겠어.'
여태 사용법을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림자에 덮어씌워 사용했을 뿐. 그다음에는 날아오는 파편을 없애는 정도였을까.
'그런 게 아니야.'
이 힘은 고작 그런 게 아니다. 이제는 알겠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능력인지를. 늑대가 어떤 생각을 강하게 품었을 때, 마침내 그것은 본연의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하울링. 늑대가 높게 울부짖었고 그 소리는 광장의 벽에 부딪치며 수없이 메아리쳤다.
'――치운다.'
다가오는 산양을 보며, 늑대의 눈이 짙은 빛을 흩뿌렸다. 늑대에게 다가가던 산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재생되었던 손목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니,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물러나 거리를 벌린 산양이 눈에 마력을 집중했고 그제야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안개에 자신을 숨기고 있던 그것이 공간을 집어삼키며 일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늑대의 턱이 서서히 벌어지고 붉은 안광을 흩뿌렸다.
'먹어치운다…!'
먹어치우는 자. 자신을 자각한 늑대로부터 퍼져 나간 그것이 끝없는 탐욕과 함께 아지랑이를 일으켜갔다.
***
스노웰 공략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놈이 미로의 통로를 틀어막고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지만, 강태준이 합류했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강태호와 강태준. 여명을 이끄는 쌍두마차. 두 형제가 반 토막 난 검으로 백사자를 유린해갔다.
"―――!"
다만, 쓰러뜨리는 게 쉽지는 않다. 백사자의 B등급 스킬, 바위 가죽은 두 형제로서도 그리 쉽게 뚫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확실한 건 상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점. 검성과 검공이라는 이름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상처를 입고 지친 몸을 이끌면서 스노웰을 압도해갔다. 하지만 결정타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마침내.
"Îngheață într-un viscol, ―Zero Absolut!"
―대마법이 완성되었다. 아름다운 눈꽃이 내려서자 여태 버티고 서던 스노웰은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스노웰이 미로의 경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백군태가 소리쳤다.
"길이 열렸다! 들어갈 준비 해!"
달리는 백사자에게서 떨어지는 헌터들. 분명 대마법이 적중한다면 스노웰이라 한들 쓰러지게 되리라.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마법의 근원, 마법사인 하연을 향해 달리는 백사자에게서 그녀를 구해야만 한다.
"―――――!"
달려오는 괴물을 향해 숨을 몰아쉰 하연은 기다리지 않고 눈꽃을 자신의 머리 위로 추락시켰다. 떨어져내리는 눈꽃. 다가오는 백사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하연이 비틀거릴 때, 섬전처럼 다가온 은자림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늦어…!'
백사자에게서 도망치는 건 무리다. 머잖아 잡히고 말리라. 게다가 대마법의 영향권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한참을 달린 끝에 둘을 따라잡은 백사자가 커다란 발을 내리찍었고 피할 수 없다고 여긴 순간,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달리던 그대로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한 백사자가 광장 벽에 처박혔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져내려 백사자를 덮었다.
"휴우우…"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벗어난 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한 입김도 함께 흘러나왔다. 휘말리지도 않았는데 동상에 걸린 것처럼 손발이 차갑다. 파랗게 질린 안색의 하연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지만, 빛가루가 뿌려지자 한결 편해진 기분이었다.
"뀨뀨!"
감사하라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곤 두 사람이 실소했다. ―싸움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가도록 하죠."
이제 던전을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은자림에게 부축받은 하연이 창백한 안색으로 미로의 경계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
우스스. 무너진 벽의 파편을 털어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백사자가 다시 일어났고.
"……!"
그와 동시에 광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던전, 네버랜드의 붕괴. 던전이 폐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