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52 여명에서
늑대의 여명 행은 결정 사항. 은자림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지만, 알파에 대한 건은 감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일은 검성에게 넘기는 게 옳다고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이 통일되자 이리저리 늑대를 둘러보던 강태호가 말했다.
"그건 알겠는데. 어떻게 데려가지?"
알파의 일은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것. 클랜 내에서도 단단히 주의시키겠지만, 지금 당장 알려져서는 곤란하다. 최소한의 밑 작업이 끝나기까지 알파의 존재는 공표할 수 없다. 가능한 한 들키지 않게 클랜까지 데려갈 방법을 생각해야만 한다.
"음…"
은신을 사용하면 편하겠지만, 그 경우 알파가 따라오는지 확인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어련히 알아서 오겠냐마는 그 신뢰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무엇보다 지금쯤 바깥에서는 부상자들을 옮기려 차량이 몰려와 있을 터. 정말 위급한 인원을 제외하면 전부 다 병원으로 이송될 거다. 여명 또한 예외가 아니고 지금쯤 절차를 밟았을 테니 차량 하나를 빌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터. 거기까지 생각한 강태준이 늑대에게 물었다.
"…그림자는 오래 사용할 수 있나?"
강태호의 그림자에 숨어들었던 것처럼. 그림자의 사용에 제한이 없다면 일이 편해질 터. 페리와 촉수로 놀아주고 있던 늑대는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가 눈살을 좁혔다.
'아닌 척 캐묻네.'
은근슬쩍 가늠해 보려는 것이 뻔히 보이긴 했지만, 대놓고 드러낸 것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잘 됐군."
곧 강태호가 가게 앞까지 차를 운전해 가져왔다. 중형차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구겨 넣은 것이 어지간히 불편해 보인다. 늑대는 강태준의 그림자에 숨어들었고 그렇게 차량은 헌터 전용 차로를 따라 출발했다.
"뀨우우!"
"아 이 자식. 까탈스럽네 진짜."
쓰다듬으려던 강태호가 페리에게 물려 낭패를 겪었다. 손이 물리긴 했지만, 그 무식한 체력에 고작 페리의 이빨이 박힐 리도 없는데. 한데 손을 털면서 엄살을 부리는 모습이 진짜 아픈 건가 긴가민가할 정도로 실감 난다.
다소의 우여곡절 끝에 여명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그에 나는 묘한 감정을 품었다. 여명은 아니었지만, 타 클랜에 들어갔을 때는 항상 잠입해야 했는데… 지금도 모습을 숨겨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지만.
'새벽의 여명.'
깔끔하고 정돈된 7층 건물. 겉으로 보기에 특별할 건 없어 보인다. 차를 주차하고 지하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나와도 좋다."
클랜 로드의 방. 7층을 혼자 사용하고 있는 건지 제법 넓직 하다. 방 한쪽에 개인 연무장까지 있을 정도로, 그림자에서 나온 늑대를 본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갈무리한 것 같군."
그렇다면. 방 안에서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으리라. 연무장까지 있으니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을 터. 그동안 알파를 관찰하며 정말 함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면 된다. 일단 참고는 있었지만, 강태호처럼 재생 스킬이 없는 그로서는 상처를 치료할 필요가 있다. 상처 위로 포션을 뿌리고 붕대를 감고… 늑대는 그 모습을 보며 하품했다.
'잠깐 휴식이라고 생각할까.'
굳이 잠을 잘 필요도 없지만,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신뢰를 쌓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 그건 늑대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있는 게 전부였다.
'어차피 침묵하는 입도 처치했으니까.'
놈들에게 있어서도 큰 타격일 거다. 한동안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할 터. 무엇보다 홍유리와의 싸움 이후, 각 클랜에 숨어 있던 변절자들을 다 걷어내기까지 했었다. 그사이에 또 심어놨을지 모르니 100%라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잠깐은 괜찮으리라. 아니 이후의 일을 생각해 헌터들의 협력이 필요한 거다. 짧은 휴식이라 생각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맞을 터.
"……뀨우."
참고로 공략대 대부분은 병원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버랜드였으니까. 거기서 멀쩡할 리도 없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여명 클랜의 구조까지는 모르겠지만, 탐지로 살펴본 결과 건물에 남은 인원은 그래도 많다.
"…뀨우우!"
아마 사무부의 직원들이 아닐까. 그리고 네버랜드에 참여하지 못했던 헌터들일 터. 혼자 그렇게 추론하고 있을 때, 심통이 난 것처럼 갑작스레 페리가 달려들었다.
"뀨우우웃! 뀨우우! 뀨뀨!"
찰싹찰싹 꼬리로 때리는 녀석. 그동안 또 커져서, 정확히는 매개체를 섭취한 이후 기어코 5kg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작은 소형견 정도 무게와 비슷해졌다는 말. 한창 심통이 난 페리가 볼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마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이냐는 듯이.
"……지루해?"
그 말에 페리는 맹렬한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여기저기 들쑤시며 호기심을 보이더니 그새 질려버린 모양. 나야 가만히 있어도 상관없지만, 페리는 아니니까. 이제 1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새 심심해졌나 보다. 사각사각, 어느샌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강태준도 집중이 깨졌는지 눈살을 좁혔다.
"…그래. 아직 어렸지."
산책이라도 시켜줘야 하나 중얼거리던 강태준은 결국 펜을 놓았다.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나? 이쪽 사정에 맞춰 주고 있는 만큼 어지간한 요구는 들어주겠다."
"페리는 보이더라도 문제없나?"
"없는 건 아니지만…"
이만한 크기의 요정용이다. 이미 공략대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상, 요정용이 알파와 함께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파의 존재를 한 번쯤은 의심하리라. ―오히려 바라던바. 갑자기 터뜨리는 것과, 여지를 주고 시간을 두고 알리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니까. 이것도 따지고보면 밑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었다.
"―괜찮다."
그래서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요정용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이니,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것과는 별개로 클랜 내에서 소동이 벌어지지는 않으리라. 늑대는 그에 페리의 산책을 부탁했고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갔다 오지."
페리라는 이 요정용을 잠깐 산책시켜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강태준은 요정용이 알파와 함께 가겠다고 떼를 쓰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은신이 있다고 하지만 괜히 알파까지 갈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요정용은 끝까지 알파의 귀를 물고 고집을 피웠다. 그에 알파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그러자 그 커다란 몸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발목의 족쇄까지 사라지고 두르고 있던 문양도 없어진다. 눈 깜짝할 새 검은 강아지처럼 변했다는 뜻이다.
"이런 스킬도 가지고 있었나…"
얼마나 많은 스킬을 가졌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아무튼 지금 이 모습이라면 문제는 없으리라. 작게 끄덕인 강태준이 방문을 열자마자 요정용은 제멋대로 뛰쳐나갔다. 바로 뒤따라가는 검은 강아지… 저 모습을 보고 누가 구획보스급의 몬스터를 떠올릴 수 있을까? 여태 쫓을 수 없던 이유에는 저 스킬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강태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아…"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한참을 통화하던 홍유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네버랜드 공략이 끝났다는 연락. 그리고 우택에 이어 구진하까지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말에 홍유리는 푹 한숨을 쉬었다.
헌터들에게 있어 부상은 그리 야단법석을 떨 일은 아니다. 하는 일이 그런 거였으니 상처는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팔 한쪽이 아예 사라졌다는데. 거기에 더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답답한 심정에 홍유리는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만약 거기에 내가 있었다면 하는 후회가 들었다. 몸조리나 잘하고 있으라더니 등신같이… 그에 집중하고 있던 백소율은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별일 아냐. 나갔다 올 테니까 하던 거나 마저 하고 있어."
검게 물든 선글라스를 챙기는 홍유리를 보고 백소율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거 끼시면 앞도 안 보이시잖아요. 차라리 같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끄고."
신경질적으로 툴툴거리며 홍유리가 문을 열자 백소율은 한숨을 쉬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간 지내면서 홍유리의 상태를 모를 리 없었으니까.
"별일 없으셔야 할 텐데…"
백소율의 걱정을 뒤로하고 방을 나선 홍유리는 복도 맞은편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버랜드 공략은 이제 막 끝났으니 다들 병원행일 텐데…
"오, 홍유리."
손을 들며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모습. 언제 돌아온 건지 강태호가 태연한 얼굴로 서 있어서.
"…괜찮아요?"
"뭐라고?"
잘못 들었다는 듯 과장되게 귀를 후비는 모습에 홍유리는 잠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가 숨을 가다듬었다. 네버랜드에 참여도 못 한 자신이 무슨 염치로 짜증을 내겠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그녀가 다시 물었다.
"괜찮냐고요."
"거 참. 너한테 걱정도 받아보고 살다 살다 별 일이 다 있다. 걱정 마라. 나잖냐."
하기사 그를 걱정하는 게 멍청한 일이리라.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냐?"
"병원요. 아까 연락이 와서."
"아 그랬댔지. 진하도 많이 다쳤다던데."
얼추 듣기로 팔이 잘렸다던가. 직접 본 게 아니라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굳이 구진하만이 아니더라도 다친 사람들한테 얼굴이라도 비칠 필요는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인 강태호가 물었다.
"같이 갈까? 안 그래도 나도 갈 참이었는데."
과연 면회가 가능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잠깐 고민하던 홍유리는 그러자고 답했다. 조금 자존심 상하기는 하지만, 혼자 병원까지 가는 것보다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 강태호와 함께 가는 게 더 나으리라. 그렇게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려던 때, 위층에서부터 무언가가 내려오더니, 빙빙 돌았다.
"…요정용?"
홍유리는 유난히 커다란 요정용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클랜 건물 내부에 왜 이런 게 있지? 요정용은 강태호를 보고 다가 오더니 꼬리를 휘둘러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아, 미안하다니까. 안 만질게! 안 만진다고!"
게다가, 마치 어디서 본 적 있는 듯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위층은 분명…'
클랜장인 강태준의 방이었다. 클랜장님이 데려온 걸까? 급히 어딘가 나가시는 것 같더니… 근데 그러면 이 근육 뇌는 어떻게 요정용을 알고 있는 거지? 네버랜드에서 이제 막 돌아온 거 아니었나?
홍유리의 머릿속에 여러 의문이 차오르는 가운데 위층에서 검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내려오는 게 보이자 강태호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강아지를 데려왔을 리는 없을 테니까…
"으하하. 이 자식 이거."
크기도 모습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자세히 보면 원래 모습이 언뜻 남아있기는 하다. 애초에 요정용이 여기에 있는데 가긴 어딜 가겠는가? 크게 웃어젖힌 강태호는 어쩐지 불퉁스레 보이는 알파의 모습에 한참을 웃다가 찔끔 흘러나온 눈물까지 훔쳐야 했다.
"큭큭… 아무튼 이제 가자고…?"
한참을 웃은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와는 반대로.
"아, 아…"
저도 모르게 주저앉은 홍유리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선글라스를 찾아 더듬거리다가.
"……?"
―고개를 갸웃거린 늑대, 아니 강아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자빠졌다.
"아."
뒤늦게 홍유리의 상태를 떠올린 강태호가 외마디 소리를 흘렸을 때, 어디선가 조그맣게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뀨?"
어색한 침묵 속에서 오직 페리만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