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52 여명에서 (2)
한참이나 이어진 정적. 후각을 비활성화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늑대가 눈만 뻐끔거리는 강태호를 보더니 다시 쓰러진 홍유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저번에 손목을 먹어 치웠을 때,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 홍유리가 잘못했다고 빌 정도였으니까. 눈이 돌아갔다고 변명은 할 수 있겠지만. 아니 다시 생각해봐도 자업자득은 맞지만, 상태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실금까지 하면서 빌었을 때, 생각했어야 했는데…
"뀨우?"
무슨 일이냐는 듯 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기심을 표하며 홍유리에게 다가가려던 페리를 제지하곤 촉수를 뻗어 홍유리를 들어 올렸다. 조그만 강아지의 몸에서 뻗어 나온 촉수는 이질적이었고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강태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늑대는 강태호에게 말을 걸었다.
"……부를 사람은?"
바닥에 흘린 거야 닦으면 그만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씻겨주기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마를 짚은 강태호가 금방 불러오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페리는 지금 뭐하냐는 듯 갸웃거렸다. …잠깐 할 일을 한 사이에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서, 선생님…?!"
곧 강태호가 데려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 백소율이었다. 휘둥그레 눈을 뜨더니 쓰러진 홍유리를 깨우려 하지만, 혼절한 사람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감춰줄 생각으로 물이라도 끼얹어주기는 했는데… 구정물이라도 괜찮았을까? 아무튼 그렇게 연출된 상황을 강태호가 어떻게든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지만…
'…좀 불쌍하네.'
그 자존심 덩어리가. 저 고집불통이… 이 정도면 사실상 정신병의 영역이라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나중에 스퀘어에 가기 위해선 홍유리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한데…
'저 꼴이면…'
도움을 받는 건 어렵지 않을까. 속으로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망가진 홍유리가 아니라 다른 마법사에게 접촉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여명에 홍유리 말고도 다른 마법사는 있을 테니까. 아무튼 백소율이 홍유리를 업고 사라지자 강태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뭔…"
믿기 어려운 상황에 기운이 쫙 빠지는 듯하다. 아무튼 휘휘 고개를 젓고 다시 알파를 찾으려던 그는 이미 강아지의 모습이 사라졌음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놈 참."
아무튼, 나중에 홍유리를 놀려먹을 건수가 생겼다고 시시덕거린 강태호는 홀로 병원으로 향했다.
***
"산책은 하고 왔나?"
강태준이 묻는 말에 늑대는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강태준은 아직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양이 어마무시했다.
'피곤하지도 않나?'
강훈과 싸우고 상처까지 입고서도 서류 작업을 하는 게 검성보다는 철인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아. 철인은 따로 있었지.'
"뀨우우~"
페리와 놀아주면서 아까 언뜻 보았던 백소율에 대해 떠올렸다. 그녀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얼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추론해보면 아카데미가 무너졌고 탕아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으니 여명이 보호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
선생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홍유리에게 배우기라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솔직히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모르는 건가?'
―생각보다 백소율의 마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통찰로 확인했던 그녀의 마력은 고작 307. B클래스 평균도 못 되는 수준이다. 물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아직 아카데미 학생인 점을 고려하면 분명 뛰어난 게 맞다. 맞는데…
'백소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달라야 해.'
그녀는 마녀였으니까. 마녀의 재앙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니까. ―마녀의 재앙. 부산에서 하수도의 재앙이 일어나 큰 혼란이 일어났을 때, 납치된 백소율은 탕아들에게 어떤 실험을 당해 이지를 잃고 마녀로서 재탄생했다. 그 방법이란…
"왜 그러지?"
저도 모르게 열이 뻗쳤던 모양. 강태준의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하며 속을 가라앉혔다. 침묵하는 입과 싸웠을 때도 그랬지만 이 현상도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다. 역시 가능한 한 빨리 시스템을 만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단은 백소율부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직 백소율만이 마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그녀의 체질 때문에. 마력 흡수율. 그중에서도 특히 영약과 같은 외부 마력을 받아들이는 데 특출나서였다. 쉽게 말해 영약만 있으면 마력이 복사되는 체질이라는 것.
'영약이 물론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래서 놈들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다. 이전, 사각지대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인간을 갈아 마력으로 만드는 것. 결국 온갖 실험과 함께 강제로 마력을 받아들인 백소율은 이지를 상실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마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지금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이 땅에서 탕아들을 뿌리 뽑은 지금, 백소율이 마녀가 될 확률은 0에 가깝다. 설령 탕아들이 남아 있다 해도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 생각이고. 하지만 24시간 백소율을 감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녀 본인을 어느 정도 수준까진 끌어올려 둘 필요가 있다. 간부라면 몰라도 말단이나 꼬리에게 당하진 않을 정도로.
말했다시피, 그 방법은 어려운 게 아니다. 아무튼 영약만 먹이면 되는 거니까. 고개를 돌려 강태준에게 말하려 했을 땐 이미 통화 중이었다.
"…알았다. 괜찮으면 상관없겠지. 그보다 3팀장은 만났나?"
[진하? 창문 너머로 보기만 봤는데 죽진 않을 것 같더라]
"불행 중 다행이군."
굳이 집중하지 않더라도 D등급 청각 스킬 때문에 다 들린다. 병원에 방문한 듯한 강태호와 통화 중인 모양.
"그 외에는?"
[좀 다친 애들은 수술하고. 나머지는 며칠 있으면 퇴원해도 상관없다는데]
"…알겠다. 그리고?"
[글쎄… 아무래도 죽은 애들이나 주교 할멈 장례식에는 얼굴 비춰야지]
강태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씁쓸함이 담겨있었다. 그에 강태준도 한숨을 쉬었다. 네버랜드에 대한 소식을 주고받는 모양이다. 전멸은 피했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은 많았으니까. 한동안은 그 뒤처리에 골머리를 썩이지 않을까? 좀 더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은 강태준은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밤이 깊어졌을 무렵, 드디어 그 산더미 같은 서류를 다 처리했는지 강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출발하지."
잘 자고 있던 페리가 눈을 비비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자라고 쓰다듬어줬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퇴근하십니까?"
당직 클랜원의 인사를 받은 강태준이 밖으로 나갔고, 주차했던 차량을 타고 움직였다. 솔직한 말로는 그냥 달리는 게 몇배는 빠르겠지만, 내 모습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으니까. 다소 답답하더라도 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달린 끝에…
'오랜만이네.'
그리운 지리산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전히 느껴지는 드높은 산맥과 수풀. 조금이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인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잠을 청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비활성화해 두었던 후각을 다시 활성화하고 기억에 남은 냄새를 쫓아 얼마 가지 않았을 때, 원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남아있구나.'
혹시라도 야생동물이 멋대로 먹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54년 묵은 인삼]
예전에 워그이던 시절, 어떤 곰이 알려줬던 인삼밭. 같은 영약으로 마력을 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이제 나는 사용할 수 없다지만 다른 이들에겐 이야기가 다르다.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강태준이 탄성을 뱉었다. 아까의 피로는 어디 갔는지 진지하게 눈을 빛낸다. 고작 인삼이라지만 얼핏 보기에도 묻혀 있는 연수가 다르다. 하물며 그 규모가 작지 않은 것이…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알파를 찾겠답시고 지리산을 샅샅이 뒤졌을 때도 찾지 못했는데 인삼밭 같은 게 남아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지리산으로 가자는 뜬금없는 말에 무슨 함정 같은 게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
인삼이 파묻힌 밭을 보자 그 의심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에 강태준은 쓰게 웃으며 자조했다. 신뢰를 증명하라고 신변을 맡겠다고 한 주제에 정작 자신은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러는 사이, 늑대는 페리에게 인삼 한 뿌리를 주었고.
"뀨~?"
흥미롭다는 듯, 냄새를 맡던 페리가 인삼을 먹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용케 뱉지 않는 게 기특했다. 아마 담겨있는 마력을 느낀 게 아닐까.
'저거노트의 살덩이가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침묵하는 입을 먹어치웠을 때, 저거노트의 내부에서 챙겨둔 것. 허나 요즘 페리의 먹성을 보면 그마저도 금방 떨어지고 말리라. 환수인 요정용이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면 굶기고 싶지 않은 게 속마음이었다.
'한동안은 인삼부터 먹이고…'
그러는 사이, 강태준도 가져온 배낭에 인삼을 주워 담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수납 스킬로 인삼을 담았지만… 그래도 반도 담지 못했다. 마냥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방대한 인삼 농장을 본 강태준이 혀를 내둘렀다.
"굉장한 양이군."
드물게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 따라오기만 해도 인삼 일부를 주겠다고 했으니, 강태준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득을 본 셈. 영약은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어쨌건 헌터의 수준이 조금이라도 올라간다면 내게도 나쁜 것 없는 이야기다. 고작 인삼 몇 뿌리로 여명의 로드에게 빚을 지게 만든다면 남는 장사이기도 하니까.
***
"……?"
깊은 밤, 홍유리의 뒤처리를 맡았던 백소율은 왠지 모를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다 옆을 보았을 때,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옆에 있어야 할 홍유리가 보이지 않아서. 그사이에 깨어나신 걸까?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던 백소율의 움직임이 멎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어디선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벽을 두고 들려오는 소리가 화장실밖에 더 있을까. 도대체 불도 켜지 않은 화장실에서 뭘 하는 걸까?
"선…"
그녀를 부르려던 백소율은 달싹이던 입술을 닫았다. 들려오는 소리가, 다름 아닌 우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더 정확히는 억눌린, 흐느끼는 울음소리였다.
"……."
잘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겨우 넘어졌다고 헌터가 기절을 할 리가 없으니까. 2팀장, 검공님이 대답을 꺼리시는 것 같아 묻지는 못했지만 아마 또 공포증이 도졌던 게 아닐까. 물이 뿌려져 있던 이유를 얼추 나마 알 것 같아 백소율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
억눌린 신음이 커졌다. 옷으로 눈물을 닦는 듯한 그런 소리가 들렸다. 결국 참지 못했는지 엉엉 울기 시작하자 불 꺼진 화장실 문 앞에서 백소율은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긴 한숨을 쉬었다.
클랜 안에 개가 있을 리는 없을 텐데… 대체 선생님은 무얼 보셨던 걸까? 설마 검공님이 장난이라도 치셨던 걸까?
"……."
생각하던 백소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울다 지쳐 돌아올 그녀를 위해 모르는 척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두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