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52 여명에서 (3)
검은 강아지와 요정용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클랜 로드가 직접 강아지와 요정용을 산책시키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많아지자 소문은 진실이 되기 시작했다. 보란 듯 산책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가능한 한 함구하라는 모순된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너무 크게, 외부로 퍼져나가지만 않으면 된다. 강태준이 바라던 대로 클랜 내부에는 제대로 소문이 퍼졌고, 며칠이 지나 네버랜드 공략에 참여했던 이들이 하나둘 복귀하자 소문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강태준이 함구시켰다지만, 오히려 그 명령이야말로 노골적이었으니까.
"……."
회의실. 준비된 좌석에 와야 할 사람이 아직 오지 않고 있자 턱을 괸 강태호는 지루하다는 듯 하품했다.
"아. 팀장님. 말 좀 해보시라니까요?"
"뭐 인마."
"그거 말입니다. 그거. 소문. 팀장님은 알 거 아닙니까? 설마 진짭니까? 예?"
부팀장 이기준이 묻는 말에 강태호는 귀를 후비적거리더니 후 불었다.
"아. 더럽게 진짜."
"뭐 불렀으니까 오늘 말하겠지."
사실상 시인하는 말에 놀란 이기준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강태준이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상태가 위중한 3팀 팀장, 구진하를 제외하면 각 팀의 팀장과 부팀장이 모두 모인 자리. 강태준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미안하다. 조금 늦었군. 일단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강태준이 하연을 쳐다보자, 그녀가 자리 아래에서 상자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알싸한 향기가 흘러나와 확산되더니 방 안에 널리 퍼져나갔다.
"……!"
실물을 보지 않더라도 그게 영약임을 알 수 있었다. 휘둥그레 두 눈을 뜬 좌중에 하연이 인삼 한 뿌리씩을 건넸다.
"복용해도 좋고 다른 클랜원에게 넘겨도 좋다."
다만 외부에 유출하는 것만큼은 금한다. 놀란 표정의 간부진이 영약을 수습하자, 기쁜 감정이 가라앉기 전에 강태준은 말을 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클랜 내부에 퍼진 소문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
"……."
그에 다시 분위기가 심각해졌고, 홍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허벅지를 꼬집으면서까지 견뎌야만 했다.
"사실이다. 현재 클랜 내에 있는 강아지는 알파가 맞다는 뜻이다."
"……."
강태준이 수긍하자 누군가 침을 삼켰다. 미리부터 퍼진 소문에 그럴 거라 예상해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마랑 알파. 그리고 페리라는 이름의 요정용은 현재 나와 함께하고 있다."
이어서 강태준은 그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알파가 가진 지식과 탕아들을 쫓는 이유. 알파를 신뢰하기 위해, 그가 정말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정말 괜찮을까요?"
이야기가 다 끝났지만, 여전히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알파의 성장 속도를 보건대, 앞으로 1년만 지나도 인류가 손을 쓸 수 없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하리라. 그때가 돼서 뒤늦게 돌변한다면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을까? 그 물음은 그런 만약의 일에 대한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시간이 필요한 거다. 가능한 그와 접촉하고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해라. 그렇게 해서 너희 모두가 납득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을 테지. 참고로 말하자면 아까 너희에게 지급한 영약 또한 알파의 것이다."
"이게 말입니까?"
"…그래. 효과가 좋더군."
드물게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에 오히려 그들이 당황했다. 이어서 강태준의 시선은 비어있는 3팀장의 자리 옆, 홀로 구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홍유리에게 향했다.
"홍유리."
"―네."
반 박자 느린 대답. 드물게 기죽어있는 모습에 강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간부진은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으니 구태여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알파한테 적개심을 갖는 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개인의 생각까지 강제할 순 없는 법이니까."
담담히 말던 강태준의 목소리가 별안간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그 감정 때문에 일을 허사로 만든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굳은 표정으로 홍유리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여태 클랜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또 네 상태도 알고 있으니 원한다면 휴가를 주마. 며칠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빠르게 털어내라. 헌터를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다. 알파에 대한 건은 다들 조심히 흘리도록. 그리고 이은하가 복귀하면 내게 알려라.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
간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마무리되자 강태준과 하연은 가장 먼저 회의실을 나갔고 강태호는 이기준에게 턱짓했다. 먼저 나가라는 제스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만 남은 회의실에서 강태호는 홍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인마. 괜찮냐?"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대답하지도 못하는 모습. 예전의 그 당찬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고작 떠올린 것만으로 벌벌 떨고 있지 않은가. 강태호는 입맛을 다셨다.
"거, 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사실 나도 오줌 지린 적 있거든. 거… 한 삼사십 년 전쯤에?"
"……."
"그러니까 인마. 오줌싼 건 비밀로 해줄 테니까 기운 좀 차리라고."
믿으라는 듯 홍유리의 어깨를 두드리자 떨림이 멎었다. 그에 강태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가 물도 끼얹어줬으니까 소율이인가 걔도 모를 거 아니냐. 나랑 알파 그 놈밖에 몰라. 그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어."
"……."
"어. 근데 잠깐… 너 설마 저번에 발렸을 때 바닷물 끼얹어져 있었던 게……!"
멎었던 떨림이 심해졌다. 붉은 마력이 퍼져나가자 강태호는 황급히 회의실의 문을 박차고 도망쳤고 혼자 남아 부들부들 떨던 홍유리는 주먹을 꽉 쥐고 강태호를 쫓기 시작했다.
"이 미친! 그딴 걸 지금 위로라고…!"
추격전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났을 때, 홍유리는 무릎에 손을 짚고 거세게 숨을 몰아쉬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쫓아봤자 강태호를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낄낄거리며 도망친 거한을 잡지 못한 홍유리는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
"오늘. 클랜 내부에 한정해 네 존재를 공표했다."
생각보다 빠르긴 해도 사전에 그럴 거라 들었던 말이기에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는 아니겠지만, 네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할 거다. 너무 귀찮아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들에게도 안심을 심어주기 위함이니."
"그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도 되나?"
어차피 알려졌으니 상관없지 않느냐는 물음에 강태준은 쓰게 웃었다.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네 본신은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니까… 혹시 불편한 건가?"
그 말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에 작은 강아지로 지냈던 만큼 개나 늑대의 형상이라면 위화감은 없다. 오히려 인제 와서 이족보행을 할 수는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로 익숙해졌으니까.
"그럼 배려해줬으면 좋겠군. 클랜에는 헌터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묘하게 친절해진 말투. 역시 영약을 줬던 게 직방이었을까? 모습만 변형하는 건 마력이 드는 것도 아니기에 수긍하며 아공간을 열어 가지고 있던 물건을 꺼냈다. ―기다란 백색 창을 본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의… 네가 챙겨 두었던 모양이군. 알겠다. 전해주도록 하지."
원래 바로 주려다가 까먹고 있었다. 이런 거로 은자림에게 빚을 지울 수 있다면.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촉수를 뻗어 물건 하나를 더 꺼내자 강태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건…"
약간의 놀라움. 시린 예기가 서린 기다란 대낫. 전 세계를 통틀어 10개도 없는 물건이니까. 비록 무기로 쓰기 까다로운 대낫이라고는 하나, 네버랜드의 구획 보스. 처형자의 낫임을 고려하면 그딴 건 아무 상관 없다. 강신 상태였던 바포메트의 목을 잘랐을 정도니까. 어지간한 무기들은 이 낫 앞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리라.
"가져도 좋으니 누굴 좀 찾아줬으면 하는데."
"그건 탕아들과 관련 있는 인물인가?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내게 쓸모 없는 물건이라 해도 탕아들에 관한 거라면 굳이 처형자의 낫을 주진 않았을 거다.
찾아야 할 인물. 그에 대한 정보를 적어주자 곰곰이 생각하던 강태준이 고개를 주억였다.
"고작 사람 하나를 찾는 데 이런 귀물은 필요 없다. 이 정도로 상세하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
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찾는 게 쉽지는 않을 터. 내 생각이 맞는다면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만큼 확실하게. 샅샅이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확답을 받았을 때, 마침 페리가 지루해하고 있길래 산책하고 오겠다 말했다. 클랜 바깥으로 나가고 싶기는 하지만 아직은 좀 참아야 할 터.
방 밖으로 나오자 페리가 뀨뀨 기분 좋다는 듯 울었다.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 나도 맘 같아선 환계라도 잠깐 다녀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며칠간 참아온 일이 허사가 되고 말 터.
'아무리 그래도 환계를 함부로 알릴 수는 없으니까.'
지금은 전부 잊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잠깐의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뀨?"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듯 페리가 급히 선회했고,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
"뀨우뀨~!!"
갑작스레 달려든 무언가에 깜짝 놀란 백소율은 아까 산 커피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뺨에 닿는, 얼굴을 비비는 감촉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혀로 뺨을 핥으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요정용. 이제는 두 손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커졌지만, 몰라볼 리 없다. 꿈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그리운 그 모습. 소문은 언뜻 들었지만…
"뀨우우우~!"
반가움에 마주 끌어안고 있자니 요 며칠 느꼈던 침울함이 전부 날아가는 듯 했다. 마치 포근한 햇살에 녹아드는 것만 같은 기분. 한껏 애니멀 테라피를 느끼고 있을 무렵, 자연스레 이어지는 생각에 혹시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
혹시하는 생각은 역시로 변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몸과는 달리 가슴은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도 나는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도 모르게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래도,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다. 혹시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서 그냥, 그냥 껴안아버렸다.
"……?"
그런데… 어쩐지 품 안에 들어온 게 없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모습에 백소율은 질끈 입술을 짓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