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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18화 (118/407)

〈 118화 〉 #52 여명에서 (4)

갑자기 달려들길래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내가 피하자 백소율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피하신 거죠?"

나도 모르게…? 마력도 갈무리했고 모습도 바꿨는데 페리의 존재 때문인지 나라고 바로 알아챈 모양이다. 재회의 기쁨이 깨졌기 때문인지 백소율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그러쥐었다. 두 세 번 같은 결과가 반복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껴안으려 드는 모습에 얌전히 포기하고 안겼다. 누구는 보기만 해도 기절하고 누구는 껴안으려 들고…

"하아아……"

그렇게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던 백소율이 긴 숨을 뱉었다. 충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만끽하던 그녀는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클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 답답한데, 안 그래도 요 며칠 저기압이었던 선생님 때문에 힘들었으니까. 우울증에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와중, 알파를 만난 건 그녀에게 있어 무엇보다 큰 선물이었다.

그 반동일까? 백소율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이제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깊은 감정이 담긴 말에도 늑대는 고개만 끄덕였다. 거칠고 검은 털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백소율은 그간 가졌던 부정적인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맘 같아선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그녀는 뒤늦게, 혹시 멋대로 끌어안아 싫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멀뚱멀뚱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백소율은 여태 늑대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혹시…"

"할 수 있다."

생각이 읽힌 것처럼 늑대가 선수를 치자 백소율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느새 페리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찰싹찰싹 꼬리를 치고 있었다.

"뀨뀨~!"

마치 불만이라도 생긴 것처럼. 한데 그걸 껴안아달라는 걸로 생각했는지 백소율이 페리를 끌어안았지만, 페리는 이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뀨뀨! 뀨우우~!!"

그렇게 한참을 몸부림치던 페리는 이제 됐다는 듯 축 늘어지고 말았다.

"……뀨우~."

그러거나 말거나. 아공간을 열어젖힌 늑대는 촉수를 뻗어 무언가를 꺼냈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알싸한 향기가 퍼졌다.

"…아?"

알싸한 향기. 그 청량함에 머릿속이 상쾌해진다. 황홀함마저 느껴지는 진한 마력의 향. 잔뿌리가 길게 난 커다란 인삼을 보자 백소율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영약임을 알아챘다.

"이거…"

"복용해라."

그러자 백소율은 눈살을 찌푸렸고, 그에 늑대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째 그런 반응이 아니라서.

'인삼은 혹시 먹었나?'

같은 영약으로 마력을 올리는 데 한계가 있기는 한데…

"설마… 주시는 건가요?"

그러면 자랑하려고 꺼냈을까? 끄덕였더니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요?"

내려다보는 시선에, 눈을 맞추며 묻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소율이 다시 물어왔다.

"…왜 주시는 거예요?"

"……?"

"귀한 거잖아요.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제가 아니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영약을 그녀 이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마 침묵하는 입의 라이프 베슬을 내가 아니라 백소율이 복용했다면? 홍유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A클래스 헌터만큼의 마력을 보유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건 나라서 먹을 수 있는 거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녀만큼 영약에 대한 효율이 좋은 사람은 없다는 뜻. 확신을 담은 눈으로 마주하자 백소율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가 갚을 방법이 없잖아요."

은인인데. 또 이렇게 빚을 져버리면 나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정말 받아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그녀는 늑대의 한숨 소리가 들리자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냥 잠자코 받는 게 맞았을까…? 질끈 눈을 감은 백소율은 손에 닿는 감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영약이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갚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백소율은 입술을 씹었다. 몇 번이고 그 말을 곱씹다가, 결국 영약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말씀 하시면 안 받을 수가 없잖아요."

인삼을 받아든 그녀는 무언가 결의하듯이 말했다.

"반드시 갚을게요. 반드시."

"…그러니까, 가끔 만나러 가도 되나요?"

***

―멀어지는 백소율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네줬으니 알아서 복용할 터. 마력만 높아지더라도 한결 걱정은 덜 수 있으리라.

'꼬리나 말단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야 해.'

지금이야 여명에 있으니 아무리 탕아들이라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아닌 이상, 백소율을 납치하려 들진 않겠지만 언제까지 여명에만 머물 수는 없을 테니까. 역시 백소율 본인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차라리…'

문득 드는 생각에 페리를 보자, 녀석은 어쩐지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뀨우~"

그렇게나 좋아하더니… 이제 돌아가자는 듯 귀 끝을 잡아당긴다. 올라가려는 순간,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그렇게, 씩씩거리며 달려오던 누군가와 마주쳤고.

"……!"

―딱딱하게 굳은 그녀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설마 또 기절하나 싶었지만, 홍유리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빵모자를 끌어내려 눈을 가리더니 악으로 깡으로 벽의 손잡이를 짚으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느리디느렸지만, 그 모습에 나는 살짝 감탄하고 말았다.

두려움이라는 건. 각인된 공포라는 건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 또한 겪어봤기에 한 걸음 나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홍유리는 정면에서 맞서 극복하려 하고 있었다.

'…마법사를 따로 찾을 필요는 없겠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오르는 모습에 나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을 굳이 괴롭힐 필요는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나는 그랬다는 뜻이다.

복도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강태호는 힘겹게 오르는 홍유리를 보고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서서히 벌어지는 입에 나는 설마 하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고. 그 설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왈!"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낸 강태호가 배꼽을 잡고 뒹굴기 시작하자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진짜 나이를 똥구멍으로 쳐먹었나.'

저러고 싶을까? 그렇게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순간, 무언가가 쓰러지는. 필연적으로 들려온 소리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이번엔 뒤처리를 하는 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

"피곤해 보이는군."

서류를 정리하던 강태준이 혼잣말인지 말을 거는 건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이은하가 올 테니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이미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은하가 온다―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사실관계만 확인하면 신뢰를 쌓는 데 한결 도움이 되리라.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강태준에게 부탁한 일이 끝날 때까진 여명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환영의 나비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어.'

아가일을 죽였으니 무언가 달라지기는 했을 터. 다만 그게 좋게 흘러갈지 나쁘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다.

'혹시라도 이미 탕아들에 가입한 거라면…'

―타협은 없다. 스퀘어 마스터가 돌아설 바에야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맞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십중팔구…

"뀨뀨~!"

…그러니까 지금을 만끽하도록 하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

새벽녘. 뒤척이는 소리에 이불을 걷고 일어난 백소율은 푹 한숨을 쉬었다. 또 선생님이 혼자 울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코를 찌르는 알싸한 향기를 맡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

쪼르르. 술을 따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단번에 들이킨다. 외견은 어려 보이지만, 새삼 어른이란 걸 실감했다. 그러던 백소율은 이미 비어있는 여섯 병의 소주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술을 마셔본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헌터라서 취하기 어려운 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고꾸라진 혀로 '강태호 존나 시발 죽여버릴 거야―!' 울고불고 소리치는 모습에 싹 사라졌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백소율은 홍유리를 불렀다.

"선생님."

"……."

듣지 못한 걸까? 어깨가 움찔거린 걸 보면 그럴 리가 없다. 백소율은 다소곳이 앉아 홍유리의 등에 손을 얹었다.

"내일도 일 하셔야 하잖아요?"

홍유리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의외로 조용히 넘어가겠구나 싶었던 백소율은 홍유리가 헛구역질을 시작하자 깜짝 놀라 그녀를 들어 올렸고 정말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으으…"

속을 전부 게워 낸 홍유리의 등을 토닥여주던 백소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되신 거예요? 설마 또…"

알파를 만났느냐는 물음에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래서 이렇게 된 거구나… 백소율이 납득할 때, 홍유리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좆같은 새끼… 모른다면서… 아무도 모를 거라면서…"

해롱해롱 꼬인 발음. 분하다는 듯 중얼거리던 홍유리는 별안간 고개를 돌려 백소율과 마주했다.

"나 안 지렸어! 참았어. 참았다고!"

"……."

"근데. 근데…!"

강태호 그 미친 새끼가 개 짖는 소리를 냈다고. 억울함을 토로하듯 말하더니, 품속에 얼굴을 묻는 홍유리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나 안, 안…!"

토하고 나서 되려 취기가 심해진 모양.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홍유리는 울분을 참지 못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회의실에서 들었던 말과 그동안 속에 쌓였던 감정들. 홍유리는 울고불고 쏟아내며 토로했다.

구진하는 병상에서 누워있는데. 아직 일어나지도 못했다는데. 만약 내가 네버랜드에 참여했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알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비록 시작은 입장의 차이로 인한 엇갈림 때문이지만, 어디까지나 잘못한 건 나였으니까.

회의실에서 클랜장님이 말했던 것.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그게 얼마나 서러웠는지. 또 강태호가 지랄하는 건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파가 해코지할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무서워서 당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정작 알파는 나를 돕고. 물까지 끼얹으면서 매번 숨겨주려 한다. 그렇게 자존심을 지켜주려 하는 게 무엇보다 비참했다. 차라리 욕하거나 경멸했다면…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만 해도 비참한데 영약까지 받고 말았다.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벌벌 떨고만 있는데…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도무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사과했는데 싫어하면? 받아주지 않으면? 아니, 애초에 말을 할 수나 있을까?

알파는 본래 모습도 아닌데. 조그마한 강아지일 뿐인데. 나는 그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것만 해도 힘겨운데…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헝클어져 엉망이 되어간다. 고집불통에 독불장군인 그녀는 솔직하게 사과하는 법을 몰랐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미칠 것만 같다고.

여태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속마음을 술김에 전부 털어놓은 홍유리는 엉엉 울며 백소율을 끌어안았다. 곧, 그녀는 자신을 마주 끌어안는 손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봤다.

"괜찮아요… 선생님은 노력한 거잖아요?"

홍유리는 침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달래준 백소율은 홍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들면 같이 가드릴게요."

"……진짜?"

언제 옮겨졌는지 침대 위였다. 그에 백소율은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안심한 홍유리는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잠들어갔다…….

"……."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백소율은 홍유리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깊은 새벽, 늦은 시간에 두 사람은 같은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잠들었고.

"……!"

―아침에 일어난 홍유리에 의해 이불은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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