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52 여명에서 (5)
"선배. 저 먼저…"
이은하의 말에 우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로 칭칭 감겨 있어 말은 못하지만. 침묵하는 입의 마법에서 높은 체력을 기반으로 살아남은 우택은 전신에 화상을 입었으면서도 되려 미약한 재생 스킬을 발현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 그동안 강한 마력이 전신에 깊게 스며들어 섣불리 손대지도 못하고, 수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어쩌면 스킬을 발현하지 못했다면… 이은하는 푹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클랜에서 봬요."
미약하게 끄덕이는 우택을 지나친 이은하는 오늘 새벽에 마지막 수술을 마친 구진하의 병실을 쳐다봤다. 아직 면회조차 불가능하지만, 듣기로는 목숨에 지장은 없다던가. 이제 의식만 찾으시면 될 텐데…
'휴…'
조금만 더 빨리. 조금만 더 빨리 결심해서 도왔다면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착잡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며 클랜까지 도착한 이은하는 그 앞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사실 처음엔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둘의 모습을 보곤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알파에 대한 복수심― 여태 이은하를 이끌었던 동기는 그것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엇갈린 오해가 풀린 지금, 순수하게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파처럼.
마음을 가다듬은 이은하가 심호흡과 함께 클랜에 들어가려는 순간, 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잘됐네요."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 고개를 돌린 이은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선자님…? 여긴 어떻게. 그보다 괜찮으세요?"
"저는 별로 다치진 않았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거노트를 홀로 막았던 은자림이 다치지 않았을 리 없다. 다만 어떤 요정용의 빛가루가 그녀의 상처를 치유했을 뿐. 덕분에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당신은 괜찮은가요? 이름이…"
눈을 좁히며 묻는 말에 이은하는 퍼뜩 대답했다.
"이은하라고 합니다!"
"…저는 당신의 상관도 뭣도 아니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급하지 않다면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길 안내― 대전의 대표 클랜. 그 로드 자리를 맡고 있는 그녀가 대체 왜 여기까지 왔을까?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건 상관없는데… 어디로 가시려고요?"
"검성께 볼일이 있어요."
이은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작 같은 클랜인 자신은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데… 과연 다르구나 싶었다. 새삼 눈앞의 이 사람이 최고의 헌터이자 칠영웅의 수좌인 창선의 제자임을 다시금 실감했다.
"넵!"
―이은하는 절차에 따라 그녀를 안내했고, 머잖아 7층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엔 1팀의 부팀장이자 강태준의 비서이기도 한 하연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제 돌아가면 되겠구나 생각한 순간.
"―이은하 씨. 기다리세요."
하연이 막아세웠다. 고개를 갸웃거린 이은하는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가? 불안감을 품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머잖아 문밖에서 강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함께 클랜 로드의 방에 들어갔다.
"왔나?"
"며칠만이군요. 검성. 몸은 괜찮으신가요?"
태연하게 인사하는 둘 사이에서 이은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안절부절못했다. 인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해야겠지만 지금 하면 대화의 흐름이 끊길 텐데…
빙글빙글 눈이 돌아가는 것만 같은 상황에서 마침 강태준의 시선이 이은하를 향했다.
"그렇군. 네가…"
"네! 이은하입니다!"
깍듯이 인사한 그녀에게 강태준이 턱짓했다.
"앉아 있어라. 돌아오려면 조금 걸릴 테니. 그리고 선자…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돌아온다고?'
"…저도 선루(仙淚)를 빨리 보고 싶었으니까요."
선루. 그녀가 가진 백색 창의 이름이었다. 강태준은 그에 끄덕이며 거치대에 놓아뒀던 창을 건넸지만, 정작 은자림은 마치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은하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은자림은 눈에 띄게 실망한 듯 보였다.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아침부터 오느라 조금 피곤하군요. 잠깐 쉬었다 가도 되겠죠?"
"큭. 편한 대로 해라."
'……?'
웃으셨나? 잘못 봤나 싶었지만 선자님의 손이 주먹이 된 걸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사각사각. 머잖아 클랜장님이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됐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이은하는 자신이 대체 왜 여기에 불려왔는지 수십 번 고민해야 했다. 초조해하는 그녀와는 달리 은자림은 어느새 하연이 가져다준 차를 여유롭게 마시고 있었다.
"……."
아무리 그래도 클랜장님이 부르신 건데 부팀장님이 혼내실 리는 없겠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을 무렵, 노크 하나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 없었다. 대신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은 길게 뻗은 촉수. 그걸 따라 시선을 내리자 검은 강아지가 요정용과 장난치며 함께 들어오는 게 보였다.
"설마…"
은자림이 설마 하며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은하는 확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파…!"
뜬금없는 만남. 마력을 느끼기 이전에 애초에 이은하는 어린 강아지였던 모습을 본 적이 있으니 그가 알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늑대였던 모습보다 오히려 반가움이 들었다.
"――."
늑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촉수를 휘휘 저어 손을 흔들듯 인사하는 모습에 강태준은 또 한번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곧 은자림 또한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오랜만이군요. 알파. 은―?!"
갑작스레 페리가 달려들었지만 은자림은 두 팔 벌려 페리를 안았다. 심지어 그 표정에 황홀함마저 떠올라 있다. 재회를 만끽하는 둘― 언제 저렇게 사이가 좋아졌지? 일방적으로 은자림이 따라다니던 게 아니었나? 나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기다리던 시간이 왔으니까.
강태준과 시선을 마주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하."
"네!"
그 호명에 화들짝 놀란 이은하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난데없이 사장실에 불려온 거나 다름없을 터.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였다.
"오늘 널 부른 건 한 가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반응을 보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네?"
"지리산 법계사. 알파는 너를 덮쳤던 워그가 아니라 구해준 은인― 맞나?"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이은하를 보고 강태준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얼룩으로나마 남아있던 의심조차 사라졌다.
―확인이 끝나고 의심할 여지마저 사라졌다. 완전히 결백해진 마랑을 보며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그가 신뢰를 져버릴 만한 이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것뿐. 그마저도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
"알겠다. 그리고 선자. 볼일은 끝난 것 같은데… 아직 지친 건가?"
"……!"
큭 이를 악물며 은자림은 방해해서 죄송하다며 방을 나섰고 페리가 그 뒤를 따라 나가자 강태준이 말했다.
"…그만 나가봐도 좋다. 네게도 더 할 말은 없으니."
"아, 넵!"
문을 열고 나가는 이은하의 뒤로 강태준이 들릴 듯 말듯 말했다.
"…네버랜드 공략은 수고했다. 앞으로도 노력하도록."
"……감사합니다!"
그렇게 혼자 남은 강태준은 안경을 닦았다.
***
'…죽는 줄 알았네.'
클랜장님과 선자님 사이에 끼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간단한 확인뿐이었으니 망정이지 좀 더 있었으면…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알파가 왜 클랜에 있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애써 아쉬움을 누르려 했을 때, 무언가가 그녀를 툭툭 건드렸다.
의아함에 고개를 내린 이은하는 검은 강아지가 빤히 올려다보는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
촉수가 까닥이는 모습이 마치 숙여보라는 듯이 보여서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쪼그려앉은 그녀에게 아공간을 연 늑대는 인삼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도와준 값이다."
조그마한 강아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저음에 이은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분명히 암운을 드리운 괴물에게서 지켜줬던 목소리. 정말 알파가 맞는다는 실감이 뒤늦게 들었다. 오해가 풀리고 제대로 재회할 수 있었다… 이은하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도와줬다니…?"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두 번. 아니 네버랜드까지 세 번…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함 받았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까지 폐를 끼쳤는데. 나는 괜한 오해나 하면서 널 쫓겠다고… 그런데 내가 도와줬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이번엔 물어볼 수 있다. 바로 앞에 알파가 있으니까.
"잠깐…"
***
'의외로 나쁘지 않네.'
자판기 커피. 이은하가 마시는 걸 보고 문득 떠오른 것이다. 악식으로만 먹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미각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먹고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야, 그동안 먹어온 것들이 하나같이 끔찍한 맛이었으니까. 조리되지도 않았고 악식이 아니라면 먹을 수조차 없었으니. 비쥬얼도 끔찍했고 굳이 먹을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는 사회가 아닌가. 맛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널려 있다. 미처 생각지 못한 맹점에 나는 침음을 흘렸다.
"…저기."
이은하가 사준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그녀가 말을 걸어왔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예전 그대로였지만, 네버랜드에서 고생한 만큼 조금 야위어 보인다.
"왜 내가 도와줬다고 하는 거야?"
"받은 게 있으니까."
"받았다고?"
그녀가 답답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 건 사실이다. 소설 속 세계에서의 기억은 없었다지만 아가일의 환상에 빠졌을 때, 분명 그리 느꼈으니까. 다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 덕에 지리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괴물 늑대를 쓰러뜨려주지 않았다면. 워그를 빈사상태에 가깝게 몰아넣지 않았다면 부정형 워그가 될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을 거다.
괴물 늑대― 우월종 워그와 싸웠을 때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혼자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당시 나와 놈은 그만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물론 모든 건 내가 행동했기 때문에 일어났지만, 이은하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형편좋게 굴러가지는 않았을 거란 뜻이다. 어리석은 행동이건 멍청한 행동이건, 내게 이득이 된 건 사실. 반대로 그녀에게 있어 나는 여러 번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셈이겠지만…
'네버랜드에서 있었던 일은 굳이 들먹일 것도 없지만.'
따지고 보면 기이하게도 서로에게 빚이 있는 셈. 다만, 정말 그 이유 때문에 영약을 건넨 건 아니다. 일일이 경중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은하(인간)]
[신장 164.4cm] [체중 44.1kg]
[힘 107] [민첩 124] [체력 131] [마력 389]
다른 능력치야 워낙에 낮았으니 비교적 올리기 쉬웠을 거라 해도… 단기간에 60 이상 급증한 마력은 그녀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받은 게 있다고 해도 난 모르겠는데…"
우물쭈물. 이은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깍지 낀 손가락을 비볐다. 늑대는 남은 커피를 핥아마셨다.
'아쉬운데…'
오랜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맛이었으니까. 하나 더 뽑아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일단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편하게 받아도 좋다."
"……."
이은하는 푹 한숨을 쉬었다. 편하게 받으라고 해도 편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었으니까. 다만, 늑대는 속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어차피 내 마력은 네게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런 게…"
믿기 어렵다는 듯한 반응이더니 이은하는 머잖아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아마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네가 가지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돌아갈 뿐."
그 말에 마음을 정한 듯, 이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삼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감사 인사를 받자 이제야 얽힌 실타래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는 사이,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은자림의 모습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보았는지 휘둥그레 눈을 뜬 이은하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
―출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다. 아무리 클랜장님이 부르셨다고 하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허둥지둥 준비하다 옆에 둔 커피가 쏟아지기 직전, 늑대는 촉수로 커피를 붙잡았다. 직감과 간파를 싸울 때 외에 사용한 건 처음인 것 같아 실소가 튀어나왔다.
"아, 미안한데 그…!"
"가라."
그 담담한 말투에 이은하는 허둥대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멀어져 갔다. 때마침 페리와 산책을 마쳤는지 올라온 은자림이 내 앞에 멈춰 서더니 아까까지 이은하가 앉았던 옆자리에 앉았다.
"……."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그냥 나도 가만히 있었다.
"뀨우뀨~!"
촉수로 페리와 놀아주는 중에 한숨 소리가 들렸다. 생각을 정리한 모양인지 은자림이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떤가요?"
갑작스러운 존대.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여태 반말을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불편하다면… 제 클랜에 와도 좋아요."
"괜찮다."
"……."
즉답하자 은자림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 이유를 물어왔다.
"…이유가 뭐죠? 여명만큼은 아니지만 은자의 숲도 절대 작은 클랜은 아니에요.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그래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클랜에 홍유리나 하연 같은 뛰어난 마법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휴. 여지는 없는 것 같군요."
한숨이 늘어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은자의 숲에 갈 생각은 없다. 이렇게까지 권유하는 건 같이 싸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력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페리?
"그래도 마음이 바뀌면 오도록 해요. …이번에도 기다릴 테니."
그 말만큼은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멀어지는 은자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이은하가 남기고 간 커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