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52 여명에서 (6)
"이야기는 잘하고 왔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하는 급하게 자리를 떴지만, 미리 강태준에게 언질해 뒀으니 혼날 일은 없을 거다. 조금 머리가 복잡했지만, 이은하 덕분에 입장정리가 끝났다. 강태준이 날 의심하는 일은 더는 없을 거라는 뜻이다.
"잘 끝났다니 다행이군. 마침 네게 할 말이 있었는데."
"……?"
"신뢰를 쌓기 위한 시간… 그것도 인제 슬슬 마침표를 찍어야겠지."
영문을 몰라 눈살을 찌푸리는 내게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이 나타났고, 우리가 맡게 됐다는 뜻이다. 거기에 네가 동행해줬으면 좋겠군."
"…던전의 수준이 높은 건가?"
여명이 처리하지 못할 만한 던전이 있는 걸까? 설마하니 화산각룡정도 되는 괴물이 나타난 게 아니라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지간해서 네가 움직일 일은 없을 거다."
"……감독역이라도 하라고?"
"그래. 하지만 위험한 상황에서만 나서는 정도로 족하다. 몬스터인 네가 던전에 동행했는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안전하다는 좋은 증명이 될 테지."
그래서 마침표라고 했던 모양. 어려운 것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간부 하나는 동행하게 될 거다."
이 또한 클랜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니 불쾌해하진 말라고 했고 그에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안심시키기 위한 장치― 그 말은 사실이었다. 혹시 날 의심하는 거라면 간부진이 아니라 강태준 본인이 와야 했을 테니.
"상관없는데… 언제?"
"이틀 후. 그즈음이면 네가 부탁한 일도 마무리될 거다."
찾아달라고 했던 이에 대한 정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빠르긴 하지만 나쁘지 않다.
"뀨뀨뀨!"
―날아다니는 페리를 보며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 평온한 휴식도 앞으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
"죄송합니다! 늦었…?"
"알면 빨리 들어오지?"
당장에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말 하지 않는다. 이은하는 오랜만에 보는 백소율과 눈짓으로 인사했다.
"…그럴 줄 알았지."
잠깐 이은하를 훑어보던 홍유리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내 혀를 차며 그녀에게 턱짓했다. 앉으라는 신호에 이은하는 곧바로 앉았고, 홍유리는 말을 이었다.
"너도 영약 받았지? 꺼내."
그 말에 이은하는 멀뚱멀뚱 눈을 끔뻑였다. 받기는 했는데― 어떻게 알고?
"복용하게 도와줄 테니까 꺼내라고."
우물쭈물하던 이은하는 영약을 꺼냈고, 휙 가져간 홍유리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영약을 달이고는 있는데 문제는 주전자가 두 개 더 있다는 점. 그게 누구의 것일지는 불 보듯 뻔하다.
"어… 가지고 계시네요?"
"간부라서."
짤막한 대답에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이은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더 캐물었다가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대신 백소율에게 시선을 향했다. 망설이던 백소율은 약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직접…"
그러고 보니 알파가 구해줬다고… 그 사실을 떠올린 이은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대로 혼자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 괜히 김칫국을 마셨단 사실에 입맛을 다셨다. 고마움이라거나 그런 마음이 퇴색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런데 뭔가 좀 야매―!"
"뭐?"
설마 그냥 먹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전자에 끓이는 건 어떤가 싶어 물으려던 이은하는 매서운 눈빛에 침을 삼켜야만 했다.
"…아무것도요."
곧, 달여진 차를 마신 이은하는 마력의 증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것만 같은… 이게 영약이구나 하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외부의 마력이 침투하자 내부의 마력이 들끓었다. 두 마력이 격렬히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통증이 일었다. 입가에 한 줄기 피가 흐를 때, 외부의 마력을 제압했고 그 일부가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고통보다도 마력이 불어난 감각이 신기했다. 이은하가 눈을 떴을 땐, 홍유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연신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설마 전부 다?"
"싫으면 말든가. 내가 먹게."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고, 주전자를 완전히 비우는 데에는 한 시간가량이 소모되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지만, 영약을 받아들이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젠 물배가 차올라 아무것도 들어갈 것 같지가 않다……. 포만감이 차오르는 건 홍유리도 다르지 않았는지 거북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왜 그러세요?"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백소율에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진작에 주전자를 다 비우고도 태연한 모습이었으니까.
"…소율아. 괜찮아?"
"네?"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은하는 눈살을 좁혔다. 많이 먹는 건 본 적 없지만 의외로 대식가였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저은 이은하는 다시 내부를 관조했고, 증진된 마력을 느끼며 작게 감탄했다. 이게 영약이구나 싶어서.
"아."
신기하다는 듯 이은하는 손을 쥐고 폈다. 당장에라도 마력을 사용해 보고 싶어 근질근질하다… 수련실에 가려던 이은하를 홍유리가 제지했다.
"아 참. 이틀 후에 던전 하나 있는데… 너 거기 가."
그 말에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전이요?"
"어. 던전."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는 모습. 이은하가 되묻기 전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닥치고 가. 이미 명단 제출했으니까."
"갑자기 가라고 하셔도…"
"왜? 그럼 평생 수련만 하고 살게? 실적도 쌓아야 등급이 오를 거 아냐."
"그건 맞지만요…"
"아. 그냥 까라면 까지?"
자꾸 말을 흐리는게 짜증났는지 홍유리가 으름장을 놓았고 이은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홍유리가 시키는 대로 해서 손해 본 적은 없으니까.
"이틀 후에 바로 출발하는데 뭐 해야 하는진 알지?"
"넵."
"좋아. 당장 준비해."
네버랜드에 가기 전, 함께 준비했으니만큼. 홍유리도 별 걱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하가 황급히 방을 나서자 홍유리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야. 너도 느끼고 있지?"
"…네."
같은 영약을 같은 방식으로 달여 마셨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건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은하와 홍유리가 받아들인 마력의 양도 적은 게 아니었지만, 감히 백소율과는 비교할 수 없다.
―마치 영약 그 자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만 같다.
그건 통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부의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만 한다. 아까 이은하가 선혈을 흘렸던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
홍유리는 피를 흘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동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압도적인 마력으로 찍어눌렀을 뿐. 나름 괜찮은 영약이라고 해도 홍유리의 마력에 저항하는 건 무리였다. 전자건 후자건 부딪힌 마력은 그만큼 소모되는 법이고.
차이는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영약을 받아들이는 데 체력과 마력의 손실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백소율의 경우는―
'손실이 아예 없는 건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효율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마법의 본산인 스퀘어에서 생활했던 홍유리조차 처음 봤을 정도로.
"왜 저만…"
"몰라."
왜 그런지는 모른다. 단순히 체질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 알게 된 거라면 탕아들이 그녀를 노리는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니었을까 싶다.
"알파한테 받았다고?"
"…네."
다시 생각해보면, 알파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십중팔구 그러하리라. 당시 아무도 몰랐던 아카데미 습격 사건 당시의 타겟이었던 백소율을 구한 건 다름 아닌 알파였으니까.
영약을 준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언뜻 듣기로 탕아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던데… 그래서 백소율에 대해 알고 있었다? 홍유리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이상하지 않나? 그럼 혹시 알파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마랑의 모습이 떠올라 숨이 가빠졌다. 그런데도 모순되게 숨이 턱턱 막힌다. 안색이 창백해진 홍유리를 본 백소율이 황급히 다가와 등을 토닥였디.
"선생님…"
그래도 가라앉지 않자 백소율은 홍유리를 끌어안았다. 홍유리는 애써 머릿속을 비우려했으나, 오히려 그럴수록 더 생각나고 만다. 고작, 고작 생각하는 것뿐인데…
"…괜찮으세요?"
홍유리는 대답 대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다. 클랜장님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이 두려움, 공포는 극복해야만 한다. 홍유리는 이를 갈면서도 스스로 최면을 걸듯 계속 속삭였다.
'알파는…'
무섭지 않다.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도움을 받은 거라고. 이제 싸울 일은 없다고. 그렇게 자신에게 되뇄다. 그러자 조금이나마 떨림이 가라앉았다. 홍유리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이젠 싫어…"
지긋지긋하다. 진절머리가 난다. 평생 이러고 살 수는 없다. 부르르 떨면서, 입술을 짓씹은 홍유리는 주먹을 쥐었다. 강태호 그 미친 새끼가 지랄하는 게 얼마나 열 받았던가. 매번 쓰러지는 건 얼마나 비참했던가. 그냥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는 싫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남은 자존심과 부서진 고집을 모두 그러모은 홍유리는 울먹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용기를 내 말했다.
"…가자."
새벽에 했던 약속을 떠올린 백소율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잘도 먹는군."
강태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뜬금없이 인간의 음식을 먹고 싶다는 말에 고민할 것 없이 승낙했지만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이야 작은 강아지의 모습이었지만, 본신은 마랑. 먹어치우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전무후무한 마랑이었음을 간과한 것. 구내식당의 식자재 대부분을 먹어 치우며 눈길을 받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먹어봤자 처형자의 낫은커녕 인삼 하나값도 나오지 않겠지만…
문제는 돈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요정용과 검은 강아지가 식사하는 모습은 흔한 게 아니었으니까. 입소문을 타고 클랜의 많은 인원이 창문 너머로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함구하라 한 만큼 경솔하게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심정은 이해가 간다. 알파의 옆에 수북이 쌓인 접시와 그릇을 본 강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맛있나?"
대답하는 대신 촉수를 들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요정용은 입가에 소스를 한껏 묻히고 있고… 그 행동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강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갈 테니 천천히 오도록."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질 때까지 정적이 찾아왔지만, 그 이후에는 오히려 심해졌다. 눈치 볼 강태준이 사라지자 물밀듯 몰려온 사람들이 늑대를 빙 둘러싸기 시작했다.
"뀨우우~!!"
놀라하는 페리. 그리고 주변의 시선.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계속 식사할 자신은 없었기에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진짜 오랜만에 맛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했다가 옆에 놓인 셀 수도 없는 그릇들을 보고 떨떠름해졌다. 마지막 그릇을 깨끗이 비웠을 무렵,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다 꺼져. 안 꺼져?"
―당당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 다만 어째서 울먹이는 것만 같은 목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말투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서워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입가에 묻은 소스를 핥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와는 한번쯤 대화할 필요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