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52 여명에서 (7)
그렇게 으름장을 놓아 사람들을 물린 홍유리는 거만한 태도로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이전의 당당함을 그대로 가지고 말했다.
"야. 따라와."
―내가 없는 방향에다가. 심지어 코끝이 빨갛다. 어이없는 심정에 옆을 쳐다보니 백소율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다. 유성 매직으로 그은 듯 검게 칠해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니까.
"……."
백소율이 신호를 주고 나서야 홍유리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쪽팔렸는지 얼굴이 붉다.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마른침을 삼킨 홍유리가 다시 말했다.
"따라 오…"
말하려는 순간, 인파를 물려준 게 고마웠는지 페리가 홍유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장하다고 칭찬하는 듯한… 고작 그것뿐인데 홍유리는 높은 톤의 기묘한 비명을 지르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결국 한숨 쉰 백소율이 대신 말했다.
"…할 말이 있으니 따라와 주실래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유리가 사람을 물렸다고는 해도 창밖엔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으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홍유리는 쥐고 있던 백소율의 소맷자락을 놓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붉어진 눈시울도 슥슥 문질러 애써 숨겼다. 남들 앞에선 당당하겠다는… 그 모습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조금 괴롭히고 싶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무슨 강태호도 아니고.
홍유리를 따라 올라간 곳은 6층. 그녀 개인의 방이었다. 들어오라는 백소율의 말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고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향에 이미 영약을 복용했단 걸 알 수 있었다. 페리는 새로운 공간이 마냥 신기한지 호기심을 보였다. 홍유리에게 당한 전적이 있으니 반감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잠깐 둘러보고 있으니 홍유리는 결심했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선글라스를 벗어 부수고 그 잔해를 바닥에 흩뿌렸다.
"…두 번은 안 말해."
아직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꽉 쥔 주먹은 분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홍유리의 생각을 읽을 방법은 없지만 시비를 걸 생각이었다면 굳이 방까지 데려올 리는 없을 터. 백소율이 돕지도 않았을 거다.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 이유에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뒤에서 보아도 붉어진 얼굴. 부르르 떠는 손. 두 번은 않겠다는 말까지. 하지만 설마 싶었다.
'그 홍유리가?'
에고의 화신. 고집불통 독불장군 홍유리가 정말 사과를 한다고? 그건 강태준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보다 믿기 힘든 일이다. 결국 홍유리는 몸을 돌렸고, 그녀를 올려다보자 질끈 감은 눈꼬리 끝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믿기 힘들지만, 진심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사, 사…!"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홍유리는 눈을 떴다. 비록 시선이 위를 향해있어 내가 보이진 않겠지만, 지금 그녀에겐 이 정도가 한계이리라.
사과하려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계라고 생각했던 홍유리가 고개를 꺾었다. 그에 따라 시선이 내려가고 마침내 망막에 내 모습이 비치고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평생 울 만큼 울린 것 같은데…'
따지고보면 자업자득이지만. 선홍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 초점이 맞지 않는다. 백소율의 손이 어깨를 짚자 흠칫한 홍유리는 다시 나를 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홍유리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사, 사, 사과…!"
"뀨우우…?"
셋이 지켜보는 가운데, 홍유리는 꽉 주먹을 쥐었다. 결국 눈의 색이 진해지고 맺혔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감정이 격해졌다는 증거였다. 흐느낌을 억누르고 입술을 짓씹은 홍유리는 마침내 용기를 냈다.
"받아줬음 좋겠어……요."
불안한 듯 옷자락을 힘껏 쥔 손과 다시 질끈 감은 눈.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 불같은 성격에 순순히 사과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심지어 무서워서 말도 못 하면서.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모습을 몇 번이나 보였던 상대에게. 저 한마디를 내뱉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 요 며칠간 그녀가 내게 보인 모습은 안쓰럽기 했었다.
―슬쩍 페리를 보았지만, 녀석 또한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왜 그러냐는 듯이 홍유리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걸로 감정의 응어리를 전부 털어냈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다. 우리 사이의 악연은 제법 꼬여있었으니까. 아마 수변공원에서 날 죽이려 했단 사실 자체를 모르지 않을까.
하지만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 쌓인 감정과 묵힌 악연을 꼭 복수로만 풀어낼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여기서부터 다시 관계를 쌓아가면 되지 않을까? 홍유리가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그녀가 다시 헌터로 활동할 수 있게 돕는다면. 마찬가지로 나 또한 스퀘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알겠다."
전전긍긍하던 홍유리는 다리가 풀렸는지 주저앉고 말았다. 거기까지가 한계였으리라. 백소율은 잘했다는 듯 울면서 웃는 홍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분명 그녀의 사과는 전환점이 되리라. 이제 앞으로는 올바른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홍유리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
…실수. 뻗은 촉수를 되돌리며 귀 옆을 긁었다. 어쩐지 백소율의 빤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
"……!"
잠에서 깬 홍유리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미 방. 침대 위였다. 좋은 냄새― 일어나자마자 식욕이 돋궈진다.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 내용물을 추측하고 있을 때, 백소율이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일어나셨어요?"
"응. 근데…"
단번에 마신 홍유리가 컵을 돌려주자, 백소율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눈살을 찌푸렸다가 기억을 되돌린 홍유리는 탄성을 내지르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 시발…"
사과는 했는데… 잘 한 것 같기는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쪽팔려서. 꼬르륵거리는 배꼽시계가 제법 시간이 흘렀음을 알린다. 홍유리가 테이블 앞에 앉자 백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어요."
홍유리는 수저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당당히 마주 보는 데 성공했다……! 그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
알파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지만, 조금은 익숙해졌다. 앞으로 차차 극복해나가면 되리라. 이제는 그럴 자신이 있었으니까. 수저를 들어 찌개를 떠먹다가.
"부팀장님~!"
갑자기 문이 열려 사레 들리고 말았다. 컥컥거리던 홍유리는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고, 거기엔 멋쩍게 웃는 이은하가 있었다.
"아… 식사하고 계셨네요?"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얼빠진 모습을 보니 화낼 기력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한숨을 쉰 홍유리가 말했다.
"매너도 없어? 노크하고 들어와. 그리고 뭐."
어쩐지 잠깐 황당하다는 표정이 보인 것 같지만, 홍유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준비 다 끝났다고 말씀드리려고 왔는데…"
"알았어. 내일 볼 테니까 꺼져."
"…네."
쭈그리가 된 이은하가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옷 갈아입으셨네요?"
"아무튼 내일 뵙겠습니다~!"
웬일이냐는 듯한 반응. 그렇게 이은하가 사라지자 홍유리의 얼굴이 그라데이션으로 붉어지더니 한껏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
"―시끄럽군."
강태준은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방과 층에는 당연히 방음이 되어 있다. 설령 고성방가를 지르더라도 들리지 않을 테지만 문제는 그의 청력.
"……후."
스킬로 발현되어 청각을 조절할 수 있는 늑대와는 달리 가만히 있어도 온갖 소음을 포착하고 만다. 조그마한 소리라면 모를까 저렇게 소리를 지른다면… 고개를 저은 강태준은 늑대를 보았다.
"…듣기론 홍유리와 대화했다는 것 같던데."
그 말에 늑대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잘 끝난 것 같아 다행이군. …그런데 소리 지르는 건 좀 말릴 수 없나?"
그제야 늑대는 고개를 돌렸고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던 늑대와 요정용이 동시에 갸웃거리자 강태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입가에 묻은 크림. 저 모습을 보고 누가 마랑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 짧은 시간에 완전히 적응한 듯 보인다. 대화도 잘 끝났다면 둘을 붙여놓는 건 어떨 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헌터로서 써먹을 수 없으니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강태준의 생각을 알고는 있는지 늑대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이은하의 커피를 시작으로 늑대는 오랜만의 식도락에 몰두해있었다. 전생한 이후 먹어온 것들이 하나같이 끔찍한 맛이라 포기했었지만, 여기라면 다르니까.
"뀨우우!"
그렇게 늑대와 요정용은 만찬을 즐겼다.
***
"…그래서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언니는 괜찮아?"
"응~ 나는 괜찮은데."
"던전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걱정하는 은아에게 이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별로 안 위험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퍽이나. 조심해서 다녀와."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앞으로 이틀― 고작 이틀만 지나면 다시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 감히 네버랜드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던전은 던전.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지만 애써 태연하게 식사를 마쳤다.
이은하는 침대 위에서 복잡한 머리를 헤집었다.
이래저래 바쁜 하루였으니까. 복귀하자마자 다른 던전을 준비하라는 것도 그렇지만…
"알파…"
알파가 클랜에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아침부터 선자님을 만나고 또 클랜장님께 호출되는가 싶더니 별안간 알파를 만났을 때는…
"……."
멍하니 누워 무늬 없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말, 다시 만났구나 싶어서. 게다가 영약도 받아마셨다…… 비록 나한테만 준 건 아니더라도. 늘어난 마력을 느끼며 이은하는 손을 들어 올려 쥐었다 폈다.
문득 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난데없이 커피를 사달라길래 무슨 소린가 싶었더니 맛있게 마시던 모습이. 강아지가 커피를 할짝거리는 살면서 한 번도 볼 일 없을 모습…
"귀여웠는데."
지금이야 마랑이라고 불리지만, 이은하에게 각인된 모습은 여전히 슬라임 혹은 강아지였다. 내게서 비롯됐다고 말한 흡사한 마력과 의외로 낮은 저음… 어쩐지 몸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에 잠을 청했지만, 어쩐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내일 출근하면 또 만날 수 있을까? 이은하는 자신의 입꼬리가 느슨해져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새벽이 깊어지고 나서야 가까스로 일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