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52 여명에서 (8)
이은하를 만났고 홍유리에게 사과를 받았지만 늑대가 여명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항상 붙어 다니는 페리와 놀거나 혹은 무언가를 먹거나 둘 중 하나였다.
"……."
―의외로 자판기 커피가 맛있다. 매 층마다 있는 자판기의 커피를 전부 맛보는 것… 늑대에게 새롭게 생긴 취미였다. 하기야 평생에 한 번도 없을 경험. 누가 굳이 자판기 커피를 다 뽑아마시려고 할까. 그렇게 10종류의 음료를 즐기고 방으로 돌아온 늑대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강태준은 쓰게 웃었다. 분명 지폐로 줬는데 거스름돈이 전혀 돌아오지 않아서.
"…그렇게 마시고도 불만인가?"
"……."
"정 불만이면 옥상에도 가 봐라. 거기도 자판기는 있으니."
"옥상?"
곧바로 호기심을 보이는 늑대에게 강태준은 고개를 저으며 돈을 건네줬다. ―그렇게 옥상으로 향했고 펼쳐진 광경에 늑대는 작게 감탄했다. 탁 트인 공간과 넓게 펼쳐진 야경. 고층 빌딩이 가득한 서울에서도 전경이 트여있는 명당. 그리고 난간에 기대어 선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일단 커피부터. 자판기가 작동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은하 또한 늑대를 발견하고는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알파?"
묻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고 촉수로 자판기를 가리켰다. 마시겠냐는 듯한 제스처에 이은하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난간 너머로 보이는 야경을 구경했다. 조용한 정적… 늑대는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였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이은하는 결국 참지 못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저기."
"……?"
"…쓰다듬어봐도 돼?"
그 말에 늑대는 실소했다. 한참 고민하더니 꺼낸 말이 고작 그거라서. 그러라고 답하자 환한 표정이 된 이은하가 늑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 이은하는 강아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털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고민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막상 던전으로 들어갈 날이 내일로 다가오자 조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니까.
자꾸 네버랜드에서 다친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일 갈 던전과 네버랜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또 아무것도 못하면 어떡하나― 그래. 무력감이었다. 그 감정을 처음 느꼈던 건 지리산에서였다. 혼자서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워그에게 죽기 직전에 보았던 초록색 점액 덩어리. 그게 지금은 마랑이라고 불리고 있구나…… 감회가 새로워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은하의 물음에 늑대는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시선― 잠깐 생각하던 늑대가 이내 말했다.
"…싸우고 먹었다."
"……."
성의 없게까지 느껴지는 짤막한 대답. 하지만 늑대가 해온 일이라고는 여태 그것뿐이었다. 탕아들과 싸우거나 혹은 몬스터를 먹어치우거나. 발버둥 쳤고, 발버둥 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했다. …무언가와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생 스킬은 몸을 낫게 해줬지만, 마모되어가는 정신만큼은 붙잡아주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만났다."
페리 그리고 백록. 둘을 만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죽거나 실패해서가 아니라 포기해서. 그만큼 지쳐있었으니까. 지금은 잠들어있을 페리를 떠올리자 늑대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와…"
탄성을 지른 이은하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소리에 느슨해졌던 늑대의 입꼬리가 다시 돌아와서.
'웃은 거 맞지?'
긴가민가할 정도였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이은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말을 생략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많은 일이 있었겠구나 하고 막연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간단히 표현했지만, 이은하가 언뜻 아는 것만 해도 대전의 밤이 있었다. 엄청난 마법사를 쓰러뜨렸다던가. 또 아카데미 습격에서는 소율이도 구했고… 그에 반해 나는 뭘 했던 걸까……?
"내일 던전에 간다고 들었다."
"응?"
침울해있던 이은하는 별안간 들려온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미 늑대는 커피를 다 마시고 촉수만 길게 뻗어 새로운 커피를 뽑고 있었다. 그게 신기해서 손을 뻗었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물컹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친 감촉이어서. 촉수는 어디까지나 늑대의 신체 일부분― 정확히는 털이 변형한 것이었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신기하네."
"그래서 여태 남아있었나?"
"그… 응."
늑대의 말에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수련실로 가서 조금 연습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랬다가 괜히 내일 던전에서 지장이 있으면 안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냥 집에 가는 건 꺼려져서 옥상에서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걱정하지 마라."
"……."
"넌 재능이 있으니까."
"재능……."
그 말에 이은하는 쓰게 웃었다. 바로 그게 아카데미 출신도 아닌 자신이 클랜에 스카우트된 이유였지만, 인제 와서는 모르겠다. 처음 보았을 땐 고작 슬라임에 불과했던 알파는 지금… 굳이 알파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한테 비하면 초라해지니까. 예를 들어 선배라거나 팀장님이나 부팀장님… 혹은 선자님.
"…이젠 잘 모르겠어."
정말 재능이 있기는 한 걸까. 이은하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고 늑대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도 덕분에 마음이 가라앉기는 한 것 같다. 고맙다고 말한 이은하는 이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톡톡 건드리는 감촉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러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공간에서부터 늑대가 영약을 꺼내고 있었기에.
"먹으라고?"
대답은 없었지만 마치 재촉하듯 영약을 흔든다. 받으란 것 외에 뭐가 더 있을까? 부담스러워 거절하려던 이은하는 인삼이 한 뿌리가 아님에 눈살을 좁혔다.
"가는 길에 가져다줘라."
―누구에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인삼은 세 뿌리였으니까. 어제 함께 달여마셨던 면면을 떠올리자 이은하는 쓰게 웃었다. 이러면 거절하기도 힘들어서.
"…고마워."
그렇게 이은하가 사라진 곳에서 늑대는 야경을 바라보았다.
"내일…"
제법 길게 느껴졌던 휴식도 이젠 내일로 끝이었으니까. 신뢰의 마침표를 찍자던 강태준의 말을 떠올린 늑대는 계속 커피를 마셨다.
***
노크 소리에 홍유리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시간에 어떤 개념 없는 새끼가… 혹시 강태호면 진짜 죽여버리겠다며 이를 갈던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모습을 보인 건 의외로 이은하였다.
"뭐야. 너 퇴근 안 했어?"
"네. 그게…"
우물쭈물하며 영약을 내미는 모습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영약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알파와 만나고 온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딴 걸 덥석 받아 와?"
타박하는 홍유리의 말에 이은하는 멋쩍게 뒷머리에 손을 올렸다.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러게요…"
홍유리는 짧게 혀를 찼다. 아마 같이 주라고 했으니 거절하지 못한 모양… 그래도 받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좋았으면 좋았지.
"이거 넣어놔."
그 말에 백소율이 영약을 옮기자 홍유리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왜 퇴근 안 했어?"
"그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을 흐리자 홍유리는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더니 이은하의 머리에 딱밤을 때렸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꺼져. 자고 내일 출근해."
"넵."
"대답만 잘 하지 말고… 그리고 백소율 너는."
그 말을 하던 홍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나?
"아무튼. 내일 던전이나 잘 갔다 와. 등신같이 다치지 말고."
"아.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도 문을 닫은 홍유리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백소율이 보이지 않아서.
"얜 또 어디 갔어?"
***
"여기 계셨네요."
그 말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백소율의 숨이 가빠 보여서.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묻는 말에 늑대는 그러라고 답했다가 들어올려지고 말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 잠깐 당황한 늑대는 이내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커피를 마시는 데 방해가 되진 않았으니까.
"페리는요?"
"자고 있어."
수면이 필요 없는 늑대와는 달리 페리는 잠을 자고 꿈을 꾼다. 깨어있는 시간은 전부 함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곤히 잠든 걸 괜히 깨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에 백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 언니랑 만난 건가요?"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영약 때문에 찾아온 모양― 그렇게 생각했는데 백소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늑대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안 그래도 어두웠던 밤이 더 어두워지며 야경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깊은숨을 내쉰 백소율이 고민하는가 싶더니 늑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뜬금없는 말좀 해도 될까요?"
오늘따라 고민 상담하는 사람들이 많네. 늑대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꿈을 꿔요."
꿈…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있을 수 없는 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실감 없는.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미 또 하나의 세계로 자리 잡은.
"…그게 정말 꿈인지 모르겠어요."
긴가민가하다. 그 꿈을 꿀 때마다 마력이 늘어났으니까. …푸르스름한 세계였다고 백소율은 말했다. 온갖 신비한 것들이 날아다니고 하늘에는 바다가 떠 있는.
"……."
그 말에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말하는 풍경은 늑대가 잘 아는 세계였으니까.
"그냥 꿈이었다면… 하지만 그건."
망설이던 백소율은 늑대를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제가 직접 봤던 세상이었어요."
마녀의 재앙을 막았을 때, 페리는 백소율을 환계로 데려갔었다. 길지는 않았지만 환계에 발을 들였었다. 백소율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녀가 환계의 꿈을 꾸는 것은 십중팔구 이유가 있지 않을까.
환계에 간 사람 모두가 그러는지 아니면 백소율뿐인지는 모르겠으나…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불안하다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나면 백록에게라도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안심하라는 말에 백소율은 믿는다는 듯 옅게 웃었고 밤은 서서히 깊어져갔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까지 둘은 옥상을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던전으로 향하는 날이 밝았다.